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무법자 - 남자, 여자 그리고 우리에 관하여
케이트 본스타인 지음, 조은혜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만화영화 <마징가 Z>에 나오는 아수라 백작은 반은 남자, 반은 여자 얼굴을 가진 악당이다. (그녀)의 모습은 자웅동체에 가깝다. 아수라 백작은 상황에 따라 유리한 얼굴을 들이민다. 자웅동체는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한다. 전령의 신 헤르메스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 태어난 헤르마프로디토스. 플라톤향연에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언급한 자웅동체를 인용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태초에 인간의 성()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였다고 한다. 여자와 남자, 그리고 이 둘이 합쳐진 자웅동체. 가장 완벽한 인간의 원형인 자웅동체는 신의 질투를 받아 반으로 분리된다.

 

강한 남자’, ‘예쁜 여자젠더 이분법(Binary gender) 사회가 만들어낸 전통적인 성적 규범이다. 이 사회에서 예쁜 남자강한 여자는 괴물 취급을 받았다.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강조하는 성적 규범이 무너지면서 남성 같은 여성’, ‘여성 같은 남성이 주목받기 시작한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에 대해 자유롭고 열린 사고로 양성(兩性)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남성이나 여성에 갇혀 있기보다는 필요하다면 다른 성의 장점을 받아들여 인생을 더욱 자유롭게 살겠다는 것이 바이섹슈얼(Bisexual, 양성애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트랜스섹슈얼과 트랜스젠더(Transgender).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성학 및 퀴어 이론(Queer theory)에서는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한다. 트랜스섹슈얼은 성전환을 위한 의료 조치를 받고 싶은 사람 혹은 의료 조치를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흔히 수술을 통해 완전히 성전환한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의료 조치를 받지 않고 생물학적 성별을 거부하는 사람도 트랜스젠더에 포함된다. 이런 사람들은 이성의 옷을 입는 크로스드레서(Crossdresser)로 지내기도 한다.

 

이성애자가 많은 사회에서 게이, 레즈비언을 비롯한 성 소수자들에게는 수많은 편견이 뒤따른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성 소수자들은 조심스레 벽장에 나온다. 그들은 조금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성 소수자들에게 그 선택은 어떤 의미일까. 미국 성 소수자 운동을 주도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이자 MTF 트랜스젠더(male-to female transgender, 생물학적 성별은 남성이지만 성 정체성은 여성인 사람)케이트 본스타인젠더 무법자(바다출판사, 2015)는 독자들을 향해 도발적으로 묻는다. “왜 성 소수자는 남성’, ‘여성이라는 젠더 체제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가?” 또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왜 사람들은 젠더 체제를 포기하지 못할까?”

 

그녀는 젠더 체제를 해체하기 위해 젠더 무법자(Gender Outlaw)’가 되라고 말한다. 젠더 무법자는 젠더 없는 삶을 산다. 젠더 무법자는 남성또는 여성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틀에 박힌 젠더 이분법에 억지로 맞추지 않는다. 젠더 무법자의 성 정체성은 유동적이다.

 

 

젠더 유동성은 자신이 무얼 하는지 인식하면서 길든 짧든, 어떤 변화를 겪든 간에 자유롭게 한 성별 아니면 무한한 젠더 중 여럿이 될 수 있는 능력이다. 젠더 유동성은 젠더의 규칙이나 경계 따위를 모른다. (92)

 

 

젠더 체제의 경직성은 성 소수자의 다양한 관계 맺기를 부정하고, 생물학적 여성과 남성의 결합만을 인정하는 문화의 편협함은 성 소수자의 삶을 불안하게 한다. 그녀는 젠더 없는 삶을 인정하지 않고 한쪽 성별(남성)이 또 다른 성별(여성)을 억압하는 젠더 체제를 저격한다. 특히 남성 특권은 젠더 체제를 지탱해주는 교활한 권력이다. 남성이 이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면 남성과 여성 간의 불균형한 역학 관계가 무너진다. 젠더 체제를 비판하는 저자의 입장은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을 탐구하여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 자체를 전복하려는 급진적 페미니즘과 닿아 있다.

 

젠더 무법자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나온 퀴어 이론의 고전이지만, 개인의 젠더 선택을 지지하고, 젠더 체제를 허물어뜨리는 유희적 특성을 가진 대안으로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을 내세운 저자의 입장은 지금 봐도 급진적이다. 그래서 트랜스섹슈얼을 비판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권리보다 성 소수자 권리 신장에 더 초점을 맞춘 본스타인의 여성 운동을 비판한다.[1] 그들의 공세에 맞서는 본스타인은 트랜스섹슈얼의 여성 운동을 배제하는 페미니스트를 젠더 체제를 유지하는 데 얽매인 분리주의자라고 응수한다. 젠더 무법자7장은 본스타인이 직접 쓴 퀴어 연극작품 숨겨진 아, 젠더이다.

