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 오리아나 팔라치, 나 자신과의 인터뷰
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김희정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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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는 펜 하나로 세상을 움직인 인터뷰 전문 기자이다. 그녀는 세계적인 정치 거물들과 인터뷰를 도전적으로 진행하는 걸로 유명하다. 정치 거물들은 팔라치의 신랄한 질문 공세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늘 팔라치의 승리로 인터뷰가 마무리되었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 오리아나 팔라치, 나 자신과의 인터뷰》는 그녀의 말과 글을 토대로 사후에 펴낸 자서전이다. 자서전 편집자는 팔라치가 자신에 대해 직접 밝힌 내용만 선별하여 자서전 형태로 엮었다. 따라서 이 책은 그녀의 투쟁적인 삶과 뜨거웠던 열정을 회고하는 생생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팔라치는 무솔리니(Mussolini)의 파시스트 정권 아래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를 이끈 지도부였다. 팔라치는 파시스트와 나치에 맞서는 저항운동에 뛰어들었고, 일찍부터 정치권력 남용 문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다. 자서전의 1부(「운명은 그렇게 준비되었다」)는 팔라치가 유년 시절에 겪은 일화와 ‘기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에 대한 기록이다. 삼촌의 권유로 팔라치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베트남 종군기자로 활동한다.

 

팔라치는 종군기자로 베트남 전쟁에서 중동 전쟁, 헝가리 침공에서 남미 봉기, 걸프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팔라치는 기사를 쓰면서 자신을 ‘역사의 증언자’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역사 현장의 중심에 섰다. 2부(「돌아다녀! 세상을, 마음껏!」)에서는 기자의 사명, 글쓰기와 인터뷰에 대한 팔라치의 진솔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팔라치는 자신과 인터뷰한 유명 인사들을 가리켜 ‘불쾌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유명 인사, 특히 권력자와의 인터뷰는 걸림돌이 많다. 사전에 질문 원고를 받아 보고 거북한 내용은 빼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고, 미리 특정 질문은 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인터뷰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현장의 위압감 때문에 준비한 내용을 제대로 질문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련한 팔라치는 주눅 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한풀 옷을 벗기듯 놀라운 사실을 뽑아내고 권력자의 속내를 간파해 나갔다. 그러나 팔라치는 자신이 정치 인터뷰 기자로 알려진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팔라치의 활약상에 감탄한 대중은 그녀를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으로 칭송했지만, 그녀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수많은 인물을 인터뷰하고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던 팔라치는 그리스의 반체제 인사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Alexandros Panagoulis)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파나굴리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뒤 전설적인 영웅으로 다시 되살린 것이 <한 남자(Un Uomo)>라는 소설이다. 3부(「사랑과 자유를 위한 투쟁」)는 사랑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숙명적인 인연을 잊지 못하는 팔라치 자신의 독백이기도 하다.

 

팔라치는 외향적인 동시에 내향적인 삶을 살았다.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뛰어들었고, 나치즘과 파시즘이 위세를 떨쳤을 때 이에 대한 저항의 글을 쓰며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색적이었으며,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글쓰기에만 몰두했던 고독한 인간이었다. 혹자는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오리아나 팔라치’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팔라치는 자신의 이름에 ‘영웅’, ‘성녀’, ‘전사’와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을 거부했으며 자신을 둘러싸고 서서히 만들어진 신화를 부정했다. 팔라치가 좋아할 만한 명예로운 별명이 뭐가 있을까. 하늘에 있는 깐깐한 팔라치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녀를 ‘자유인’이라 부르고 싶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는 ‘자유인’ 팔라치의 내면적 자화상이다. 그녀가 인터뷰한 팔라치는 ‘전설의 여기자’가 아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말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인간이다.

 

 

 

 

 

※ Trivia

 

63쪽에 팔라치가 이란의 소라야 왕비를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긴 일화가 나온다. 이 장에 소라야를 ‘소리야’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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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2 12:53   좋아요 0 | URL
역시 사진 보는 눈이 뛰어나십니다! ^^
 

 

 

수전 손택(Susan Sontag)『해석에 반대한다』라는 글에서 “해석은 해방 행위다. 거기서 해석은 수정하고, 재평가하는, 죽은 과거를 탈출하는 수단이다[1]라고 썼다. 그녀가 새롭게 제시한 ‘해석’의 의미는 예술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학문의 진리는 끊임없이 연구되고 재해석된다. 칼 포퍼(Karl Popper)의 철학은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에서 출발한다.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행태는 ‘닫힌 사회’의 전형적인 속성이다. 인간의 이성은 합리적이면서도 불완전하므로 상호 비판이 허용돼야 하며 절대적 지식 추구는 위험하다. 포퍼가 지향하는 학문 접근 방식은 ‘비판이 가능한가?’라는 점이다.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 이한구 《칼 포퍼의 『열린사회의 그 적들』 읽기》 (세창미디어, 2014)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믿음은 각자마다 다르다. 사람들은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여긴다. 그들은 대화와 토론을 거부한 채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것만이 절대적이라 여겨 ‘닫힌 사상’을 깊이 간직한 채 살아간다. ‘진리의 소유화’는 어느 사람도 예외일 수 없다. 새로운 지식과 앎에 대해 열려 있는 사람이 훌륭한 지식인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게일 루빈(Gayle Rubin)이다.

