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히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입장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입장도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민경, 《페미니스트 선생이 필요해》 63쪽)

 

 

 

 

대구중앙도서관동성로에서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내일모레(23일)에 동성로 일대에서 제10회 대구퀴어축제가 열립니다. 뜻깊은 행사에 맞춰 박차민정 님의 《조선의 퀴어》(현실문화, 2018)를 읽어보고 싶어서 중앙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습니다. 이때가 5월 중순이었고, 때마침 나온 《지금 여기 페미니즘X민주주의》(교유서가, 2018)도 같이 신청했어요.

 

 

 

 

 

한 달 지나고 나서 신청도서 처리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한 권은 취소됐습니다. 그 한 권이 《조선의 퀴어》였습니다. 취소 사유는 이렇습니다. “여러 연령대의 이용자가 이용하는 공공도서관 소장 도서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 제외되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입니다. 혹시 사서가 이 책을 ‘변태들’이 나오는 음란한 도서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원래 퀴어(queer)‘괴상한’, ‘기묘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고, ‘괴상한 존재’, ‘변태’로 취급받은 동성애자를 멸시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의 퀴어》는 ‘변태’로 오인된 근대 조선의 퀴어들을 재조명한 책입니다. 박차민정 님은 오래전부터 퀴어 이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신 분입니다. 퀴어 페미니스트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연구가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 바로 《조선의 퀴어》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공공도서관 소장 도서’로 적합하지 않다니…‥. 퀴어라는 주제도 페미니즘인데 어째서 《조선의 퀴어》는 공공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었을까요? 아마도 사서는 퀴어를 진짜 ‘변태’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 책이 청소년의 정서에 해로운 내용이 있을 거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공공도서관에 ‘페미니스트 사서’ 채용이 시급합니다. 대구중앙도서관 사서가 정말로 ‘퀴어’를 싫어하는지 궁금해서 《페미니즘을 퀴어링!》(봄알람, 2018)을 신청했습니다. 책 제목에 ‘페미니즘’이 들어가 있으니 이번에는 사서가 올바른 결정을 할 거로 믿습니다.

 

 

 

 

 

 

 

 

 

 

 

 

 

 

 

 

 

 

 

 

 

 

 

 

 

 

 

 

 

 

 

 

*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 이론 : 입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2)

* 수잔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이매진, 2016)

*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2015)

* 주디스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 (이매진, 2015)

 

 

 

과거에는 ‘변태성욕자’, ‘동성애자’를 욕할 때 ‘퀴어’를 사용됐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퀴어는 다양한 성적 정체성, 성 지향성이 있는 ‘성소수자’를 아우르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퀴어를 ‘변태’, ‘해롭고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고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퀴어 혐오(트렌스젠더, 게이, 레즈비언 혐오)를 일삼는 사람, 동성애와 퀴어 축제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 그리고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로 알려진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스트가 있습니다.

 

 

 

 

 

 

 

 

 

 

 

 

 

 

 

 

 

* 쉴라 제프리스 《래디컬 페미니즘》 (열다북스, 2018)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즘은 ‘젠더 비평적 페미니즘(Gender-Critical Feminism, GCF) 또는 ‘문화(주의) 페미니즘(Cultural Feminis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TERF’로 통일하여 쓰겠습니다. TERF에 속하는 쉴라 제프리스제니스 레이먼드는 트랜스젠더 자체를 부정해서 성별 불화를 겪는 사람을 ‘트랜스섹슈얼리즘’이라고 부릅니다. 그녀들은 성전환 수술을 허용하는 의료 정책에 반대합니다.

 

 

 

 

 

 

워마드(WOMAD)는 TERF을 표방하는 여초 성향 커뮤니티입니다[1]. 본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직 생물학적 여성의 권리 신장을 지향합니다. 워마드는 남성은 절대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워마드는 게이와 트랜스 남성의 여성 혐오에 대항해 ‘미러링’으로 비판합니다만, 문제는 게이와 트랜스 남성을 비꼴 때 쓰는 워마드 용어가 ‘성 소수자 혐오표현’이라는 점입니다.

 

 

 

 

 

트랜스 여성도 워마드가 적대하는 대상입니다. 워마드는 트랜스 여성을 ‘남성’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여성 운동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트랜스 여성의 성전환 수술을 비꼬기도 하고, 트랜스젠더를 싸잡아서 ‘젠신병자(트랜스젠더+정신병자)라고 비하합니다. 이 단어에 성별 불화를 겪는 트랜스젠더를 ‘정신장애인’으로 바라보는 비하적인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지만 트랜스젠더는 더 이상 정신장애가 아니며, 이를 질병으로 규정하면 실제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 및 낙인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어크로스, 2018)

* 김승섭,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 외 《오롯한 당신》 (책공장더불어, 2018)

 

 

 

혐오표현은 소수자를 부정하고 차별하거나 배제하려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젠신병자’는 트랜스젠더라는 성소수자를 여성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 혐오표현입니다. 쉴라 제프리스는 트랜스섹슈얼리즘을 ‘인권 침해’로 규정하면 의료적 트랜지션 즉, 성전환 수술 · 호르몬요법 등을 불법화하는 데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녀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성 소수자 차별과 억압이 워낙 강고해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실태 파악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국내 의학 전문가들은 트랜스젠더들이 제대로 의료서비스를 받았는지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의학 교육 과정에서 의료적 트랜지션에 필요한 지식 및 기술에 대한 수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요. 의료적 트랜지션을 규제하면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의 건강을 악화시키는 불법 의료적 트랜지션이 음지에서 성행할 수 있습니다.