 

성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개인의 권리나 능력이 억압받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권리는 젠더 체제에 익숙한 이성애자가 독점한 것이 아니다.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역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으며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누군가를 사랑할 권리가 있다. 젠더 이분법은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체제라고 믿는 사람들, LGBT비정상적인 변태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1] 쉴라 제프리스 래디컬 페미니즘(열다북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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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단 하나의 사상’으로 볼 수 없다. 또, 페미니즘은 ‘단 하나의 정의(定義)’로 규정할 수도 없다. 페미니즘은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경합하는 담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들)’이다. ‘페미니즘(들)’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도 있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Marxist Feminism)도 있고, 사회주의 페미니즘(Socialist Feminism)도 있고, 급진적 페미니즘(Radical Feminism)도 있고,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도 있어 사상이 풍성하다. 이성애주의에 도전하고, LGBT(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등 각종 성 소수자 인권을 바탕에 둔 퀴어 페미니즘(Queer Feminism)도 주목받고 있다. 범세계적으로 본다면 제3세계 페미니즘(Third World Feminism)에 접근할 수 있다. 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주체는 흑인 여성, 아시아 여성, 이슬람 여성 등이다. 그리하여 젠더, 인종, 사회계급 모두를 아우르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 또는 트랜스페미니즘(transfeminism)이 부상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 활발하게 활동 중인 페미니스트 대부분은 급진적 페미니스트에 가깝다. 메갈리아는 급진적 페미니즘을 표방한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메갈리아는 과거의 정제된 페미니즘 운동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여성 운동을 펼쳤다. 혐오의 언어를 미러링하며 혐오에 대항하는 방식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SNS를 중심으로 메갈리안들이 활동하게 되자 미러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메갈리안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반응도 나왔다. 그런데 이러한 반응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 페미니즘을 ‘진짜, 가짜’로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메갈리아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감별’하는 것을 무슨 합당한 권리인 마냥 말하고 있는 것일까?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페미니즘 감별사’로 행세하고 다닌다.

 

MtF(Male to Female, 의학적으로 지정된 성별이 ‘남성’이었으나 ‘여성’으로 전환한 것) 트랜스젠더가 여성 운동을 한다고 하면 콧방귀 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메갈리아가 사라진 후 일부 메갈리안들이 모인 워마드는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 소수자를 배제하는 성향을 드러낸다. 이들은 게이의 여성혐오에 맞서 미러링을 시도했다. 그러나 게이를 향한 워마드의 미러링은 방어적인 측면이 크다. 워마드는 성 소수자 인권 보호보다는 여성 인권 보호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워마드의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본 사람들은 ‘워마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할 뻔 했다. 하지만 ‘페미니즘(들)’의 광범위한 담론을 생각한다면 그런 입장도 옳다고 보기 어렵다. 워마드는 ‘성 소수자를 배제하는 급진적 페미니즘’이다. 미국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TERF(Trans 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라고 부른다. TERF는 ‘남성’과 ‘여성’으로 말하는 ‘생물학적 성별’과 ‘이성애’를 지향한다. 그래서 동성애자, 생물학적 성별을 거부하는 트랜스젠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년에 한서희가 ‘트랜스젠더는 여성이 아니다’, ‘성(性)은 바꿀 수 없다’라는 등의 발언을 해서 하리수가 비판한 일이 있었다. 두 사람 간의 설전이 벌어졌을 때 일부 네티즌들은 ‘한서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공격했다. 앞서 말했듯이 상대방의 페미니즘을 ‘가짜’로 몰아세우면서 비난하는 것은 ‘페미니즘 감별사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한서희의 발언을 ‘비판’하고 싶으면 성 소수자들도 여성 인권 신장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워 반박하면 된다. 그런데 퀴어 페미니스트를 조롱하는 TERF의 호전적인 태도가 만만치 않다. TERF는 퀴어 페미니스트들, 트랜스페미니스트들, 심지어 자신들의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멸시하는 의미로 ‘쓰까페미’라고 부른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 [개정판 절판]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2000)

* [구판 절판]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1995)

 

 

 

 

급진적 페미니즘 운동을 주도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성 구분을 아예 철폐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 혁명을 지향했다. 그녀가 원했던 세상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는 문화적 구분이 사라지고,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는 자연적 생식(임신)을 거부한다. 파이어스톤이 ‘급진적 페미니스트’로만 알려져 있다 보니 그녀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간과했던 인종차별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했던 사실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 듯하다. 《성의 변증법》 5장‘트랜스페미니즘’에 근접한 파이어스톤의 탁월한 분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장에서 나는 인종차별주의는 성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개인의 정신에 있어서 성차별주의처럼, 우리는 인종차별주의를 가족의 권력 위계질서와의 관계에서만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적 계급의 발달에서처럼 인종의 생리학적 구별은 불평등한 권력의 분배에 기인할 때에만 문화적으로 중요해진다. 그러므로 인종차별주의는 성차별주의가 확장된 것이다. (157쪽)

 

개별적인 백인 가정은 개별적인 흑인 여성을 성적으로뿐만 아니라 평생 가사노동으로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 (169쪽)

 

 

 

파이어스톤은 이분법적 성별이 사라진다면 여성을 억압하고 종속하게 만든 ‘생물학적 가족’, ‘(남성)문화’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정형적인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틀에 갇혀 생활할 필요가 없어진다. 지금 그녀가 살아있다면 이분법적 성별을 지지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을 보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파이어스톤은 자신이 꿈꿔왔던 ‘페미니스트 혁명 국가’가 당장 실현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인간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와 가부장제의 재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구판, 114쪽). 그녀의 급진적 생각은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하다.

