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
최종렬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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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실업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을 나와서 다녀본 직장이라는 게 대학교 행정실에 계약직으로 일한 것과 지금 다니는 기계제품을 판매 · 설치하는 회사이다.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고 싶어도 이직할 곳을 찾기가 만만치 않고, 잘못하다간 정말로 오갈 데 없는 백수가 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청년 실업에 대한 뉴스를 들을 때면 남 일 같지 않다.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이 실업이다. 거기에 지방대 출신은 취업 전선에서 가장 불리하다는 말까지 들으면, 따뜻한 말 한마디 정도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청년 실업도 서러운데, 지방대 출신이라고 해서 이 사회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너무 서글프다.

 

지방대 재학생과 졸업생, 학부모를 심층 면접하여 분석한 복학왕의 사회학(오월의봄, 2018)을 다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지방대생이 행복하게 살려면 뭘 해야 하는 거야?” 게으른 것도 아니고 다들 열심히 살려고 고군분투를 하는데도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지방대생의 삶이 왜 이 지경이 됐나.

 

복학왕의 사회학은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최종렬 교수의 논문을 보완한 책이다. 논문 제목은 복학왕의 사회학: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 분석이다. 복학왕은 매주 수요일 네이버에 연재 중인 웹툰이다. 지방대 생활의 사실적인 모습을 묘사해 호평을 받고 있다. 저자는 지방대에서 10년 이상 가르치면서 만난 청년들이 웹툰에 나온 지방대생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연구를 진행했다. 저자는 6명의 지방대 재학생과 17명의 지방대 졸업생, 그리고 지방대생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묻고 얻은 답변을 분석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없는 지방대생의 서사를 새롭게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래서 저자는 감정을 제대로 들어주는 상대가 없다는 점에서 지방대생을 소수자로 본다. 특정 지역, 특정 학교에 국한된 현상의 구조를 전체 지방대 학생에게 적용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위험은 분명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일반화된 경험적 사실을 도출하는 것이 연구의 주된 의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누군가는 지방대생을 생존 경쟁에서 낙오된 패배자라고 말한다. 또는 지방대라 부르지 않고 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라고도 부른다. 주로 지방대생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자조적인 속어로, 패배주의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오늘날 청년층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생존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들을 각자도생에 익숙한 생존주의 세대라고 불렀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시선으로는 지방대생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학생들은 한결같이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사는 것을 행복의 가치로 삼았다. 이들에게 생존은 가족 안에 머물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경쟁이 치열한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공부, 입시, 스펙 경쟁 속에서 처지고 낙오했던 쓰라린 경험을 겪었거나 이미 그 경험을 하기 전에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어차피 도전해도 실패한다고 체념하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겸연쩍어한다. 저자는 적극적으로 자기계발을 하지 않는 지방대생의 감정 상태를 성찰적 겸연쩍음이라고 표현한다. 생존을 위한 자기계발 의지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한 자기보존 의지가 강할수록 행복을 위한 목표를 높게 잡지 않는다. 자신과 가까이에 있고, 얼마든지 자주 만날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도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기에 실패로 귀결되는 도전을 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주변 환경에 익숙한 학생들은 가족 밖, 더 나아가 지방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저자가 만난 지방대생들의 행동 양식은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로 요약된다. 지방대생뿐만 아니라 지방대 졸업생, 부모들 대부분은 적당히 돈을 벌고, 적당히 즐기면서 가족과 함께 사는 소소한 일상을 꿈꾼다.

 

그렇다면 지방대생은 어떻게 하면 가족지방이라는 이중 울타리에 벗어날 수 있을까? 지방대생들이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대학과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을 해야 한다. ‘대학생활을 즐겨라!’라는 말조차 쉽게 꺼내기 힘든 지금의 지방대는 기운이 팔팔한 자유로운 영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자기 세계에 갇힌 무기력한 영혼들이 캠퍼스를 배회한다. 저자는 미적 체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는 것이 가족주의에 벗어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학이 미학적 폴리스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용어를 쓴 것에 약간 불만이 있다. 왜냐하면, 용어 자체에 인문학적 향기가 물씬 풍기고 책을 접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일부 독자는 저자가 문제 해결 대안으로 제시한 미학적 폴리스개념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저자가 제시한 미학적 폴리스는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교육 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새로운 타자들을 만나 상호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저자의 대안이 이상적이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지방대생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기 세계에 갇힌 채 살아가는 지방대생들이 있다.

