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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 - 개정판 ㅣ 현대사상의 모험 24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조르주 바타유와 르네 마그리트. 그들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때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초현실주의 그룹을 이끈 앙드레 브르통과의 불화가 원인이 되어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두 사람에게 가슴 아픈 가정사가 있다.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몸을 던져 자살했고, 바타유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기도했다.
바타유는 마그리트의 그림 「강간」을 볼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마그리트는 여자의 신체 부위와 얼굴을 절묘하게 조합했다. 여자의 가슴은 눈, 배꼽은 코, 입은 여성의 성기로 에로틱하게 변형되었다. 이 그림 제목은 상대 여성의 얼굴을 쳐다보면서도 섹스를 떠올리는 남성의 은밀한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욕은 식욕, 수면욕과 함께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이다. 섹스의 본질적인 목적은 종족 번식이다. 그러나 바타유는 섹스를 진화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에로틱한 욕망이 죽음에 이르는 황홀한 극치감이라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마그리트의 「강간」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그리트가 여자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의도가 무엇인지 잘 몰라 당혹해 한다. 반면 바타유는 그림을 보는 재미에 지루할 틈이 없다. 그는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자신이 정의한 에로티시즘을 발견했기 때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든다. 우리는 성행위 후 다시 옷을 입으면서 에로티시즘의 수치심을 가린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성욕을 금기하는 관습적인 사고를 배신했고, 금기시돼온 일탈을 「강간」을 통해서 과감하게 드러냈다. 종교가 에로티시즘을 부도덕한 감정의 일탈로 규정해도 성욕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굳이 잘 알려진 사례를 언급하지도 않아도 우리는 에로티시즘이 금기를 위반하게 만드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안다.
성욕은 오해받거나 거절되고 혹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기도 하다. 때로는 ‘추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때로는 동물에 가까운 수치스러운 본능으로 인식된다. 노동은 성적 일탈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노동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노동력을 팔아 생활을 유지한다. 노동의 생산성을 지향할수록 성욕은 잊혀진다. 섹스는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허용돼야 한다는 통념이 형성된다. 여기에 금욕을 강조하는 종교적 금기까지 더해지면서 성을 은밀한 곳에 꼭꼭 숨겨놓고 억압해왔다. 현실적 제약과 결핍은 성욕을 반감시키기는커녕 배가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성욕을 섹스로 풀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치환한다. 카니발리즘(식인 풍습)은 매년 노동과 금기 속에 붙잡혀있던 인간들에게 허락되는 유일한 향락의 시간이다.
에로티시즘은 단순한 쾌락의 도구가 아니다. 인간의 생멸(生滅)을 확인하게 만드는 감정의 증거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생명은 오직 인간뿐이다. 성적 환희의 순간이 지나간 이후에 인간은 죽음, 즉 ‘작은 공포’를 깨닫는다. 마그리트는 성욕과 죽음의 연결고리를 절망적으로 묘사했다. 천으로 얼굴을 뒤집어쓴 채 입을 맞추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성욕의 불안과 공포를 전달한다. 마그리트는 이 그림으로 하얀 속옷의 천이 얼굴을 가린 어머니의 주검을 접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마그리트에게 천은 ‘작은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인 대상이다. 수없이 두려워하던 긴 시간의 축적이 화가 기억의 심연에 있다. 이 기억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죽음까지 인정한 에로티시즘’(《에로티즘》 11쪽)이 있다. 우리는 날마다 아름답게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의미 있는 삶이 연속적으로 흘러갈 것만 같지만, 죽음이 언제 우릴 가로막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연속적인 존재’이다. 죽음의 공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성적 쾌락에 탐닉해봤자 소용없다. 섹스는 ‘가장 진하면서도 의미 없는 발작’(《에로티즘》 117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종교의 힘이 희미해진 지금, 현대인은 음란함과 폭력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류는 감금되고 폐기되어야 했던 성적 욕망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사람들은 그것을 범죄로 규정한다. 오늘날의 에로티시즘은 ‘쾌락에 이르는 부정적 욕망’이다. 성범죄의 위험이 커질수록 에로티시즘의 본질은 왜곡되고 있다. 또다시 에로티시즘은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 하는 '건강하지 않은' 금기가 된다. 바타유는 여자를 물건처럼 대하는 남자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과 폭력성이 사회의 안정성을 해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바타유가 추구했던 정상적인 에로티시즘로 회복하는 일이 아직은 요원하게 느껴진다.
※ 책머리 8쪽에 바타유는 지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남겼다. 그가 언급한 지인 중에 ‘자크 앙드레 부아사르’라는 이름이 있다. 그런데 역자가 이름 표기를 잘못 적었다. ‘자크 앙드레 부아파르(Jacques-Andre Boiffard)’가 맞다. 부아파르는 브르통과 함께 초현실주의 그룹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으며 브르통의 소설 《나자》의 삽화를 그렸다. 하지만 부아파르도 브르통과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그는 바타유와 함께 브르통을 비판하는 팸플릿을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