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란스 기획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권김현영 엮음 / 교양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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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정말 심각해”라는 생각으로 대충 반응하고 넘겨버리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 너무나도 쉽게 뻔한 이야기로 치부되는 문제 중 하나가 ‘성폭력’이다. 우리는 이 ‘성폭력’이 끔찍한 범죄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 각 영역으로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개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쉽지만은 않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문제, 피해자와 지원자들만이 가해자를 상대로 싸우는 문제, 즉 일반 시민에게는 상관없는 문제로 설정되자마자 개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관심 두지 않을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무관심은 타인을 배제하는 행위가 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 ‘관심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될 수도 있다. 무관심하고 침묵하면서 그 문제에서 멀어져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또 하나의 권력이다. 이런 상태에 오랜 시간 지속한다면 개인의 분별력과 사유능력이 상실돼 부조리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말했다.

 

불특정 여성을 공격하거나 강간한 범죄를 ‘그들(피해 당사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은 강남역 10번 출구에 ‘나는 너다’, ‘나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등의 문장이 적힌 포스트잇을 붙였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우리(여성)’의 문제로 인식되었고,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 문제라고 인식했을 때 피해자의 ‘정체성’을 우리와 동일시하게 됐지만 피해 자체는 여전히 타자화하는 우를 범했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 약칭 ‘피가페’)은 성폭력 문제의 현재 담론의 지형을 살펴보고 미투 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책이다. 성 문화 연구 모임 ‘도란스’가 세 번째로 기획한 책이다(첫 번째 책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두 번째 책은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그 출발로 권김현영‘피해자 중심주의’‘2차 가해’라는 용어의 한계들을 살핀다. 그녀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 편을 들고, 피해자를 위해 폭로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용된 ‘피해자 중심주의’의 페미니즘으로는 성폭력 문제를 ‘권력과 폭력’의 문제로 볼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피해자의 윤리-정치적 결단은 공동체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성폭력을 관리하고 해결하려는 절차 속에서 피해자는 오직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로서의 역할만을 요구받는다.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닌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라는 역할’ 속에서 피해자는 오직 피해자의 권리만을 특별하고 이질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처럼 비치게 된다. 나는 이것이 바로 권리의 형식을 띤 타자화라고 생각한다. (권김현영, 63쪽)

 

 

지금까지 페미니즘은 성폭력 근절을 위해 ‘분노하고 폭로하는 정치’를 반복했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되는 목록을 늘리면서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했다. 하지만 점점 피해자의 폭로가 공론화가 되면서 피해자는 ‘싸우는 사람’이기보다 ‘보호받을수록 고통스러운 사람’으로 전락했다. 페미니즘은 피해자를 편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사건 해결에 목소리를 내면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피해자에 연대하는 사상이다. ‘강간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누가 더 고통받는가’ 식으로 경쟁하는 길로 빠진다면 성폭력 문제 해결에 대한 논의를 더 어렵게 만든다.

 

‘2차 가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2차 피해’라는 용어를 살펴봐야 한다. 2차 피해는 피해자가 1차 피해(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부당한 상황을 뜻한다. 대표적인 ‘2차 피해’ 사례가 피해자의 증언을 불신하고, 소극적으로 성폭력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태도이다. 그런데 2차 피해는 성폭력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부추겼다. 가해자로부터 법적으로 공격받는(무고죄, 명예훼손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2차 피해’ 대신 ‘2차 가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김현영은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2차 가해’를 무분별하게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2차 가해’는 ‘가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형성한다. 그렇게 되면 공론장에서 주목해야 할 1차 피해, 즉 ‘성폭력’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 만다. 따라서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는 피해자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반 성폭력 운동 전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정희진도 피해자를 타자화하는 페미니즘 정치학을 비판한다. 그녀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피억압자 또는 피해자로 규정하는 반응이 여성 자체를 ‘남성 권력의 피해자’로 한정된다고 지적한다.

 

 

피억압자 스스로 피해자화는 경우, ‘피해자화’는 여성을 본질적으로 남성 권력의 피해자라고 보고 여성에게 그에 맞는 이미지와 역할을 요구한다. 또한 ‘피해받은 불쌍한 여성’은 여성의 존재성을 남성과의 관계로만 한정하는 방식이다. 남성 권력은 여성이 피해 상태에 머물기를 원한다. 피해 여성만이 남성을 권력의 주체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정희진, 223쪽)

 

 

오용된 피해자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권김현영과 정희진의 입장 모두 여성의 피해 경험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의 피해 경험을 ‘폭로’하고 ‘발견’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페미니즘의 진짜 역할이고, 미투 운동 이후 우리 사회가 실천해야 할 자세이다.