 

복학왕의 사회학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부대꼈다. 지방대 졸업생의 위치에 서서 대학교에 일하는 동안 다양한 모습의 지방대생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취업에 번번이 실패해서 졸업을 유예하는 친구들, 이러한 반복되는 실패에 지쳐버린 친구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겪은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 지레 겁먹어 도전을 꺼리는 친구들. 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은 금방 나오지 않겠지만,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지방대생들의 목소리를 사회 전체에 울릴 수 있는 공적인 서사 형태로 듣는 일이다. 이 일은 책상에 앉아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귀 기울여 듣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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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1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22 11:51   좋아요 1 | URL
대구에 일자리가 줄어들면, 지방경제가 침체될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누릴 수 있는 문화자본도 줄어들어요. 이러니까 대구가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 비해서 문화 공간이 부족해요. 특히 서점과 책방! 지역에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으면 문화에 대한 지역주민의 관심도 단순해져요. 그래서 대구에 오래 살면 보수적인 집단 분위기를 쉽게 벗어나지 못해요.

syo 2018-08-21 18: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왜 눈물이 나지?? ㅠ_ㅜ

cyrus 2018-08-22 11:53   좋아요 0 | URL
이 책을 보면서 대학생 시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저도 얼른 취직해서 소박하게 지내면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마음가짐도 보수적인 환경이 만들어 낸 생각이었어요.

감은빛 2018-08-21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방대 졸업생이라 공감이 많이 가네요.
아마도 저 역시 시민단체 활동가라는 직업을 택하지 않았다면,
기나긴 실업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거라는 생각을 가끔해요.
활동가가 아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저자의 대안은 별로 대안으로 느껴지지 않는군요.

한편으로 저는 대학이 너무 많고,
대학을 나와도 딱히 인생에 도움될 것이 없는
그러니까 대학 다니면서 대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입시 학원의 연장처럼 단순히 각종 자격증과 스펙 쌓고,
고시 준비하는 그런, 굳이 대학생이 아니어도 될 활동을 대학에서 하는 것이 문제다 싶어요.

대학입시와 대학생활과 취업준비까지 쓸데없이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 여겨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뭔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혹은 잘 하는 것을
통해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특히 요즘처럼 뭐든 찾아보면 다 알 수 있고,
요즘 젊은 분들처럼 뭐든 척척 잘 하는 사람들이라면 말이죠.

cyrus 2018-08-22 11:57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책의 저자가 내세운 대안이 ‘대학만능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여성운동 단체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단체는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입니다. ‘레드스타킹’처럼 독서와 여성운동을 병행하는 중소 규모 단체도 있습니다. 대구에 ‘레드스타킹’과 비슷한 단체가 또 있는데요, 작년 5월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나쁜 페미니스트’입니다. 집회, 독서모임, 페미니즘 강연 등을 기획 · 진행하고 있습니다.

 

 

 

 

 

 

7월 30일에 ‘나쁜 페미니스트’와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이 공동 주최한 페미니즘 강연이 열렸습니다. 강연 제목은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교차성’입니다. 강연자는 김보명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입니다. 김보명 선생님은 요즘 제가 주목하고 있는 여성학자입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 분이 쓴 논문과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제주도 예맨 난민 문제가 불거진 이후로 ‘일부’ 페미니스트는 난민 보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무슬림 남성 난민’이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스갯소리로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난민을 ‘남민(男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여성 차별과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이슬람 문화가 우리나라 사회에 들어올까 봐 걱정합니다. 이방인에 대한 낯선 감정, 그리고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2015)

* 마사 누스바움 《혐오에서 인류애로》 (뿌리와이파리, 2016)

* 카롤린 엠케 《혐오사회》 (다산초당, 2017)

 

 

 

