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몸은 평등하다 - 장애여성들의 몸으로 말하기
김효진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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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슬슬 추워진다. 올해 겨울도 춥다고 한다. 추위에 약한 사람이 다 달라 실제 체감 온도는 온도계 온도만으로 짐작할 수 없다. 또 체감 온도는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무엇을 체감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세계에 위치한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 어떠한지를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머리만 생각해서는 불가능하며, 몸만 움직여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장애인에 대한 체감도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많은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쉽게 간과한다. 장애인을 ‘불쌍한 존재’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 속에서 장애인들은 늘 비장애인들의 동정을 마주해야 한다. 대중매체에서 장애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의존적 존재로 그려진다. 의존성은 장애인의 독립적 인격을 부정하는 근거로도 이어진다. 장애인을 타자화하는 시선은 근본적으로 당연히 보장돼야 할 장애인의 권리에 접근하지 못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Deleuze)가타리(Guattari)에 따르면 다수성과 소수성은 양적 문제가 아니다. ‘다수’는 수적으로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의 가치 척도를 가진 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그 척도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은 비주류, 즉 소수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척도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을 받는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소수민족은 이들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힘 있는 다수에 의해 ‘2등 시민’으로 강등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배제하고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을 ‘정상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장애 여성’의 목소리는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장애 여성’, ‘비장애인 여성’은 생소한 용어였다. 이 세상(이성애 중심 사회)에 여성과 남성이 있고, 마치 장애인이라는 무성(無性)적 존재라도 있는 것처럼 장애인 안에 여성이 있다는 것을 무시해오고 있었기에 장애 여성들의 경험과 차별은 드러나지도 않았다. ‘장애여성네트워크’는 장애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장애를 가진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장애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의식을 바꾸기 위한 운동을 하는 인권 단체이다. 2009년에 ‘장애 여성 이야기가 있는 사진전-몸으로 말하기’를 개최하여 일상 속에서 포착한 장애 여성들의 모습이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2010년과 2011년에는 페미니즘 저널 <일다>에 장애여성네트쿼크에서 활동한 다섯 명의 장애 여성들이 쓴 스무 편의 글이 연재되었다. 이 글들을 모은 책이 바로 2012년에 나온 《모든 몸은 평등하다》이다.

 

나온 지 꽤 됐지만 이대로 잊히기엔 아쉬운 책이다. 저널지에 발표한 글을 모아서 낸 무성의한 책이 아니다. 자신들을 ‘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정상인’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운 몸’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장애 여성을 위한 책’이 아니라 장애인, 비장애인을 아우르는 ‘모두를 위한 책’이다. 다섯 명의 글쓴이들은 장애와 마주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장애여성들의 삶을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고자 (장애 남성, 비장애인) 독자들을 설득한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장애 여성들의 삶과 인권을 배려하고 존중하기를 설득하는 글쓴이들의 어조는 부드럽고, 유쾌하다.

 

비장애인들은 누구나 친숙한 것 앞에서는 편하고 낯선 것 앞에서는 불편하다. 그래서 장애 여성의 몸을 뒤틀리고 결함 있는 몸이라고 생각한다.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낯선 것들 앞의 그 불편함을, 우리는 존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제의 감정을 통해서 해소하려고 한다. 그 때문에 장애인 문제의 심각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무관심과 편견이다. 특히 장애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은 차별에 관해 이야기하고, 권리를 주장해도 무관심과 편견이 대부분의 비장애인과 장애 남성들의 잠재의식에 도사리고 있어 막막함에 직면할 때가 많았다. 여성이라면 축복받아야 할 초경이 장애 여성에게는 본인은 물론 부모에게도 골칫덩이가 된다. 연애, 결혼, 출산도 비장애인 여성이 갖는 고민보다 훨씬 복잡하다. 건강 상태는 물론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여건도 충족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몇몇 비장애인 독자들은 “자기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데 무슨 다른 장애 여성들을 도울 수 있겠느냐”고 걱정할 것이다. 한때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은 장애 여성이지만 이 책을 통해 더 가까이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이 책의 글쓴이들은 발랄하게 웃으면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녀들은 비장애인, 혹은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애 여성의 몸’을 이야기한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하는(글 쓰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긴다. 그녀들에게 몸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에 맞춘 몸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몸이다. 장애 여성의 몸은 비극과 불행의 몸이 아니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아도 존재하는 몸들의 자기 확인은 유쾌하면서도 당당하다.