 

이 책의 2장은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기록하고, 관련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힘겹게 투쟁해온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의 지난한 여정을 담고 있다. 3장(한채윤)4장(루인)퀴어 페미니즘에서 제기하는 성소수자 관련 쟁점들을 다룬다. 앞서 《피가페》가 ‘미투 운동 이후’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 책이라고 말했지만, 페미니즘과 퀴어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1] 그리고 성 소수자도 같은 성 소수자 또는 비(非) 성 소수자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며 죽음을 부르는 ‘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성폭행을 경험한 레즈비언, 트랜스 여성도 미투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혹자는 페미니즘 책에 ‘성 소수자 문제’를 다룬 글이 두 편씩이나 있다는 점에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특히 성 소수자를 배격하고 오로지 ‘여성’을 위한 여성운동을 표방하는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 진영에 속한 독자라면 3, 4장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도란스’는 성 문화 연구 모임이다. ‘페미니즘 문화 연구 모임’이 아니다. ‘성(性)’에는 남성과 여성만 있는 건 아니다.

 

여성이 성적 피해를 보는 이유는 ‘복장’과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성이 갖는 권력과 폭력성 때문이다. 그리고 방관자가 그런 폭력성에 대해 침묵해왔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를 만들었다. 이런 위계적 관계와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피해자들의 저항을 어렵게 하고 가해자의 계획적 함정에 고스란히 빠져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든다.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런 모순된 구조를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1] 정희진은 성 소수자를 차별하고, ‘여성 순혈주의’만 고집하는 TERF를 에둘러 비판한다. 그러면서 ‘퀴어’가 빠진 페미니즘은 성립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페미니즘도 퀴어 이론도 결국 차별 받지 않고, ‘인간’으로 존중받는 삶을 위한 사상이다.

 

성적소수자와 이성애자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태도가 가부장제의 원리이다. 그래서 퀴어 정치는 페미니즘의 성립 조건이다. 이는 마치 계급이 젠더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퀴어는 인간의 성별을 양성으로 고정시키려는 가부장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젠더들이다. 젠더 환원주의나 ‘여성 순혈주의’는 옳고 그름을 떠나, 가능하지 않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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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팝니다 - 상업화된 페미니즘의 종말
앤디 자이슬러 지음, 안진이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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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점에 페미니즘 굿즈(goods)’를 사면 페미니즘 도서를 끼워 준다. 여성단체와 페미니즘 모임들은 티셔츠부터 에코백, 스티커, 배지 등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한다(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도 페미니즘 굿즈를 만들 예정이다). 페미니즘 도서가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르고, 여성단체 기부 · 후원 운동도 벌어지면서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말이 나왔다. 반 페미니스트들은 과 손잡은 페미니즘을 조롱하기 위해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원래 이 말은 메갈리아가 먼저 쓴 것이다. 메갈리아는 이 구호를 사용하면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페미니즘 굿즈 생산 및 후원 운동을 진행할 거라고 천명했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페미니즘 구호이다.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페미니즘은 돈이 된다자본과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 구호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공모자가 되지 않겠다는 페미니스트의 선언이라고 평가한다.[1]

 

손희정은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구호는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구호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가 페미니즘을 흡수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페미니스트라면 페미니즘을 팝니다(세종서적, 2018)을 반드시 정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페미니즘 열풍을 따져봐야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국의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앤디 자이슬러상업주의에 물든 페미니즘을 냉정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영화나 TV 프로그램, 언론, 광고 등 대중매체의 파급 효과가 불러온 오늘날의 페미니즘 열풍의 이면을 분석한다. 페미니즘 대중화에 힘입어 탄력받은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과거와 달리 세련되고 매력적인 여성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여권 신장을 표방하는 기업의 광고들이 등장했고, 할리우드에서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연예인들은 페미니스트라고 떳떳하게 선언한다. 엠마 왓슨UN 연설이 전 세계 페미니스트들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예인인지 불분명하지만) 한서희가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면서 페미니즘 굿즈를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거론된 사례들은 시장 페미니즘(marketplace feminism)’이라고 부른다.

 

시장 페미니즘에 익숙한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1980~90년대에 등장한 포스트페미니스트이다. 시장 페미니즘은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을 우선시하는 여성 운동에 관심이 많다. 그녀들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담배는 남성 흡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도 선택할 수 있는 기호품이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섹스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섹스하는 것도 여성 해방의 기치를 내건 페미니즘에 따른 선택이다.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여성의 외모를 부각하는 매력 자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개인의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 성형 수술을 선택한다.

 

포스트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선택하는 권리정도로 여긴다. 그녀들이 쟁취하고 싶은 여권(女權)’모든 여성이 가져야 할 권리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이다. 저자는 공익보다는 사익에 초점을 맞춘 포스트페미니스트와 그녀들이 지향하는 시장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어쩌다가 페미니즘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시장 페미니즘이 등장하게 된 것은 1980년대에 포스트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가 손을 잡으면서부터다. 기업이 주도한 시장 페미니즘속 빈 강정이다. 기업은 페미니즘을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했고, 상품 판매를 유도하기 위해 여성 친화적인 홍보를 펼쳤다. 시장 페미니즘은 여성 운동 이후로 경제적 지위를 가지게 된 여성을 소비자로 격상시키는 데 일조했다. 시장 페미니즘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2세대 페미니즘의 정의와 정반대이다.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선배들의 여성운동을 구닥다리로 취급했으며 개인의 선택이 성공적인 것이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시장 페미니즘은 정치와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개인의 자아실현 및 성공에 초점을 맞춘 ‘쉬운 페미니즘이다.