 

 

 

 

 

 

 

 

 

 

 

 

 

 

 

 

 

 

* 게일 루빈 《일탈 : 게일 루빈 선집》 (현실문화, 2015)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게일 루빈은 스물다섯 살에 『여성 거래 :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녀는 이 논문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젠더 불평등을 ‘계급’ 또는 ‘가부장제’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성 거래』가 발표된 연도는 1975년이다. 미국의 70년대는 급진적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의 시대였다. 신좌파 내 고질적인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루빈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로 퍼지는 ‘제2 물결 페미니즘’의 지적 양분을 흡수한다. 1970년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성의 변증법》을 발표하여 성별 자체가 권력 관계를 내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발표했을 때 파이어스톤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재미있게도 《성의 변증법》이 발표된 지 5년이 지난 시점에 루빈의 논문이 나왔다. 《성의 변증법》의 첫 문장은 이렇다.

 

 

성적 계급(sex class)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2].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자체에 이미 권력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성적 계급을 ‘가장 오래되고, 가장 견고한 계급’이라고 말한다. 여성 억압은 아버지가 권력을 독점하는 가부장제와 더불어 작동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계급과 권력은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지만, 여성의 지위는 몸과 성별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나 루빈은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여성 억압 분석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는 ‘가부장제’ 대신에 ‘섹스/젠더 체계’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여성 억압의 원인을 분석한다. 섹스/젠더 체계는 여성을 ‘선물’인 것처럼 거래(또는 교환)하는 문화를 설명하는 개념적 도구이다.

 

루빈은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계급 사회를 설명한 마르크스(Marx)와 엥겔스(Engels), 프로이트(Freud)에서 라캉(Lacan)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 레비스트로스(Levi Strauss)의 구조주의 인류학이 침묵한 젠더 불평등에 주목한다. 그녀는 여섯 명의 남성 지식인들이 구축한 사상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 2012)

 

 

 

마르크스는 여성 억압에 관해서는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엥겔스는 사적 소유에서 파생된 가족제도(일부일처제)의 기원을 추적하여 여성 억압을 읽어냈지만, 루빈은 그의 분석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지 엥겔스의 대표작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실망스러운 저작’이라고 평가한다[3].

 

 

 

 

 

 

 

 

 

 

 

 

 

 

 

 

 

 

* 장-다비드 나지오 《정신분석의 근본 개념 7가지》 (한동네, 2017)

* 김석 《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에로의 초대》 (김영사, 2010)

* 김석 《에크리 :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살림, 2007)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2009)

*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도서출판 숲, 2008)

 

 

 

프로이트는 아버지에 대한 원초적 적대심을 소포클레스(Sophocles)의 고대 비극에서 빌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 이름 붙인다. 남자아이는 어머니와 자신이 페니스가 달린 똑같은 사람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페니스를 거세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거세 공포)을 느낀다. 남자아이는 거세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자아이는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게 되고 남자로서의 성 정체성을 획득한다. 남자아이의 성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설명할 때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자주 언급된다.

 

라캉은 생물학적 성차에 주목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이론을 ‘상징적 차원’으로 재분석한다. 그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라캉에 따르면 아이의 욕망은 결여로 인해 발생한다. 남자아이는 ‘페니스가 없는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자신을 ‘상상적 팔루스(Phallus)로 간주한다. 아버지의 거세 공포에 직면한 남자아이는 어머니의 결여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팔루스를 모방한다. 이 위기 과정을 통해서 남자아이는 자신의 팔루스를 아버지의 팔루스와 동일시하고(이때 ‘상상적 팔루스’는 거세된다), 자신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 욕망의 대상을 아버지로 변경한다. ‘상상적 팔루스’에서 ‘상징적 팔루스’로 전환하면서 페니스는 타자, 즉 아버지의 욕망을 나타내는 기표(記標, signifier: 주체를 구성하고 재현하는 역할을 하는 요소)[4]가 된다. 라캉은 욕망의 대상이 되는 상징적인 아버지를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말한다. 남자아이의 욕망은 주체적 욕망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남자아이는 팔루스를 인식한 과정에서 타자인 아버지의 욕망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남아 있다. 팔루스가 없는 여자아이는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가. 라캉은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처럼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를 팔루스의 소유자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실제 페니스(프로이트), 상징적 팔루스(라캉)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자아이는 ‘자신에게 팔루스를 줄 수 있는 아버지’를 욕망한다. 팔루스를 원하는 여자아이는 자신을 여성으로 인정하고, 아버지를 통해 팔루스를 소유하고자 한다. 루빈은 프로이트와 라캉 정신분석학의 ‘남근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남근 중심주의는 여성의 수동적인 정체성을 강조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 앨런 바너드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한길사, 2016)