 

 

 

 

 

저는 ‘페미니즘’과 ‘퀴어’가 서로 연관이 없는 별개의 단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퀴어/퀴어 이론’을 흠집 내기 위한 수단으로 페미니즘과 퀴어를 따로 구분 지어 사용되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에 1차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시위가 열렸습니다. 이 시위는 미투 운동이 확산된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 사회 전반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시위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시위 참가 조건이 문제 있다고 봅니다. ‘생물학적 여성’ 자체를 인정한다는 건 결국 페미니즘이 꾸준히 비판했던 젠더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일입니다. 젠더 이분법의 선택지는 단 두 개입니다. ‘생물학적 남성’과 ‘생물학적 여성’이죠. 젠더 이분법은 성소수자인 ‘제3의 성’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젠더 이분법에 기초한 시위 참가 조건은 트랜스 여성의 참여를 막는 것이고, 트랜스 여성에 대한 차별입니다. 트랜스 여성도 성희롱 · 성폭력(시스젠더에 의한 성폭력과 성소수자 간의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성소수자 사회 안에서도 성폭력을 인지하고 제기할 수 있도록 공론화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기회가 부족합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동성 간 성소수자 간의 성폭력을 공론화하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 이민경, 최현희, 최승범 외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동녘, 2017)

 

 

 

정희진 님은 성소수자와 이성애자를 구별하는 차별하는 태도가 가부장제의 원리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퀴어는 인간의 성별을 양성으로 고정하려는 가부장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젠더들이라고 말합니다. 여성 순혈주의는 불가능합니다[2]. 현재의 워마드는 여성 순혈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페미니스트는 이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내부 비판을 하지 못하는 걸까요? 루인 님은 국내에 페미니즘과 퀴어의 상호 관계성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면서 논쟁적 문제에 ‘몸을 사리는’ 페미니스트들의 태도를 지적했습니다[3].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모두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은 학문입니다. 둘 중 하나를 공부하는 건 벅찬 일이에요. 하지만 공부하지 않은 것을 모른다고 해서 복잡한 논쟁 주제를 자꾸만 피해야 할까요? 내가 관심 있는 학문이 조금씩 뭔가 잘못되고 있는데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논쟁을 피하려는 태도, ‘나중에’ 생각해보겠다면서 신중한 척하는 태도. 이 모든 행동은 잘못된 현상을 유지하게 해주는 ‘몸 사리는’ 태도입니다. 달리는, 아니 모든 사람이 행복할 때까지 달려야 할 페미니즘에 ‘중립’은 없습니다[4].

 

저는 지난 달 초에 공개적으로 약속했습니다. 싸다구 맞을 각오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요[5]. ‘중립’이라는 이름에 숨어서 페미니즘 내 문제를 소극적으로 지켜봐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페미니즘 논쟁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내놓아도 어차피 욕먹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타당한 비판도 받을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1] 워마드 회원 전체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건 아닙니다. 워마드 일부가 성소수자를 혐오합니다.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 있는 워마드 회원을 실제로 만나봤습니다.

 

[2] 정희진,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215쪽.

 

[3] 루인, 『트랜스젠더 운동, 페미니즘과 동성애 운동과의 관계: 미국과 한국의 경우』, 2012년 3월 1일, ‘Run To 루인’ http://runtoruin.com/1955

 

[4]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하워드 진).

 

[5] [싸다구 맞을 각오로 공부하기] http://blog.aladin.co.kr/haesung/10078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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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8-06-2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진보운동사 원로 여성운동가들은 독재와 군부에 저항하며, 민주화와 노동운동과 같이 여성운동을 전개했지만, 워마드 등장에서 그분들의 노력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cyrus 2018-06-22 11:57   좋아요 0 | URL
페미 강연 때 어느 여성주의 연구가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제는 사회주의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삶과 업적에 주목해야 한다고요. 워마드 중심의 급진 페미니스트 활동이 크게 부각되고 많이 알려지고 있는 상황이 페미니즘 발전을 고려할 때 바람직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이 워마드의 페미니즘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다른 관점으로 여성 문제에 접근하는 페미니즘이 상당히 많아요. 여러 갈래로 이루어진 페미니즘이 발전하려면 페미니즘 내부 비판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페미니즘이나 여성 운동가의 업적도 알려야 합니다.

syo 2018-06-2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퀴어 책을 도서관에 들여놓으시려는 사이러스님의 노력을 비롯해, 전개하신 모든 논지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근데 퀴어 책을 들여놓지 않는 이유에 대한 사이러스님의 추측은 뭔가 좀 귀엽습니다ㅋㅋㅋㅋ 설마 그래서일려구요 ㅋㅋㅋㅋ

도서관이 페미니즘 책도 웃으면서 들여놓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페미니즘 책 신청을 거부하는 일부 도서관에 대한 제보도 있잖아요. 별로 맘에 안들지만 안 들여놓으면 난리치겠지, 하는 마음에 어거지로 들여놓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가뜩이나 페미니즘 책도 맘에 안 드는데, 이제 퀴어놈들까지 설쳐? 근데 퀴어 책은 안 들여놨다고 난리 치는 분위기도 아니고, 퀴어는 여성에 비해 훨씬 더 마이너하니까, 어렵지않게 나가리시키는 건 아닐까요?

그것과 별개로 하나만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사이러스님은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의 하위개념이나 부분집합이라고(혹은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거나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cyrus 2018-06-22 12:01   좋아요 0 | URL
syo님의 생각이 그럴 듯합니다. 아마도 사서는 중앙도서관에 페미 책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예요. 중앙도서관에 <퀴어 이론 : 입문> 있고요, 중앙도서관은 다른 대구 공공도서관들보다 동성애, 레즈비언 관련 책들을 더 많이 갖추고 있어요. 십 년 전에 나온 페미니즘 책들은 서고가 아닌 자료실에 있어요. 중앙도서관은 페미니즘, 퀴어를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다량으로 보관되어 있는 곳이에요. 취소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아서 도서관 홈피 게시판에 글을 남기려고 해요. ^^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의 ‘하부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페미니즘과 퀴어 모두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낸 성차별을 해체하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의 학문에는 여러 갈래의 길(급진적 페미, 사회주의 페미, 레즈비언 페미, 에코 페미 등)이 있어요. 퀴어 이론도 ‘여러 갈래의 길’ 중에 하나에요. 저는 페미니즘과 퀴어가 처음에는 한 길로 쭉 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페미니즘과 퀴어를 가르는 간격이 너무나 많이 커졌어요. 이 간격을 좁힐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터야하는데 그게 바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이에요. 그런데 TERF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스트를 ‘쓰까페미’라고 부릅니다. 급진적 페미 관점에서 퀴어 페미 또는 상호교차성 페미를 비판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자신들의 페미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쓰까’라고 놀리고 멸시하는 건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는 일입니다.

syo 2018-06-22 12:49   좋아요 0 | URL
으음, 사이러스님의 말씀이 제 눈에는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의 ‘하부 개념‘ 혹은 ‘부분 개념‘ 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페미니즘의 여러 갈래 중 한 갈래‘ 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의 지류라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 낸 성차별을 해체하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은 정론이지만,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두 학문이 ‘하나‘ 이거나, 한 학문이 다른 한 학문의 ‘갈래‘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당위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원래 두 학문이 같은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A는 B이다˝가 참이라고 해서 A와 B가 등가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B는 A이다˝가 붙어야지요.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과 ‘하나‘의 학문이려면 ˝퀴어 이론은 페미니즘이고, 동시에 페미니즘은 퀴어 이론이다˝ 라는 말이 합당해야 하는데, 그렇게 느껴지시나요? 이 문장이 마치 ˝천문학은 과학이고, 동시에 과학은 천문학이다.˝ 라는 문장만큼 어색하게 느껴지시지는 않으시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사이러스님께서는 ‘하나‘라는 표현을 통해 페미니즘이 퀴어 이론을 ‘품고‘ 하나가 된 그림을 그리고 계신건데요.