 

실제로 비장애인들은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장애인을 만날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대중매체에서 그려지는 장애인의 이미지들에 익숙해서 장애인은 자신의 판단과 실천을 할 수 없는 존재,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장애인은 이렇게 상상적 타자로 그려지고 ‘타자화’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관계망을 형성할 수 없거나 관계망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구성되게 된다. 도와주는 비장애인과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장애인이라는 방식의 관계로 재현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이기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자기 행복을 위해 저마다의 이유로 살고 있다. 장애인에게 느끼는 비장애인의 불편함은 ‘정상’, ‘표준’으로 정형화된 신체적으로 건강하면서 아름다운 몸과 비장애인의 몸에 대한 괴리감에서 생긴다. 타자에 대한 관심, 서로 다른 몸과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간의 만남과 교류가 정말 중요하다. 타자의 삶과 만나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만 느끼고 해석하면 타자의 삶을 절대로 체감할 수 없다. 자기 것일 뿐이다. 장애인에 대한 체감이 쉽지 않기에 우리는 장애인의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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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20 19:5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2018-11-2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20 19:56   좋아요 0 | URL
여전히 장애인과 함께 수업하는 방식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꾸 피하면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채 살아가게 되고, 장애인 복지 정책 도입이나 장애인 권리 문제에 시큰둥하거나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괴물은 부자연스러운 체형을 가진 존재이다. 보통 굉장한 힘과 잔인성을 가진 공포의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이다. 예를 들면 살아 있는 뱀이 뒤엉켜 있는 머리를 가진 메두사(Medusa)는 괴물이다. 스핑크스(Sphinx)는 사자의 몸뚱이에 상반신은 여자였다. 이 괴물은 어려운 질문을 인간에게 던진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간을 죽여 버린다. 고대 인도에서 신체적 기형은 신성한 존재로 이해했다. 아스테카(Azteca) 신화에 나오는 케찰코아틀(Quetzalcoatl)은 날개 달린 뱀의 모습을 한 창조주이다. 그는 우주의 생성에 관여한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지금 우리는 괴물을 어떻게 볼까? 물어보나 마나 인정하지 않는다. 괴물은 추하고 무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물을 정의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뭐라고 불러야 하지?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서 ‘정상’인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괴물’과 ‘기형’을 주제로 한 책을 지금 소개하는 건 최근의 고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 고민은 ‘기형’이라는 말을 대신할 단어를 찾는 것이다. 기형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기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람직한가? 이번에 소개할 책들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만든다.

 

 

 

 

 

 

 

 

 

 

 

 

 

 

 

 

 

 

 

 

 

 

 

 

 

 

 

 

 

 

 

 

 

 

 

* [품절] 게르트 호르스트 슈마허 《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 (도서출판 자작, 2001)

* 필리프 코마르 《인체 : 에로티시즘과 해부학》 (시공사, 2001)

* 아먼드 마리 르로이 《돌연변이》 (해나무, 2006)

* [절판] 마크 S. 브룸버그 《자연의 농담》 (알마, 2012)

* 스테판 오드기 《괴물 : 가깝고도 먼 존재》 (시공사, 2012)

* 토드 로즈 《평균의 종말》 (21세기북스, 2018)

 

 

 

《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 (도서출판 자작)《돌연변이》 (해나무), 《괴물 : 가깝고도 먼 존재》 (시공사)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온갖 기형 증상을 보여준다. 결합쌍생아(샴쌍둥이), 거인증, 단안증(외눈증) 등 다양한 기형 증상에 대한 역사적 기록,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살핀 뒤 현재 ‘기형학(Teratology)으로 밝혀낸 그 원인의 의미를 설명한다. 기형학이 등장하면서부터 기형은 ‘혐오의 대상’에서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러한 변환점이 있다고 해서 기형에 대한 대중의 왜곡된 시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기형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을 우리에 가두고 전시하는 프릭 쇼(freak show)는 20세기에 들어서까지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프릭 쇼의 무대 위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장애인이다. 프릭 쇼를 홍보하는 매체는 그들을 ‘이국적인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방인’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프릭 쇼의 장애인들은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태어난 서구인이었다.