 

급진적 페미니즘 역시 ‘단 하나의 페미니즘’으로 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은 서로 다른 여성운동 전략을 구사했다. 그렇지만 파이어스톤의 책을 읽으면서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는 생각이 든다. 두 진영 간의 차이점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구분하는 일도 편향적으로 비교하는 ‘감별’의 오류로 빠질 수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페미니즘에 입장 차이는 있다(다양한 페미니즘의 특징, 문제점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많지 않다. 시의성이 떨어지지만 로즈마리 푸트남 통의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훌륭한 ‘페미니즘 종합 참고서’다). 그러나 아주 꼼꼼하게 살펴보면 미묘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파이어스톤은 급진적,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교차성을 잘 이용하여 두 진영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두 진영을 상호 보완한 독창적인 여성운동론을 제시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있었기에 급진적 페미니즘이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급진적 페미니즘은 좌파 성향이 강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페미니즘 역사는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하면 짧은 편이고, ‘페미니즘(들)’끼리 서로 경합하면서 논쟁을 진행하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직도 ‘마르크스’, ‘좌파’를 편협하게 보는 이데올로기적 도그마가 남아 있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의 호의적 반응이 늘어나는데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부각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누군가가 ‘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순간, 네티즌들은 그 사람에게 ‘욕을 부르는 좌빨과 꼴페미의 환상적인 조합’이라고 조롱할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음지에서 벗어나서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접점을 찾아 여성 문제를 접근하는 시도를 해봤으면 좋겠다. 퀴어 페미니스트들의 활동도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그들에게 더 분발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어느덧 ‘주류’로 자리 잡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음지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다가가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상대 진영의 페미니즘이 나의 페미니즘과 다르다고 해서 ‘너의 페미니즘은 틀렸어!’고 규정해선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즘(들)’이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를 교섭하고, 보완해야 한다. ‘페미니즘(들)’끼리 서로 “내가 잘 낫다‘는 식으로 싸우는 것은 페미니즘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소모적인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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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8-02-09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리고
자유주의 페미니즘 Liberal Feminism,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Marxist Feminism, 사회주의 페미니즘 Socialist Feminism, 급진적 페미니즘 Radical Feminism,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Queer Feminism, 제3세계 페미니즘 Third World Feminism,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Intersectional Feminism( 또는 트랜스페미니즘 transfeminism)
중에서 *** 페미니즘의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어느 알라디너가 마립간 님도 페미니스트이고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으면 좋겠어요라는 댓글을 받았는데, 제 가치관이 이 중 어디에 가까울까 생각했습니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Intersectional Feminism?

cyrus 2018-02-10 10:07   좋아요 0 | URL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나는 OOO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페미니즘 정체성을 뚜렷하게 밝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페미니즘 정체성을 밝히기보다는 여성문제를 바라보는 저의 관점에 근접한 ‘페미니즘(들)’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원래 처음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J. S. 밀, 베티 프리단)으로 시작했다가 제3세계 페미니즘(벨 훅스, 김미덕)을 알게 됐고, 최근에 급진적 페미니즘(파이어스톤), 사회주의 페미니즘(아우구스트 베벨, 클라라 채트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2018-02-09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0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8-02-0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들인글 잘봤습니다 폐미니즘 공부 해야겠네요!

cyrus 2018-02-10 11:12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여성들이 살면서 말하지 못했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심판매 2018-02-12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페미니즘이라는 말을들었을때는 ˝뭐, 이런 이기적인 집단들이 다 있나?˝ 였는데 이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현대사회의 공동체 분화현상 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존의 가부장적인 가족중심 공동체에서 분화된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인거죠. 부모세대를 돌아보며 절대 이런 공동체는 만들지 말아야겠다라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공동체 같아요.
그런 공동체를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건 응원과 비판이라고 생각해요.
개별의 공동체라는것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기도하고 불필요한것들은 걸러서 듣는 정리정돈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그들의 말을 듣다보면 몇몇은 괜찮은 내용도 있는데 가끔 몇몇은 (제기준에서) 말도 안되는 미숙한 생각의 내용도 있어 보여요.
이럴때일수록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건 서로를 존중하는 ˝해체주의˝가 아닐까해요.
각자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할 자유는 언제나 어디서나 있으니까요.
있는 힘껏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을 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마음껏 쏟아 냈으면 해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더이상 없을때까지...
그러면 지금과 같은 가끔은 생기는 볼 성 사나운 모습은 없어지지 않을까해요.
천만 다행인것은 제 귀에 바로 대고 육성으로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거에요.

cyrus 2018-02-12 13:37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페미니즘이 여러 갈래의 분파로 나뉜 건 페미니즘은 다양한 학문 및 사상과 결합할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마다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보는 시선, 그것을 해체하는 관점들이 다릅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마음껏 펼칩니다. 물론, 페미니스트들 내부에서도 비판과 성찰이 이루어집니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입니다. 합당한 비판은 경청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악의적으로 비난하거나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꼬투리 잡아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려는 입장에 반대합니다.
 