그런데 이 ‘공포’ 감정이 무슬림 남성 난민과 이슬람에 투사되면 어떻게 될까요? 무슬림 남성 난민은 여성을 잔인하게 억압하는 ‘악마’가 되고, 이슬람은 여성 억압을 일삼는 반인륜적 종교로 인식합니다. ‘무슬림 남성 난민=이슬람=악마’로 연상되는 공포 감정이 확산될수록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공포도 더해지고, ‘가짜 뉴스’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난민을 ‘여성을 위협하는 존재’ 또는 ‘사회에 해로운 존재’로 규정합니다.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사회 전체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타자를 거부하고 혐오하는 반응을 ‘투사적 혐오(projective disgust)라고 말합니다. 투사적 혐오는 자신과 다른 사회 구성원 또는 타자를 ‘오염원’으로 규정하도록 가르칩니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슬림 남성 난민이 한국 여성을 위협할까봐 두려워합니다. 워마드 회원들은 무슬림 남성과 이슬람을 조롱하는 발언을 합니다. 그러나 무슬림 남성 난민과 이슬람에 향한 투사적 혐오는 상상적 차원에서 일어날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슬림 남성 난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난민을 두려워하는 반응은 ‘실재보다 강력한 상상적 차원’에서 일어난 감정입니다. 실제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은 무슬림 난민 남성에게 분노와 혐오를 투사하는 상상은 타자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독일의 언론인 카롤린 엠케(Caroline Emcke)는 혐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고 말합니다[주1]. 따라서 우리 사회에 제주도 예맨 난민 수용을 반대하고, 혐오하는 목소리가 늘어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김보명 선생님은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언어를 분석하여 여성들이 왜 ‘난민 혐오’에 몰두하는지 배경에 주목했습니다. 무슬림 난민 남성을 비난하는 여성들은 무슬림 남성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슬림 남성에게 학대받은 무슬림 여성의 피해 경험 사례를 ‘전시’합니다. 김보명 선생님은 한국 여성의 안전을 확보하는 명목으로 무슬림 여성의 피해 사례를 동원하고 전시하는 언어를 ‘페미니즘의 언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서사는 무슬림 여성을 ‘피해자’라는 고정된 틀 안에 가둡니다. 즉 남성 중심 무슬림 문화에 저항하는 무슬림 여성의 힘과 목소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아마도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한국 여성이 무슬림 여성의 피해 경험을 공론화하는 일은 피해자 여성을 지지하는 동시에 무슬림 남성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반(反) 성폭력 활동이 될 수 있다고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 여성의 피해 경험 사례만 지나치게 부각하는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 담론에 벗어나지 못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권김현영 선생님은 피해자 경험을 공론화하면서 무조건 피해자 편에 들어주는 언어는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주2]. 한국 여성(페미니스트)이 무슬림 남성 난민이 일으키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슬림 여성에게 ‘피해자로서의 역할’만 부여한다면, 그것은 ‘피해자 존중’이 아닙니다. 권김현영 선생님은 피해자를 무조건 지지하거나 오직 피해 사실만 호소하는 일을 ‘권리의 형식을 띤 타자화’라고 했습니다[주3].

 

 

 

 

 

 

 

김보명 선생님은 “페미니즘은 난민 혐오의 주체 세력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내세워 난민 수용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워마드 회원들은 남성 난민과 이슬람을 혐오하는 발언을 합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페미니즘이 지금보다 더 용감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용감했습니다. 그분은 ‘혐오와 공포’를 넘어선 페미니즘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경계 없는 페미니즘’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선생님은 “페미니즘은 나의 세계를 넓히는 사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공감합니다. ‘나의 세계’에 갇힌 페미니즘은 다양한 여성의 경험, 언어,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의 세계’를 넓히려면 사유의 범위를 좁히게 하는 ‘경계들’을 없애야 합니다. 그 ‘경계들’이란 인종주의, 종교, 문화, 섹슈얼리티 등입니다. 복잡한 ‘경계들’에 연루된 특정 여성 집단의 경험과 목소리를 재현하고 분석하는 페미니즘이 바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입니다.

 

 

 

 

[주1] 카롤린 엠케, 정지인 옮김, 《혐오사회》, 다산초당, 2017, pp. 22~23.

 

[주2] 권김현영,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pp. 50~51.

 

[주3] 같은 책, pp.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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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퀴어링!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이론, 실천, 행동
미미 마리누치 지음, 권유경.김은주 옮김 / 봄알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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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 중심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의 삶은 정치학과 철학의 주제가 되지만, 여성의 삶은 의학과 생물학의 주제로 간주한다. 특히, 근대 이후 공 · 사 영역 분리의 성별화가 가속화되면서, 남성의 삶은 더욱 공적인 것이 되었고 여성의 삶은 더욱 사적인 것이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신은 여성인가, 남성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부딪히게 되는 문제가 되었다. 다른 사람이, 즉 의사가 당신의 성별이 무엇이라고 정해준다면 어떻게 될까? 단 두 가지의 선택 중 하나로 ‘당신은 남성입니다’ 또는 ‘당신은 여성입니다’라고 말이다. 당신이 스스로 남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남성’이라고 정해준다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당신은 스스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남성’이라고 정해준다면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여성인데도 남성으로 호명하는 순간, 주체는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의사가 판정한 성별 결과에 따라 분홍색 혹은 파란색 옷으로 구분되어 입혀지며, 손에는 인형 또는 장난감 로봇이 쥐어진다. 성별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은 차별적이지만, 근원적으로 단 두 가지의 성별을 지정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폭력적인 일이다.