 

프릭 쇼는 ‘비정상적인 신체’를 전시하여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무엇이 ‘정상적인 신체’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프릭 쇼를 즐기는 관객들은 ‘비정상’과 ‘정상’의 이분법 속에 강력하게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누가 괴물이며, 정상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관객들은 충격과 호기심을 느낌과 동시에 무대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위치가 ‘정상’임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기형과 괴물을 작품의 소재로 즐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인체 : 에로티시즘과 해부학》 (시공사)은 예술에서의 ‘기형’을 ‘가시적인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신호로 본다. 괴물은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상징하는 대상이었고, 예술가는 그것을 ‘혐오’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아름다움’을 한층 더 부각한다. 괴물의 모습과 대비되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관객은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존재가 된다. 그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움’이란 ‘균형 잡힌 완벽한 신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평균의 종말》 (21세기북스)에서는 ‘평균’ 개념으로 인간의 특징을 설명하려고 했던 통계학자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평균에 가까운 인간’을 ‘정상’으로 분류하여 이에 미치지 못한 사람은 ‘기형’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누군가 ‘비정상’으로 지목될 때, 그와 대척점의 구도에선 사람은 정상적인 존재가 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는 사회에서 ‘혐오’가 작동하는 방식과 같다. 혐오는 신체적 차이뿐만 아니라 성 정체성(gender identity), 섹슈얼리티(sexuality)를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로 전환하며 이를 통해 차별과 배제를 구성한다. 《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는 한때 기형으로 분류된 간성(intersex), 동성애, 성도착 등도 언급한다. 지금은 동성애자를 ‘기형’의 한 범주로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는 ‘비정상’으로 지목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특징을 모두 가졌다는 이유로 양성인을 ‘완벽한 인간’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상황일 뿐, 시간이 지나면서 양성인은 기형적인 질환으로 간주하였다. 《자연의 농담》 (알마)은 기형을 ‘진화적 관점’으로 설명하면서, 기형적인 모든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았는지 보여준다. 《돌연변이》의 저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유전자를 300개씩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유전적 변이로 인해 생긴 기형은 생물학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발생 과정에서 해당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기형의 원인을 무조건 유전적 요인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기형을 일으키는 유전질환은 유전자 이상과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는 복합적인 사례가 대부분이다.

 

기형인 생명체들은 라틴어로 ‘자연의 농담(Iusus natura)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 말은 기형을 ‘자연의 실수’로 인식하는 오늘날의 관점과 대비된다. 실수는 ‘잘못함’ 또는 ‘잘못됨’이라는 전제가 들어가 있다. 기형을 ‘자연의 실수’로 보는 사고방식은 그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면 안 될 ‘잘못된’ 존재로 보는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자연의 농담》에서는 기형 이외에 ‘이형(異形)이라는 단어도 나온다. ‘정상’을 뜻하는 ‘전형(全形)’과 반대되는 표현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형도 ‘자연의 일부’이며 오랜 진화의 결과인 ‘다양성’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타자의 생김새가 나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그것을 ‘전형’의 틀에 맞춰 ‘비정상’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기형 대신에 ‘이형’이라는 말을 쓰기로 했다. 물론, 단어를 바꿔서 사용한다고 해서 기형에 대한 차별적인 뉘앙스가 퇴색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형’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이형과 전형을 비교하려는 인식을 경계해야 한다. 차이가 차별로 변질하고 다름이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혐오는 일상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 무섭다. 잘도 숨어버리는 이 혐오야말로 우리 현실에 잠복하여 시시때때로 섬뜩한 손톱을 내미는 현재형의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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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1-19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놓은 책중에서 유일하게 읽은 책은 기형의 역사 하나뿐이네요^^;;;