 

시장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 속상하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페미니즘은 유행어가 아니다. 그런데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운동을 지지하거나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연예인, 심지어 협찬을 받아 페미니즘 굿즈를 사용하는 연예인에게 열렬히 환호한다. 저자는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반응을 페미니스트의 오류라고 말한다. 사실 오류보다 착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인기 여성 아이돌이 저는 페미니스트예요!”라고 말한다면 아이돌 팬들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질까? 천만에!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 물론, 몇몇 팬들은 자신이 동경하던 연예인을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 속 페미니즘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기만 하다. , 연예인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한낱 유행이 될 수도 있으며 연예인 페미니즘은 여성운동에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연예인 페미니스트에게만 몰리는 대중 및 언론의 시선은 심각하고, 지루한페미니즘의 문제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앤디 자이슬러는 페미니즘의 휘슬 블로어(whistle-blower)’. 그녀는 페미니즘에 문제가 있을 때 휘슬(호루라기)을 불어 잘못을 바로 잡아준다. 페미니즘을 팝니다는 페미니즘의 가치를 변질시킨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공모자가 된 페미니즘도 비판한다. 따라서 이 책은 방만한 신세대 페미니즘,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방관한 2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내부 비판적 성격이 강하다. 페미니즘은 쉬운 학문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수적인 이름 안에는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페미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쉽고 재미있는 시장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페미니즘은 어려워져야 한다.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고 가벼운 페미니즘은 없다.

 

 

 

 

 

[1] 손희정, [청춘직설-페미니즘은 파워가 된다], 경향신문, 20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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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8-04-13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 어려워져야(공부해야하는)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요.

cyrus 2018-04-14 13:47   좋아요 1 | URL
‘쉬운 페미니즘‘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돈벌이로 볼 수도 있거든요.

2018-04-13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4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4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8-04-13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공부다‘새삼 느껴지네요! 사실 페미니즘은 우리의 삶에 모두 연결되어 있지요^^.

cyrus 2018-04-14 13:55   좋아요 0 | URL
‘책에 있는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일도 좋지만, 더 중요한 건 ‘세상에 있는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책 속의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완전히 똑같지 않아요. 요즘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각각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또 사람들(페미니스트)을 만나 보면 책에 보기 힘든 페미니즘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AgalmA 2018-04-14 1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굿즈애호가로서;; 그런 상품들이 관심을 끄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운동이든 가벼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섣부름과 무모함 같은 반대급부는 있기 마련이지요... 자기 생각과 목소리를 크게 내는데 자신 없는 사람들은 그런 대체, 상징물로라도 표현하고 싶어 하는데서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다 명철한 지식과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하기 어렵죠. 그런 요구는 자칫 엘리트주의식 운동이 될 수도 있고요. 오히려 이렇게 쉽게 오픈하는 환경이 조정하기 더 쉽다고 생각해요. 암묵적이고 경직된 분위기에서는 변화가 더 어렵고, 깊이와 행동이 같이 부응하기도 쉽지 않으니^^;

자본 시장이 페미니즘을 이용하고 있는 건 저도 인상 찌푸려지지만 양적인 저변이 확대되어야 질적 변화도 기대해볼만 한 거 아니겠습니까.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도 그러한 움직임에서 이만큼 성장한 거라고도 생각하고요.

cyrus 2018-04-14 14:02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좋은 목적으로 페미니즘을 널리 알리는 일이라면 굿즈 제작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이제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 즉 겉과 속이 다른 ‘자칭 페미니스트들‘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페미니즘이 왜곡될 수 있거든요. 제가 페미니즘 독서 모임 멤버들과 함께 강연 홍보를 한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에게 페미니즘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그 사람은 ˝유아인이 말한 페미니즘이 아닌가요?˝라고 말했어요. 저는 이런 반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보기에 유아인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 어렵고, ‘연예인이 말한 페미니즘‘은 반짝 반응으로 그칠 수 있어요.

페크pek0501 2018-04-15 0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끝문장 -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고 가벼운 페미니즘은 없다.˝
진실에 담겨 있는 아픔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공부해 나간다면 깊은 공부가 될 것 같아요.

말로만 페미니즘을 강조하고 행동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입니다.

cyrus 2018-04-15 11:38   좋아요 0 | URL
제가 행동을 안 해서 페미니즘 독서모임에 활동하게 됐어요. 대구에도 각종 페미니즘 관련 강연이나 집회가 펼쳐져요. 강연이나 집회에 가면 페미니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확실히 책에서 느끼는 페미니즘과 비교하면 느낌이 다릅니다.

