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땅 이야기 - 환상의 장소들로 우리를 인도할 지식의 나침반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4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야구 관련 유행어 중에 ‘나믿가믿’이라는 단어가 있다.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2011년에 처음 부임했을 때 나온 단어다. 이 해에 라이온즈는 외국인 타자 선수로 라이언 가코를 영입했다. 가코가 팀의 중심 타선의 한 축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시범경기부터 시즌 초반 내내 가코는 빈타의 늪에 허덕였다. 팀은 그의 홈런을 기대했지만, 영양가 높은 홈런이 나오지 않았다. 가코의 장타 능력은 좋지 않았어도, 인성은 좋았다. 류 감독은 모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에서 가코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 “나는 믿을 거야. 가코 믿을 거야”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성적이 부진한 선수를 끝까지 믿고 기용하는 류중일표 ‘믿음 야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당시 팬들은 첫 해 부임한 초보 감독의 믿음을 못마땅했다. 가코의 부진이 길어지자 야구팬들은 ‘나믿가믿’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류 감독의 경기 운영을 조롱했다. 드디어 가코는 92타석 만에 마수걸이 홈런을 쏘아 올렸다. 팬들은 이 홈런이 부활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장타율은 저조했고, 가코는 6월에 2군으로 내려갔다. 불행하게도 가코는 손가락 부상을 당해 시즌 도중 구단과의 계약이 해제되었다.

 

류 감독은 팀의 주축 선수들이 부진한데도 경기에 출전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라이온즈가 4년 연속 통합 우승을 달성하면서 류 감독의 ‘믿음 야구’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경기가 패하거나 감독이 신뢰한 특정 선수가 패전의 원흉이 되면 팬들은 ‘믿음 야구’를 언급해서 비아냥거린다. 사실 주축 선수만 믿고 경기를 운영하는 방식은 팀 전체에 독이 될 수 있다. 2군 성적이 좋은 선수들의 1군 진입이 어려워진다. 예전에 류 감독은 구단 내부에서 육성하는 2군 선수들의 능력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당장 1군 경기에 투입이 가능한 즉시 전력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진이 오래가는 주축 선수들을 믿는 류 감독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2군 선수의 경기력을 부정적으로 드러내는 발언은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2군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차츰 넓혀주지 못하고, 주축 선수들의 경기력에 의존하면 2군 선수들의 경기 능력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이렇듯 ‘믿음’이라는 단어가 마냥 좋다고 볼 수 없다. 

 

야구에 ‘나믿가믿’이 있다면, 이 지구에는 ‘나믿전믿’이 있다. “나는 믿을 거야. 나는 전설을 믿을 거야”를 줄인 말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책 《전설의 땅 이야기》는 수많은 ‘나믿전믿’의 사례가 가득 있다. 에코는 아틀란티스, 엘도라도, 샴발라 같은 인류의 환상이 만들어 낸 전설 속 장소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러나 에코는 이 모든 장소가 환상의 실체임을 강조한다. 인류의 상상력은 공유되어 하나의 믿음으로 굳혀지는데, 그게 바로 이야기의 한 형태인 ‘전설’이다. 전설은 상상력이 넘치는 인간이 만들어낸 재미있는 발명품이다. 보물이 가득한 전설의 땅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거부하기 힘든 매혹적인 판타지다. 전설은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는 인류를 바다 건너 움직이도록 부채질했다. 콜럼버스는 지상 낙원을 찾으려고 배에 올라탔다. 우리는 역사 수업시간에 콜럼버스를 ‘신대륙 탐험의 개척자’라고 배운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찾으려던 ‘신대륙’은 원주민이 사는 천연의 땅이 아니라 지도에 없는 지상 낙원을 의미한다. 콜럼버스는 생애 첫 번째 항해 기간에 바하마 제도 등을 발견하고 고국 에스파냐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돋보이려고 신대륙에 향료와 금광이 많다고 거짓말을 한다. 콜럼버스는 지상 낙원을 발견하지 못했는데도 금이 많은 지상 낙원의 존재를 믿었다. 그리하여 탐험가들의 배는 지상 낙원의 전설을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게 된다.