cyrus 2018-11-20 19:58   좋아요 0 | URL
기형학을 처음 소개한 책일 겁니다. 이런 책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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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복잡하다. 현 상황은 과연 자연스러운 전환기의 모습일까, 아니면 심각한 사회 해체의 과정일까? 어떤 때는 지나친 기우라는 생각도 든다. 일반적으로 문명이 인간의 의식 구조보다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사회가 급격히 변동하는 과정 속에는 어느 정도 혼란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흔들리고 있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연약한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상징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고 발전의 동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구성원들 간의 가치 합의와 상호 신뢰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러한 사회적 신뢰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과 규정을 어기고 공익을 해치는 행동을 예사롭게 여긴다. 개인주의에 매몰된 개인의 이익 추구는 결국 공동체나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침해함으로써 어떠한 형태로든 혐오와 폭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주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라는 개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전제되는 개념이다. 개인주의는 사회 속에서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사회나 공동체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 하고, 개인은 사회에 대하여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사회의 부당한 요구나 권리 침해에 대하여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시민의식이 형성되었고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기주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책임은 다하지 않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기주의가 만연하게 되면 사회 속에서의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서로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이는 결국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하여 배척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시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만을 챙기는 데 전념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회의 부당한 행태를 알고도 묵인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윤리적 가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오로지 나 자신의 이익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 개인주의의 성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믿을 수 없게 되며, 또한 사회공동체의 과제에 협력하지도, 그 필요성을 깨닫지도 못하게 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역사의 종말》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냉전은 끝났으며, 21세기에 인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지 십 년이 지난 후에 후쿠야마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시대가 역사의 최종 종착지로 실현되면 역사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고 멈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만한 선택지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쿠야마는 자신이 《역사의 종말》을 썼을 때, 과학기술의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즉 과학기술이 계속 발전하지 않는 한 역사의 종말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앞으로 확고부동한 진리로서 장기간 군림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대가 이대로 계속 유지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희망을 받아들일 때 정말로 곤혹스러운 것은 공산주의가 한물간 체제라고 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역사의 마지막 단계로 인정하기에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현실이 너무 각박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극단적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질하는 사회를 바라보며 이것을 인류 역사의 최종 단계라고 낙관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인류로선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일방적인 승리에 도취하여 자유 시장경제의 장점만 부각하는 건 ‘희망 고문’일 뿐이다.

 

서평의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말았다. 극단적 개인주의에 대한 필자의 염려와 《역사의 종말》의 한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한 이유는 유발 하라리《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약칭 ‘21가지 제언’)의 서문에 대한 부연 설명을 미리 하기 위해서였다. 하라리는 이 책에서 ‘혼미의 시대’ 속에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면서 그는 책의 서문에 자유주의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다.

 

 

 역사는 예상 밖의 선회를 했고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 지금 자유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12쪽)

 

 

이 책은 단순히 인류의 미래를 논하는, 그저 그런 미래학적 예언서는 아니다. 저자는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개인주의, 자유민주주의의 한계와 문제점을 직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유민주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인류가 근대 세계로 향하면서 개발한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말한다. 인간 자신이 바로 앎과 사람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한 기준이 됐다. 이와 같은 생각에 기반을 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근대 시민사회에서 개인의 위치와 역할을 규정하는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므로 독자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그것이 인류에게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물론 자유주의가 불변의 진리라든가, 완벽한 사상인 것처럼 믿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21가지 제언》의 부제를 빌려서 이 책의 주제를 단 한 줄로 표현하자면, ‘더 나은 자유주의 시대는 어떻게 가능한가’로 볼 수 있겠다. 하라리는 변화에 적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자유주의 모델을 제시한다.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의 근간을 이룬다고 해서 썩을 대로 썩은 자유주의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부정적인 전망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에 ‘사망 선고’를 내리면서까지 멀리할 필요는 없다. 공산주의를 제안한 마르크스의 ‘처방’은 틀렸어도 그의 진단에 주목하듯이, 자유주의 역시 여러 모로 한계가 있어도 새롭게 고쳐 나갈 수 있다면 지금도 유효하다.

 

자유주의와 인류는 ‘기술적 도전’과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기술적 도전’은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알고리즘의 결정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며, ‘개인의 자유’라는 생각의 기반이 위태로울 수 있다. ‘정치적 도전’이란 민족주의의 과잉과 종교 근본주의의 부활로 인해 일어나는 국제적 분쟁이다. 민족주의자와 종교 근본주의자는 국가 또는 특정 사회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환경 문제나 핵전쟁 같은 복잡한 문제를 소홀히 다룬다. 이러한 갈등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통해서 해결하기 어렵다. 사회 분위기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만들어지는 가짜 뉴스와 (보이지 않는) 테러의 공포는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킨다.

