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 선언
애널리 루퍼스 지음, 김정희 옮김 / 마디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 ‘산유화’ 중에서)

 

 

 

산에 피는 꽃은 소박하다. 내색하지 않고, 유난 떨지 않고, 저만치서 봄을 이야기한다. 야생화들은 조용한 외톨이의 삶을 닮았다. 화려하게 봄 행세를 하지 않더라도, 나직하게 피어오르더라도, 소리 없이 씨앗을 퍼뜨린다. 모든 존재는 저만치만큼의 거리감을 느끼고 살아간다. 결국, 우리는 세상을 혼자 살아가고 있다. 가족이 있고 연인이 있고, 친구가 있지만 모두 저만큼의 거리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결국은 혼자라는 의미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서 혼자 가는 존재이므로 본질적으로 외롭고 불안하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 부득이하게 혼자 있어야 하면 갑자기 우울감이 엄습한다. 개인의 독립적인 생활이 늘어나면서 혼자 밥 먹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외톨이가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을 향한 시선은 조금은 곱지만 않다. 주변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사람들을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ひきこもり)로 쉽게 규정한다. 심리상담 전문가들은 히키코모리가 감정 처리에 굉장히 미숙하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아예 모든 인간관계를 차단하거나, 자신의 상태에 대한 솔직한 성찰의 기회가 부족해진다고 본다. 그들은 고독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히키코모리의 상황을 우려한다. 단절된 관계 속에서 괜히 엉뚱한 데 화풀이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히키코모리는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는다. 뉴스는 살인 사건 용의자를 히키코모리라는 프레임 안에 가둔다. 단순한 프레임에 익숙해진 우리는 히키코모리를 흉포한 사람으로 여긴다.

 

 

 

 

 

히키코모리라는 단어가 발명되기 전부터 이미 외톨이는 특이하고 음습한 존재로 취급받으면서 살아왔다. “나를 좀 제발 놔두시오!” 좀머 씨의 독백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좀머 씨는 무언가 쫓기는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마냥 걸어 다닌다. 일반적인 사람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기이하기 그지없다. 작가 애널리 루퍼스는 독자들 앞에서 외친다. “나를 좀 제발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그녀의 외침은 외톨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현실로부터 상처 입은 순수한 영혼의 몸부림이다. ‘하나의 유령이 도시를 배회한다. 외톨이주의 (Ioneriem)라는 유령이.’ 루퍼스는 이렇게 자기 존재를 알린다. 그리고 외톨이를 문제아로 보는 사회 앞에서 당당히 외친다. ‘만국의 외톨이들이여, 단결하라!’ 그녀의 책 《외톨이 선언》은 외톨이가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꿈꾸고, 세울 수도 있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강조한다.

 

외톨이에게 세상은 언제나 난세였다. 대중은 외톨이를 사회 부적응자라고 생각한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 모든 손님의 시선을 받는다. 영화 속 외톨이는 고독의 절망감 속에서 점점 미쳐가는 병적인 인간으로 묘사한다. 미디어는 ‘병 주고 약 주기’식으로 외톨이들을 제 입맛대로 이용했다. 반 고흐 같은 예술가를 재주가 넘치는 위대한 외톨이로 내세운다. 외톨이들의 특별한 재주는 만인의 추앙을 받는다. 세상의 외톨이들은 미디어의 ‘약’을 넙죽 받아먹는다. 그러나 이 약은 외톨이들의 존재를 드높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외톨이들에게 일종의 ‘힐링’을 유도하는 가짜 약이다. 현실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외톨이들은 외톨이들의 재주를 선호하는 주류의 반응에 흥분한다. 그들의 반응을 통해서 위로와 안도감을 받으려고 한다.

 

루퍼스는 비록 외톨이가 현실에서는 비주류이지만, 창작의 세계에서만큼은 주류라고 자부심을 표출한다. 당대에 멸시받던 무명의 외톨이 예술가가 후대에 제대로 인정받아 성공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그렇지만 루퍼스는 외톨이를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들떴던 것일까. 외톨이로 살다 간 유명 인사와 예술가 들을 열거하고 설명하는 데 지나치게 열을 높였다. 외톨이의 창조력에 초점을 맞추면서 《외톨이 선언》을 읽으면 헛바람이 들어갈 수 있다. 이건 책의 핵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독서다. 외톨이가 돼서 방 안에 틀어박혀 창작에 열중하면 대중의 시선에 한 몸에 받는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꿈 깨시라. 여기에 착각한 외톨이들은 주류에게 인정받는 성공에 대한 열망에 들떠서 혼자 흥분한다. 그들의 눈에는 인정의 욕망이 만든 ‘성공’이라는 신기루가 보일 뿐이다. 외톨이가 대중문화에 이바지한 공로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의 재주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외톨이는 외로운 창작의 임부를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 특수한 존재가 아니다. 루퍼스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진정한 외톨이는 따로 있다. 그들은 이 세상 한가운데에 자신이 ‘홀로 있음’을 알면서도 관계의 끈을 여유 있게 잡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들은 관계의 끈을 밀고 당길 줄 안다. 혼자 있고 싶을 땐 혼자서 시간을 잘 보내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도 잘 듣는다.