성의 변증법 - 페미니스트 혁명을 위하여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지음, 김민예숙.유숙열 옮김 / 꾸리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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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를 지나면서 미국은 정치 ·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혁을 겪었다. 1960년대는 여성해방운동이 막 힘을 얻기 시작하며 결혼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전통적 가치들이 흔들리고 있던 시기였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 역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안에서 ‘여성 인권’에 눈뜨게 되었다. 서구 사회의 지배층인 백인 남성들은 흑인, 여성들을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키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통제와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구실을 했다. 1969년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주도로 시작된 ‘레드스타킹 선언(Red Stocking Declaration)’‘억압 계급으로서의 여성’을 사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레드스타킹 선언을 지지한 파이어스톤은 이듬해에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을 발표했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단순하게 여성 평등만을 주장하는 기존의 페미니즘 시각에서 탈피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마르크스(Marx)엥겔스(Engels)는 역사적으로 여성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적 관점을 이어받은 파이어스톤은 남성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봤다. 그녀의 논리에 따르면 여성에게 강요된 결혼, 출산, 가사노동은 억압적인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녀는 여성들이 진정으로 해방되기 원한다면 낙태를 남성에게 의존하지 말고 여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급진적인 미래를 제시한다. 파이어스톤은 인공 태반, 시험관 아기 시술과 같은 ‘인공생식’이 활성화된다면 ‘자연적 생식(生殖)’, 즉 임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나왈 엘 사다위(Nawal El Saadawi) 등의 페미니스트들은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과 성 이론으로는 여성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를 바라보는 파이어스톤의 입장은 그녀들과 다르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섹슈얼리티의 본질을 파악한 프로이트 이론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파이어스톤은 프로이트 이론과 페미니즘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al Complex)가 나타나는 가부장제 핵가족의 문제점을 살폈다.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선 근친상간의 욕망을 지니고 아버지에 대해선 경쟁의식을 가지게 되면 아버지와 같은 가부장적 권력을 차지하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친족 구조가 형성되어 있어서 아들의 근친상간 욕망이 억압되고,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력은 유지된다. 그 권력 속에서 성장한 아들은 가부장제에 익숙한 ‘아버지’가 된다. 파이어스톤은 프로이트 이론을 끌어들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가부장제가 여성과 아이의 피억압을 심화시켰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부장제 핵가족을 해체하는 대안으로 모든 여성과 아이들에게 ‘성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이어스톤은 ‘(남성)문화’가 만들어낸 ‘사랑’ 개념도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남성을 사랑하는 여성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사랑하는 남성과의 결혼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결혼하지 못한 여성은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없다. 결국,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가 된다.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져서 가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유지된다.

 

 

맞벌이가 보편화한 지금, 이 시대 여성들은 결혼 후에도 계속 일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계속될수록 여성의 취업뿐만 아니라 재취업도 어려워진다. 이렇다 보니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여성들은 취업 대신에 결혼을 선택한다. 이런 현상을 ‘취집(취업+시집)’이라고 부르는데, ‘취집’을 선택한 여성은 전업주부로 살아간다. 요즘 우리 사회에 ‘1인 가구’ 비중이 늘어나고 결혼을 기피하는 경향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과연 파이어스톤이 예언한 대로 ‘사랑’이라는 현상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를 볼 수 있을까? 그런 사회가 온다면 핵가족이 줄어들고, ‘자녀 없는 부부 가족’이 늘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녀 없는 부부 가족’은 부부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작동되지 않는 최적의 친족 구조일까? 파이어스톤은 여성은 일부일처제를 지향하고, 섹스보다는 관계에 더 관심이 많고, 애정과 성욕을 혼동하는 동물로 본다. 반면 그녀가 보는 남성은 섹스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 없는 동물이다. 따라서 그녀는 사랑을 낭만화시키는 ‘(남성)문화’를 반대하고, “남성들은 사랑할 수 없다”(197쪽)고 주장한다. 결혼하지 않거나 자녀가 없어도 여성이 사랑하는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한다면 ‘건전한 사랑’을 느끼기 어렵다. 파이어스톤이 지금 살아있다면 현모양처를 꿈꾸는 여성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결혼이 네 인생 책임 지냐?”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이 문장 하나라도 삭제되지 않도록 그대로 출판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40여 년 전 스물다섯 살의 젋은 파이이스톤의 여성론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을 넘어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꿈꿨던 그녀의 작업은 현재 우리 시대의 요구와도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하지만 《성의 변증법》도 시대적 한계에 갇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파이어스톤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지지하면서 자녀는 ‘권력을 가진 부모’가 되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부모의 양육이 자녀의 성장에 큰 영향을 준다는 입장을 옹호하는 셈인데 ‘부모의 양육’을 근거 없는 ‘가설’이라고 비판하는 주디스 리치 해리스(Judith Rich Harris)의 입장을 내세워 파이어스톤을 비판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를 잘 성장하는 데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오늘날 아이들은 제대로 대접 받을 권리가 있는 독립된 개체로 받아들여지며, 둘째는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유년기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그마” 때문이다. 이 도그마를 믿는 사람들은 또한 유년기에 부모와 함께한 특정한 경험이 특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이 믿음 역시 ‘양육가설’에 속한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 가설》 138쪽)

 

 

 

파이어스톤은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인 키부츠(kibbutz)와 비슷한 공동체 사회를 만든다면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로 구분되는 불균등한 관계가 해소될 거로 믿었다. 그녀가 상상한 미래의 공동체 사회는 ‘완전 평등 사회’이다. 그러나 아이는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한다. 아이는 또래 친구를 만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이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깨닫게 된다.