* 최협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 (풀빛, 2014)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여성의 교환’이 친족 체계와 족외혼 문화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원시 씨족사회의 기본 구조는 근친상간 금기에서 시작된다. 가부장이 자신이 속한 부족의 여성들을 다른 부족에게 '교환'함으로써 족내혼을 금지하고, 동시에 다른 부족과 혈연관계를 맺는다. 여성 교환의 기본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풍습이 결혼이다.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를 건네주는 관습이 결혼의 '교환' 행위를 보여준다. 신부의 아버지는 ‘성적 주체’ 또는 ‘교환 주체’인 반면 신부는 가족을 형성하기 위해 교환되는 ‘선물’이다. 루빈은 ‘여성 교환’ 구조가 여성을 억압하는 심층적 구조라고 비판한다.

 

루빈의 『여성 거래』는 남성 중심적 학문과 문화에 기인한 ‘해석을 수정하고, 재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종속이 묵인되었던 ‘(여성이)죽은 과거’에서 탈출하기 위한 ‘해방적 사유’을 펼친 역작이다. 다만, 루빈이 지향하는 ‘여성 해방’은 ‘남성 또는 가부장제의 제거’가 아니라 섹스/젠더 체계로 작동되는 사회구조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1] 《해석에 반대한다》 25쪽

[2] 《성의 변증법》 13쪽

[3] 《일탈》 『여성 거래』 99쪽 : 루빈은 엥겔스를 비판하지만, 그의 통찰은 주목할 만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4] 《일탈》에서는 ‘상징적 증표’가 ‘기표’와 같은 의미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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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1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1 16:18   좋아요 1 | URL
결혼과 출산에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살 수 있는,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어요. 순결과 도덕을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만남이 풍기문란을 조장한다면서 반대할 것입니다. 비혼 족이 늘어도 여전히 혼자 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이 남아 있어요.

2018-07-11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1 16:34   좋아요 0 | URL
일하면서 몰래 제 글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제가 ‘상상적 팔루스’의 의미를 잘못 소개했어요. 루빈의 <여성 거래> 번역문을 읽으면서 역자가 페니스와 팔루스를 서로 비슷한 의미로 쓰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성 거래> 번역문을 읽기 전에 정신분석학 자료를 참고했고, <여성 거래>를 읽었을 때 본문에 있는 프로이트와 라캉 정신분석학 개념을 정확히 구분해가면서 읽었어요. 그런데도 라캉의 이론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고, 이렇게 글로 정리해도 쉽지 않네요.. ^^;;

제가 봐도 팔루스를 받아들이는 여자아이에 대한 설명이 매우 빈약하게 느껴졌어요. 글을 쓰다 보니 엉뚱하게도 프로이트의 이론을 언급해버렸네요. 단기간에 야매로 라캉을 공부하니까 이 글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노출되었습니다. 제 글을 꼼꼼하게 읽고, 문제점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syo님. 퇴근하고 나서 글을 고치겠습니다. ^^
 
폴리아모리 -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
후카미 기쿠에 지음, 곽규환.진효아 옮김 / 해피북미디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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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안방극장이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다. 그야말로 ‘연애 예능방송’ 전성기다. 다만 기존 연애 예능방송 프로그램이 연예인과 일반인의 만남, 또는 실제 연예인 커플의 일상을 주로 관찰해왔다면, 최근 방식은 일반인 남녀들이 주인공이 돼 서로에게 관심을 표하고 ‘썸’을 타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1970년대에 공개 맞선 프로그램이 등장한 적이 있었으나 가장 많이 알려진 제1세대 연예 예능방송은 1994년에 방영된 <사랑의 스튜디오>다. 이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사랑의 작대기’다.

 