현재 퀴어 이론이 대부분 페미니즘의 자장 아래 연구되고 있는 현실이나 페미니즘이 퀴어 이론에 제공하는 양분에 대해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구요, 퀴어 이론을 연구하시는 논퀴어 연구자들의 노고를 부정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남성이 아무리 페미니즘을 열심히 연구하고 실천하여도 남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경험, 해서는 안 되는 발언, 페미니즘 학문 안에서 움켜 쥐려고 해서는 안 되는 헤게모니가 있는 것처럼, 퀴어 이론 안의 논퀴어 페미니스트에게도 마찬가지의 제약조건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점들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함께 어깨를 겯고 앞으로 나가는(실제로는 페미니즘이 퀴어 이론을 부축하고 함께 가는 양상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구요) 동등한 별개의 학문의 꼴로 귀결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근거가 아닐까요.

‘하나‘라는 말씀으로 주장하고 싶으신 윤리적 당위성에는 저도 100퍼센트 동의합니다. 함께 가야죠. 그렇지만 ‘페미니즘‘이라는 깃발 하나만 들고 싸워 나가다 보면 쉬이 간과될 수 있는 그 ‘차이‘가 종국에는, 되돌리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수해야 할 결정적 틀어짐을 낳을까 우려합니다. ‘인간 해방‘에서 말하는 인간이 백인 부르주아 남성만을 부르는 말이었듯, ‘성 해방‘에서 말하는 성이 논퀴어만을 부르는 말이 되지 않게 하려면, 아직 상대적으로 미약하고 의존적인 학문일 수 있지만, 퀴어 이론의 독자성과 자생성을 끝까지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입니다.

만약 처음 사이러스님께 드렸던 질문에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의 하위개념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답을 주셨다면, 저는 아, 그러시구나, 하고 말았을 것 같아요. 그건 그냥 견해차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길고 구구절절 택도 없는 개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사이러스님의 대답과, 그 대답 뒤에 이어지는 설명들이 정합적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포스트를 통해 사이러스님이 말씀하시고 싶었던 말씀에는 하나도 반대하는 게 없는데도, 지엽적인 이야기로 이렇게 스압공격을 가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ㅎㅎㅎ

허허허....

cyrus 2018-06-22 15:30   좋아요 0 | URL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syo님의 의견은 올바른 지적입니다. 제 생각이지만,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질문하고, 소신 있게 의견을 밝히는 syo님을 만나면 엄청 좋아할 것 같습니다. ^^

다시 생각해보니까,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은 하나’라는 주장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연대’를 강조하기에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에 쫓겨 급하게 생각하고 댓글을 쓰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의견이 나와 버렸네요.

페미니즘이 단순하게 ‘여성을 위한 학문’이었다면 퀴어 이론은 ‘페미니즘의 하부 개념’, ‘페미니즘의 부분 개념’으로 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성차별에 고통 받는 존재는 여성만 있는 게 아니라, 남성, 성소수자, 장애인도 포함합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포함한 가부장제의 억압, 성차별에 억눌려 있던 모든 사회구성원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학문입니다. 남성,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이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듯이 가부장제 사회를 해체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래도 저는 여러 갈래로 나뉜 페미니즘이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동일한 가치와 입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협력하고 연대하면 공통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공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가치와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연대할 수 있어요. 후자의 연대는 각자 고유의 가치와 입장을 존중하는 전제로 공통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협력과 연대가 이루어지면 어떤 특정한 가치와 입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위계질서가 없어야 해요. 이 위계질서가 작동되면 연대가 불가능해요.

여러 갈래의 페미니즘이 있는데 딱 한 길만 좋다고 해서 그것만 갈 수 없어요. 이 길도 가고, 저 길도 가보는 거죠. 아니면 두 개로 갈린 길의 간격을 없애는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의 연대가 ‘공통 목표(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 낸 성차별을 해체)를 달성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이 여러 갈래의 길 위를 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페미니즘과 퀴어는 하나’라는 표현을 썼는데, 제가 봐도 아닌 것 같습니다.. ^^;;

이 답글의 의견이 이해되지 않거나 그래도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말씀해주세요.

syo 2018-06-22 18:20   좋아요 0 | URL
대구에 내려가면 사이러스님 손에 붙들려 얄짤없이 레드스타킹에 참여하게 되는 건가요ㅋㅋㅋㅋㅋ 어쩐지 사이러스님이 syo 너 이놈 내려오기만 해라, 하며 벼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저의 착각인가요 ㅎㅎㅎ

cyrus 2018-06-23 11:25   좋아요 0 | URL
레드스타킹은 해치지 않아요.. ㅎㅎㅎㅎ 이분들과 계속 만나보면 마음이 편해질 거예요. 페미 뽕에 제대로 취합니다.. ^^

2022-06-15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22 12:16   좋아요 0 | URL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워마드가 ‘생물학적 여성’을 지향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처음 알았습니다. 어제 쓴 글에 밝혔듯이 워마드가 TERF를 표방한다고 해서 워마드 전체가 성소수자를 혐오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부’가 성소수자 혐오를 하고 있다면, 또 다른 ‘일부’는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 있는 워마드 일부는 ‘젠신병자’, ‘똥꼬충’ 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근본 없는 페미니즘>, 꼭 읽어보겠습니다. 어제 글을 쓰고 나서 그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저도 ****님을 위해 페미니즘 문헌을 추천합니다. 나영 님이 학술지에 게재한 글입니다. 제목이 <지금 한국에서, TERF와 보수 개신교계의 혐오선동은 어떻게 조우하고 있나>입니다. 레드스타킹 멤버가 공유한 글입니다. 저는 나영 님의 글을 참고해서 워마드를 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http://www.academia.edu/36485411/%EC%A7%80%EA%B8%88_%ED%95%9C%EA%B5%AD%EC%97%90%EC%84%9C_TERF%EC%99%80_%EB%B3%B4%EC%88%98_%EA%B0%9C%EC%8B%A0%EA%B5%90%EA%B3%84%EC%9D%98_%ED%98%90%EC%98%A4%EC%84%A0%EB%8F%99%EC%9D%80_%EC%96%B4%EB%96%BB%EA%B2%8C_%EC%A1%B0%EC%9A%B0%ED%95%98_.pdf

2018-06-22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22 14:23   좋아요 0 | URL
링크 화면 중앙에 ‘READ PAPER’라는 작고 희미한 글자가 보이시나요? 화면 아래로 스크롤 내리면 그 글자 바로 밑에 본문이 뜹니다. ****님이 말씀하신 비밀번호가 PDF 다운로드할 때 입력해야 하는 비밀번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본문 화면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알려주세요. 제가 이 글을 보는 방법을 알아볼게요.