 

 

 

아이는 부모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지 않는다. 아이는 자기와 유사한 다른 아이들을 통해 자아를 형성한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 가설》 323쪽)

 

 

 

주디스 리치 해리스는 아이가 친구들을 만나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게 되는 ‘성별 범주’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고, 아이들의 수가 적은 유목민 무리가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완전히 평등한 사회에 가깝다고 말한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집단에는 아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에페족 아이들은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한데 어울려 놀았다. 에페족 아이에게 유의미한 사회범주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아니라 어른과 아이인 것이다. 자녀가 성별에 따른 구별 없이 완전하게 평등한 성 개념을 갖기를 바란다면 아이를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유목민 무리에 보낼 것을 권한다. 그게 아니면 아이들 수가 너무 적어서 놀이집단이 둘로 나뉠 수 없는 지구상의 어딘가로 보내는 것도 괜찮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 가설》 345, 346쪽)

 

 

 

인간의 역사에서 차별 철폐를 내세워 지상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이 원하던 지상천국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utopia)’였다. 그러나 파이어스톤은 현실보다 ‘성 구분 자체를 철폐하는 페미니스트 혁명’이라는 꿈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성의 변증법》 출간 이후로 파이어스톤은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도 페미니스트 혁명 투쟁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질환에 시달리다가 2012년에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나키스트 마 골드만(Emma Goldman)‘더 이상 꿈꿀 것이 없음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녀가 죽음을 맞는 순간, 더 이상 꿈꿀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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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8-02-08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현실 세계에서의 최적 optimum이 이상 ideals이라고 생각합니다.

cyrus 2018-02-08 19:47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최적의 조건 또는 환경이 서로 상반되는 양자를 만족시키는 경우가 잘 없죠.

마립간 2018-02-09 07:47   좋아요 1 | URL
제 글을 읽으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교육 방법에 방법에 있어, 자율성과 평등적 결과의 적점, 최적을 찾아 그것을 교육 제도로 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당수의 제도들이 상보성을 이해하지 못해 양쪽의 나쁜 결과를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편애가 넘치는 정의감에 의존한) 페미니스트들의 많은 주장들이 최적을 찾기 보다는 상보적인 양쪽을 주장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레삭매냐 2018-02-08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님은 곧 페미니스트 전문가가
되실 것 같습니다. 아니 ‘이미‘인가요.

cyrus 2018-02-08 20:47   좋아요 0 | URL
전문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ㅎㅎㅎ 저는 ‘우물(알라딘) 안에 있는 개구리(딜레탕트)‘입니다. ^^

stella.K 2018-02-08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제목대로 사랑이 밥 먹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짜릿하고 후끈 거리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잖아.
하긴 난 배우자한테 밥은 먹여줄 수 있어.
하지만 그가 싸놓은 X 치우라고 그러면 도망갈 것 같아.
사랑이 밥 먹여주냐고 하면서 말이지.ㅋㅋ

cyrus 2018-02-08 20:23   좋아요 2 | URL
파이어스톤은 이 책에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성(sex)와 에로티시즘을 부정하지 않아요. 그녀는 에로티시즘을 완전히 부정하게 되면 성적 기쁨과 흥분마저 사라진다고 썼거든요.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라면 본인이 싼 똥은 자기가 할 수 있는만큼 치워야죠. 혼자 똥 치우기 힘들어서 ‘사랑의 힘‘이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여자에게 똥 치워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라 볼 수 없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강요에요. ^^

stella.K 2018-02-09 13:3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지. 옳은 말이야.
그런데 내 말은 이 사람이 수족을 못 쓰게 되는
최악의 경우를 말했던 거지.
내가 조금 오버는 했지?
파이어스톤이 정말 맞는 말을 한 것 같다.

2018-02-08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2-09 11:09   좋아요 1 | URL
‘사랑’이라는 단어가 남아 있어도 남녀 모두 행복하고 만족시킬 수 있는 ‘진짜 사랑’을 경험하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AgalmA 2018-02-11 14: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68혁명 이후의 유럽 페미니즘, 미국의 여성해방운동이 급격히 식었던 걸 생각할 때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도 비슷한 양상이 될까 좀 우려하는 중입니다. 사회-경제 불안정이 장기화되면 이러한 급진적인 운동은 대중의 장기적 응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먹고 살기 힘든데 자신과 밀접한 문제가 아니면 관심주지 않으니까. 오히려 먹고 살기 힘드니까 이런 페미니즘 움직임에 화풀이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사상과 운동의 신선도가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게 관건입니다. 현재의 급진적 페미니즘으로는 화력이 약하죠. 다양성, 포괄성이 있어야 해요.
뻑하면 메갈리안 들먹이거나 결혼 기피하며 백마탄 왕자 잡는 된장녀 운운하는 인간들과 대결하려면^^;

cyrus 2018-02-12 13:43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운동은 시대의 요구와 반응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정체될 수밖에 없어요. 여성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로 영미권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정체되는 바람에 여성운동이 시들해졌어요. 우리나라 여성운동도 언젠가는 정체기(과도기)를 겪을 것입니다.
 