 

《외톨이 선언》은 ‘외톨이들은 이 세상에 특별한 존재’라고 떠벌리면서 자신들을 광고하는 책이 아니다. 외톨이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굴하지 않고, 남들처럼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진실한 영혼의 목소리다. 진짜 외톨이는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불만으로 가득 찬 유별난 존재가 아니다. 가짜 외톨이는 자신의 위태로운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외톨이라는 가면을 사용한다. 그 가면 속에 숨으면서 자신을 향한 타인들의 눈치를 살핀다. 진짜 외톨이는 외로운 감정을 느껴도 참을 줄 안다. 또한, 남들 앞에서 자신의 고독을 광고하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 자기를 발견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나 자신에게로 나아가는 삶’을 찾는다. 그리고 자기를 타인 앞에서 표현하는 공간과 기회를 충분히 확보하고 넓힌다. 즉, 건강한 외톨이는 저만큼 떨어져 살아도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일 줄 안다. 살다 보면 관계보다 혼자가 더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당신이 혼자여도 별일 없이 잘살고 있다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이다. 저만치 혼자서 피는 꽃이 아름다운 것처럼 말이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돼지 2016-02-23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도현아`라는 가수의 `외톨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제 여식의 18번입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ㅋㅋ

cyrus 2016-02-24 08:28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노래 `외톨이`는 아웃사이더가 부른 비트가 빠른 랩입니다. 도현아의 `외톨이` 한 번 들어봐야겠습니다. ^^

yureka01 2016-02-23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독하더라도 외롭지는 말아야 될텐데요^^..(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더불어라면 좋겠습니다.^^))책과 더불어가 알라딘 서재잖아아요 ㅎㅎ^^

cyrus 2016-02-24 08:29   좋아요 2 | URL
맞아요. 가끔 외로우면 사람들과 가까이 다가가서 어울리는 시간을 만들어야 하죠. ^^

하양물감 2016-02-23 22: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혼자인 것을 좋아하는것과 외톨이라는건 다른데 그걸 오해하는 사람도 있구요.
아무리 혼자하는것이 좋다해도
같이 해야할 때는 해줄수도 있어야하지않을까 해요^^

cyrus 2016-02-24 08:33   좋아요 2 | URL
외톨이를 품성이 덜 된 이기적인 사람으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면 안되겠습니다. ^^

서니데이 2016-02-23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점점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외로움도 문제가 될 수 있겠군요.
cyrus님, 좋은 밤 되세요.^^

cyrus 2016-02-24 08:33   좋아요 1 | URL
좋은 하루 보내세요. ^^

페크pek0501 2016-02-24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성격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싶어서
예술적이어서 그래, 라는 말을 할 때가 있어요. 비사교적이고 때론 신경질적이고 인간 관계에 서툰 사람이 정말 예술적으로 보일 때가 있거든요.

예술가들에겐 외톨이 기질이 있을 것 같아요...

cyrus 2016-02-24 21:31   좋아요 0 | URL
그런 면이 있어요. 폴 오스터도 글쓰기를 고독을 동반한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으니까요. 김갑수 씨는 자기만의 작업실에서 클래식을 듣는 일이 정말 좋아해서 방송 일 끝나고나면 회식 없이 바로 작업실에 간다고 합니다. 그분도 고독과 창작의 관련성을 인정했어요.

서니데이 2016-02-24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좋은밤되세요.^^
 

 

 

 

 

 

우리는 빨간색으로 칠해진 날을 확인하면 마음이 설렌다. 빨간색 날짜가 많을수록 좋다. 황금 같은 명절 기간이다. 일에 지친 우리는 그날에 마음껏 쉴 수 있다. 하지만 명절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이날만큼은 진짜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즐거운 명절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분위기 브레이커’가 꼭 있다. 상대방이 듣고 싶지 않은 말만 골라서 하는 친척이다. 걱정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건 충분히 잘 안다. 하지만 취업 준비 잘 되고 있느냐고 물어보는 말은 취업 준비 스트레스에 예민한 친척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무시무시한 공격적인 말이다. 아예 그로기 상태로 만들려고 작정했는지 연속 펀치를 날리는 사람도 있다. “우리 아들은 아무나 못 들어간다는 대기업에 다니는데 넌 지금 어디 회사에 다니니?” 유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비교를 한다. 연휴 아니면 자주 만나기 힘든 사이인데 조카들 다니는 회사가 어느 정도인지 그렇게나 궁금한가. 은근슬쩍 취업에 성공한 자식 자랑을 한다. 꼭 마치 자기 자신이 자식 취업 잘되도록 키운 것처럼 얘기한다. 자식 농사는 부모가 했어도 취업 농사만큼은 자식이 혼자서 한 것이다. 자식의 노력을 모르고, 자식 자랑을 내세워 자신을 뽐내려는 어른은 밉상이다.