꽃다지 2018-04-22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대 딸이 페미에 빠져 있는데, 이론적 바탕없이 SNS 상에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인 양 말끝마다 토를 달고 지적질입니다. 집에 있는 또하문이나 이프 등 책들을 좀 읽어보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합니다. 자기가 아는 게 진리라는 듯, 하지만 생각과 행동은 너무 이기적이고 공감 능력 없고,한숨 나오게 합니다.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귀막고 입닫고 하는 모습이 너무나 걱정스럽습니다. 페미니즘이 하나의 유행이 아니라 삶의 자세이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와의 연대의식으로 발전하길 바랍니다.

cyrus 2018-04-25 14:12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야 바우솔님의 댓글을 확인했어요. 90년대부터 여성 운동에 헌신한 여성주의 운동가의 페미즘과 소위 ‘영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젊은 세대의 페미니즘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대 차이가 있듯이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세대 차이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특정 여성 문제를 바라보는 구세대 페미니스트와 신세대 페미니스트의 시선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대 차이의 간극을 조금씩 좁혀나가는 것도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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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는 평소 사랑하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던 중 진한 스킨십을 시도한다.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강제로 삽입 섹스를 한다. 남녀 간의 삽입 성교는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지만, 남성이 강제로 여성의 몸속으로 들어왔다면 ‘데이트 강간’이다. 어떤 남성들은 ‘데이트 강간’이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을 혐오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하며 과민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 용어는 데이트 중 생기는 강간의 개념으로 부부강간만큼이나 생소하게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단지 낯설다고 느끼며 외면하기엔 그 심각성이 만만치 않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이런 상황을 비관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속적인 피해자로 남게 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강간 피해자는 죄인 취급을 받는다.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은 강간 피해자는 두 번 세 번 운다. 검찰과 경찰 수사 과정에서 또 상처를 입고 재판 과정에서 또다시 모욕을 당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존심은 짓밟히고 인권은 파괴당한다. 심지어 가해자에게 협박까지 당한다. 강간 피해 여성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지속한다면 ‘강간 문화’라는 위험하고도 왜곡된 편견이 횡행하는 세상이 된다.

 

수잔 브라운밀러《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오월의봄, 2018)는 강간 피해 여성들의 참혹한 실상을 증언하기만 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강간이 ‘성적 본능’ 때문에 발생하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폭력성’과 ‘권력’에 의해 매개된 가해자의 고의적인 행동임을 입증한 책이다. ‘남성 연대(male bonding)는 물리적 폭력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실행하는 장이다. 여성을 강간하고 학대함으로써 남성은 ‘남성성’을 확인하고, 가부장적 권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든다. 그 폭력 행위가 여성을 유린하는 행위였던 만큼, 남성들은 그 행위를 실행하여 우월성을 가진다.

 

진화생물학인간의 행동을 진화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학문이다. 진화생물학에서 특히 논쟁이 격렬한 주제는 남녀관계 또는 섹스다. 대부분 진화생물학자는 “남성의 강간 본능은 진화의 산물이다”, “남성이 여성을 겁탈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다”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와 그의 정신분석학을 이어받은 심리학자들은 강간 피해 여성의 심리상태를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강간범이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은 강간범을 ‘성적 사이코패스’로 규정했고, 강간범이 심리치료를 받으면 과도한 성적 욕구가 제거된다고 믿었다. 마르크스와 남성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지적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전략을 모색했으나 여성을 불리하게 만드는 강간 문화를 문제 삼지 않았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를 폭로한다. 강간은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문제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이다. 저자는 성경(2장), 전시 강간(3장),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 인디언 여성 강간(4장, 5장, 7장), 동성 간의 감옥 강간(8장) 등 생생한 사례들을 해석하면서 이 문제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 권력의 문제이며 국가 · 민족 · 인종 등과 결합된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난제임을 드러낸다. 각종 강간 사건의 진행과정을 통해 가해자의 권위적 위치에 억눌려 피해와 비난을 감수하는 피해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1970년대 미국에서 강간 반대 운동이 확산하기 전까지 강간은 당연한 일상 문화(!)이거나, ‘남녀상열지사’로 미화되었다. 성경에서 묘사한 강간은 피해 여성을 소유한 가족,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서, 남성 가부장의 재산권 침해를 의미했다. 여성의 몸이 남성의 소유라는 인식 때문에 강간은 범죄로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다. 강간은 대개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만이 있을 때 발생하는 사건의 특수성(강간 사건의 증거는 대부분 형태가 없다)과 재판부의 남성(가해자) 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강간 사건을 법에 호소하는 경우 승소율이 매우 낮다. 경찰과 법원은 강간 피해 여성을 ‘방탕한 자’로 간주하여 이들을 의심하고 추궁한다. 심지어 피해 여성의 취약점을 노려 강간을 시도한 경찰들도 있다. 경찰은 ‘법의 권위를 대행하도록 사회가 인정한 직업’이다. 그런데 인권의식이 낮은 경찰은 가해자를 엄벌하기는커녕 피해자에게 진술을 강요하고 수치심을 들게 하는 질문을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2차 가해’가 벌어진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가 나온 지 삼십여 년이나 지났으나 강간 범죄는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피해자들은 ‘가해자’로 몰린다. 최근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강간 문화에 대해 질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런데도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미투 운동을 깎아내리는 남성들이 있다. 그들이 페미니스트와 미투 운동에 예민하고 유난스럽게 구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을 단순히 페미니즘에 반기를 드는 일탈 문제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구조도 살펴봐야 한다. 한국은 강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할 수 있는 아주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형성된 곳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고소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이 부조리리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성폭력 피해자를 모욕하는 강간 문화와 왜곡된 남성 우월주의 때문이다. 가해자의 죄의식을 무뎌지게 하는 이 몰상식한 강간 문화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1975년에 나온 책이다. 그렇다 보니 시대적으로 맞지 않거나 잘못 알려진 내용이 여럿 등장한다. 저자는 1장에서 ‘야생 상태에서 강간하는 동물’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가 출간된 이후부터 동물도 강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에 비판받은 저자는 서문에 진화생물학을 비판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저자는 아우구스트 베벨《여성론》(까치, 1990)을 참고하면서 중세 시대의 초야권(신부의 결혼 첫날밤을 소유하는 영주의 권리)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초야권은 ‘일종의 강간’이며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비정기적으로 초야권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초야권은 ‘중세 유럽의 악습’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초야권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박 입장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책 304쪽에 ‘방관자 효과’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 이야기가 나온다. ‘38명의 사람’이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고도 아무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진 50년 후, 이 사건이 모두 ‘언론의 왜곡 보도’로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제로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던 당시의 목격자 수는 6명이었으며 그중 2명이 신고를 했다.