2018-06-22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22 15:51   좋아요 1 | URL
트페미 중심으로 전개되는 ‘탈 코르셋 운동’이 강압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하는 여성들이 있어요. 네, 페미니즘도 사람이 만든 학문이라서 무조건 완벽할 수 없고, 비판받을 수 있어요.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단순히 문제점이 많다는 이유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은 동의하기 힘듭니다. 저는 TERF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TERF도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TERF는 비판 받을 만한 페미니즘입니다. 제가 ‘워마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 입장을 ‘팔이 안으로 굽는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워마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발언이 페미니즘을 왜곡하고, 편견을 재생산한다고 생각해요. 반 페미니스트는 워마드와 다른 노선의 페미니즘을 공격할 때도 ‘너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특히 남성)이 페미니즘을 판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일입니다.

페크pek0501 2018-06-2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는, 아니 모든 사람이 행복할 때까지 달려야 할 페미니즘에 ‘중립’은 없습니다[4].˝
이 문장을 읽고 이런 글이 생각났어요.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지성의 반대말은 절충, 균형, 원칙... 이런 사고들이다.˝(정희진처럼 읽기, 202쪽.)

cyrus 2018-06-25 12:32   좋아요 0 | URL
첨예한 갈등이 나오는 문제에 한 가지 대답을 선택하는 건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예요. 그러나 계속 피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요원해질 것이고, 문제에 휘말린 당사자들은 더 괴로울 거예요. 욕을 먹거나 비판을 받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밝혀야 합니다. 자신이 말한 입장이 아니면 잘못을 떳떳하게 인정하면 됩니다.

마립간 2018-07-05 08: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의 제게 언급한 페이퍼이기에 반복해서 읽고 곰곰이 생각 ... 중입니다.

1) 단편적으로 앞 선 댓글 대화로 페미니즘의 비판을 거부한다면 워마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2)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보다 상위 개념이다. (보편성에 비춰.)
3) 정희진처럼 읽기 ; 지성의 반대말은 절충, 균형, 원칙이라면 ... 지성과 비슷한 말은 독선, 불균형, 무원칙일까...
4)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 ; 하워드 진의 중립 기준은 무엇일까. 지구? 태양? 우리 은하? 아니면 13차원의 우리 우주 universe?

제가 읽은 책은 <여성의 남성성>뿐이지만, 우리 나라 (또는 알라딘에서 언급되는) 페미니즘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알 수 있죠. 흑백 인종을 갈등으로 남녀불평등을 덮으려는 것은 비겁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남녀불평등(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빌미로 인종 갈등, 퀴어 문제를 덮으려는 것을, 저는 더 비겁하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에는 인종 갈등이 없기에 남녀불평등만 문제로 보는 분도 계시구요.

비로그인 2019-03-11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dical Feminist가 아닌 TERF라는 멸칭을 아무런 설명 없이 사용하시는 데서 악의를 느껴집니다
글쓴 분께서는 워마드와 트랜스젠더리즘에 반대하는 모든 스탠스를 묶어서 혐오라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게이 커뮤니티의 여성혐오와 트랜스젠더리즘의 여성혐오적 측면, 전환수술의 부작용 등에 대해 얘기하는 건 분명히 필요하고 이러한 태도를 혐오로 낙인찍으며 발화를 막는 퀴어커뮤니티의 경향에 대해서도 재고해보시길

cyrus 2019-03-11 22:57   좋아요 0 | URL
TERF에 대한 정의를 설명했는데요. TERF라는 용어와 그 의미를 제가 만들었습니까? 렏펨을 TERF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하면서 명시한 적이 없습니다. 이 글의 첫 번째 각주에 ‘워마드 회원 전체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썼습니다. TERF나 워마드를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쓴 적도 없고요. 나현 님의 논리대로라면 페미위키의 ‘TERF’ 항목 작성자도 악의적으로 렏펨을 보는 사람이겠네요.

이번에 나온 <미투의 정치학>의 머리말은 정희진 님이 쓰셨어요. 머리말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최근 몇 년간 일부 페미니스트(렏펨, 터프.....) 역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주장하고 있다.” (30쪽)

정희진 님이 ‘터프’와 ‘혐오’를 언급하셨는데, 여기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게이 커뮤니티의 여성 혐오도 분명 심각한 문제인 것 맞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렏펨이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미러링으로 성소수자 전체를 혐오하는 방식은 오히려 성소수자 혐오를 재생산하고 확대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화의 하인들 - 여성, 이주, 가사노동 여이연이론 17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지음, 문현아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은 세계화의 하인들이다.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세계화의 하인들》, 32쪽)

 

 

 