 

젊은 사람들이 덕담 같지 않은 덕담을 하는 어른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어른들도 무조건 피하고 싶은 친척이 있다. 자신의 경제적 수준을 과시하는 친척은 화목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근황을 스스로 알리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잘 살면서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을 남김없이 챙기려고 한다. 몸에 좋다거나 맛있는 명절 음식이 남아 있으면 다른 친척에게 나눠 줄 생각도 않고, 자신이 먼저 가져간다. 주방 일에 친척들이 다 같이 분담하면 명절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다. 그런데 눈치 빠른 며느리는 제일 번거로운 주방 일은 알아서 피한다. 만날 하는 친척만 주방 일을 담당한다. 주방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일하는 친척이 있는 반면에, 거실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데 여념이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친척도 있다. 이쯤 되면 그들은 친척이 아니라 ‘친적’이다. 친밀한 적. 가깝지만 더욱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존재. 그들이 미워도 대놓고 화를 내지 못한다.

 

명절 때만 되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불편하다. 며칠만 딱 참고 넘어가면 좋겠지만,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오랫동안 쌓이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명절 때만 되면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친척이 평소에 악감정 있는 다른 친척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전통적인 대가족의 모습이 점차 사라질수록 가족 간의 끈끈한 친밀감은 희미해져 간다.

 

이러한 불상사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운 사람이 있더라도 꾹 참아내며 긍정적으로 대하라는 식의 해결책은 별로다. 그건 대중 앞에 나서고 싶은 땡중이 가장 선호하는 공허한 수사다. 긍정론은 너무 케케묵었고 현실성이 없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상대방에 맞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상대방의 단점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이를 방관하면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심기 불편한 상황을 무덤에 갈 때까지 참아낼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런 사람은 화병과 우울증으로 고생한다.

 

 

 

 

 

 

 

 

 

 

 

 

 

 

 

 

 

칸트는 인간을 ‘뒤틀린 목재(crooked timber)’ 같은 존재로 봤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안다. 다만, 자신의 약점을 잘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과 무관하다. 약점을 스스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갖춰져 있다. 뒤틀린 목재라고 해서 완전히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제멋대로 말라비틀어진 목재도 훌륭한 안목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잘 다듬으면 멋진 조각 작품으로 변신한다. 이렇듯 약점이 있는 사람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사람들은 겸손할 줄 안다. 반대로 자신의 약점을 방치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설정한다. 더 이상 약점을 고칠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들은 약점을 잊으려고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잘못된 자만심은 자신의 존재를 거짓으로 치장하려는 나쁜 결과를 만든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커다란 소 앞에서 자신의 배를 억지로 부풀린 어리석은 개구리와 비슷하다. 결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는 ‘빅 미(big me)’다. 결함을 장점으로 만들려는 사람은 ‘리틀 미(little me)’다. 그들은 결함투성이의 작은 존재임에도 이를 고치려는 삶의 과정 자체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투쟁으로 생각한다. ‘리틀 미’는 ‘빅 미’처럼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지나친 욕심이 낳는 최악의 결과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정직하게 자기 수양에 몰두한다.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우리의 행동이 올바른지 그른지 판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상호 간의 예의와 신뢰가 형성되어야 관계가 돈독해진다. 다만 실천을 못해서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우리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살다 보면 결함 한 가지씩 생기게 마련이다. 애덤 스미스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순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남들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공정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주장한다. 공정한 관찰자는 겸손하다. 그래서 우리의 이기심을 억제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촉구한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즉 우리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항상 완벽한 존재로 보일 수 없다. 자신의 명예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인정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상대방의 관심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빅 미’가 되고 싶은 개구리는 배를 부풀리다가 그만 몸이 터져 죽어버린다. 겸손이 부족한 ‘빅 미’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고집하다가 망신살 뻗치게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다면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다. 그렇지만 ‘공정한 관찰자’의 목소리를 잘 듣는다고 해서 자만심의 덫을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그냥 분위기를 잘 파악해가면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니까 밉상이 되지 않도록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개념을 밥 말아 먹고 배불러 터진 사람은 어떻게 손 볼 도리가 없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약점이 많다고 했다. 못난 인간들이 알아서 개과천선할 거로 기대하지 않는다.

 

갑자기 내 안의 공정한 관찰자가 나에게 속삭인다. 아는 척하지 말라고. 그렇다. 겸손하지 못한 ‘친밀한 적’을 피하기 위한 정답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기에 ‘이렇게 하면 피할 수 있다’라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그런 결론을 내리면 나는 나 자신과 상대방을 기만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말만 하게 된다. 내 안의 공정한 관찰자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은? 나도 잘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될 친밀한 적을 피하는 법을.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맥(漂麥) 2016-02-09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밀한 적... 이 말 너무 공감합니다...^^
고향에서 조금 일찍 올라왔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그저 좀 더 건강하시기만 바란 명절입니다... cyrus님도 내일 마지막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cyrus 2016-02-11 09:09   좋아요 0 | URL
저희 부모님도 일찍 돌아왔습니다. 요즘에는 차례를 다 지내고 난 뒤에 집으로 일찍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고향집에서 쉬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집에서 연휴를 보내는 것이 훨씬 더 나아요. 연휴 마지막 날에 집으로 돌아오면 피곤할 수도 있으니까요. ^^