 

책 306쪽에 잠깐 언급된 ‘로젠버그 사건’에 대한 역자의 설명이 빈약하다. 1953년 미국의 로젠버그 부부는 소련에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관련 비밀을 넘긴 혐의로 체포되었다. 부당한 재판으로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전기의자에 앉아 숨을 거두었다. 아인슈타인, 사르트르 등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교황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부부의 정해진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게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던 로젠버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역자는 주석에 ‘죄를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 없이 부부는 간첩죄로 사형당했다’라고 썼다. 후일 전직 KGB 요원의 증언에 따르면 남편은 산업정보를 제공한 간첩이었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그가 넘긴 정보가 원자폭탄을 만들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내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2016년에 로젠버그 부부의 자녀들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모친이 무죄임을 증명해달라고 청원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저자는 동성애자들이 동성애를 ‘마조히즘’으로 연관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낸다(406쪽). 그녀는 동성애자들이 강조하는 ‘마조히즘’이 동성 간 강간 문제의 본질을 회피할 수 있다고 봤다.

 

 

마조히즘적 요소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은 강제로 당하기를 원한다는 식의 믿음이 그렇듯, 경우를 가리지 않고 마조히즘을 가정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406쪽)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이 강제적 성행위를 선호한다고 볼 수 없다. 저자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동성애자는 ‘상대방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인 성행위를 강요하는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인식은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일부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입장과 유사하다.

 

282쪽에 오식이 있다. “범행 시간대는 보통 낮보다 밤히 선호된다.” ‘밤히’는 ‘밤이’의 오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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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0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11 10:05   좋아요 1 | URL
네, 성폭력은 피해자의 몸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삶,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파괴하는 잔인한 범죄입니다.

서니데이 2018-04-10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키티 제노비스 사건‘은 많이 알려진 내용이어서 간략하게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언론의 왜곡보도에 의해 실제와 다르게 잘못 알려졌다는 것은 잘 몰랐습니다. 리뷰를 읽고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그러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네요.
cyrus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18-04-11 10:07   좋아요 1 | URL
저도 최근에 ‘제노비스 사건의 진실’을 알았어요. 로젠버그 부부 사건도 그렇고요. 두 사건 모두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독자가 책에 적힌 내용을 의심하지 않으면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알 수 없게 됩니다. ^^

붕붕툐툐 2018-04-10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리뷰는 정성과 지식이 넘치네요. 존경스럽습니다.

cyrus 2018-04-11 10:10   좋아요 0 | URL
제 글에 쓸데없이 넘치는 게 너무 많아서 글 내용이 길어져요. 그래서 글을 읽기가 힘들어요. 솔직히 저도 제가 쓴 글을 읽지 않아요.. ㅎㅎㅎ