 

페미니즘의 출발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인 섹스(sex)와 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gender)를 구분하는 데서 비롯됐다. 이를 토대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정치적 주체로 집단화하고, 권리 향상을 위한 연대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의료적 트랜지션(medical transition)으로 여성이 남성이 되고, 남성이 여성이 되는 세상에서 페미니즘이 ‘여성’이라는 성적 범주만 강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젠더 영역으로 들어가면 페미니즘은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성적 본질주의, 즉 본질적으로 결정된 성 정체성은 없다고 말한다. 즉 선천적으로 타고난 섹스도 젠더의 넓은 의미에 포함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를 ‘원본 없는 모방’[주1]이라고 말했다. 젠더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되는 오직 그 순간만큼만 가변적인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여성을 여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성으로 지칭된 존재가 여성 정체성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젠더든 섹스든 완성된 채로 존재하는 원본은 없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을 여성의 권리향상 차원을 넘어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드래그 퀸(drag queen, 남성이 공연이나 오락을 목적으로 여장을 하는 것)까지 포함한 성소수자의 섹슈얼리티 문제로 확장한다. 이러한 급진적인 인식론은 퀴어 이론(queer theor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퀴어는 본래 동성애자들을 멸시하는 호칭이지만, 버틀러에 이르러서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적 단어로 자리 잡는다.

 

《페미니즘을 퀴어링!》(봄알람, 2018)은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에 관한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을 쓴 미미 마리누치(Mimi Marinucci)는 페미니즘 시각에서 퀴어 이론을, 또 퀴어 이론 시각에서 페미니즘을 새롭게 해석할 뿐 아니라 페미니즘 자체를 다시 쓰고 있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제와 규범이 만든 사회적 산물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하는 급진적 이론이 되려면 섹스 안에 전제된 문화적, 제도적 통제를 꿰뚫어봐야 하며 어떤 특정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만 강조하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 체계에도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마리누치가 시도하는 것은 페미니즘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의 연대, 즉 ‘퀴어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저자는 퀴어 이론가들로부터 이론적 수혈을 받는데, 이 책에서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버틀러, 그리고 게일 루빈(Gayle Rubin)의 사상에 대한 인용을 만날 수 있다. 마리누치는 푸코, 버틀러, 루빈의 사상을 분석과 비판의 방법론으로 삼아 페미니즘 담론을 해체적으로 읽어냄으로써 ‘퀴어 페미니즘’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 ‘페미니즘을 퀴어링!’은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은 연대할 수 있다는 선언적 진단이며, 좀 더 급진적인 젠더-섹슈얼리티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표현이다.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을 연대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퀴어 이론은 젠더 이분법과 섹슈얼리티 이분법(이성애/동성애)뿐만 아니라 여성학과 게이 및 레즈비언 연구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주2].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의 연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은 공통으로 ‘주변인들의 목소리’로 시작됐다. 이 두 가지 운동에 뛰어든 모든 사람들, 즉 프롤레타리아 여성(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흑인 여성(흑인 페미니즘), 그리고 성소수자 등은 기존의 공고한 이성애 중심 가부장적 사회에서 배제된 ‘주변인’의 존재인 동시에 권력을 교란할 수 있는 목소리와 언어를 가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이상한(queer)’ 것으로 치부되었지만, 개인적 목소리가 점점 모여서 더 커질수록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은 ‘정치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페미니즘 운동은 자매애를 넘어서 더욱 강력한 ‘주변인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퀴어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든 모든 사람은 ‘퀴어’하다. 퀴어한 주변인들이 자기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정체화하는 것이 퀴어 페미니즘의 실천 방식이다.

 

 

 

 

[주1] 미미 마리누치 지음, 권유경 · 김은주 옮김, 《페미니즘을 퀴어링!》, 봄알람, 2018, pp. 136.

 

[주2] 같은 책, p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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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종교인들은 종교를 믿음과 구원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 구체적 종교 형태를 통해 이해한다. 이들은 각 종교 신도의 생활과 경전 내용을 통해 종교의 의미를 유추하기도 한다. 대부분 종교는 보수적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과거의 전통을 지키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종교인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데 요청되는 비판의식을 거부하고, 이전 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종교는 비판적 사유가 작동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더 이상 변화하기를 거부하는 행보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종교 내 성차별문제는 오랫동안 비가시화되어 왔다.

 

워마드에 천주교의 성체(聖體)를 훼손한 사진이 올라와 큰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밀떡에 주황색 글씨로 낙서가 되어있고, 일부가 불타 검게 그을려 있는 사진이 문제였다. 천주교에서 성체는 현존하는 예수의 몸을 가리킨다. 성체를 훼손하는 행위는 예수를 직접 모욕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부 워마드 회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는 사라져야 한다면서 천주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를 조롱하는 게시물을 올리기도 했다.

 

 

 

 

 

이슬람교 경전 코란을 불태우는 사진이 게시되면서 또 다른 논란이 일었던 바 있다. 해당 사진은 실제 경전을 소각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 아니다. 워마드 회원이 직접 코란을 불태워 찍은 사진도 아니다[1]. 그러나 이 게시물을 올린 회원은 이슬람 바퀴벌레라는 표현으로 이슬람과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지금도 워마드에는 종교를 비하한 게시물이 남아 있다.