2016-02-09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0 0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0 0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것도 이 새벽에...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책 잘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

cyrus 2016-02-11 09:22   좋아요 0 | URL
책이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불후의 걸작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됩니다. 그래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시간 날 때 재미있는 《소설 마태우스》 서평 써주십시오. ^^

transient-guest 2016-02-10 0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0이 넘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을 어디선가 봤습니다.ㅎㅎ 명절에 모인 자리에서 어른들의 지갑은 열리고, 말씀은 좀 덜 하시면 좋을 텐데요.ㅎㅎ 가끔은 내 자신이 남을 불편하게 하는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cyrus 2016-02-11 09:30   좋아요 0 | URL
그런 말도 있었군요. 공감합니다. ㅎㅎㅎ  그런데 지갑은 안 열면서 입을 많이 여는 어른들도 있어요. 입만 살아있다고 해야 되나요? 세뱃돈이나 용돈은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신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제 친척 중에 이런 유형의 분들이 무려 두 명이나 있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만나면 서로 죽이 잘 맞아서 합동 밉상짓을 합니다. ^^;;

페크pek0501 2016-02-1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을 읽으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 중 `고상하고 싶은 욕구`에 주목했어요. 인간은 고상한 것을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웃을 돌보고 자선할 수 있다는 거죠. 만약 그런 욕구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기적이고 천박해지는 거죠.
흥미롭게 읽은 책이었어요. 님의 페이퍼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cyrus 2016-02-11 14:52   좋아요 0 | URL
고상한 욕구가 너무나 강한 나머지 자신의 수준을 모르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

clavis 2016-02-20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숭산스님의 평생화두ㅡ오직 모를 뿐.이 생각납니다 좋은 페이퍼 고맙습니다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그림을 본 관람자들의 시선은 아프로디테의 뒷모습에 제일 먼저 향했을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뒷모습만으로도 관능적인 자태를 뽐낸다. 변태 같다고? 무슨 소리!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아프로디테의 치명적인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우리는 변태가 아니다! 그저 한 장의 누드화를 보고 있을 뿐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아프로디테의 단장(원제: The Rokeby Venus)』 (1648년)

 

 

에로스 : 엄마! 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다리에 쥐가 나요.

 

아프로디테 : 계속 그러고 있어라, 아가야. 거울이 없으면 사람들이 날 좋아하지 않아.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벨라스케스는 관람자의 마음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관람자들이 아프로디테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도록 의도적인 연출을 했다. 벨라스케스는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민망하지 않도록 아주 중요한 존재를 하나 더 그려 넣었다. 거울을 들고 있는 에로스다. 관람자는 이 벌거벗은 여인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아프로디테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 여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거울이 있는 위치로 볼 때 여신의 얼굴상이 절대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려고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신의 뒷모습을 구경하는 관람자들을 관찰한다. 우리의 시선이 아프로디테의 뒷모습을 쭉 훑어보다가 거울로 향하는 순간, 거울 속에 있는 아프로디테의 눈과 마주친다. 마치 관음증적 시선으로 몰래 훔쳐보다가 발각된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화가의 멋진 연출력 덕분에 우리는 아프로디테의 뒷모습을 실컷 볼 수 있다. 아프로디테의 엉덩이를 뚫어지게 본다고 해서 변태라고 놀리는 사람도 없다. 벨라스케스는 에로스를 그려 넣음으로써 세속적인 여성의 나체를 그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를 비껴간 비난의 화살은 수백 년 지난 뒤에서야 벨라스케스를 추종한 프랑스의 화가 마네가 대신 맞았다. 에로스가 없었더라면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분명 마네의 『올랭피아』 못지않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희대의 걸작이 되었다.

 

잠깐만! 아프로디테 이야기에 너무 열중하는 바람에 에로스를 깜빡 잊고 넘어갈 뻔했다. 알고 보면 에로스는 참으로 불쌍한 녀석이다. 자신의 빼어난 미모에 ‘자뻑’에 빠진 엄마 기분을 맞추려고 애쓰는 중이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무릎을 오래 꿇고 있는 에로스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엄마! 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다리에 쥐가 나요.” 아들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아프로디테는 요지부동이다. 에로스가 거울을 치우면 신성한 몸의 지위는 상실된다. 그러면 관람자들은 더 이상 그녀의 몸을 보지 않는다. 아프로디테는 관람자들의 관음증적 시선을 즐기면서 자신의 매력을 전시하고 싶어 한다. 아프로디테의 나르시시즘이 강화할수록, 그녀의 몸은 벌거벗은 상태로 구경거리가 된다. 이로써 거울에 집착한 아프로디테는 ‘아프로디테 포르네(Aphrodite porne)’가 된다. 음란한 아프로디테. 그녀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신으로서의 자아)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설픈 포르노(porno) 여배우 흉내를 낸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나르시시즘을 확인시켜주는 거울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 화살을 들고 다니면서 돌아다녀야 할 에로스가 나르시시즘 병에 걸린 엄마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된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영혼을 조종해야 한다. 그러니까 에로스의 역할은 아프로디테가 진실한 아름다움, 본인의 주체성을 확인시켜주도록 자극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을 든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나르시시즘을 긍정하는 시동(侍童)이다. 아프로디테는 에로스의 타자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적 대상으로 변질한 나르시시즘을 확인할 때 에로스를 찾는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지배 영역에 포섭당했다. 그는 강한 의미의 타자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날갯짓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울을 든 에로스의 날개는 힘을 잃었다. 거울 하나 때문에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보여주기’를 위한 대상이 되었다. 에로스가 다시 날갯짓하려면 거울을 파괴해야 한다. 아프로디테와 에로스 모두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서로 간의 타자성이 성립되고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