이하라 2018-04-1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간에 문화라는 단어가 더해지니 말도 아니게 섬찟해지는군요. 게다가 역사가 증거하기까지 하니... 데이트강간이라는 것도 인식을 못해왔었는데 심각한 문제임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cyrus 2018-04-11 10:11   좋아요 0 | URL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 각종 강간 피해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차마 읽기 힘든 내용들도 있습니다. 책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강간은 강간이다
조디 래피얼 지음, 최다인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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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프랑스의 배우 카트린 드뇌브와 미술평론가 카트린 미예 등 100명은 전 세계에 확산된 ‘미투 운동’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르 몽드」에 발표했다. 이들은 성폭행은 범죄지만, ‘남성이 여성을 유혹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투 운동이 남성들을 유혹할 수 있는 여성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공개서한은 비판에 직면했고, 카트린 드뇌브는 엄청난 비난 여론을 견디지 못하고 5일 만에 사과했다. 그녀는 사과문을 통해 자신도 ‘페미니스트’이며 1971년 낙태 처벌 반대 운동에 동참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 잘못된 생각에 근거한 엉뚱한 주장은 오히려 성폭행 피해자에게 악영향을 준다. 놀랍게도 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는 성폭행의 심각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성폭행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면식 강간)가 많다. 성폭행 피해 여성은 남성이나 성에 대해 공포증을 느끼면서 불안이나 우울증세, 죄의식, 자살 충동, 결혼생활에 대한 불안, 생활 부적응 등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 성폭행 피해 여성의 후유증이 이처럼 심각한데도 성폭행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하다.

 

 

* 많게는 전체 강간 신고의 50%가 의도적 허위 신고라고 단언한다. [1]

* 강간 피해 여성은 멍청하고 헤프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아서 강간당한 것이다. [2]

* 면식 강간은 문제가 아니라 성적 자유에 따르는 허용 가능한 위험이다. [3]

 

 

성폭력은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범죄이다. 성폭행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운 피해자에게 책망하는 것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피해자 가족들에게까지 정신적 상처를 준다.

 

여성 성범죄 전담 변호사인 조디 래피얼《강간은 강간이다》(글항아리, 2016)라는 책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편견들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강간 부정론자들은 강간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통계를 의심한다. 저자는 2∼8%에 불과한 허위 신고를 근거로 강간 통계의 신뢰성에 꼬투리 잡는 강간 부정론자의 주장이 강간의 위험성을 축소한다고 비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적 해방을 페미니즘 운동의 우선순위로 두는 페미니스트(성 해방론자)도 강간 부정론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성 해방론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은 주체적인 존재이다. 남성을 유혹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강간을 당하면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책임을 묻어야 한다. 성 해방론자들은 강간을 단순하게 ‘나쁜 섹스’로 치부한다. 이들의 주장은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부합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러나 성폭력 앞에 침묵을 강요받거나 숨죽여야 했던 ‘피해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는 데 일조하는 역효과가 생긴다.

 

저자가 인터뷰한 다섯 명의 피해자 모두 추악한 진실을 말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강간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조차 강간을 당한 피해 여성에게 오히려 성적으로 능동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냐, 옷을 야하게 입고 있지 않았냐, 위험한 곳에 일부러 혼자 있지 않았느냐 등을 따지며 강간 가해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판을 끌고 가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강간 가해자 편을 드는 사회적 편견과 가해자의 형량을 낮추려는 협잡꾼들 속에 피해 여성은 어느새 가해자로 몰린다. 이러한 ‘2차 가해’를 받는 피해 여성은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잘못한 사람은 가해자인데 피해자가 왜 협잡과 편견으로 수치심을 느끼고 고통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가. 《강간은 강간이다》는 성폭행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고, 그것이 피해자를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보여준다. 《강간은 강간이다》는 성폭행 피해 여성의 행실에 책임을 전가하고, 그녀들의 힘 있는 목소리를 조롱하는 우리 사회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책이다. 이 ‘거울 같은 책’을 무시하고, 책의 내용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설득해봤자 소용없다. 그들은 날 ‘페미나치 부역자’, ‘여자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남자를 배신한 놈’이라고 험악한 말을 하면서 조롱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약점이 부끄러워서 거울을 보지 않는다. 오로지 상대방를 대할 때 상대방의 약점만 보고 조롱한다. 성폭행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사회적 편견과 질시와 힘의 논리로 약자를 굴복시키는 미개한 사회이다.

 

 

 

 

[1] 조디 래피얼 《강간은 강간이다》, 12쪽

[2] 같은 책, 65쪽

[3] 같은 책,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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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4-05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움이 뭔지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

cyrus 2018-04-06 15:18   좋아요 1 | URL
사실을 설명해줘도 귀를 닫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답답해요.. ^^;;

sprenown 2018-04-06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르노에 대해 문화적 표상으로 보면서 포르노 규제에 반대하는 입장의 페미니즘도 있다는 글을보고 놀랐어요. 페미니즘... 참 복잡하군요.

cyrus 2018-04-07 16:28   좋아요 2 | URL
저도 페미니즘을 공부하다보면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요. 포르노 규제 문제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문제도 페미니즘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을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시대가 달라지면 여성 운동의 방향도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의 페미니즘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 할 수 없어요. 언젠가는 구시대에 유행했던 페미니즘 사상이 재조명받을 수도 있어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는 분명 좋은 책이지만, 다소 아쉬운 구석이 있다. 특히 내가 인용한 다음 문장에 역주가 없는 점이 불만족스럽다.