 

불확실하고 복잡한 사회적 분위기에 속절없이 갇힌 개인들의 ‘각자도생’을 이제 어찌할 것인가. 하라리는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 나에 대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라는 주체는 합리적이지도,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의외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살면서 느끼는 나쁜 마음, 슬픈 마음 등 내면의 고통을 용감하게 대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관찰’하면서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관찰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환경이나 타인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하라리는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순간순간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실 그가 제시한 21가지 제언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상식적인 ‘제안’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푸짐한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것처럼 늘어놓았는데, 음식 가짓수가 많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다. 유발 하라리의 책을 ‘종이’라는 식탁 위에 차려진 21가지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음식 가짓수는 많은데 딱히 먹을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식탁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 내린 음식 '처방'은 구체적이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 종이 식탁에 차려진 음식 중에 먹을 만했던 것은 ‘애피타이저’에 해당하는 서문이었다. 눈으로 먹고 난 뒤에 자유주의에 대해 많이 생각해볼 수 있다. 마지막 메뉴가 아쉽다. 먹을 게 별로 없는 마당에 마지막에 ‘명상’이라니. 책을 다 읽어도 다시 허기를 지게 만드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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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11-13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I루스 박사님 멋집니다. 짝짝짝!!

cyrus 2018-11-14 12:18   좋아요 0 | URL
계속 박사님 소리 들으니까 부담스럽네요.. ㅎㅎㅎ 그런데 ‘Sl루스’를 거꾸로 부르면 안 되겠어요. ‘스루IS’가 되는데, 이슬람 테러 집단 이름처럼 보이네요. ^^;;

2018-11-14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14 12: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ㅎㅎㅎㅎ 저자가 진중하게 미래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다가 마지막에 명상을 언급해서 김이 샜습니다.. ^^;;
 
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31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 갈무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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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Marx)《공산당 선언》에서 구체제를 뒤흔드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출몰하여 결국은 전 세계적인 권력을 잡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수백 년이 넘게 지난 지금, 공산주의가 아닌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전 세계적인 권력을 잡아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의해 주도되는 ‘자본 축적’의 새로운 양식이다. 시장은 겉으로는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거래와 교환의 장소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선택, 서열화, 배제의 원리가 작동한다. 그 결과 상품 및 인간관계를 특권화하거나 황폐화한다. 특히 자본 축적을 위해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포섭한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착취를 이윤으로 바꿔버린다. 인간의 노동력은 자본이 유통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의 핵심은 자본의 자유가 역사상 어느 때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화되었고, 자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축적 과정이 허용됨으로써 인간적 삶의 틀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본 축적은 자본주의가 이행되는 역사와 함께할 만큼 오래됐고 해결이 어려운 문제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자본이 피와 오물을 뿜어대면서 지상에 나타났다고 썼다. 그에 따르면 자본의 태동 과정인 ‘시초 축적(primitive accumulation)농민 공유지에 대한 야만적 약탈에서부터 시작된다. 자본 축적 역사의 첫 장면에 나오는 공유지 약탈은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으로 알려진다. 역사적으로 인클로저 운동은 크게 두 차례 일어났다. 15세기 지주들은 자기 땅을 가지기 위해 공유지에 울타리를 쳤고 그 땅에서 일하던 농민들을 쫓아냈다. 땅을 강제로 빼앗긴 농민들은 빈민층으로 전락했다. 19세기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도시로 건너갔다. 이들이 직면한 도시는 이미 자본주의의 물결이 퍼지고 있는 세계였다. 즉,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 생존이 가능한 세계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시초 축적 개념을 언급하면서 궁핍과 실업의 공포에 떠는, 도시 노동자와 빈민 들이 늘어났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공동체를 해체해야만 가능한 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농민 공동체, 마을 공동체를 가차 없이 때려 부수고 공장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빈곤한 노동자들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마르크스가 시초 축적을 설명하면서 ‘중대한 사실’ 하나를 놓쳤다고 지적한다. 그 중대한 사실이란 15~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유럽에 행해진 마녀사냥을 악마와 마법에 대한 집단적 적대감이 만들어 낸 광기의 역사 정도로 인식한다. 그러나 페데리치는 마녀사냥을 자본주의의 도입과 이행 과정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기존에 알려진 마르크스의 시초 축적 개념을 보충한다.