남녀가 각각 4명씩 출연해 게임과 대화를 하고 난 뒤에 ‘사랑의 작대기’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지목하여 선택한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던진 ‘사랑의 작대기’가 서로에게 향하고 있으면 커플이 된다. 남녀 네 쌍 모두 커플로 맺어지는 놀라운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사랑의 작대기’ 모두 일치하지 않아 단 한 쌍의 커플이 맺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작대기를 몰려 받는 사람이 있고, 단 한 명의 작대기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의 작대기’ 진행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마음에 드는 사람 한 명만 선택하면 된다. 나도 그랬고, 어렸을 때부터 ‘사랑의 작대기’를 기대 반 불안 반으로 봤던 사람들은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사회에선 ‘모노가미(monogamy: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이다. 모노가미가 문명사회의 이상적 결혼제도로 정착된 이래 법률과 윤리의 보호를 받는 유일한 성 행동은 부부간의 육체관계이다. 배우자의 외도는 비윤리적이고 부정한 행위로 인식된다. 간통죄가 폐지될 때까지 간통은 위법 행위로 이혼 사유가 되었고,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만약 단체 맞선에 참가한 사람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두세 명 선택한다면 이건 잘못된 행동일까? 일부일처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파트너를 복수로 선택한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한다. 또, 그들은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폴리아모리스트(polyamorist)는 여러 사람과의 다양한 관계로 삶을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여러분은 혹시 ‘폴리아모리(polyamory)또는 ‘폴리아모리스트’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지만, 폴리아모리는 상대방을 독점하지 않고 다자간에 사랑을 나누는 형태를 말한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집단으로 활동하며 해당 집단 안에서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물론, 이들은 정신적 유대감 형성에 중점을 두는 관계를 지향한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함께 아이를 기르기도 한다. 폴리아모리는 독점적인 일대일 관계를 주축으로 형성된 연애와 일부일처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일부일처제를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연애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성별과 나이에 따라 위계를 만들지 않고 평등한 관계를 이루려는 노력과 막힘없는 의사소통을 추구한다.

 

《폴리아모리 :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해피북미디어, 2018)은 폴리아모리의 탄생 배경과 폴리아모리 특유의 문화를 설명하고, 미국 폴리아모리스트들의 다양한 삶을 소개한 책이다. 미국 같은 경우 1990년대부터 폴리아모리를 공론화하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폴리아모리 비영리단체 중 하나인 ‘러브 모어(Love More)’는 1994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일본의 인류학자. 저자는 14개월 동안 미국 폴리아모리스트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그들의 일상생활을 조사했다.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폴리아모리스트의 특징은 ‘백인’, ‘중산계급’, ‘고학력’이다. 이 세 가지 특징에 해당하지 않는 폴리아모리스트도 있다. 폴리아모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만큼 인종, 계층, 종교 등에 구애받지 않는 폴리아모리 공동체가 등장할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폴리아모리를 ‘스와핑(swapping)’, ‘난잡한 관계’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폴리아모리는 상호 간 합의를 통한 평등한 생활을 실천한다. 폴리아모리스트에게도 독자적 윤리가 있으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폴리아모리로 볼 수 없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여러 명의 파트너에게 자신의 교제 상황을 숨겨선 안 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숨기는 것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폴리아모리 문화에 어긋난다. 폴리아모리스트도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교한 성 윤리 기준을 갖고 있으며 성병 혹은 임신을 피하고자 콘돔을 반드시 사용하며 정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폴리아모리스트는 폴리아모리 문화 및 생활 방식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폴리아모리 매뉴얼’을 만들어 공유한다. 폴리아모리스트들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매뉴얼은 실생활에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파트너에 대한 질투, BDSM 관계 문제, 양육 문제 등)를 대처하는 지식을 제공한다.

 

저자가 만난 폴리아모리스트들은 자신에 대해 솔직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지 폴리아모리스트 부부의 모습도 일부일처제 부부와 거의 비슷하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가끔 자신을 소홀하게 대하는 파트너의 행동에 질투심을 느끼곤 한다. 폴리아모리스트 부부싸움도 ‘칼로 물 베기’다. 그렇지만 그들은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불편한 상황을 피하지 않으며 파트너와 함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폴리아모리는 다자간의 합의를 전제로 한 사랑 방식이다.

 

보부아르“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성(gender)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보부아르의 명언을 빌리자면 사랑 또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인식은 근대 이후 시작되었다. 일부일처제는 근대부터 시작된 사회제도이다. 폴리아모리가 말해주는 진리는, 일부일처제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부일처제도 그렇고 폴리아모리 역시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Trivia

 

* 러빙 모어의 폴리아모리 조사에 따르면 보면 폴리아모리스트이면서 동시에 BDSM 실천자인 사람의 비중은 약 30%다. (177쪽)

→ ‘보면’이라는 표현을 빼면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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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07-0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리아모리라.. 흥미롭습니다. 제 입장에서만 보자면 아무래도 독점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내 남편을 다른 사람과 쉐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부디 내 남편도 같은 생각이길 바라며 ㅋㅋㅋ

cyrus 2018-07-06 07:33   좋아요 1 | URL
폴리아모리스트도 질투심을 느껴요. 파트너가 다른 파트너를 더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질투하는 것이죠. ^^;;

북깨비 2018-07-06 07:55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저는 폴리아모리스트를 했다간 이 파트너 저 파트너 질투만 하다가 세월 다 보내겠군요. ㅋㅋㅋㅋ 🤣 다른 사람의 폴리아모리를 딱히 반대할 건 없지만 그래도 자녀의 양육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모노가미가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2018-07-05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6 07:39   좋아요 0 | URL
그래서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

sprenown 2018-07-05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결혼제도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지만 그나마 본능과 이성의 타협의 선물이니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8-07-06 07:44   좋아요 0 | URL
결혼제도의 정착에 영향을 준 ‘본능‘과 ‘이성‘이 남성 중심 사고가 반영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내는 남편의 부속품으로 취급받았고,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는 가부장적 권위를 남성의 본능으로 정당화했어요.