 

 

 페루, 리마의 플로라 트리스탄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처음 생겨난 페미니스트 단체들 중 하나이다. (53)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이 문장에 역주가 없는 게 뭐가 문제냐?”라고. 아니다!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만약에 내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번역을 맡았다면, ‘플로라 트리스탄이 누군지 설명하는 역주를 써넣을 것이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사람 이름이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여성 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단한 인물이다.

 

 

 

 

 

플로라 트리스탄(Flora Tristan, 트리스탕으로 표기하는 책도 있다). 그녀는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보다 훨씬 더 앞서서 여성과 노동자 운동에 헌신했다. 체트킨과 룩셈부르크가 고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라면, 트리스탄은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다. 트리스탄의 사회주의 운동, 체트킨과 룩셈부르크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한 여성해방운동의 목표는 비슷하다. 이 세 사람은 남성의 지배여성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이 두 가지 문제가 여성을 억압한다고 봤다. 그런데 어째서 트리스탄은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가? 트리스탄의 업적을 이해하려면 먼저 19세기 유럽을 수놓은 다양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을 두루 살펴봐야 한다.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열린책들, 2012)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을유문화사, 2007)

    

 

 

 

 

 

 

 

 

 

 

 

 

 

 

 

 

* 로버트 오언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천줄 읽기)(지만지, 2012)

* 샤를 푸리에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외(책세상, 2007)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소설 유토피아에서 사유재산제를 폐지하는 과격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모어를 공상적 사회주의의 원조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로버트 오언(Robert Owen), 생시몽(Saint Simon),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19세기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유럽의 19세기는 유토피아 사상이 만발했다. 산업혁명으로 물질문명은 발달했지만, 삶은 더욱 각박해졌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상적 노동이 가능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다. 오언은 농업과 산업이 모두 발전하고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인디애나 주에 땅을 사들여 뉴 하모니라는 공동체 마을을 만들었다. 푸리에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고, 자급자족하는 팔랑스테르를 세웠다. 사회주의자들은 계몽과 설득을 통해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자본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콧방귀를 뀌었다.

 

 

 

 

 

 

 

 

 

 

 

 

 

 

 

 

 

 

 

 

 

 

 

 

 

 

 

 

 

 

 

 

* [품절]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상에서 과학으로(새날, 2006)

* 리오 휴버먼 리오 휴버먼의 자본론(어바웃어북, 2011)

* 한형식 맑스주의 역사 강의(그린비, 2010)

* [품절] 욜렌 딜라스-로세리외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서해문집, 2007)

 

 

 

 

마르크스엥겔스는 오언, 푸리에 등의 사회주의자들을 공상적 사회주의로 분류하여 그들의 입장을 현실적 기반을 갖지 못한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엥겔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를 비판할 땐 가차 없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훼손되지 않고 굳게 뿌리내리기 위해 과학적 공산주의로 분류했다. 트리스탄은 오언과 푸리에와 가까이 지냈다. 과학적 공산주의가 실패했더라도 트리스탄의 업적이 덜 알려지거나 폄하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트리스탄의 여성해방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리스탄은 스페인계 페루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는 공장 노동, 판화를 채색하는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했다. 트리스탄은 페루에 생활하면서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는 노예들의 열악한 처우를 목격했고, 이를 고발하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 그녀는 푸리에의 사회주의 사상 속에 담긴 여권 옹호론에 주목했다. 푸리에는 네 가지 운동과 일반적 운명에 대한 이론이라는 글(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외수록)에 여성의 경제적 자유와 성적 자유를 억압하는 남성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비판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해방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부르주아 여성들까지도 비판했다.

 

 

 

플로라 트리스탄의 삶과 주요 활동을 간략하게 언급한 책들

 

 

 

 

 

 

 

 

 

 

 

 

 

 

 

 

 

 

 

 

 

 

 

 

 

 

 

 

 

 

 

 

* 안체 슈룹, 파투 그림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숨쉬는책공장, 2016)

*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젠더와 사회(동녘, 2014)

* [절판] 수잔 앨리스 왓킨슨 페미니즘(김영사, 2007)

* [품절] 이효재 엮음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창비, 1989)

 

 

 

 

푸리에가 지적한 대로 19세기 유럽 남성들은 생각하는 여성에 반감을 드러냈다. 트리스탄의 남편도 그런 부류의 남성이었다. 트리스탄의 남편은 그녀를 학대했다. 그 시대에 여성은 이혼할 권리가 없었다. 트리스탄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여행길에 올랐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딸의 후견 문제로 남편과의 법적 싸움이 이어졌고, 남편은 트리스탄에게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사생아’, ‘혼혈아’,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아내라는 삼중 굴레 속에서도 트리스탄은 영국, 프랑스로 건너가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라티오, 2014)