 

아프로디테, 에로스, 나르키소스. 나올 사람은 다 나왔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르키소스를 사랑한 에코(Echo)다. 에코는 어디에 있을까? 에코는 한병철의 책 속에 있다. 2012년 《피로사회》, 2013년 《시간의 향기》, 2014년 《투명사회》, 2015년 《심리정치》 그리고 《에로스의 종말》. 제목만 다를 뿐 한병철의 사상은 메아리(echo) 같이 반복되면서 독자들 앞에 울러 퍼진다. 과잉의 긍정성으로 무장한 성과 주체는 《피로사회》에 먼저 나온 개념어다. 구경거리로 전시된 ‘포르노적 삶’은 《투명사회》에 이미 논했다. 《에로스의 종말》에 나오는 ‘할 수 있을 수 없음(Nicht-Können-Können)’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으면 《심리정치》를 읽어보면 된다. 《에로스의 종말》은 전작들의 내용을 반복하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한병철은 생각의 목소리의 울림을 좋게 하려고 ‘에로스’를 언급해보지만, 그것만 빼면 진부하다. 한병철의 책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라면 올해 나올 그의 책이 어떤 내용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일 년 마다 나오는 한병철의 책은 새 책인 듯 새 책 같지 않다. 그의 책이 나올 때마다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소개하는 언론사 서평을 보면 어이없는 웃음이 나온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이 2016-02-08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병철 씨가 봐야할 거 같은데 이 페이퍼 :)

cyrus 2016-02-09 20:26   좋아요 0 | URL
저자가 이 글을 보면 기분이 언짢을 겁니다.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6-02-08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좋은 평 안 하시면서 모든 한병철 책 꼭 읽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ㅎㅎ

cyrus 2016-02-09 20:28   좋아요 0 | URL
악평도 서평입니다. 저처럼 남들이 하지 않은 ‘딴소리’ 늘어놓는 사람도 있어야 재미있지 않습니까? 저는 호응이 많은 책에 단점 하나라도 발견하면 당장 알리고 싶은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ㅎㅎㅎ

비로그인 2016-02-09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스가 아프로디테때문에 거울을 들고 있어야 하니, 에로스의 타자성이 거세되고 나르시시즘으로 전락했네요. 자아리비도라고 하나요. 리비도가 외부에서 철수할 때 자신으로 향한다는 것, 아프로디테는 대상애의 결핍으로 무료함을 자신의 아름다운 신체로 향한 것 같네요. 어쨌든 생명충동인 에로스가 불쌍해지네요 ^^

cyrus 2016-02-09 20:31   좋아요 0 | URL
거울을 포기하지 못하는 에로스도 나르시시즘의 신호로도 볼 수 있겠군요. 색다른 해석입니다. 의견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 2016-02-09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설날 잘 보내셨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16-02-09 20:32   좋아요 1 | URL
네, 연휴가 금방 지나갈 정도로 잘 보냈습니다. 내일 마지막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2016-02-14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2-15 17:29   좋아요 0 | URL
책을 읽어보시고 난 후에 제 감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세도 좋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이죠.
 
전설의 땅 이야기 - 환상의 장소들로 우리를 인도할 지식의 나침반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4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야구 관련 유행어 중에 ‘나믿가믿’이라는 단어가 있다.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2011년에 처음 부임했을 때 나온 단어다. 이 해에 라이온즈는 외국인 타자 선수로 라이언 가코를 영입했다. 가코가 팀의 중심 타선의 한 축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시범경기부터 시즌 초반 내내 가코는 빈타의 늪에 허덕였다. 팀은 그의 홈런을 기대했지만, 영양가 높은 홈런이 나오지 않았다. 가코의 장타 능력은 좋지 않았어도, 인성은 좋았다. 류 감독은 모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에서 가코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 “나는 믿을 거야. 가코 믿을 거야”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성적이 부진한 선수를 끝까지 믿고 기용하는 류중일표 ‘믿음 야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당시 팬들은 첫 해 부임한 초보 감독의 믿음을 못마땅했다. 가코의 부진이 길어지자 야구팬들은 ‘나믿가믿’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류 감독의 경기 운영을 조롱했다. 드디어 가코는 92타석 만에 마수걸이 홈런을 쏘아 올렸다. 팬들은 이 홈런이 부활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장타율은 저조했고, 가코는 6월에 2군으로 내려갔다. 불행하게도 가코는 손가락 부상을 당해 시즌 도중 구단과의 계약이 해제되었다.

 

류 감독은 팀의 주축 선수들이 부진한데도 경기에 출전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라이온즈가 4년 연속 통합 우승을 달성하면서 류 감독의 ‘믿음 야구’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경기가 패하거나 감독이 신뢰한 특정 선수가 패전의 원흉이 되면 팬들은 ‘믿음 야구’를 언급해서 비아냥거린다. 사실 주축 선수만 믿고 경기를 운영하는 방식은 팀 전체에 독이 될 수 있다. 2군 성적이 좋은 선수들의 1군 진입이 어려워진다. 예전에 류 감독은 구단 내부에서 육성하는 2군 선수들의 능력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당장 1군 경기에 투입이 가능한 즉시 전력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진이 오래가는 주축 선수들을 믿는 류 감독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2군 선수의 경기력을 부정적으로 드러내는 발언은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2군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차츰 넓혀주지 못하고, 주축 선수들의 경기력에 의존하면 2군 선수들의 경기 능력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이렇듯 ‘믿음’이라는 단어가 마냥 좋다고 볼 수 없다. 