 

워마드의 성체 훼손 논란에 대해서 혹자는 천주교가 워마드의 자극적 행동에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종교 내 성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 의미에서 각 종교계도 성차별 문제에 대한 자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종교 내 성차별 문제를 들여다 볼 때 반드시 피해야 할 오류가 있다. 종교가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한다는 주장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공통으로 가부장제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성경이나 코란에 보면 여성은 남성보다 수동적이고 열등한 존재이며 동시에 파괴적인 성적 에너지의 소유자로 간주하여 남성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 통제돼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신이 부여한 특권에 따라, 남성은 여성에 대한 권위를 지닌다. 여자의 부정행위가 의심될 때는 훈계하라. 여자를 가두고 매질하라.”

 

(코란 443[2])

 

 “정숙한 옷차림을 한다.” (디도데 전서 29)

 

 “바지나 청바지가 아니라 원피스나 치마를 입는다.”

  (신명기 225[3])

 

 

기독교와 이슬람에는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교리나 규율이 있다. 그렇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교리를 전파하고, 여성을 무시하는 종교는 사라져야 하는가? 그리고 예수와 무함마드는 성차별주의자인가? 그들은 남자라서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워마드는 종교를 모욕하는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과연 이게 극단적이어도 충분히 의미 있는 여성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기독교와 이슬람을 여성 혐오 종교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예수와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워마드의 행동은 논증적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그리고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양한 전략을 선택할 수 있는 여성운동의 특성상 워마드의 종교 비하는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다.

 

 

 

 

 

 

 

 

 

 

 

 

 

 

 

* 에마 골드만 외 그곳에 가면 다른 페미니즘이 있다(르몽드코리아, 2018)

* 레이첼 헬드 에반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비야토르, 2018)

 

 

 

기독교와 이슬람은 여성 혐오 종교라는 주장은 누구나 동의한다. 여성을 차별하는 내용이 있는 경전의 구절 몇 개만 찾아내면 종교의 문제점을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문제점만 지나치게 부각하면 여성을 동등하게 바라본 경전의 해석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게 된다. 성경, 코란 등 종교 복음서는 여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왔지만, 그 속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여자 성인(聖人), 여성 신도를 찬양하는 구절도 있다. 경전이나 복음서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전승되고 공유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 종교인들은 여성을 높이 평가한 구절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삭제했다. 그리하여 기독교, 이슬람 내 여성 신도들은 경전의 구절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 엄익란 금기, 무슬림 여성을 엿보다(한울아카데미, 2015)

* [절판] 하이다 모기시 이슬람과 페미니즘(프로네시스, 2010)

 

 

 

이슬람 페미니스트 아스마 바를라스(Asma Barlas)는 이슬람 문화권에 있는 여성 차별의 원인을 코란에서 찾지 않는다. 그녀는 무슬림 여성을 동등하게 대하라고 강조한 무함마드의 계시를 왜곡하고, 차단한 남성 종교인 및 학자들의 가부장적 권력이 무슬림 여성 차별을 강화한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4].

 

비무슬림 또는 비무슬림 학자들은 경전의 편파적인 해석을 무시한 채 이슬람과 코란 자체가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원인이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편견은 반이슬람주의라는 탈을 쓴 극우 세력을 결집하게 만드는 서사로 작용한다. 이슬람을 비하하고, 코란을 불태우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몇몇 워마드 회원의 주장은 반이슬람 · 반난민 정서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종교와 난민을 배척하는 워마드의 발언은 페미니즘 방식의 언어라고 보기 어렵다.

 

종교 내에 쉬쉬하고 있는 여성 차별 및 성폭력 문제는 종교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 문제이다. 남성 중심, 가부장적으로 해석되고 전달된 경전은 평등의 관점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서 경전이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종교 내 성차별 문제는 남성 종교인의 절대적 권위와 위계 구조를 문제 삼아야 근절할 수 있다. 종교 자체를 여성 혐오의 온상으로 생각하는 워마드의 극단적인 입장은 종교 내 페미니즘 운동의 노력을 축소하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워마드는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은 잘못 찾았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종교 내 성차별 문제를 어떻게 근절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1] 워마드 회원이 코란을 직접 불태운 것이 아니라 과거 외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사진을 가져다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글이나 유튜브를 검색하면 동일한 사진과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워마드 회원 코란 불태웠다게시물에 발칵외국 사진 재탕 확인 휴우~”], 동아일보, 2018711)

 

[2] 앙리 텡크, 신은 여성 혐오자인가?, 그곳에 가면 다른 페미니즘이 있다, 151, 르몽드코리아, 2018. 

 

[3] 레이첼 헬드 에반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 179, 비아토르, 2018.