필리핀인을 가사도우미로 불법 고용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명희에 대한 영장이 어제 기각됐다. 법원은 범죄혐의 내용과 수사 진행 경과를 볼 때, 구속 수사할 사유나 필요성, 상당성을 모두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어제 불거진 조재현에 대한 성폭행 의혹 소식에 가려 이명희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관심이 조금 묻힌 감이 있었다. 물론, 이 두 개의 사건 모두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규명해야 하며 특히 페미니스트라면 유심히 살펴보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합법화하면 부부 맞벌이가 쉬워져, 여성 경력단절이 해결되고 출산율도 높아질 거라는 주장이 나온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가사도우미 수요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수요는 늘어나는데 불법으로 막혀 있으면 가격이 음지에서 형성돼 수요자들의 부담만 가중된다. 정부의 규제가 늘 해법이 될 수는 없다. 규제하면 오히려 더 교묘히 법망을 피하거나 음지에서 불법 활동 및 범죄가 독버섯처럼 퍼져나간다. 강남을 비롯해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에는 외국인 가사도우미 불법 고용이 만연하고 있다. 이자스민 전 국회의원은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는 법이 도입된다면 우리나라 경제에 이득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일자리를 찾기 위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특히 세계화는 난민을 생산하는 기제다. 자본이 확대 재생산되고, 축적되는 것처럼 인적 자원의 이동 또한 막을 수 없다. 난민 또는 이주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코리안 드림’을 가슴속에 품은 개발도상국 출신의 외국인들은 어떤 직업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교육 수준에 맞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이지만 고국에 있는 가족만 바라보며 기피 업종에 뛰어든다. 우리나라에서의 이주노동자의 여성 비율은 국제결혼 추세에 따라 증가하고 있다. 이주를 결심하게 된 배경 및 원인은 다르지만, 여성 이주가 증가하는 것은 다른 대륙 국가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특히 싱가포르와 대만, 홍콩에는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에서 온 여성들이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생각하면 외국인 가사도우미 합법화는 시기상조다.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떠받치는 ‘하인’이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는 일은 ‘하인’을 고용하는 것과 같다. 《세계화의 하인들》(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더 잘사는 선진국으로 ‘여성 가사노동자가 수입’되는 과정을 조명하는 책이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어머니는 미국으로 이주한 필리핀인이다. 저자는 필리핀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이탈리아 로마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필리핀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그녀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여성은 아내와 어머니, 딸, 며느리가 되면 ‘정상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보육, 요리, 청소 등의 가사노동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별 분업 체계에서 ‘여성적’ 일의 본질은 가족 및 타인을 보살피는 ‘무급 가사노동’ 또는 ‘돌봄 노동’으로 규정된다. 과거 여성들이 무급으로 수행하던 가사노동 및 돌봄 노동은 세계노동력 시장에서 상품화되면서 특권계급 여성이 구매할 수 있는 ‘저임금 서비스’가 된다. 저자는 저임금 서비스 노동에 대한 요구가 급증함에 따라 가난한 이주 여성이 가사노동을 떠맡는 존재, 즉 ‘하인’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선진국의 특권계급 여성, 즉 여성 고용주는 ‘힘들고 더러운’ 집안일을 하기 싫다는 이유로 가사노동을 가난한 이주 여성에게 떠넘긴다. 이렇게 되면 ‘남성적’ 일과는 구분되는 ‘여성적’ 일이 ‘돌봄의 연쇄(care chain)라는 방식으로 강화된다. 외국인 여성이 이주하면 그녀가 해야 할 가사노동은 또 다른 가난한 여성이 떠맡게 된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성별 노동 분업이 가난한 국가로부터의 여성 이주를 통해 지속한다.

 

필리핀은 전체인구의 10%가 해외에 나가 일한다. 해외 취업자들은 대개 여성들이다. 필리핀 여성들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점 때문에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동, 아시아 등 곳곳에서 가사도우미, 보모 등으로 인기가 있다. 여성의 해외 취업이 늘면서 ‘재생산 노동(가사노동, 돌봄 노동)의 국제적 분업’은 필리핀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서 노동이민의 새로운 추세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가 지속하면 이주 여성은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저임금 노동만 해야 하는 빈곤하고도 불리한 상황에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타국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이주 여성과 고향에 남겨진 아이들의 정서적 불안정도 생각하면 이주 여성 문제는 간단치 않다. 따라서 외국인 가사도우미 합법화 논의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 책이 발간된 이후로 내가 터득하게 된 것은 모든 여성고용주들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일부는 자신의 이중일과의 부담에 도움을 받기 위해 가사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안일이라는 더러운 일을 회피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중간계급과 상층계급의 과시적 소비의 징후로서 가사노동이라는 재화가 포함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14쪽, 한국어판 서문)

 

 

오랜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은 독립된 주체가 아닌 남성의 소유물이나 부차적 존재로 여겨져 왔다. 가부장제가 뿌리 깊던 당시 여성들에게 교육, 기술보다 아내, 엄마로서 해야 할 역할이 더 중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성별화된 노동 분할 전략으로 여성의 빈곤화를 심화한다. 《세계화의 하인들》은 특권계급 여성이 이주 여성 노동자들을 어떻게 ‘차별’하며 불평등을 초래하는 위계적인 구조를 어떻게 만드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만 봐도 이명희가 얼마나 잘못한 일을 했는지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이명희는 ‘더러운 집안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불법 가사도우미를 고용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할 수 있는 법이 생기면 걸레 드는 것을 싫어하는 잘 사는 마나님들이 엄청나게 좋아하겠는 걸?

 

 

 

 

 

* Trivia

 

1. 목차의 1장 제목과 본문 1장 제목이 다르다. 목차에는 ‘로마와 로스엔젤리스의 필리핀 이주 가사노동자’라고 표기되어 있고, 본문에는 로마와 로스엔젤리스의 필리핀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목차의 1장 제목에 ‘여성’이 빠졌다.

 

2. 284~285쪽에 ‘흐몽인’, ‘흐몽 난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베트남, 중국, 라오스 등지에 사는 묘족(苗族)의 베트남어 이름이다. ‘흐몽’이 아니라 ‘몽(Hmông)’이라고 불러야 한다. ‘H’는 비음(鼻音)이므로 소리가 날 듯 안 날 듯 발음해야 하기 때문이다. 묘족을 설명한 대부분 인터넷 백과사전 항목에서는 ‘몽족’이라고 언급하지 ‘흐몽족’이라고 하지 않는다.

 

 

 

 

 

[*] [이민 없는 한국]⑨이자스민 “맞벌이 늘어나는 韓…필리핀 가사도우미 허용 목소리↑』 이데일리, 2018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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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22 15:59   좋아요 1 | URL
네. 페미니즘은 ‘정치적 올바름’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학문입니다. 페미니즘이 여성 문제에 접근하려면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합니다.
 
오롯한 당신 - 트랜스젠더, 차별과 건강
김승섭 외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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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게 아니게 보이는 무심함이 온 우주를 멍들게 할 수 있다.

 

(김살로메,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54쪽)

 

 

 

올해로 ‘여성 참정권 운동(Suffragette, 서프러제트) 100주년을 맞는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처음 불붙기 시작한 것은 1848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여성권리대회 때다. 그로부터 수많은 여성이 투옥되는 등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지만 제일 먼저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나라는 영국도, 미국도 아니다. 1893년 뉴질랜드가 최초이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헌법부터 여성들의 참정권을 보장했다.