여성론 까치글방 42
이우구스트 베벨 / 까치 / 1990년 7월
평점 :
품절


 

 

 

 

 

 

여성의 종속과 만연한 매춘에 기대고 있는 부르주아 가족은 그 경제적 토대인 사유재산을 없애면 자연히 붕괴할 거야! (아우구스트 베벨) [1]

 

 

다수자는 소수자에게 자기들의 법률을 강요하거나 박해를 가한다. 그러나 여자는 미국의 흑인이나 유태인들처럼 소수자가 아니다. 지구 위에는 남자와 같은 수의 여자가 있다. 최초에 이 두 무리는 서로 독립해 있었다. 예전에는 쌍방이 서로 모르고 지냈거나 또는 어느 편이나 상대편의 자주성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 결과 약자는 강자에게 굴복하게 되었다. 유태 민족의 분산, 미국의 노예 제도의 등장, 식민지 정복 등은 획기적인 역사적 예들이다. 이 경우에 피압박자들은 최소한 지난날의 추억을 간직한다. 그들은 과거와 전통, 때로는 종교와 문화를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베벨(August Bebel: 여성론자, <부인론>의 저자, 1840~1913)이 묘사한 여자와 프롤레타리아와의 비교는 아주 훌륭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수적으로 열세하지도 않고 또 그들의 개별적인 집단이 최근까지 형성된 일이 없었다. 비록 과거에 사건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여자와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를 계급의 범주 내에서 설명을 하고, 특정한 개인을 이러한 계급 속으로 끌어들여 이유를 밝힌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발전이다.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이 언제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자는 언제나 있었다. 여자는 그 생리 구조에 의하여 여자이다. 역사를 한껏 소급해 보아도 여자는 늘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2]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전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이었던 푸리에와 오언, 베벨 같은 이들은 단지 선의의 미덕에 의해 계급 특권과 착취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상세계를 상정하면서 현존하는 사회적 불평등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3]

 

 

보부아르(Beauvoir)《제2의 성》(을유문화사, 1993) 1권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의 앞 장을 읽다가 말았다. 독서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문장을 따라가던 내 눈이 두 권의 책 초반부에 나온 ‘생소한 이름’ 앞에서 멈췄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 그 이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보부아르와 파이어스톤의 책을 잠시 덮고 베벨의 《여성론》(까치, 1990)을 펼쳤다. 2보 전진 독서를 위한 1보 후퇴 독서다.

 

 

 

 

 

 

 

 

베벨은 여성해방론을 주장한 독일의 사회주의자다. 그는 마르크스(Marx)의 사회주의를 지지하여 사회민주당을 창설,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가 1879년에 발표한 <여성과 사회주의(Die Frau und der Sozialismus)>사회민주당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여성론》과 《여성과 사회》(보성출판사, 1988)는 이 책의 번역본이다. 일본에서는 이 책이 ‘부인론’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여성론》의 초판은 180여 쪽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기존의 내용을 보완하거나 새로운 자료를 계속 추가하면서 중판이 여러 번 출간되었고 1910년에 400쪽이 넘는 개정 50판이 출간되었다. 《여성론》 완역본은 저자 생전에 마지막으로 나온 개정 50판을 번역한 것이다. 1987년에 책의 1~3부를 번역한 책이 나온 적이 있다. 1990년에 4부를 온전히 번역한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까치 판 《여성론》을 헌책방에 만나게 되면 이 책이 완역본인지 아닌지 잘 살펴봐야 한다. 《여성론》 완역본 앞표지에는 ‘완역본’이라는 글자가 있다.

 

베벨은 여성의 평등을 주장하는 부르주아지(bourgeoisie, 시민계급)의 여성운동에 부정적 견해를 드러낸다. 그는 남녀 평등사회가 실현된다고 해도 여성들은 남성만 유리한 ‘결혼과 매춘’에 예속된다고 주장한다.

 

 

  시민계급의 여성운동이 주장하듯 남녀의 완전한 평등권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여성의 예속상태―거의 모든 여성들에게 현재의 결혼제도는 바로 이러하다―나 매춘 그리고 남성에 대한 경제적 예속 등과 같은 악덕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명백한 일이다. 좀 더 혜택 받은 계층에 속하는 몇몇 여성들이 교직과 의료직, 학문과 관리 생활 등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하여 여성의 지위 전반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녀 사이의 관계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서론, 9쪽)

 

 

  노동여성들을 가장 괴롭히고 있는 임금제와 또 현존의 재산 및 산업질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성적 노예제를 없애기 위해 국가 및 사회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바꿔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시민계급 여성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이와 같은 근본적 변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특권적 지위에 있으므로 계속 확산되어나가는 노동여성운동을 위험하고도 부당한 투쟁이라 생각하면서 저지하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현대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첨예화된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적 대립이 여성운동 내부에서도 날카롭게 부딪히기 시작한 것이다. (서론, 9~10쪽)

 

 

책의 1부는 각종 인류학적 연구 성과를 동원하여 원시사회부터 ‘모권(母權)’을 가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밝힌다. 베벨은 루이스 헨리 모건(Lewis Henry Morgan)《인류사회》(문화문고, 2005)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두레, 2012)을 인용하여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할 수 있는 정당성을 내세운다. 분업과 경제가 발달하면서 모권 중심의 원시사회는 자연스럽게 부권(父權)과 일부일처제가 가능한 부권 중심의 농경사회로 전환되었다.

 

 

고대의 씨족조직이 와해됨과 아울러 여성의 영향력과 지위도 급격히 하락하였다. 결국 모권은 소멸되고 부권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사유재산 소유자로서 남자는 이제 그가 ‘적출’로 인정하여 자신의 재산을 상속케 할 자식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1부, 36쪽)

 

 

2부는 사유재산제의 자본주의 사회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무산계급 또는 노동계급)와 여성을 억압하는 각종 사례를 논한다. 베벨을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마찬가지로 결혼이 ‘여성을 노예로 만드는 사회제도’라고 규탄한다. 그는 부르주아지 여성 운동가들이 외면한 프롤레타리아 여성 노동자(기혼 여성)들의 비참한 상황을 열거하여 여성과 프롤레타리아를 ‘자본주의 사회 속에 고통받는 존재’로 인식한다. 또 매춘 행위를 금지하면서도 ‘공창’을 용인하는 국가의 이중적인 자세가 여성을 불리하게 만드는 사회제도라고 지적한다.