 

그동안 마르크스를 포함하여 자본주의를 연구한 학자와 역사가들은 농민이었던 남성들이 도시 노동자가 되어 가는 과정들만 언급했다. 그러나 인클로저 운동 이후 여성은 임신과 육아, 그리고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이유 등으로 이주할 수 없었고 따라서 여성은 남성처럼 상업 공간에 진출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여성의 활동은 재생산 노동(출산, 보육, 가사 노동)에 한정되었고, 여성이 남성처럼 일한다고 해도 그에 따른 임금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여성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무산계급)이나 다름없었으며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여성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태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여성의 노동이 착취된 사례를 언급하지 않았다.

 

페데리치는 마녀사냥이 자본주의가 확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 즉 ‘시초 축적’의 사례라는 점에 주목한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남성의 노동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임금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여성은 남성과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생산 기계’가 되었다. 여성의 역할은 그저 집에서 머무르며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재생산 노동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출산과 무관한 성행위와 피임을 막아야 한다. 중세의 여성들은 약초를 이용한 피임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출산 통제를 위한 지식은 여성 공동체 내부에서 공유되어 전해졌다. 그렇지만 공유지가 사라지면서부터 여성의 출산 통제에 대한 인식은 달라졌다.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삶의 희망을 잃은 농민들은 땅을 강제로 약탈한 지배 계급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픈 지배 계급은 여성을 탄압하는 전략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농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여성을 ‘마녀’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이로 인해 빈민 또는 범죄자가 된 남성들은 자신들이 불행해진 이유를 ‘마녀의 사악한 힘’에서 찾으려고 했다. 남성들은 여성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비난했고, 죄 없는 여성을 마녀라고 지목하면서 화형대 위로 올려세웠다. 그 결과, 국가는 여성의 신체를 완전히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노동하는 인구를 늘리기 위해 여성의 사적 영역인 출산에 개입하는 근대적 통치술이 등장한 것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개인의 신체를 통제하는 권력의 실체를 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마르크스처럼 마녀사냥을 주목하지 못했다. 페데리치는 푸코의 입장도 비판한다.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통치술은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장될수록 위력을 떨친다. 제국주의의 기세가 만개를 떨치던 시기에 유럽인들은 토착민을 강제로 몰아내어 식민지를 약탈할 때도 이 통치술을 이용했다. 이 책의 제목에 있는 캘리번(Caliban)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희곡 《템페스트》에 등장하는 마녀의 아들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반자본주의적, 반식민지적인 세력을 ‘캘리번’과 같은 괴물로 묘사했다. 자본주의는 자신들이 착취하는 대상을 깎아내릴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마저 지우려고 했다. 자본주의는 부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적인 괴물은 수많은 사람을 몰아내거나 잡아먹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빼앗은 것은 안정적인 삶뿐만 아니다. ‘희생양’을 만들어내어 그것을 공격하게 만드는 또 다른 괴물들을 태어나게 했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이 확산하면서 여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난민 차별 문제가 더해지고 있다. 여성, 성소수자, 난민이 '괴물'로 오해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이로 인해 정의롭지 못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연대의식과 응집력,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인간성마저 괴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캘리번과 마녀》는 신자유주의가 가져다준 풍요에 눈멀고, 신자유주의가 만든 희생양에 속기 쉬운 이 세상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이 우리의 삶을 좀 더 성찰하게 하고 거대한 세상의 구조를 다시 살펴보게 만드는 거울이라면 우리는 거울을 다시 꺼내 들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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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19 11:28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도 그 점을 지적했고, 여성 간의 경제력 차이가 여성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2018-10-18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19 11:30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 푸코의 이론이 언급된 책이라 내용이 어려울 수 있지만, ‘마녀사냥’을 재해석한 책의 3, 4장을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
 
시스터 아웃사이더 딕테 시리즈 1
오드리 로드 지음, 주해연.박미선 옮김 / 후마니타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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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드리 로드(Audre Lorde)를 알게 된 것은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흑인 여성의 경험을 분석의 핵심에 두고, 수많은 흑인 여성 운동가를 광범위하게 인용한다. 특히 “억압이 매일 먹는 음식처럼 일상적인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감시자가 되어야 했다”[주]는 오드리 로드의 인용 구절은 성 · 계급 · 인종 차별의 삼중 고통에 시달리는 흑인 여성의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흑인 페미니즘은 인종 차별, 성차별 등 인간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과 억압을 비판한다.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서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에 따른 억압에 저항하고, 지속적인 제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흑인 여성의 힘 기르기(empowerment)를 강조한다.