 

[4] 엄익란, 금기, 무슬림 여성을 엿보다, 60~62, 한울아카데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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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0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개신교 특히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장로교 교단의 보수
성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 내에서 여성 신자들의 수가 압도적
이지만 실질적인 교회를 운영하는 결정권을
가진 목사 장로들의 수는 남성자들이 독차지
하고 있거든요.

보수정당인 개신교계를 강력한 우군으로
삼아 여성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고수하려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계의 자정 능력은 1도 믿지 않습니다.

cyrus 2018-08-02 14:28   좋아요 0 | URL
저도 종교가 스스로 개혁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종교 내 성차별 문제는 십 년 전에도 거론된 적이 있었어요. 그땐 종교계 인사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을 뿐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았어요.

stella.K 2018-08-0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마드가 무섭긴 무섭더군.
근데 놀라거나 흥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해.
그만큼 여성으로서 억눌려 온 세월이 얼마냐?
거기에 대한 반작용인데 저 정도 가지고 되겠어?
그런데 사람은 갈 때까지 가봐야 안다고
저러다가도 아, 이건 옳은 방법이 아니겠구나
깨닫고 다시 이성적인 방법을 찾아가지 않을까?
어디나 극단주의는 있어왔어.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못하지.
물론 또 다른 형태로 바뀔 수도 있지만.
그냥 사탄 마귀의 작용이야. 어쩌겠니?ㅋㅋㅠ

cyrus 2018-08-02 14:3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워마드는 계속 극단적인 노선만 고집할 거 같아요. 그들은 온건적인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워마드가 온건적인 여성운동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들과 다른 여성운동, 특히 교차성 페미니즘을 ‘쓰까‘라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별로예요. 자신들의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우월적인 성향이 있는데, 이걸 페미니스트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신매매의 초기 형태는 전쟁에 패한 나라의 군인이나 여성이 승전국의 노예가 되는 경우였다. 패전의 대가를 노동력으로 계산해 치른 것이다. 전쟁은 역사적으로 남성이 일으켰지만, 살아남아 그 피해를 온전히 떠안는 것은 여성이었다.

 

 

 

 

 

 

 

 

 

 

 

 

 

 

 

 

 

 

*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 호메로스 《일리아스》 (도서출판 숲, 2015)

* 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도서출판 숲, 2009)

 

 

 

전쟁에서 여성은 전리품으로 취급된다. 군사주의는 여성을 제멋대로 선취하고 여성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인식하면서 착취했다. 전쟁 때마다 되풀이됐던 적군의 사기를 누그러뜨리려 상대편 여성을 납치하고 성폭행하는 일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집단 강간을 통해 패전국의 남성은 자국 여성을 보호하지 못한 수치심을 느끼며 승전국의 남성은 이들을 ‘정복했다’는 일종의 승리감에 도취한다. 여성을 짓밟은 고대 군사주의의 실상을 보여준 작품이 에우리피데스(Euripides)『트로이아 여인들』이다. 에우리피데스는 트로이가 멸망한 이후에 트로이 왕비 헤카베와 딸 캇산드라,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에게 덮친 비참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 트로이가 함락되자, 트로이 왕가의 여인들 모두 승자의 노예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헤카베는 오뒷세우스의 여종으로, 캇산드라는 아가멤논의 첩으로, 안드로마케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의 첩이 된다. 헬레네는 고대 영웅들만큼이나 유명한 여성이지만, 그녀는 남성 영웅들의 세계를 장식한 ‘트로피’에 불과하다. 트로이 전쟁의 가장 큰 명분은 납치된 헬레네를 되찾는 것이었고, 헬레네와 직접 관련이 없는 국가들은 각자의 승리와 전리품을 얻어내고자 했다.

 

 

 

 

 

 

 

 

 

 

 

 

 

 

 

 

 

 

 

 

 

 

 

 

 

 

 

 

 

 

 

 

* 마디스 레디커 《노예선》 (갈무리, 2018)

* 김진묵 《흑인 잔혹사》 (한양대학교출판부, 2011)

* [절판] 벤자민 콸스 《미국 흑인사》 (백산서당, 2012)

* 장 메이에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시공사, 1998)

 

 

 

근대에 들어서는 아프리카 등지의 흑인이 미국이나 유럽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강제 매매 형태였다. 유럽과 신대륙을 점령한 백인 노예상인들에게 흑인 노예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안겨준 살아있는 ‘상품’이었다. 흑인 인신매매가 이루어지는 가장 큰 목적은 노동력 확보였다. 따라서 남자 노예의 몸값이 훨씬 높았다. 여성 노예들이 백인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 게일 루빈 《일탈》 (현실문화, 2015)

* 니키 로버츠 《역사 속의 매춘부들》 (책세상, 2004)

* [절판] 번 벌로, 보니 벌로 《매춘의 역사》 (까치, 2002)