 

야구에 ‘나믿가믿’이 있다면, 이 지구에는 ‘나믿전믿’이 있다. “나는 믿을 거야. 나는 전설을 믿을 거야”를 줄인 말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책 《전설의 땅 이야기》는 수많은 ‘나믿전믿’의 사례가 가득 있다. 에코는 아틀란티스, 엘도라도, 샴발라 같은 인류의 환상이 만들어 낸 전설 속 장소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러나 에코는 이 모든 장소가 환상의 실체임을 강조한다. 인류의 상상력은 공유되어 하나의 믿음으로 굳혀지는데, 그게 바로 이야기의 한 형태인 ‘전설’이다. 전설은 상상력이 넘치는 인간이 만들어낸 재미있는 발명품이다. 보물이 가득한 전설의 땅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거부하기 힘든 매혹적인 판타지다. 전설은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는 인류를 바다 건너 움직이도록 부채질했다. 콜럼버스는 지상 낙원을 찾으려고 배에 올라탔다. 우리는 역사 수업시간에 콜럼버스를 ‘신대륙 탐험의 개척자’라고 배운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찾으려던 ‘신대륙’은 원주민이 사는 천연의 땅이 아니라 지도에 없는 지상 낙원을 의미한다. 콜럼버스는 생애 첫 번째 항해 기간에 바하마 제도 등을 발견하고 고국 에스파냐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돋보이려고 신대륙에 향료와 금광이 많다고 거짓말을 한다. 콜럼버스는 지상 낙원을 발견하지 못했는데도 금이 많은 지상 낙원의 존재를 믿었다. 그리하여 탐험가들의 배는 지상 낙원의 전설을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게 된다.

 

재미있으라고 만든 발명품인 전설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다. 콜럼버스의 거짓말은 다른 사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조용한 시골 마을 렌르샤토는 허풍쟁이 사제의 헛소문 때문에 음모론의 중심지로 변했다. 렌르샤토 교회의 사제는 교회 건물을 재건하는 과정에 보물을 발견했다고 허풍을 쳤다. 사제가 퍼뜨린 소문이 프랑스 전역으로 퍼지면서 평범한 마을 렌르샤토는 보물 사냥꾼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사제는 자신이 만든 거짓 전설을 이용해 기부금을 요청했다.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렌르샤토의 전설을 알리는 데 동참하는 협잡꾼들이 늘어났다. 전설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자 이제는 성경의 내용조차 왜곡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나중에 전설의 일부가 날조되었고, 허위로 판명되었음에도 여전히 전설을 믿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소설가 브라운은 렌르샤토의 전설을 소재로 쓴 《다 빈치 코드》를 통해 국제적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고, 소설에 언급되는 내용 일부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에코는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부추기는 댄 브라운을 비판한다. (에코는 댄 브라운을 자신의 작품 《푸코의 진자》에 나오는 음모론을 믿는 얼간이로 비유한 적이 있다) 전설을 좋아하는 순수한 감정을 이용하여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 ‘전설 팔이’가 지나치면 조롱거리가 된다. 제임스 힐튼의 소설 배경 샹그릴라가 유명해지자 중국은 원난 성 중디엔(中甸)이라는 동네 이름을 샹그릴라로 변경했다. 평범한 동네를 지상 낙원으로 홍보하여 관광객의 지갑을 노리는 희대의 개수작을 부렸다. 여기에 인도도 질세라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했다. 그들은 라다크 왕국의 수도였던 레(Leh)를 샹그릴라로 홍보했다.

 

에코는 허구의 장소를 상상하는 인류의 무한한 창작 능력을 존중한다. 다만, 광신적인 ‘나믿전믿’과 그런 인간의 허점을 이용하는 ‘전설 팔이’를 경계한다. 전설은 어른들을 위한 구전동화다. 몸은 다 자랐어도 허구의 장소로 향하고 싶은 동심은 살아 있다. 동심을 영양분 삼아 자란 상상력은 또 하나의 새로운 전설로 변모한다. 지상 낙원 같은 허구의 장소는 고달픈 현실을 잊게 해주는 곳이다. 그래서 인류는 전설을 사랑했다. 할아버지로부터 전설을 듣고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 자기 자식에게 그 전설을 알려줌으로써 낭만적 환상을 대대로 공유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전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믿전믿’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전설’에 점 두 개를 억지로 빼서 ‘진실’이라고 우긴다. 이들의 행보를 보면 처량하다.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설의 순수한 동심을 스스로 망가뜨린다. 전설은 전설일 뿐, 제발 진실이라고 우기지 마시길. ‘전설 팔이’로 사기 치는 놈들을 조심하시라.