 

참정권은 국민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고도 소중한 국민의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여성이 있다. MTF 트랜스젠더(male-to female transgender, 트랜스여성)이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과 스스로 생각하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한다.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성별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트랜스여성이고, 반대의 경우는 트랜스남성(female-to-male transgender, FTM 트랜스젠더)이다. 트랜스남성 역시 트랜스여성과 마찬가지로 투표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국민의 대다수는 시스젠더(cisgender)다. 시스젠더는 신체적인 성별과 자신이 생각하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한다고 느끼면서 살아간다. 시스젠더가 투표를 하려면 신분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 시스젠더 입장에선 신분증을 챙기고 오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에게 신분증 확인은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다.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번호 체계는 신원 확인에 유용하다. 13자리 숫자에 출생연도, 출생지, 그리고 성별 등의 정보가 포함된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첫 번째 숫자는 성별을 의미한다[*]. 트랜스여성은 현재 여성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정받은 성별은 변경되지 않아 남성의 호적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트랜스젠더 대부분이 호르몬 투여만으로 혹은 일부 외과적 수술만으로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른 사회생활이 가능하지만, 주민등록증 등 공문서상 법적 성별은 자신의 사회 생활상 성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신분증 확인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시스젠더의 편견과 차별이 두려워서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너무 많은 불편함을 안고 살아간다. 병원에서도, 은행에서도, 신용카드 만들 때 정말로 많은 설명을 해야 하고 심지어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법적 성별 변경과 관련된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호적 정정은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또 절차도 복잡하다. 시스젠더에 속한 사람들은 트랜스젠더가 마주하는 불편함이 어떤 건지 잘 모른다. 미국의 역사가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의 책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생각의길, 2018) 첫 문장을 빌리자면, 시스젠더는 ‘무지(無知)라는 골짜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트랜스젠더는 이 골짜기에 들어올 수 없다.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다수인 골짜기에 트랜스젠더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견’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롯한 당신》(책공장더불어, 2018)은 ‘무지’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트랜스젠더에 대해 가장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견인하는 책이다. 이 책은 김승섭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트랜스젠더 의료 접근성 문제를 다룬 논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논문과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다. 트랜스젠더의 건강 문제에 대한 국내 연구 자료가 전무한 상황 속에서 연구팀은 총 282명의 트랜스젠더를 만나 설문조사를 했다. 대부분 학술 연구는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 진행한다. 그러나 김승섭 교수 연구팀은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한국연구재단에 두 차례나 연구비 신청을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크라우드펀딩(시민의 후원, 기부 등으로 자금을 모으는 방식)으로 연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국내 트랜스젠더들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채 의료적 트랜지션(medical transition)을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성을 바꾸는 의학적 트랜지션인 정신과 진단과 호르몬요법, 외과적 수술 등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으로 분류돼 있다. 많은 시스젠더가 트랜스젠더에 대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의학적 트랜지션이다. 트랜지션은 어느 한순간에 마치 마법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호르몬요법은 체형과 피부 · 목소리를 변화시키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성전환수술은 호르몬요법으로 불가능한 신체적 변화를 얻기 위해 시행된다. 여기에는 안면윤곽 성형술, 목젖 성형수술, 유방 절제 · 확대술, 고환 · 정관 절제술, 자궁 · 난소 난관 절제술 등이 포함된다. 트랜스젠더가 의학적 트랜지션을 받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높은 의료비용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의료 시설이 부족한 점도 문제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일부 트랜스젠더는 호르몬 요법을 해주는 의료 기관이 없어서 의료적 처치를 받지 않는다고 답했다. 외국에서는 트랜스젠더를 위한 정부의 의료지원이 확대되는 추세다. 연구팀은 미국 · 유럽에서 의료적 트랜지션을 위한 의료진 교육과 수련 과정을 편성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 의과 대학의 교육 과정에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되지 않아 트랜스젠더의 건강 문제를 이해하는 한국 의료 전문가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조금 더 생각해보면 ‘별 게 아니게 보이는 무심함’이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구에 참여하면서 많은 트랜스젠더를 만난 김승섭 교수의 자기반성은 이분법적 성별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트랜스젠더의 목소리에는, 내게는 더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어떤 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누군가가 살아있는 세상이 있었다. 은행에서 신원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보일 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19쪽)

 

 

트랜스젠더의 인권 문제는 시스젠더에겐 다소 낯설고 난감할 수 있는 사회적 과제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적어도 편견 없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받는 고통을 알아야 한다. 트랜스젠더도 ‘국민’의 한 사람이며 기본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트랜스여성을 비꼬는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TERF)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다. 당신들의 편견과 차별, 그리고 소수의 문제에 대한 무심함이 누군가를 멍들게 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트랜스젠더를 ‘오롯한 인간’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

1900~1999년에 태어난 남성 : 1

1900~1999년에 태어난 여성 : 2

2000~2099년에 태어난 남성 : 3

2000~2099년에 태어난 여성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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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9 19:27   좋아요 1 | URL
그렇지만 소수의 사회적 약자를 지나치게 옹호하면 다수의 사회 구성원 또는 또 다른 사회적 약자가 차별을 받을 수 있어요. 페미니즘 문제나 성소수자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의 오류에 빠지기 쉬운 주제입니다. 상대방이 비판하지 않으면 스스로 이 오류를 감지하기 힘들어요.

조그만 메모수첩 2018-06-19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정권 소외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네요. 일상과 의료 면에서의 고통만 어렴풋이 상상했을 뿐이었는데...ㅠㅠ 타고난 성별이든 선택한 성별이든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되는데 사회는 평균에서 벗어난다는 것에 대해 부당한 억압을 가하는 거 같아요 😔

cyrus 2018-06-19 19:29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랬어요. 선거 끝난 후에 이 책을 읽었어요. 트랜스젠더가 겪는 불편한 상황들이 이렇게 많을 줄 생각하지 못했어요.
 