AgalmA 2018-07-0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노가미가 쌍방의 합의이고 폴리아모리는 다자간의 합의라는 차이가 있을 뿐 어느 것이 옳다라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적정한 합의란 게 참 어려운 문제라... 육아, 양육에 있어 모노가미가 더 사회에 안정적이라는 판단 하에 정착된 것이라고 봐야겠죠. 예전처럼 첩의 자식도 같이 사는 사회도 아니니.... 개인의 정체성↑, 유교적 가부장제, 대가족 경향이 허물어지면서 지금은 폴리아모리 가족 제도가 필요해진 시점이긴 한 거 같습니다. 여전히 남성쪽 양육 책임의식이 의심스러운 게 걸림돌 아닌지 싶군요.

cyrus 2018-07-06 08:10   좋아요 0 | URL
이 책에 폴리아모리 가족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폴리아모리 가족 유형이 다양해요. 대가족 유형이 있고, 혼자 사는 폴리아모리스트도 있어요. 폴리아모리스트의 삶도 애로사항이 많아요. 양육 문제도 그 중 하나인데요, 여러 사람이 아이를 돌봅니다. 만약 파트너 A가 자식을 돌보지 못하면 B가 대신 돌봅니다. 흑인 가족이 아이를 돌보는 방식과 유사해요. 그러니까 혈연 관계가 아니더라도 파트너의 자식을 돌보는 거죠. ^^

페크pek0501 2018-07-08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회에 살면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습니다.

고 마광수 교수의 글이 생각나네요.
˝내가 보기에 결혼제도는 마땅히 없어져야만 할 악이다. 굳이 둘이 살려면 계약동거가 차라리 낫다. 그러나 프리섹스의 실천만이 인류를 권태와 가학의 질곡에서 구해줄 수 있다.˝(p22)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라는 책에 있는 글입니다.

cyrus 2018-07-08 17:31   좋아요 0 | URL
BDSM(속박, 규율, 사디즘, 마조히즘)을 지향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어요. 세상을 넓고 성적 지향은 다양합니다. ^^
 

 

 

이 시대의 흑인 여성은 위험하다. 그녀들은 인종적 억압에 성적 억압까지 중첩된 이중의 억압 속에서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 흑인 여성이 처한 문제에 민족주의 문제까지 겹친다면,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인권 존중을 호소했던 흑인 민권 운동 조직 내부에서조차도 흑인 여성 억압은 항상 있었다. 1960년대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했던 흑인 여성들은 흑인 남성들과 함께 시민으로서 살 수 있는 평등권을 획득하기 위해 함께 투쟁했다. 그러나 흑인 여성들은 흑인 공동체 내부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억압인 성차별을 인식했다.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의 가부장적 억압은 인종차별주의와 비슷한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 재키 플레밍 여자라는 문제(책세상, 2017)

* [절판] 레이철 홈스 사르키 바트만(문학동네, 2011)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 [절판] 벤자민 콸스 미국 흑인사(백산서당, 2002)

    

 

 

하나의 사회집단 안에서 대부분 남성은 기득권이며 통제와 지배에 집중한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 질서가 확립되면서 여성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지식 인증체계가 전제하는 이성적 존재기준은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남성 편향적일 수밖에 없고, 여성의 경험을 왜곡하거나 배제한다. 19세기 백인 남성 지식인의 경우 흑인 여성은 머리가 작고 당연히 지능도 낮다는 걸 입증하려 했다. 사르키 바트만(Saartjie Batman)은 남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끌려간 뒤 런던에서 반라의 차림으로 춤추고 노래하면서 아프리카 희귀종으로 전시됐다. 죽은 뒤에는 뇌와 생식기가 박제돼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에 진열됐다.

 

필리스 위틀리(Phillis Wheatley)는 아프리카계 흑인 출신 시인이다. 흑인 비평가들은 그녀의 시가 노예제도에 대한 저항 의식이 드러내지 않았다고 비판했지만, 그녀는 시를 통해 흑인 차별 문제와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언급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자신들이 창간한 잡지에 위틀리의 시 몇 편을 공개해서 노예제 폐지 여론의 불씨를 댕겼다. 그런데 위틀리의 시집이 발표되었을 때 총 열여덟 명의 남성 지식인들이 그녀의 재능을 검증하려고 했다.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지식인 집단 또는 학문 공동체는 흑인 여성은 열등하다는 편견이 있다. 백인 남성 지식인들은 자신의 인종적 편견을 기본적이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기준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그들만의 기준때문에 흑인 여성의 새로운 주장 또는 특출한 재능은 예외로 취급되거나 가차 없이 외면받는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백인 남성의 기준으로 설명되는 세계와 그들의 통제 방식에 대항하기 위해 흑인 여성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식을 체계화하고 드러낸다. 그러나 지식인 집단에 소속된 몇몇 흑인 여성 학자들은 흑인 여성에 대한 백인 남성 지식인의 통제 방식에 동조하기도 한다.