 

3부에서 베벨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간 갈등과 양극화 현상을 언급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를 주시한다. 베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찾아 여성을 해방할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이 책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4부에 사회주의가 여성해방운동과 함께 앞으로 나가야 할 청사진을 제시했다.

 

밀의 《여성의 종속》(책세상, 2006)이 남성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경전이라면 베벨의 《여성론》은 남성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경전이다. 부르주아 여성들이 선호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사회 개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베벨은 《여성론》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의 실현’을 위한 여성의 적극적인 노동 운동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 책도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베벨은 중세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한 나쁜 문화의 사례로 영주의 초야권(初夜權, 영주가 결혼하는 농노의 신부와 첫날밤을 보낼 권리)을 언급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초야권을 유럽 중세 시대에 성행한 적이 없는 문화로 보는 견해가 지지받고 있다. 베벨은 동성애를 ‘자연에 반하는 성욕 만족’, 동성애자를 ‘방탕아’로 표현했다. 그 당시에 동성애를 ‘정신질환’의 형태로 보는 사회적 편견이 있었다. 베벨은 남녀 모두 균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전면 무상 교육을 주장했다. 그리고 고된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여성을 위해서 완벽한 조리 도구와 각종 가전제품이 마련된 ‘공산주의적 취사장’을 제안하기도 했다. 성능 좋은 조리 기구와 부인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가전제품이 생겨도 여성의 가사노동은 남성보다 많은 실정이다. 그런데 베벨은 남성도 가사노동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파이어스톤의 지적대로 베벨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언론 자유가 전혀 없다는 저 단순하기 그지없는 생각이야말로 부르주아 사회를 가장 완벽한 사회로 규정해놓고 적대감으로 사회주의를 비방하고 깎아내리는 억지임에 틀림없다. 부르주아 사회를 마치 진정한 언론자유의 보루인 양 말하는 것 자체가 벌써 명백한 거짓이다. (4부 484쪽)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지길 바라는 열망이 너무나도 컸던 베벨은 간간이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사회주의 내부의 문제점을 바라보지 못했고, 그는 사회주의 사회가 언론 자유를 보장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마르크스, 바벨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꿈꿨던 국가는 그들의 이상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스탈린(Stalin)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스탈린 체제는 가족 제도 유지를 강화하는 국가 정책을 전면으로 내세웠고, 베벨이 지지한 ‘여성의 자유연애’를 금지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쉴 틈 없이 공장 노동과 가사노동을 모두 맡아야하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이렇듯 사회주의도 ‘가장 완벽한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피차일반이다.

 

 

 

 

 

[1] 수전 앨리스 워킨스 《페미니즘》 (김영사, 2007) 90쪽

[2] 《제2의 성 1》 (을유문화사, 1993, 구판) 16~17쪽

[3]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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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3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2-03 11:34   좋아요 1 | URL
<여성론>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여성의 지위는 그 민족의 문화를 측정하는 데 가장 적절한 척도이다.” (127쪽)

여성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의 첫 젠더 수업 창비청소년문고 27
김고연주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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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 하와(Hawwah)가 탄생하기 전까지 아담(Adam)은 남성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었다. 하와가 탄생하고 나서야 ‘남성’, ‘여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남성은 남성적 가치관에 따라, 여성은 여성적 가치관에 따라 획일적으로 양육되며 한 쌍의 남녀가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아 사는 것이 삶의 유일한 방법이자 가치라고 교육받는다. 또한, 이성애만이 인간이 나눌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랑이자 덕목이라고 배운다.

 

성(sex)은 ‘남성과 여성’을 의미하는 생물학적, 의학적 개념이다. 젠더(gender)는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 · 문화 ·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여 만들어내는 종합적인 현상을 포괄한 개념이다. 페미니즘(feminism)은 가부장적 질서에 반대하면서 젠더에 기초한 다양성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근대사회가 일원론적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회였다면 오늘날 현대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폭력 불감증에 걸려 있다. 특정 대상에게 향하는 혐오 발언에는 언제나 폭력이 있다. 일상생활에 침투한 혐오 발언은 가히 치명적이다. 주장이 다르면 공격하고 공격당한다. 다양성의 사회에 살면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론이 설 자리를 잃고 설득이나 이해는 통하지 않는다.

 