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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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준비가 됐는데 어디를 가도 내가 모자라대요.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박기영의 노래 『취.준.생』 중에서)

 

 

 

 

등용문(登龍門)은 출세의 문을 뜻한다. 중국 황하(黃河) 상류에 급류가 흐르는 협곡이 있다. 협곡 이름은 용문이다. 물살이 어찌나 센지 그곳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성공한 잉어는 용이 돼 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용문을 오르지 못한 잉어는 뭐라고 부를까? 용문에 오르려고 도전하다가 바위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를 입고 하류로 떠내려가는 잉어들을 ‘점액(點額)이라 한다. 점(點)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고 액(額)은 이마를 뜻한다. ‘점액’은 출세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 잉어는 멀리 황하까지 가지 않더라도 매일 등용문을 오른다. 오염 내성이 강한 잉어지만 수질 악화와 서식처 파괴 등 매일 용문보다 험한 길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경기불황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출세의 문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외국 연수를 다녀오고 자격증을 따고 성형수술까지 해도 원하는 직장 구하기가 낙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려운 시대가 됐다. 개천에서 때때로 잉어도 나오고 용도 나오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 희망조차 없다. 부모 돈이 곧 실력이요, 능력인 세상에서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이 없으면 꿈을 실현하기 어렵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친 사회에선 이미 출발선부터 지각인 사람들이 많다. 매일 차근차근 등용문에 올라가봤자 ‘금수저들’의 세계에서 사다리가 걷어치워 지기 일쑤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마치 계급주의 사회처럼 이른바 ‘신의 직장들’이 지나치게 주목받으면서 역주행을 하고 있다. 그 중심에 ‘공채(공개 채용)가 있다. 청년들은 너도나도 대기업 ·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맨다. 장기 불황에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나자 ‘안정적 고용’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첫 직장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으로 출발하면 평생 그 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청년들의 인식이다. 공모전은 높은 상금과 인턴 등 실무 경험의 혜택까지 누릴 기회를 부여해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러나 공모전 경쟁률이 점점 더 높아지면 대학생들은 경력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공모전의 ‘전(展)’을 ‘싸울 전(戰)’으로 써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기자 출신 소설가 장강명의 책은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사, 현실을 반영한다. 《표백》(한겨레출판, 2011)은 모든 틀이 이미 다 짜여 있는 세상, 그 구조 속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표백세대’라 칭하며 자살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반어적인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 《한국이 싫어서》(민음사, 2015)는 현실적 이유로 한국을 떠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대중과 평단에서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댓글 부대》(은행나무, 2015)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의 댓글 조작을 통한 선거개입에서 모티프를 얻어 쓴 소설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나온 첫 르포르타주 《당선, 합격, 계급》(민음사, 2018)동시대의 현실과 호흡하는 그의 글쓰기와 궤를 같이한다. 이번에 그는 문학상과 공채 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들여다본다. 2년 넘게 작가는 공모전을 운영하는(운영하지 않는) 출판사 대표 및 담당자, 작가 그리고 작가 지망생 등 문학 공모전과 채용 시스템의 현실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장강명은 한국 공채 문화를 ‘지망생들의 세계’, ‘합격자의 세계’로 바라보면서 대학 입시, 기업 공채 제도, 자격증 시험 등으로 확장한다. 이 공채 문화를 계급사회를 조장하는 ‘한국만의 방식’으로 규정한다. 책은 한국 공채 문화의 현실의 면면을 쓸쓸하지만,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한국 공채 문화의 문제점은 ‘승자’ 그룹(‘등용’, ‘합격자의 세계’)과 ‘패자’ 그룹(‘점액’, ‘지망생들의 세계’)으로 분화시키는 무한 경쟁과 성과(성적) 중심주의다. 자격증과 공모전, 그리고 공무원 시험은 ‘무한 경쟁’이라는 사회의 파고 속에 있는 한 척의 구명보트와 같다. 모든 구직자가 아귀다툼으로 올라타면 구명보트는 당연히 뒤집힐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경쟁의 금을 넘어선 합격자들은 ‘용(龍)’이 되지 못한다. 어중이떠중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 인맥과 파벌을 보험으로 삼고 있어서다. 엘리트의식, 권위주의, 패거리주의에 찌들어 있는 곳이 ‘합격자의 세계’이다.

 

장강명은 ‘문학공모전’ 수상경력이 화려하다. 그러나 그는 문학공모전도 ‘일종의 채용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등단 문화와 공채 문화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 점수 또는 성과로 합격(당선)과 불합격(낙선)으로 나누고, 합격자 또는 당선자는 ‘그들만의 세계’의 구성원이 된다. 합격자는 우월감을 느끼고, 불합격자는 열등감을 많이 느끼면서 등용에 재도전한다. 이렇게 합격의 권위가 만들어 낸 울타리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일을 자랑하기 위해 ‘간판’을 내세운다. 우리는 과대평가된 간판과 권위를 맹목적으로 신뢰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간판을 차지하기 위해 ‘바늘구멍’ 같은 공채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취업 및 시험 준비에 매달려서 극도로 예민해진 사람들은 ‘용과 같은 괴물’로 변할 수 있다. ‘고시오패스(고시생과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를 뜻하는 소시오패스의 합성어)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실력과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원하는 직장에 취업할 수 있으니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라는 말이 의미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 책, 《당선, 합격, 계급》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합격의 권위’와 ‘간판’은 노력보다 배경이 더 중요하다는 불신을 낳게 한다. 시험 결과로 인생의 당락이 결정되는 한국은 ‘공채의 나라’이다. 특권과 차별이 용인된 공채의 나라에 사는 청년들은 꿈을 꾸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공채 문화가 ‘불공평한 생존 방식’임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등용’은 문제가 많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계급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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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9 15:26   좋아요 1 | URL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일하는 게 힘들어 보였어요. 이제 좀 적응했다 싶었는데 인사발령이 나면서 새로운 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또 힘든 고생을 하게 되죠.

북다이제스터 2018-06-18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지 척^^

cyrus 2018-06-19 15:27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정미나 옮김, 이우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고등학교 중퇴가 최종 학력인 서태지는 노래 『교실 이데아』에서 대입 중심의 교육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그 후 이십여 년이 흘러간 오늘의 교실은 어떤가. 등교 시간은 달라졌어도 고등학교의 교실 이데아는 그때 그 시절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수능은 전국의 학생을 단일한 시험으로 줄 세우는 획일적인 입시제도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한다. 하지만 진로에 대한 고민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교육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전부 똑같은 EBS 문제집을 풀고, 똑같은 내용을 같은 기간에 이수하고 있다. 학생들의 꿈을 판가름하는 것은 수능 점수다. 어른들은 진로 고민을 제쳐두고 ‘일단 대학부터 가서 고민하라’고 강요한다.