 

 

 

 

※ 책 속에 발견한 오자


‘동박박사’ (52쪽), ‘동방방사’ (53쪽), ‘어마어한 보물을 찾아냈음을 암시하는’ (410쪽)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12-2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생각없이 읽으면 본론은 영화 <머니볼> 얘기가 전개될 거 같은데, <전설의 땅 이야기>! 다른 사람 리뷰는 이런 독특한 글 전개 보는 맛^~^!
<오래된 미래> 보면 라다크 경우는 그래도 설득력 있지 않나 하는데요~ 생활풍습, 가치관 등을 보면... 개발 오염 우려를 들어서 최근 상황 어떤지 찾아보니 아직은 괜찮은 것 같기도..울란바토르처럼 되지 않길...

cyrus 2015-12-27 17:24   좋아요 0 | URL
오늘 글을 다시 보니까 류중일 감독 이야기가 너무 많이 차지한 느낌이 들어요. 재미있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표맥(漂麥) 2015-12-26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읽으면 `참 박식한 작가`라는 생각을 항상 합니다. 책을 통해 뭔가 배울게 꼭 있더군요... 천작하는건 아니지만... 에코 좋아한답니다...^^

cyrus 2015-12-27 17:26   좋아요 0 | URL
에코의 책이 어려워도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에코가 애연가라고 하던데 지금도 책을 써내는 모습이 대단해요. ^^

transient-guest 2015-12-27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무척 궁금합니다만, 다른 두꺼운 책들처럼 비싸요 여기 가격으로는..ㅎ 언젠가는 구해서 읽어볼 수 있겠지요ㅎ

cyrus 2015-12-27 17:29   좋아요 0 | URL
저는 도서관 책으로 읽었습니다. 대출기한을 생각해서 틈틈히 읽었습니다. 《미의 역사》, 《추의 역사》보다 읽기가 수월했습니다. ^^
 

 

 

 

 

 

 

 

 

 

 

 

 

 

 

 

 

 

장 자크 루소는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한 번도 정규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집을 나간 루소는 남의 집 하인 노릇까지 해가며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 자신의 후견인 바랑 부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루소는 독서에 몰두했다. 그는 백수 생활을 하면서 편견 없이 세상을 통찰하는 눈, 독창적 사고력을 얻었을 수 있었다. 이랬던 루소가 여성의 독서를 부정적으로 봤다. 그는 여성이 한쪽 손으로 책을 읽는 이유가 마스터베이션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성희롱 발언을 했다가는 사회에 매장당하는 신세가 된다. 루소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여성이 독서를 하면 정욕에 휩싸일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중세의 봉건 질서를 비판하고, 인간 이성의 가치를 신뢰했던 루소와 같은 계몽 사상가들마저도 여성의 독서를 용납하지 않았다.

 

남성들은 여성의 손에 책 한 권이 쥐어지면, 절대로 열어선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악마의 손에 들어간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여성들의 지적 호기심을 경계했다. 여성들이 책을 읽게 되면 가정에 대한 순종을 거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렇다 보니 남성중심 사회에서 연애소설은 여성의 감정을 교란케 하는 불건전한 책으로 오해를 받았다. 남성들은 책과 여성의 관계에 자꾸 침범했다. 여성이 책을 읽다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힐까 봐 두려워했고, 성경이나 정숙한 여자가 되는 예절을 소개한 팸플릿을 권했다.

 

여성이 마음대로 책을 읽지 못했던 ‘남독(男讀) 강점기’ 대략 중세부터 20세기 초까지라고 보면 된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여성들은 하층민 여성보다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았지만, 남성들의 텃세 때문에 제한적으로 독서를 해야만 했다. ‘남독 강점기’의 여성은 ‘책 읽는 존재’가 아닌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의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자연스럽게 규정되었다. 

 

 

 

 

 

안토니 비르츠  「소설 읽는 여자」 (1853년)

 

 

 

남성들은 여성의 독서를 금지하면서도 여성과 책의 만남을 야릇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아주 노골적으로. 화가 안토니 비르츠는 소설 읽는 여자를 나체 상태로 만들었다. 이 그림을 구경하는 남자들은 누드모델의 독서 행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여자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자의 몸매를 마음껏 감상할 뿐이다. 그림의 구도는 남자들의 눈이 여자의 봉긋한 가슴과 은밀한 부위가 비치는 오른쪽 거울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여자 가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자들은 그림 왼쪽에 악마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악마의 손은 여성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공급하는 ‘나쁜 손’이다. 남성들은 소설에 푹 빠진 여성을 부도덕한 죄인으로 경계하면서도, 자신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채워주는 성적 대상으로 바라봤다. 이러한 남성들의 이중적인 시선은 장서표에서도 드러난다. 남성 장서가들을 위해서 여성 나체가 그려진 장서표가 유행했고, 에로틱한 장서표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가부장제가 강화되었던 동양에서도 책 읽는 여성의 존재는 미미했다. 중국의 남성 애서가들은 책을 미녀로 비유하곤 했다. 중국 명나라 사람 포송령의 소설 《요재지이》에 책 속에 튀어나온 미녀의 이야기가 있다. 낭옥주는 독서를 무척 좋아해서 성인이 되어서도 홀아비로 지내왔다. 그는 자신이 즐겨 읽는 책속에 나오는 미녀가 자신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멋진 왕자가 나오는 동화를 읽고 나서 백마 탄 왕자가 자신에게 청혼하기를 바라는 소녀들의 순수한 마음과 유사하다. 낭옥주의 기도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되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다. 낭옥주는 <한서>를 읽다가 살아있는 듯한 미인이 그려진 그림을 발견한다. 드디어 그림 속 미녀는 진짜 사람이 되어서 낭옥주 앞에 등장한다. 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안여옥’이라고 밝힌다. 낭옥주는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안여옥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만, 책밖에 모르는 바보 낭옥주는 자신의 책을 잊지 않았다. 낭옥주가 독서에 열중하면, 안여옥은 질투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함께 살고 싶으면, 책을 모두 내다 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낭옥주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목숨,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태어난 집이나 다름없는 책을 버릴 수 없었다. 고대 중국의 시인이나 애서가들은 책의 아름다움을 미녀로 비유하면서 칭찬했지만, 책 읽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책에 관한 글에 등장하는 애서가들은 전부 남자다. 안여옥은 책에서 태어난 사람인데도 책을 싫어한다. 자신의 존재 근원을 부정하는 그녀의 태도가 억지스럽다. 애서가 입장에서는 안여옥이 독서의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몰상식한 여성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동양의 남성들도 책과 여성의 만남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계로 이해했다.