 

 

 

시대가 변하면서 대중이 인식하는 인신매매의 형태도 달라진다. 19세기 미국과 유럽의 반 매춘 활동가들은 ‘매춘을 목적으로 한 인신매매’를 비판하면서 매춘과 인신매매를 사회악으로 규정했다. 금욕과 도덕주의를 강조했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매춘부들은 멸시의 대상이었다. 이때만 해도 성병에 걸린 매춘부를 수용소에 강제로 보내게 한 성병 방지법이 있었고, 국가는 매춘부에게 일방적으로 성병 검사를 강요했다. 스위스 출신의 목사 토마 보렐은 강제 매춘의 실상을 보고하는 책을 펴냈는데, 그의 책은 <유럽의 백인 노예>라는 제목으로 미국에 소개됐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도 매춘과 인신매매 반대 여론이 형성되었는데, 미국의 반 매춘 활동가들이 사용한 수사적 비유가 바로 ‘백인 노예’였다. 그들은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 특히 유대인을 인신매매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인신매매 공포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의 기운이 와전되며 거대한 분노의 줄기로 증폭됐다. 요즘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난민 공포’의 형성 과정과 유사하다. 불확실하거나 심지어는 조작된 유언비어(가짜 뉴스)가 난민들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심을 자아내듯이 ‘백인 노예’는 이민자들을 배척하는 미국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줬다. 반 매춘 활동가들은 유언비어를 이용해 인신매매와 매춘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페미니스트였던 무정부주의자 엠마 골드만(Emma Goldman)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게일 루빈(Gayle Rubin)은 각각 『The White Slave Traffic(백인 노예 매매)와 『The Traffic in Women(여성 거래)』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전자는 1910년에, 후자는 1975년에 나왔다. 이 두 편의 논문의 공통점은 제목에만 있는 게 아니다. 골드만과 루빈이 논문에서 주장한 내용도 비슷하다. 두 사람은 인신매매와 매춘의 개념을 왜곡하면서 혼용하는 반 매춘 활동가들의 입장에 반대한다. 루빈에 따르면 인신매매의 위험성을 강조하여 매춘을 공격하는 방식은 매춘부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매춘이 ‘성노예를 강요하는 인신매매’로 오해하기 쉽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춘을 비난하는 반 매춘 활동가들의 입장은 도덕적 보수주의자들의 입장과 만나게 된다. 루빈은 이 두 세력의 기묘한 만남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골드만은 백인 노예 담론을 비판하면서 성 도덕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여성의 성적 자유를 옹호했다. 그러면서 매춘부의 입장을 존중했다.

 

 

 

 

 

 

 

 

 

 

 

 

 

 

 

 

 

 

 

* 이소희 엮음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8)

 

 

 

골드만과 루빈의 입장은 지금도 여전히 급진적이다. 왜냐하면, 매춘 또는 성매매(혹은 성 노동)를 둘러싼 페미니즘 내부의 오랜 논쟁에 기름을 부을 만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성매매 여성들은 ‘피해자’인가, ‘노동자’인가? 자발적 성매매를 허용해야 하는가? 성매매방지특별법에 따르면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행한 자를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은밀하게 성매매를 시키는 인신매매 조직이 있을 거고,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근절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성매매방지특별법을 생각한다면 루빈의 입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성매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매매 합법화 정책이 인신매매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매매에 반대하면서도 성매매 여성의 인권 보호에 힘쓰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그러나 일부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바라보는 페미니스트들의 동정ㅈ적인 시선에 반대한다. 자신들을 ‘성노동자’ 또는 ‘성판매 여성’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피해자 위치의 성매매 여성’ 담론은 성을 판매하는 여성을 적극적인 경제활동 주체, 즉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어떻게 부르는가, 누가 부르느냐는 문제는 중요하고 민감하다. 이름 자체로 존재가 가시화되기도, 은폐되기도 한다. ‘창녀’, ‘갈보’, 그리고 ‘걸레’는 성판매 여성을 ‘순결하지 않고, 불결한 존재’로 만드는 차별적인 표현이다. 매춘 또는 성매매 대신에 ‘성 노동’, ‘성판매’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여전히 성매매에 대한 입장이 불명확하다. 한때 성매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루빈의 의견을 살펴보니 너무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급한 일반화는 복잡한 여성 문제를 단순하게 만든다. 또 여성 문제에 관련된 당사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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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7-2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서 남자 노예(흑인)의 몸값을 그의 치아 상태를 보고 정한다는 대목을 보고 놀란 적이 있어요.
같은 사람끼리 어떻게 그런 취급을 할 수 있는 건지 경악할 일이에요.

cyrus 2018-07-23 17:13   좋아요 0 | URL
흑인노예는 ‘상품’이었어요. 노예상인들이 노예를 고를 때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치아와 눈동자였어요. 노예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거예요. 노예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은 노예의 몸 구석구석 살폈습니다. 노예 입장에선 수치스러운 일이죠.