 

 

 흑인여성 학자가 학계에서 인정하는 자격을 갖춘 이후에 흑인여성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려고 하면, 그녀는 대부분의 흑인여성을 배제하고 폄하하는 체계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하라는 압력에 부딪힌다. 흑인여성과 같은 외부인 집단이 엘리트 백인남성을 비롯한 내부인 집단의 특권을 인식할 때, 권력자들은 외부인을 지속적으로 배제하는 동시에 외부인들이 절차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안전한외부인 몇몇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권력자들은 지식인증절차에서 대다수의 흑인여성을 배제하기 위해 소수의 흑인여성에게 지식인증제도 내부의 자리를 허락하고, 이들에게 학계와 사회 전반이 공유하는 흑인여성의 열등함을 가정하고 작업하도록 권유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419~420)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종속된 지식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서구의 지식 인증체계에 종속된 소수의 흑인 여성 학자들이 흑인 여성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데 한몫했다고 지적한다. 흑인 페미니즘을 종속된 지식이라고 명명하는 그녀의 입장은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비판한 것이다. ‘종속된 지식이 된 페미니즘은 비단 흑인 페미니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페미니즘 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시기로 알려진 일제 강점기에도 종속된 지식으로 변질한 페미니즘이 있었고, 여성 해방에 대한 희망을 품은 일부 여성 지식인들은 일본의 조선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

    

 

 

 

 

 

 

 

 

 

 

 

 

 

* 정운현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인문서원, 2016)

*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책으로보는세상, 2011)

    

 

 

 

 

 

 

 

 

 

 

 

 

 

 

 

* 김재용 외 친일 문학의 내적 논리(역락, 2013)

  [이 책에서 필자가 참고한 글] 이선옥 여성해방의 기대와 전쟁 동원의 논리 : 여성의 친일 작품과 논설이선옥 우생학과 제국주의의 성정치 : 채만식의 여인전기와 이기영의 처녀지』」

    

 

 

일본이 시작한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0년대에 우리나라 여성 박사 1호인 김활란 이화여전(현 이화여자대학교) 교장은 친일 잡지에 조선 여학생에게 징병을 독려하는 논설을 발표했다. 김활란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여성계 민족단체 근우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친일 인사로 돌변했다. 그녀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가정의 개선과 부인 교화 운동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 간담회에 참석했는데, 그 모임을 주도한 단체는 친일 여성단체였다. 이밖에도 김활란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의 주요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강연과 방송을 통해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을 옹호했다.

 

친일 문학의 내적 논리 (역락, 2013)에 수록된 여성해방의 기대와 전쟁 동원의 논리 : 여성의 친일 작품과 논설우생학과 제국주의의 성정치 : 채만식의 여인전기와 이기영의 처녀지』」는 일제 강점기 여성 지식인들이 남긴 논설을 근거로 친일 논리를 분석한 글이다. 이 두 편의 글을 쓴 이선옥은 여성 지식인의 친일 행위가 여성 해방에 대한 기대감과 일본 제국주의 논리가 결합하면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김활란뿐만 아니라 시인 모윤숙, 한국 근대 여성주의 운동가로 평가받는 박인덕 등의 여성 지식인들은 여성해방론을 주장했으나 일제의 황국 신민 정책(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의 신하가 되는 것)여성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할 기회라고 파악했다. 이 세 사람의 여성해방론, 즉 페미니즘은 일제 논리에 종속된 지식으로 전락한다. 친일 여성 지식인들은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자식을 낳는 군국의 어머니를 예찬했으며 그렇지 못한 조선 여성을 열등한 여성으로 규정했다. 안타깝게도 친일 여성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친일 행위가 조선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종속된 지식이 된 페미니즘은 여성 운동사의 오점이자 흑역사. 가끔 페미니스트는 그들이 직면해야 할 다양한 여성 억압 논리(가부장제, 군국주의, 민족주의, 계급, 인종차별주의, 성소수자 차별 등)에 자연스럽게 동조할 때가 있다.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불편하더라도 페미니즘 내부의 비판과 성찰이 요구되어야 한다. 여성 운동가, 페미니스트의 과오를 비판하는 것은 여성 운동의 분열을 조장하여 페미니즘의 진정한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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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페미니즘×민주주의
정희진 외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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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요구되고 있지만,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견고한 분야에선 여전히 여성의 사회 참여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페미니즘 논의가 주목받으면서 이전보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요소는 많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여성은 동등한 존재로서가 아닌, ‘남성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인식 역시 뿌리 깊게 남아 있기도 하다. 따라서 제도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하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성보다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비롯해 고용조건 개선, 권익 · 지위 향상 등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현안이 남아 있다.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 사회참여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에의 참여가 특히 중요하다. 하지만 여성 공천 할당제는 선거 공천 때마다 매번 반복돼 왔던 문제이지만 실제로 현실화하지는 못했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시도지사 후보로 등록된 이 중 여성은 6명에 불과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한 여성 후보는 35명이다.[1] 6·13 지방선거는 집권 여당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여성의 자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불어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 여성을 공천하지 않았고, 기초단체장도 고작 11곳에 후보를 내 7명이 당선됐다. 선거 과정에서도 여성 후보들을 향한 ‘혐오’의 시선은 일상화돼 있다.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녹색당 신지예 후보의 선거 벽보를 한 남성이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남성은 페미니스트 후보가 당선되면 남성의 일자리가 빼앗길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선거 벽보를 훼손했다고 진술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젠더는 일상생활부터 국가정책, 사회운동, 지식사회에 이르기까지 가장 첨예한 논쟁 주제 중 하나다. 페미니즘을 모르면 인간과 사회 현상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남성 중심적 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문제는, 미투(#MeToo) 이슈에 대한 상반된 반응에서 보듯이 젠더 이슈 인식이 남녀에 따라 극심한 격차를 보인다는 점이다. 여성 문제 인식에 대한 남성들의 문화 지체 현상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도 왜 우리 사회에 변화가 없을까. 젠더 이슈는 정치에서 늘 주변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문제를 다른 사회적 문제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는 인식은 우리나라 정치권의 젠더 감수성(gender sensibility) 수준을 보여준다.