‘젠더’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남녀차별 · 여성혐오가 여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알게 모르게 남녀차별이 존재한다. 김고연주《나의 첫 젠더 수업》은 역사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어떤 식으로 성 역할을 부여받고 수행했는지 청소년들에게 쉽게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는 먼저 가족 안에서 ‘고정된 성 역할’이 어떻게 주입되고 고착되는지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성은 가정 내에서 소극적 · 수동적인 여성성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한다. 흔히 분홍색은 여성을 대변하는 색깔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자아이에게 분홍색을 강조하는 것이나 남자아이에게 분홍색을 금기시하는 것 모두 비교육적이다. 성 정체성이 생기지 않은 시기에서부터 특정한 색을 접하는 아이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게 돼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외모가 아름다워야만 취업이나 결혼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풍토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인간의 가치를 외모로만 따지는 것은 인간의 내면을 경시하는 속물주의로 이어진다. 최근에는 얼굴이나 몸매를 가장 먼저 쓰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청소년 시기부터 벌써 루키즘(lookism, 외모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학생들은 무리한 다이어트와 성형으로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저자는 청소년 독자들이 외모지상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도록 현실적인 사례(비현실적인 바비 인형의 몸, 미스코리아 대회의 문제점 등)를 들어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근대 초기의 여성상은 가족의 생계 부양자이자 가장으로서의 남성상을 보완하는 모습이었다. 모성, 감정, 사랑스러움 등이 그 여성상의 내용을 이룬다. 그러나 모성은 본능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모성을 신성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남아 있어서 스스로 또는 타인에게 모성을 강요하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바댕테르(Elisabeth Badinter)는 모성 본능은 본래부터 여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바댕테르의 입장을 인용하여 육아 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을 위해 사회가 만들어낸 ‘모성 본능’의 불편한 진실을 알려준다. 모성은 출산을 경험한 어머니에게만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인간적 감정’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분법적 성 역할, 혐오 문제는 자신 또는 타인의 생각과 신체에 대한 생각과 행동 범위를 축소한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을 꼭꼭 숨기기 위해 타인의 약점을 손가락질하고 혐오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저자는 자신과 타인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한다면 남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고정된 성 역할에 맞서는 남녀에게 당부하는 그녀의 말이 깊고도 넓은 혐오 사회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실천적 방안으로 이어질 것인지 의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 타인에 향한 사랑을 아끼지 않는 성숙한 사람은 타인과 정서적 연결을 맺고 타인을 공감한다.

 

이 책을 자녀와 함께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있다. 주제별로 읽는 것이다. 그때그때 관심에 따라, 이런 조합, 또 저런 묶음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런 접근을 통해 어른, 청소년 독자들은 젠더라는 새로운 시각이 사회를 달리 해석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고리타분하고 잘못된 성교육을 받고 자란 어른들은 왜곡된 성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올바른 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제대로 이끌어주려면 어른들도 성을 공부해야 한다. 어른도 잘 모르고 틀릴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성을 다시 공부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든다. 《나의 첫 젠더 수업》은 여성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여성, 남성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이라는 목표에 좀 더 접근하도록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용기와 자극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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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8-01-23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아이에게 분홍색을 강조하는 것이나 남자아이에게 분홍색을 금기시하는 것 모두 비교육적이다. ; 여자 아이가 스스로 분홍색을 좋아할 때, 그것을 금기시하는 것은 교육적일까요. 비교육적일까요?

우리 딸아이를 예로 든다면 유치원 입학하면서 분홍색을 좋아하다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저는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cyrus 2018-01-24 15:19   좋아요 0 | URL
딸이 스스로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니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홍색은 ‘여자의 색’, 파랑색은 ‘남자의 색’이라는 편견을 가진 부모는 자녀에게 편견을 가르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뿐만 아니라 또래 친구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 배우게 됩니다. 남자 친구들 대부분이 분홍색보다 파랑색을 선호하면, 그들과 어울리는 남자 아이는 파랑색을 선호하게 됩니다. 여자 아이도 마찬가지에요. 분홍색을 선호하는 동성 친구들과 어울리면 분홍색을 좋아하게 되죠. 다가 후토시의 <남자문제의 시대>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마립간님처럼 자녀가 무슨 색을 좋아하든 내버려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마립간 2018-01-24 19:09   좋아요 0 | URL
아래 비밀댓글에 대한 답변과 함께 생각해 보면

어른의 개입 없이, 유치원생들 사이에서 색깔에 관한 남녀 편향이 생긴다면 어른이 아이들의 사고에 직접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때의 직접 개입은 설명이나 설득이 아닌 물리적 개입을 말합니다.


cyrus 2018-01-25 12:31   좋아요 1 | URL
<남자문제의 시대>의 저자는 남녀평등교육을 도입한 학교의 사례를 분석해서 남녀평등교육 도입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지적합니다. 저자의 의견에 저도 동의하고요, ‘물리적 개입’으로 아이들의 색깔 편향을 바로잡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이들이 생각하는 편견이 잘못된 내용임을 알려주는 것이 ‘개입’일까요? 저는 편견과 오해를 바로 잡을 수 있기 위해선 부모의 설명과 설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마립간 2018-01-25 14:27   좋아요 0 | URL
cyrus 님이 전에 언급했던, 양성 평등을 위한 폭력을 반대한다는 일관된 가치관의 댓글로 보입니다.

편견을 바로 잡는 교육, 훈계 그 무엇이든 개입은 개입이죠. 긍정적인 개입일 뿐이죠.

남녀불평등에 관해, 물리적 개입이 아닌 ‘잘못된 내용임을 알려주는 개입‘으로 충분한가. 성인의 경우에는 아이와 무엇이 다른가가 생각해 볼 점이겠군요.

(그리고 사람을 악어에 비유하는 것은 언어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2018-01-23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1-24 15:23   좋아요 1 | URL
학교도 고정된 성 역할과 관련된 편견을 습득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남자 아이가 분홍색을 좋아하는데, 동성 친구들이 ‘너 분홍색 좋아하니 여자구나’하고 놀리면, 남자 아이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여자의 색인 분홍색’이라는 편견을 스스로 극복해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떳떳이 밝히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죠. 아이들은 동성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성 친구들의 취향을 따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