 

우리 삶에서 ‘자유로운 선택’은 굉장히 중요하다. 어느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어느 회사의 물건을 구매할 것인지, 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등 작은 일상에서부터 인간의 삶 전체는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누리기 위해, 우리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른다. 즉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개인의 선택에 대한 독립성을 보장받고, 그러한 자유로운 선택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평균의 종말》(21세기북스, 2018)을 쓴 교육신경과학 분야의 권위자 토드 로즈는 이러한 개인의 선택에 대해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었는가를 묻고 있다.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학교와 직장생활과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편협한 기대치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93쪽)

 

 

직업을 선택할 때 우리는 나의 행복을 위해, 자아실현을 위해 직업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평균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 평균 점수, 평균 몸무게, 평균 연봉 등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평균이란 단어를 자주 접한다. 국어사전에서는 평균을 ‘여러 사물의 질이나 양 따위를 통일적으로 고르게 한 것’이라고 나와 있다. 말 그대로 평균이란 각 개체의 특성이 획일화 또는 표준화된 형태로 수렴되는 상태이다. ‘평균의 시대’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오래 됐다.

 

19세기 과학자 아돌프 케틀레는 스코틀랜드 군인들의 가슴둘레를 측정한 뒤 평균 가슴둘레 치수를 계산했다. 그는 평균 가슴둘레 치수에 가장 근접한 군인이 완벽한 신체를 갖춘 ‘참된 군인’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의 특성이 정확히 평균을 따른다고 주장할 논거가 부족했으나 케틀레가 제시한 ‘평균적 인간’은 완벽한 사람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케틀러의 ‘평균적 인간’ 이론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연구가 뒤를 이었다.

 

영국의 유전학자 프랜시스 골턴은 케틀레의 ‘평균’ 개념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으나 일부 그의 이론을 수용하여 평균으로 계층을 구분하려고 했다. 이렇게 되자 ‘평균적 인간’은 객관적이고 표준적인 기준이 되었고, ‘정상’을 판단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나올 수 있었다. 골턴이 창시한 우생학은 ‘인종 청소’의 이론적 틀로 발전되었다.

 

1940년대 미국 클리블랜드에서는 이상적 신체 치수를 가진 여성을 뽑는 대회가 개최되었다. 여성의 이상적 신체 치수는 1만 5,000명의 젊은 성인 여성들로부터 수집한 신체 치수를 계산해서 나온 ‘평균값’이었다. 대회 주최 측 관계자는 완벽한 신체를 가진 여성에게 ‘노르마(Norma: ‘정상’을 뜻하는 ‘normal’에서 따온 이름)라는 별칭을 붙였으며 클리블랜드 박물관에 ‘노르마’ 조각상이 전시되었다.

 

평균의 시대 속에서 ‘평균’은 ‘정상’ 또는 ‘우수함’의 의미로 혼동된 채 사용되었고, ‘평균’은 인간을 평가하는 하나의 준거가 되었다. 평균주의는 표준화된 교육 과정 안에서 똑같은 교재로 학습하는 공교육이 형성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육이 획일적으로 이뤄지면 학생 개인마다 취향을 살릴 기회가 부족해진다. 그리고 교육 과정에 따라가지 못한 학생은 학습 의욕이 떨어진 ‘열등한 학생’으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평균 점수로 학생의 성적 성취도를 평가하는 방식이 학생 개인의 소질 및 적성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저자는 ‘평균주의 교육’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중학생 시절 그는 ADHD 장애 판정을 받아 평균 점수를 받지 못한 ‘학습지진아’였고 성적 미달로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중퇴 이후 그는 대학입학자격 검정시험을 통과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평균의 종말》은 저자의 경험과 ‘평균의 허상’을 증명해주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면서 개인 고유의 재능과 취향을 외면하는 평균주의 교육을 비판한다.

 

저자는 평균주의 교육 또는 시스템을 탈피하고 주체적인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 ‘개개인학(science of the individual)이라는 학문을 만들었다. 그는 평균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가지 개개인성의 원칙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들쭉날쭉의 원칙, 두 번째는 ‘맥락의 원칙’, 그리고 마지막은 ‘경로의 원칙’이다. 각 개인의 특성은 같을 수 없다.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인간의 특성을 ‘평균’에 근접한 기대치에 맞출 수 없다. 인간의 성격은 하나로 똑 부러지게 규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외향적인 행동을 할 수 있고, 또 내향적인 행동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적절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본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이 걸어갔던 삶의 경로를 똑같이 따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각자에게 적합한 삶의 경로가 있다.

 

저자는 학생 개인의 능력을 부각하는 새로운 대안 교육 방식들을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가 자격증을 수여하는 교육제도이다. 저자는 학생의 실력이 검증된다면 학위 대신에 자격증을 수여하자고 주장한다. 이게 과연 우리나라 교육 실정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자격증은 취업을 위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스펙 중 하나다. 자격증은 일정한 실력을 인정하여 주는 증서인데, 우리나라의 자격증은 취업을 위해 반드시 따야하는 가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자격증을 많이 딴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재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기업들은 직원을 채용할 때 (기업이 요구한) 자격증을 소유한 지원자를 우대한다. 결국, 자격증도 획일화된 평균주의 교육의 수단으로 변질할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평균주의가 망친 교육을 개선하려면 먼저 기업부터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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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2 11:47   좋아요 0 | URL
문제 많은 낡은 사회제도를 고수할수록 그 제도에 유리한 소수 특권층만 유리해져요.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해요. 오랫동안 누려온 특권들을 포기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낡은 사회제도에 손해를 보는 다수 사람들도 변화를 두려워해요. 왜냐하면, 변화하는 과정에 겪게 될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피하고 싶어 해요.

레삭매냐 2018-06-11 1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 신문 칼럼인가 기사를 보니,
지금 21세기 한국의 노동상황이 기원전 로마의
노예들이 처해 있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는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교육제도와 시스템으로 노동을 기업/재벌에
예속된 현재가 서글퍼지네요.

cyrus 2018-06-12 11:51   좋아요 1 | URL
네, 슬프지만 현대판 노예가 많습니다.. ^^;;

책읽기는즐거움 2019-10-13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시지만 이제 수능으로 대학가는 친구들은 전체의 반의 반도 안됩니다. 시대가 변했는데 교육은 그대로 라는 말씀을 하시려면 변화된 부분은 반영하시는게 더 완벽한 글이 될 거 같아요. 물론 전체적인 논지는 공감합니다. 제가 평가할 수준은 아니지만요^^;

cyrus 2019-10-14 07:42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미혼이라서 최근 입시 현황을 잘 몰랐습니다.. ㅎㅎㅎ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3년이나 지났는데 그 사이에 많이 변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