AgalmA 2018-07-22 19: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환치해 이미지 세탁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몸 내가 어쩌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면 내 장기매매도 허용해야죠. 내 장기 자유 결정권!
매춘 행위는 성적 자유, 자기 결정권을 내세울 사안이 아닙니다. 그것을 사고자 하는 남성(더러 여성도?)들의 욕망에 기댄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워요. 우리가 생각하는 노동을 통해 얻는 자기 성취, 만족, 가치가 대부분의 성매매에서 얼마나 나올 수 있는지. 생활의 어려움 등을 호소하며 노동으로 봐 달라고 한들 매춘으로 금전적 이득을 보려는 게 옹호할 만한 것일까요. 그것을 둘러싼 카르텔, 폐해가 부정적인 건 또 어쩌고요.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점을 강조한다 해도 그건 타인의 욕망을 채워주는 착취적인 복속이 있지 않나요. ‘자기 자유‘라는 말이 무색하죠. ‘상품‘이 되고 ‘전리품‘이 된 역사의 변종이 될 뿐입니다. ‘연예계 스폰서‘ 같은 걸 보세요. 더러 호스피스적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성매매도 있지만 예외적 상황이 전체를 포괄하기도 옹호하게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지금 도덕이나 윤리를 강요하려는 게 아니라 성매매 저변에 깔린 건 무시하고 ‘노동‘이라는 표면만 보라는 논점을 가진 이들에 불만이라 한 마디 남겼습니다.

cyrus 2018-07-23 17:38   좋아요 1 | URL
저도 성매매가 범죄로 악용되고, 변질되는 것에 우려합니다. 저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여성운동에 배제하는 쉴라 제프리스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성매매 반대 입장에 찬성합니다. AgalmA님이 말씀하셨듯이 제프리스는 장애인을 위한 성매매도 반대합니다.

그런데 성매매 종사 여성 전체를 불법적인 존재로 규정하면, 이에 따른 문제점도 생깁니다. 노동시장에 소외된 여성(가정폭력을 겪은 여성, 미혼모, 나이 든 여성) 및 성소수자들은 생계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성매매에 종사합니다. 그들을 ‘범죄인’으로 취급한다면 생계에 타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성매매를 그만 두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창녀’, ‘범죄자’로 한 번 낙인찍히면 일자리를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성매매 대신에 ‘성노동’, ‘성 판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성매매 자체를 반대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성매매 문제는 성매매 자체를 없애면 끝낼 수 있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매매 문제를 논할 때마다 성매매 여성의 목소리는 배제됐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성매매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galmA 2018-07-26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장기 매매 이야기를 한 게 우스개 비유로 가져온 건 아닙니다. 장기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내세우는 게 경제적 사정입니다. 진짜 오죽하면 대체하기 어려운 장기까지 팔까 싶기도 하죠.
성 매매 경우도 이게 아니면 어렵다는 문제를 늘 가져 오는데요. 다른 일을 배우도록 사회 지원을 받아도 성매매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 많죠. 사회적 멸시나 비판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다른 걸 할 수 있는 선택의 문제가 더 크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한 번 시작하면 그 상태로 돌아가기 쉽다는 말입니다. 이런 악순환, 대물림이 진짜 문제죠. 물론 세부적이고 개인적인 여러 문제를 다 알 수 없는 문제지만 생계를 내세워 너무 쉽게 혹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요. 극도의 가난에 내몰린 사람들을 보조할 사회적 기반이 약한 건 인정합니다. 그러니 이런 여러 문제 때문에 공창제 같은 의견도 나오는 것일 테고요. 문제를 해소할 여러 사회적 기반 조성이 되어야지 성매매 찬성쪽으로 가는 건 쉬운 선택입니다.
자발이냐 비자발이냐 개인의 자유로 돌리는 것도 너무 편한 논리입니다. 내 의지로 다른 이들의 성욕을 채워 주고 돈을 받는 게 말은 되지만 전면적 공감과 수용을 이끌 논리는 아니니까요. 상부상조가 이럴 때 쓰라는 말은 아니잖아요.

power_lifter 2020-08-19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되게 잘쓰셨습니다만, 전쟁은 남자가 일으키고 피해는 여자가 입었다는 구절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정확히는 소수의 남자들이 일으켰고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게 정확한 말입니다. 남성의 경우 지배계층을 제외하면 전쟁에서 총알받이나 고기방패 취급당하고 전쟁이 아니더라도 육체적 노동이나 온갖 폭행을 받아왔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남자가 더 가혹한 처사를 당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여자가 더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