 

오드리 로드는 1970~80년대 백인 여성 주류의 페미니즘과 흑인 남성 중심의 흑인 민권운동에 맞선 시인이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이다. 1970~80년대 이 시기 페미니즘이 일구어낸 성과는 대단했지만, 비판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벨 훅스(Bell hooks)는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백인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 억압 문제에 접근한 나머지 여성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고 말한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억압의 원인이 젠더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종 문제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여성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어떤 계급, 종교, 인종,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 등을 지니는가에 따라 처한 상황은 다르다. 이런 차별과 억압의 교차성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분석도 흑인 여성들이 종속되어 온 복잡한 억압 구조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로드는 페미니스트 공동체에선 흑인으로, 흑인 공동체에선 여성으로, 이성애자들 앞에선 레즈비언으로 싸웠던 자신의 행적을 글로 표현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는 로드가 1970~80년대에 쓴 글과 연설문을 모은 책이다. 자신을 ‘흑인, 레즈비언, 어머니고 전사이자 시인’이라고 말한 그녀는 인종차별, 성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입장을 드러냈다. 로드의 글을 읽기 전에 그녀의 개인사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다. 로드는 서인도 제도 출신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열두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는 그녀의 정체성과 사상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다. 백인 게이 남성과 결혼해 딸과 아들을 가졌고, 이혼 후 백인 레즈비언 여성과 살면서 두 아이를 길렀다. 1978년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지만, 투병 중에도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를 시, 에세이, 연설을 통해 끊임없이 증언했으며 흑인 여성 해방 운동과 성소수자 해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번에 출간된 《시스터 아웃사이더》는 한 편의 글을 제외하고는 1984년 초판을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 2017년에 쓴 사라 아메드(Sara Ahmed)의 추천사와 세 편의 연설문이 추가되었다. 로드는 흑인 여성의 정체성과 경험으로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문제’라는 어려운 두 가지 담론을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그녀는 페미니즘 운동의 긍정적인 성과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긍정적 전망을 잃어가고 있는 페미니즘을 위해 과감한 비판의 수혈을 했다. 로드가 생각한 저항과 투쟁을 위한 ‘힘 기르기’는 ‘흑인 여성의 삶과 경험을 말하기’와 글쓰기, 즉 ‘침묵하지 않기’다. 그녀에게 시는 ‘혁명적인 무기’이자 ‘생명줄’이다.

 

『시는 사치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로드가 정의한 시는 인종, 계급, 성 정체성, 학력, 나이 등에 따라 성별에 맞춰 특정한 역할을 강요받는 억압들과 그에 직면하면서 얻은 감정을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는 장르이고, 그것에 대해 사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로드는 상호교차성 이론이 나오지 않았던 시기에 차별은 절대로 단순하지 않으며 각각 다른 차별의 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고 있었다. 그러면서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가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과 맞물려 작동하면서 서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권력 구조를 분석한다.

 

주류 집단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서 타자가 원하는 것, 또는 생각하는 것을 정의한다. 갈수록 그런 일은 보편화하고 표현도 당당해진다. 그들이 타자의 이름으로 말할 때 다른 생각과 감수성을 가진 또 다른 타자들은 자연히 주류가 정의하는 타자의 개념에서 배제되고 소외감을 느낀다. 변화를 추구하는 집단 내부에서조차도 차별과 배제는 항상 있었다.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했던 흑인 여성들은 흑인 남성들과 함께 민주시민으로 살 수 있는 평등권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흑인 여성들은 흑인 공동체 내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억압인 성차별을 인식했다.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의 가부장적 억압은 인종차별주의와 같은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로드는 『성차별주의 : 흑인 가면을 쓴 미국의 병폐』에서 흑인 남성이 누리는 특권을 정면으로 비판했고, 흑인 여성도 민권운동의 주체적인 존재임을 강조했다.