 

 

 

영국에 체류한 그녀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트리스탄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1843년에 <노동자 연합>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트리스탄은 노동자 중심의 협동조합에서 나오는 기금으로 병원, 학교 등을 설립한다면 여성 해방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연합>은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라티오, 2014)보다 먼저 영국 노동자계급의 노동조건과 생활상을 분석하고 운동 방향을 제시한 문헌이다. 트리스탄의 견해에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있었으나 남성 사회주의자와 일부 남성 노동자들은 여권을 주장하는 트리스탄의 견해에 반대했다. 또 남성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는 트리스탄의 노력을 무마하려고 했다. 트리스탄은 자신을 노동해방의 걸림돌’, ‘공장을 망치려는 여성으로 바라보는 남성 사회주의자와 남성 자본가들의 냉담한 반응을 이해하고 있었다.

 

 

거의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합니다. 남자들은 내가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기 때문이고, 기업주들은 내가 임금노동자의 해방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37)

 

 

트리스탄은 자신의 의견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도보로 여행을 하고, 자신이 쓴 책을 홍보했다. 강행군을 펼친 트리스탄은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녀는 열병으로 쓰러지고 말았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트리스탄을 지지한 세탁부와 중산층 부부가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 노동자들은 트리스탄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그녀를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준비할만한 돈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트리스탄의 기념비가 있는 무덤을 만들기 위해 손수 기부금을 갹출했다. 1848년 혁명 이후 여전히 트리스탄을 기억하는 노동자들은 그녀의 무덤에 찾아가 조의를 표했다. 노동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플로라 트리스탄은 무덤이 필요하다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몇 년 동안 노동가들의 애송가로 알려졌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페루 리마에 그녀의 이름을 딴 페미니스트 단체가 세워졌다.

 

 

 

 

 

 

 

 

 

 

 

 

 

 

 

 

 

 

* [품절]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람기획, 1999)

* 프랑수아즈 카생 고갱 : 고귀한 야만인(시공사, 1996)

 

 

 

트리스탄이 세상을 떠나고 4년이 흐른 뒤에 그녀의 손자가 태어났다. 손자는 할머니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된다. 그 손자의 이름은 폴 고갱(Paul Gauguin)이다. 고갱은 회고록에 어린 시절에 전해 들은 할머니에 대한 모습과 생전 활동을 언급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호인이며 묘한 여인이었다. 그분의 이름은 플로라 트리스탕이라고 하며, 프루동(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의 말에 따르면 재능 있는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실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프루동의 말만 믿을 뿐이다.

  그분은 수많은 사회주의적인 것을, 그중에서도 노동조합을 만들어냈다. 노동자들은 그분에게 감사하며 보르도의 묘지에서 기념비를 세웠다.

나는 진실과 꾸민 이야기를 조금도 구별할 수 없을 듯해서 그저 있는 그대로만 얘기할 따름이다. 그분은 1844년에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는 많은 대표자들이 참여했다.

  그래도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플로라 트리스탕이 참으로 예쁘고 기품 있는 부인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또 그분이 늘 여행을 했고, 노동자의 송사에 전 재산을 사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75~176)

 

 

플로라 트리스탄은 마르크스, 엥겔스, 클라라 체트킨의 노동해방운동에 영향을 준 선구자다. 그런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인물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다. 트리스탄의 업적을 생각하면 부당한 평가이다. 왜 아무도 트리스탄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을까? 트리스탄이 공상적 사회주의자라서? 아니면, '남성 지식인보다 뛰어난 여성'이라서? 어쩌면 지금도 세상은 그녀를 반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단지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특히 마르크시즘보다 비교적 온전한 사회주의마저 불온한 사상으로 몰아세우는 우리나라에서는 트리스탄을 빨갱이로 취급할 게 뻔하다. 마르크스에 경도된 좌파들은 그녀를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의 준말)’으로 취급할 것이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부터 시작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만 집중 조명하는 우리나라의 풍토도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저평가 받게 한 원인 중 하나이다. 근대적 페미니즘의 시작에 자유주의자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를 개선해나간 사회주의자들도 여성 운동에 뛰어들었다. 너무 많이 늦었지만, 플로라 트리스탄은 기념비가 필요하다. 이 글을 보고 있을 당신이 좌파라면 트리스탄을 모르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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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8-03-29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가 아니라도 ‘트리스탄‘ 이라는 이름은 기억해야 겠네요! 훌륭한 삶을 사신분으로...

cyrus 2018-03-30 16:17   좋아요 0 | URL
짧으면서 굵게 사신 분이죠. 트리스탄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나 그녀가 쓴 저서를 읽어보고 싶어요. 당분간은 이런 책들이 나오기 힘들어 보입니다. ^^;;

2018-03-30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30 16:18   좋아요 0 | URL
‘고갱의 외할머니’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기억되는 것처럼요.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트리스탄’으로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

2019-05-02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2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5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5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