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는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한 번도 정규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집을 나간 루소는 남의 집 하인 노릇까지 해가며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 자신의 후견인 바랑 부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루소는 독서에 몰두했다. 그는 백수 생활을 하면서 편견 없이 세상을 통찰하는 눈, 독창적 사고력을 얻었을 수 있었다. 이랬던 루소가 여성의 독서를 부정적으로 봤다. 그는 여성이 한쪽 손으로 책을 읽는 이유가 마스터베이션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성희롱 발언을 했다가는 사회에 매장당하는 신세가 된다. 루소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여성이 독서를 하면 정욕에 휩싸일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중세의 봉건 질서를 비판하고, 인간 이성의 가치를 신뢰했던 루소와 같은 계몽 사상가들마저도 여성의 독서를 용납하지 않았다.
남성들은 여성의 손에 책 한 권이 쥐어지면, 절대로 열어선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악마의 손에 들어간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여성들의 지적 호기심을 경계했다. 여성들이 책을 읽게 되면 가정에 대한 순종을 거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렇다 보니 남성중심 사회에서 연애소설은 여성의 감정을 교란케 하는 불건전한 책으로 오해를 받았다. 남성들은 책과 여성의 관계에 자꾸 침범했다. 여성이 책을 읽다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힐까 봐 두려워했고, 성경이나 정숙한 여자가 되는 예절을 소개한 팸플릿을 권했다.
여성이 마음대로 책을 읽지 못했던 ‘남독(男讀) 강점기’는 대략 중세부터 20세기 초까지라고 보면 된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여성들은 하층민 여성보다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았지만, 남성들의 텃세 때문에 제한적으로 독서를 해야만 했다. ‘남독 강점기’의 여성은 ‘책 읽는 존재’가 아닌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의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자연스럽게 규정되었다.
안토니 비르츠 「소설 읽는 여자」 (1853년)
남성들은 여성의 독서를 금지하면서도 여성과 책의 만남을 야릇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아주 노골적으로. 화가 안토니 비르츠는 소설 읽는 여자를 나체 상태로 만들었다. 이 그림을 구경하는 남자들은 누드모델의 독서 행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여자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자의 몸매를 마음껏 감상할 뿐이다. 그림의 구도는 남자들의 눈이 여자의 봉긋한 가슴과 은밀한 부위가 비치는 오른쪽 거울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여자 가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자들은 그림 왼쪽에 악마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악마의 손은 여성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공급하는 ‘나쁜 손’이다. 남성들은 소설에 푹 빠진 여성을 부도덕한 죄인으로 경계하면서도, 자신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채워주는 성적 대상으로 바라봤다. 이러한 남성들의 이중적인 시선은 장서표에서도 드러난다. 남성 장서가들을 위해서 여성 나체가 그려진 장서표가 유행했고, 에로틱한 장서표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가부장제가 강화되었던 동양에서도 책 읽는 여성의 존재는 미미했다. 중국의 남성 애서가들은 책을 미녀로 비유하곤 했다. 중국 명나라 사람 포송령의 소설 《요재지이》에 책 속에 튀어나온 미녀의 이야기가 있다. 낭옥주는 독서를 무척 좋아해서 성인이 되어서도 홀아비로 지내왔다. 그는 자신이 즐겨 읽는 책속에 나오는 미녀가 자신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멋진 왕자가 나오는 동화를 읽고 나서 백마 탄 왕자가 자신에게 청혼하기를 바라는 소녀들의 순수한 마음과 유사하다. 낭옥주의 기도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되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다. 낭옥주는 <한서>를 읽다가 살아있는 듯한 미인이 그려진 그림을 발견한다. 드디어 그림 속 미녀는 진짜 사람이 되어서 낭옥주 앞에 등장한다. 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안여옥’이라고 밝힌다. 낭옥주는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안여옥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만, 책밖에 모르는 바보 낭옥주는 자신의 책을 잊지 않았다. 낭옥주가 독서에 열중하면, 안여옥은 질투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함께 살고 싶으면, 책을 모두 내다 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낭옥주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목숨,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태어난 집이나 다름없는 책을 버릴 수 없었다. 고대 중국의 시인이나 애서가들은 책의 아름다움을 미녀로 비유하면서 칭찬했지만, 책 읽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책에 관한 글에 등장하는 애서가들은 전부 남자다. 안여옥은 책에서 태어난 사람인데도 책을 싫어한다. 자신의 존재 근원을 부정하는 그녀의 태도가 억지스럽다. 애서가 입장에서는 안여옥이 독서의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몰상식한 여성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동양의 남성들도 책과 여성의 만남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계로 이해했다.
남성의 억압과 편견 속에서도 여성들은 자유롭게 책을 읽고 싶은 열망을 마음껏 표출했다. 기존사회 관념에 도전하며, 여성의 교육적·사회적 평등을 주장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300여 편이 넘는 서평을 남긴 역사상 최초의 여류 서평가였다. 그녀는 부지런히 신간 도서들을 읽고, 비평했다. 마리 조피 르루아예 드 샹트피라는 여성은 플로베르의 문제작 《마담 보바리》를 읽은 뒤에, 소설 여주인공에 관한 자신의 감상을 직접 편지에 써서 작가에게 보냈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무서운 속도로 읽어냈다. 그녀는 독서를 통해 대학 문턱에 가보지 못한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녀들은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서의 즐거움에 마음껏 탐닉했다. 독서의 역사를 논할 때, 그녀들의 활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책의 역사마저 남자들이 기록하는 이야기(History)가 되었다. 현재의 독자들은 이들이 독서 문화에 끼친 영향을 모르고 지냈다. 아직도 책이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가. 책을 진심으로 좋아한 사람 중에 여성이 제일 많았다. 독서가 아픔과 슬픔과 비애를 달래주는 마음의 치유제라는 사실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여성이었다. 여성의 독서는 고귀하다. 그녀들은 단순히 즐거움을 느끼려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강제된 체제, 억압된 자유, 그 속에서 여성이란 존재로서 살아야 했던 시간에 대한 처절한 복기(復棋)다.
※ 글 제목을 정하지 못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곰발님이 오늘 쓰신 글을 읽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Thanks to Gombal
※ 《여자와 책》 302쪽에 적힌 ‘E.M. 포르스터’를 ‘E.M. 포스터’로 고쳐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