 

서구 페미니즘 운동 역사에서도 차별과 배제는 마찬가지로 존재했다. 인종 · 계급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보편적인 백인 여성의 억압만을 강조해온 서구 백인 중산층 중심의 여성 운동은 흑인을 비롯한 제3세계 유색 인종 여성이 경험하는 다중적인 억압을 인식하지 못했다. 백인 중산층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을 때 그들의 집에는 하녀로 일하고 있는 흑인 여성들이 있었다. 백인 여성의 입장과 제3세계 여성의 입장은 달랐으며 중산층 백인 여성이 여성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때 그것은 제3세계 여성을 대변하지 못했다. 보부아르(Beauvoir)의 《제2의 성》 출간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학술대회에서 연설한 로드는 백인 특권층 여성들이 생산한 페미니즘 이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최근 강연에서 애드리언 리치가 지적했듯이, 지난 10년간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그토록 어마어마한 양의 공부를 했다면서, 도대체 왜 흑인 여성에 대해서는, 또 우리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공부를 안 하는 건가요? 바로 거기에 페미니즘 운동의 사활이 걸려 있는 이 시기에 말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180쪽)

 

 

 

로드는 페미니즘 운동과 민권운동 내에 존재하는 모순과 차별, 억압을 사유하면서 ‘차이’의 의미를 확인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페미니즘이 무엇보다 ‘차이’를 보듬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에게 생존은 모두가 잘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를 상상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자들, 즉 구조 바깥에 존재하는 아웃사이더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생존은 우리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벼리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178쪽)

 

 

 

페미니즘은 수많은 여성에게 ‘말할 수 있는’ 언어와 ‘행동하는’ 힘을 제공했다. 그러나 차별에 관하여 설명하는 언어와 방식이 ‘인종’과 ‘젠더’ 범주 내에서 가장 특권화 된 계층이 겪는 차별만을 포함하고 있어서, 이보다 더 주변화된 범주의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배제하고 있다. 오드리 로드의 글과 목소리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가로지르는 구조를 드러내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인종차별과 성소수자 차별을 언급하는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상호교차성 이론이 여성들 간의 연대를 돈독히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피해만을 강조하여 분열을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하지만 로드가 말했듯이 ‘깨져야 할 침묵’은 너무 많다.

 

 

 우리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더라도 각자가 할 일을 하고 할 말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중략]

 우리가 여기 모여 있다는 것, 그리고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침묵을 깨고 우리의 차이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발을 묶고 있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침묵입니다. 그리고 깨져야 할 침묵은 너무나 많습니다.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꾼다는 것』, 53쪽)

 

 

억압당한 이들이 자신의 부당한 경험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목소리가 억압 주체가 속한 집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함이 ‘침묵’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주변화되어 더욱 억압받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소거하는 페미니즘은 복잡하게 교차한 다양한 ‘차이’를 외면한다. 로드는 ‘차이’ 자체가 억압의 구조를 부수는 창의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이 더 넓고 깊게 발전하려면, 나와 타자 사이에 선 위치에서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로 인한 차별과 소외는 없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 Trivia

 

* 1940, 50년대 되면 추천 도서 목록에서 대부분 삭제되었다. (역주, 287쪽)

→ ‘50년대가 되면’을 ‘50년대에 들어서면서’로 고쳐야 한다.

 

* 흑인 여성인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은 “흑인은 아름답다” 단순화된 주장을 넘어선다. (336쪽)

→ ‘은’을 ‘라는’으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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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18 07:14   좋아요 0 | URL
관용이 위험한 이유는 타자에 대해서 알지 않았으면서도(무관심했으면서도) 타자의 입장을 존중한다면서 말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위선이죠.

syo 2018-10-19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도서관에 이 책 들어와 있는 게, 혹시 사이러스님 작품인가요 ㅎㅎㅎㅎㅎ

cyrus 2018-10-19 11:45   좋아요 1 | URL
중앙도서관에 있는 <시스터 아웃사이더>는 제가 신청하지 않았고요, 서부도서관에 있는 책은 제가 신청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