 

이번에 나온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교유서가, 2018)오랜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얼룩져왔던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적 지형을 7명(정희진, 권김현영, 손희정, 한채윤, 서민, 손아람, 홍성수)의 페미니즘 시선으로 바라본 책이다. 지난해에 열린 <한겨레21> 페미니즘 강연 내용을 엮은 것이다. 정희진은 가부장제 사회의 남녀 관계를 ‘톰과 제리’로 비유한다. 톰과 제리는 한쪽이 불행해야 한쪽이 행복해지는 적대적 모순 관계이다. 고양이와 쥐가 함께 어울리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고양이 톰이 ‘남성’, 생쥐 제리가 ‘여성’이라고 한다면 남성과 여성은 섹스하는 적대적 모순 관계이다. 남녀는 서로 사랑하고 결혼해서 가족을 구성할 수 있지만, 힘과 위계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힘들고 불행한 삶에 직면한다. 그렇기 때문에 젠더는 정치적 문제가 된다. 젠더는 경험상 개인적이고, 사소한 문제일지 몰라도 그것의 생성과 작용은 결코 개인적이지만은 않다. 페미니스트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The personal is political)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정희진은 문재인 정부의 유일한 약점이 ‘젠더’라고 지적한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와 ‘촛불 혁명’을 시대정신으로 해서 집권했다. 하지만 일부 진보세력은 여성 문제, 성소수자 문제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남성 연대의 도덕적 우월감은 여 · 야, 보수 · 진보 할 것 없이 공고하다. 진보 정권도, 보수 정권도 그랬다. 젠더 이슈는 뒷전이다. 쟁점화가 안 되고 별 필요 없는 것처럼 그냥 묻혀버린 것이다. 권김현영은 80년대 민주 세력이었던 ‘40대 서울 남성 연대’가 한국 사회의 기득권이 되면서 젠더 이슈를 외면했다고 진단한다.

 

페미니스트 문화비평가 손희정은 ‘남성 검사(檢事)’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드러낸 왜곡된 남성성과 남성연대를 분석한다.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검사는 도덕성과 정의감을 지킬 줄 아는 모범적이고 훌륭한 남성으로 묘사된다. 불합리한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는 정의감을 가졌고, 음모론을 파헤치는 ‘시민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영화 속 남성 검사는 ‘나만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나르시시즘이 반영되어 있다. 이 뻔뻔한 남성의 나르시시즘은 자신을 사회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다른 문제’, ‘다른 목소리’를 배제한다.