 

남성의 억압과 편견 속에서도 여성들은 자유롭게 책을 읽고 싶은 열망을 마음껏 표출했다. 기존사회 관념에 도전하며, 여성의 교육적·사회적 평등을 주장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300여 편이 넘는 서평을 남긴 역사상 최초의 여류 서평가였다. 그녀는 부지런히 신간 도서들을 읽고, 비평했다. 마리 조피 르루아예 드 샹트피라는 여성은 플로베르의 문제작 《마담 보바리》를 읽은 뒤에, 소설 여주인공에 관한 자신의 감상을 직접 편지에 써서 작가에게 보냈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무서운 속도로 읽어냈다. 그녀는 독서를 통해 대학 문턱에 가보지 못한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녀들은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서의 즐거움에 마음껏 탐닉했다. 독서의 역사를 논할 때, 그녀들의 활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책의 역사마저 남자들이 기록하는 이야기(History)가 되었다. 현재의 독자들은 이들이 독서 문화에 끼친 영향을 모르고 지냈다. 아직도 책이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가. 책을 진심으로 좋아한 사람 중에 여성이 제일 많았다. 독서가 아픔과 슬픔과 비애를 달래주는 마음의 치유제라는 사실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여성이었다. 여성의 독서는 고귀하다. 그녀들은 단순히 즐거움을 느끼려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강제된 체제, 억압된 자유, 그 속에서 여성이란 존재로서 살아야 했던 시간에 대한 처절한 복기(復棋)다.

 

 

 

 

※ 글 제목을 정하지 못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곰발님이 오늘 쓰신 글을 읽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Thanks to Gombal

 

※ 《여자와 책》 302쪽에 적힌 ‘E.M. 포르스터’를 ‘E.M. 포스터’로 고쳐 써야 한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5-11-29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에 제가 태어났으면 큰일날 뻔했어요. 눈치 안 보고 책 읽을 수 있음에
감사드려야겠어요.
고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 여자는 열등하다는 거요. 아무리 뛰어난 철학자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세계는 새롭게 밝혀져야 할 무엇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를...

cyrus 2015-11-30 17:35   좋아요 0 | URL
만약에 지금이 남자들만 책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정말 따분했을 거예요. 지적 허영심 많은 꼰대들의 말다툼이 있지 건전한 독서토론은 없었을 겁니다. ㅎㅎㅎ

표맥(漂麥) 2015-11-2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5-11-30 17: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11-29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레즈 라캥에서도 책을 읽음으로써 테레즈가 도덕을 알게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죠~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 했지만요~
소위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에 무의식적으로 녹아있는 여자들에 대한 시선이 읽힐때는 시대상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좀 불편해집니다 ㅎㅎ
책 읽는 여자들... 위험합니다. 남자들이 부과한 의무를 안하려고 하니...
요즘도 책 읽는 여자 그리 좋아하지 않는듯 합니다 ㅎㅎ 적당히 머리빈 여자만 아니면 될 정도로만 읽기를 바라는 사람들 종종 봤습니다. ....

cyrus 2015-11-30 17:38   좋아요 0 | URL
낭옥주처럼 책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독자는 노답입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이 될 수 있어요. 저처럼 책 읽는 남자도 여자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또르르

stella.K 2015-11-30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는 그때 그때마다 어디서 주제를 그렇게도 잘 뽑아내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참 탁월해!
루소 그 점잖게 생긴 할배가 그런 응큼한 상상을 하다니. 웃겨!ㅋㅋ
얼마 전 남자와 여자가 평등해지려면 130년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그게
그냥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쩝

cyrus 2015-11-30 17:40   좋아요 0 | URL
루소의 삶에 흑역사가 많아요. 가장 유명한 인생의 오점이 자신이 부모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놓고선 자식들을 고아원에 보낸 일이에요.

서니데이 2015-11-30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cyrus 2015-11-30 20:1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