 

재미있으라고 만든 발명품인 전설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다. 콜럼버스의 거짓말은 다른 사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조용한 시골 마을 렌르샤토는 허풍쟁이 사제의 헛소문 때문에 음모론의 중심지로 변했다. 렌르샤토 교회의 사제는 교회 건물을 재건하는 과정에 보물을 발견했다고 허풍을 쳤다. 사제가 퍼뜨린 소문이 프랑스 전역으로 퍼지면서 평범한 마을 렌르샤토는 보물 사냥꾼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사제는 자신이 만든 거짓 전설을 이용해 기부금을 요청했다.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렌르샤토의 전설을 알리는 데 동참하는 협잡꾼들이 늘어났다. 전설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자 이제는 성경의 내용조차 왜곡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나중에 전설의 일부가 날조되었고, 허위로 판명되었음에도 여전히 전설을 믿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소설가 브라운은 렌르샤토의 전설을 소재로 쓴 《다 빈치 코드》를 통해 국제적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고, 소설에 언급되는 내용 일부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에코는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부추기는 댄 브라운을 비판한다. (에코는 댄 브라운을 자신의 작품 《푸코의 진자》에 나오는 음모론을 믿는 얼간이로 비유한 적이 있다) 전설을 좋아하는 순수한 감정을 이용하여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 ‘전설 팔이’가 지나치면 조롱거리가 된다. 제임스 힐튼의 소설 배경 샹그릴라가 유명해지자 중국은 원난 성 중디엔(中甸)이라는 동네 이름을 샹그릴라로 변경했다. 평범한 동네를 지상 낙원으로 홍보하여 관광객의 지갑을 노리는 희대의 개수작을 부렸다. 여기에 인도도 질세라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했다. 그들은 라다크 왕국의 수도였던 레(Leh)를 샹그릴라로 홍보했다.

 

에코는 허구의 장소를 상상하는 인류의 무한한 창작 능력을 존중한다. 다만, 광신적인 ‘나믿전믿’과 그런 인간의 허점을 이용하는 ‘전설 팔이’를 경계한다. 전설은 어른들을 위한 구전동화다. 몸은 다 자랐어도 허구의 장소로 향하고 싶은 동심은 살아 있다. 동심을 영양분 삼아 자란 상상력은 또 하나의 새로운 전설로 변모한다. 지상 낙원 같은 허구의 장소는 고달픈 현실을 잊게 해주는 곳이다. 그래서 인류는 전설을 사랑했다. 할아버지로부터 전설을 듣고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 자기 자식에게 그 전설을 알려줌으로써 낭만적 환상을 대대로 공유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전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믿전믿’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전설’에 점 두 개를 억지로 빼서 ‘진실’이라고 우긴다. 이들의 행보를 보면 처량하다.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설의 순수한 동심을 스스로 망가뜨린다. 전설은 전설일 뿐, 제발 진실이라고 우기지 마시길. ‘전설 팔이’로 사기 치는 놈들을 조심하시라.

 

 

 

 

※ 책 속에 발견한 오자


‘동박박사’ (52쪽), ‘동방방사’ (53쪽), ‘어마어한 보물을 찾아냈음을 암시하는’ (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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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2-2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생각없이 읽으면 본론은 영화 <머니볼> 얘기가 전개될 거 같은데, <전설의 땅 이야기>! 다른 사람 리뷰는 이런 독특한 글 전개 보는 맛^~^!
<오래된 미래> 보면 라다크 경우는 그래도 설득력 있지 않나 하는데요~ 생활풍습, 가치관 등을 보면... 개발 오염 우려를 들어서 최근 상황 어떤지 찾아보니 아직은 괜찮은 것 같기도..울란바토르처럼 되지 않길...

cyrus 2015-12-27 17:24   좋아요 0 | URL
오늘 글을 다시 보니까 류중일 감독 이야기가 너무 많이 차지한 느낌이 들어요. 재미있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표맥(漂麥) 2015-12-26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읽으면 `참 박식한 작가`라는 생각을 항상 합니다. 책을 통해 뭔가 배울게 꼭 있더군요... 천작하는건 아니지만... 에코 좋아한답니다...^^

cyrus 2015-12-27 17:26   좋아요 0 | URL
에코의 책이 어려워도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에코가 애연가라고 하던데 지금도 책을 써내는 모습이 대단해요. ^^

transient-guest 2015-12-27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무척 궁금합니다만, 다른 두꺼운 책들처럼 비싸요 여기 가격으로는..ㅎ 언젠가는 구해서 읽어볼 수 있겠지요ㅎ

cyrus 2015-12-27 17:29   좋아요 0 | URL
저는 도서관 책으로 읽었습니다. 대출기한을 생각해서 틈틈히 읽었습니다. 《미의 역사》, 《추의 역사》보다 읽기가 수월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