 

보수 정치인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발언을 하나의 정책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고, 당사자인 성소수자들은 모욕감과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도 성소수자의 인권은 계속 ‘나중으로’ 밀리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은 인권의 보편성이 아니라 이해관계의 특수성에 의해 ‘나중의 일’로 치부된다. 한채윤(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은 성소수자 차별 및 혐오를 합리화하는 종교(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와 정치의 정경유착에 주목한다. 법학자 홍성수는 혐오표현을 소수자집단에 대한 혐오에 근거해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혐오표현은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이 감정 차원을 넘어 현실 세계로 드러난 문제이다. 홍성수는 혐오표현의 문제에 대응하고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은 민주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고 말한다.[2]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도는 한 사회의 시민의 눈높이와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나타낸다. 어느 나라의 민주주의든 그 성숙도는 여성과 소수자를 대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한국의 페미니스트 7인은 일상의 여성 문제와 성소수자 문제를 우리 사회 최대의 정치적 상황으로 여긴다. 그들의 이러한 사유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과학자의 비판 정신과 결부돼있다. 그들이 끝도 없는 의문부호를 던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젠더 권력은 왜 현실 정치로 사소화되는가(정희진)”, “왜 남자들은 여성혐오를 하면서까지 여자들을 침묵시키려고 하는가(서민)”, “대중문화 속 여성은 왜 수동적일까?(손아람)결국엔 날 선 질문들의 끝을 독자에게 겨눈다. 남성만 진보가 아니고 여성과 성소수자와 수많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진보를 말했다. 우리는 사실 미완의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는 그간 남성, 가족, 이성애 중심의 ‘정상 시민’이 주도한 운동에 머물렀던 민주주의의 외연을 넓혀줄 것은 물론 넓게는 페미니즘 및 성소수자 운동에서 사적인 생활 영역과 공공 영역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실마리를 준다.

 

 

 

 

[1] 「6‧13 지방선거 여성 정치인 유리절벽 여전…광역·지자체 장은 남성 중심」 (여성소비자신문, 2018년 6월 25일)

 

[2] 홍성수의 강연 내용은 그의 저서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 2018)에 나온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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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8-07-0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www.youtube.com/watch?v=bGaG4pR0GWE

제가 페미니즘을 비판하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비판적 시각이 많더군요.

마립간 2018-07-01 14:42   좋아요 0 | URL
https://www.youtube.com/watch?v=IooGFjEyR3M
https://www.youtube.com/watch?v=EBzEQaRzUTY

추가 동영상입니다.

cyrus 2018-07-02 12:01   좋아요 0 | URL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내부 비판’과 성찰을 통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처음으로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페미니즘을 비판합니다. “나는 알고 있는데, 너희 페미니스트들은 그것도 모르고 있냐”, “니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틀렸으니 니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야!”는 식으로 공격하니까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진짜 의미가 변질되고,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됩니다. 세 편의 동영상을 다 봤는데요, 이미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인지한 페미니즘의 문제점이 나옵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왜곡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마립간 2018-07-02 12:09   좋아요 0 | URL
어떤 부분이 왜곡된 내용입니까?

이미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인지한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남성이 지적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cyrus 2018-07-02 12:18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두 번째 댓글의 첫 번째 동영상 50초 화면에 보면 ‘여성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해He for she!!’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그렇게 생각한 페미니스트가 있겠죠. 그렇지만, ‘He for she’는 여성을 위해 남성에게 강요하자는 뜻의 구호가 아니에요. 이 동영상을 만든 사람이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했고, 페미니즘을 비판했다면 ‘He for she’의 원래 의미를 알려줬어야 했어요.

그리고 제가 이미 페미니즘이 인식한 문제에 대해서 ‘남성’이 지적하지 말라고 언급했습니까? ‘페미니스트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을 ‘남성’으로 보셨나요? 저는 ‘페미니스트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남성이라고 상정하지 않았어요.

마립간 2018-07-02 12:26   좋아요 0 | URL
첫 번째 지적은 받아들이겠습니다.

두 번째 답변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제가 이미 페미니즘이 인식한 문제에 대해서 ‘남성’이 지적하지 말라고 언급했습니까? ; cyrus 님에 대한 반문이 아니라, (여성)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반문입니다. 보다 일반화하면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남녀를 불문하고 용인하지 않는다‘가 제 판단입니다.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이 종교화하고 있다고 했었죠.

‘He for she’를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에는 동의하시나요?

cyrus 2018-07-02 12:38   좋아요 1 | URL
저는 페미니즘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남성은 페미니즘을 비판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땐 워마드의 존재를 몰랐고, 시간이 좀 지나서야 워마드를 알게 됐어요. 마립간님이 말씀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남성을 허용하지 않는 워마드를 뜻하겠군요.

지난달에 워마드를 비판하는 글을 썼어요.
http://blog.aladin.co.kr/haesung/10166605

제가 페미니즘 강연에 참석해서 배운 내용, 페미니즘 독서 모임 활동을 하면서 들은 내용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페미니즘의 종교화’라는 마립간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워마드의 종교화’인데, 페미니스트라면 짚고 넘어 가야 할 문제입니다. 워마드의 성소수자 혐오 및 차별에 대해서 지적하는 여성주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마립간님이 언급한 동영상에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페미니스트’를 지적한 장면이 있는 걸로 압니다.

마립간 2018-07-02 13:41   좋아요 0 | URL
의견 감사합니다.

요즘 제가 알라딘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싶어 잘 방문하지 않지 않아 cyrus 님의 워마드에 대한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의견 교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