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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집사재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읽으면서 끊임 없이 미소가 지어지는 소설집.
버스에서 읽으면서 키득키득 거리다가 갑자기 가슴 한켠이
짜~안 한것이 남의 일 같지가 않은 이야기들.
맥주 캔 하나를 훌짝이며 읽으면 더더욱 재미있는 작품들.
(주인공들이랑 같이 마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술을 마시고 있고, 몇몇 작품의 주인공은 알콜중독자다.)
단편집을 읽고 이렇게 열광한 건
아사다 지로의 <장미도둑>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내 침대 옆 벽에는 커다란 갈색 보드가 걸려 있다.
앙코르왓트에서 뭔가를 간절히 기도하는 캄보디아 할머니 사진도 있고,
석모도 가는 배에서 새우깡을 들고 너무도 밝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 아빠 사진도 있고,
빨간 치파오를 입고 싼타 모자를 쓴 내 사진도 있고,
울고 있던 나를 꼭 안아 주셨던 텐진 빠모 스님 사진도 있다.
그 사진들 옆에는 <장미도둑> 책 표지도 턱~하니 붙어 있다.
언젠가 그런 소설을 썼으면 하는 바람에서....
아사다 지로의 <장미도둑>에 있는 단편들을 읽으면서 생각했었다.
이렇게 위안이 되는 글들을 쓸 수 있다면,
사는 게 헛되지 않겠다....라고.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이 어수룩하고 모자란 인간들의 총집합,종합선물세트인 것처럼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들에서도 잘난 인간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주인공들은 패배자들이다.
이제 거의 외래어로 쓰이는 단어 "loser".
키득키득 거리면서 읽다가
'근데...웃어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그런 상황들.
이 소설집의 맨 뒷부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레이몬드 카버의 생애와 작품해설>이 부록처럼 들어 있다.
하루키는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들 중 개인적 "베스트 4"를 이렇게 뽑았다.
<깃털>,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 <대성당>.
아....이럴 때 빙고! 하면 따라쟁이 같지만,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 최고의 작품은 (내게!) <깃털>이었다.
<깃털>을 읽으면서 그렇게 낄낄거리며 웃었으면서도
행복은 나눠줄 수도, 흉내낼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거라는
참으로 "당연한" 사실에 한숨을 쉬기도 했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들에 나오는 커플들은 거의가 재혼한 부부들이다.
전남편과 현재 남편의 장단점을 친절하게 비교설명해 주기도 하고(그것도 손님들 앞에서!),
옆에서 자고 있는 부인과 전처의 잠버릇의 공통점을 설명해 주기도 하고,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에서는 두 부부가 술잔을 기울이며 마주 앉아 사랑에 대해 썰을 푼다.
전 남편, 전 처 얘기를 안주 삼아, 현재의 사랑에 대한 닭살 돋는 자랑들을 입가심 삼아...
레이몬드 카버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88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소설들에 나오는 가족들은 이미 해체되고, 재구성되어 있다.
여기 실린 단편들은 대부분 81~86년에 쓴건데도 방금 구워져 나온 빵들처럼 따끈따끈하다.
이 책을 읽으며 2주 전 헝가리로 장기 출장간 후배 C가 자꾸 생각났다.
C가 비행기에서 이 책을 읽었다면 좋았을 텐데....
C가 다시 헝가리로 떠날 때 이 책을 선물해야 겠다.
공작 깃털 몇개를 선물하는 것처럼
내게 기쁨이 되는걸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딴지) 이 책은 다 좋지만...
번역의 "양심", 출판사의 "윤리" 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 책은 단편집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를 번역한 책이 아니다.
※ 이 단편집은 작년에 문학동네에서 번역해서 펴냈다.(정영문 옮김)
집사재의 책 제목은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oubt love]에 수록된 작품은 달랑 2작품 실려 있다.
이 책은...한마디로 유명한 작품만 쏙쏙 골라 "짜집기" 편집한 책이다.
번역서가 원서가 뭔지도 밝히지 않고 있다.(이건 정말 심각하다!!!)
책 뒷부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해설까지 있으니까,
혹시...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건 아닌가...하는 의혹도 살짝꿍 들었다.
번역서가 어떤 책을 번역했는지 밝히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