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을 다 읽으면 마지막으로 하는 개인 작업이 있다. 책의 참고문헌이나 제목으로만 언급된 문헌이 번역되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책 속의 책’을 찾아서 읽는다. 책 제목을 검색해서 찾아보는 과정이 번거로워도 새로운 책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우리나라에 안 나왔을 같은 무명의 책이 몇 년 전에 출간된 사실을 확인하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섬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인기가 없어서 절판되는 경우가 많다. 절판된 책이더라도 일단 ‘책 속의 책’ 목록에 포함한다. 헌책방에 갈 때 이 목록이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전설의 땅 이야기》 한 권에서 추려낸 참고문헌의 수를 어느 정도인지 세어보지 않았지만, 적은 양은 아니다.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다. 책의 목차 순으로 인용문의 참고문헌, 제목만 언급된 문헌을 정리했다. 책 제목, 저자, 출판사명 순으로 썼다. 번역본이 많은 책은 출판사명을 적지 않았다. 번역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문헌도 있다. 정보가 새로 발견하는 대로 수정할 생각이다. 《전설의 땅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다.

 

 

 

1. 평평한 지구와 대척지

 

※ 인용문 참고문헌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스티븐 호킹 / 까치
《파이돈》 플라톤 / 이제이북스
《그리스 철학자 열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 동서문화사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 나남출판, 이제이북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 / 아카넷
《신국론》 성 아우구스티누스 / 현대지성사(절판), 동서문화사
《최초의 세계 일주》 안토니오 피가페타 / 바움

 

 

 

2. 성서 속의 땅

 

※ 인용문 참고 문헌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 사계절

 

 

 

3. 호메로스와 7대 불가사의의 땅

 

※ 인용문 참고 문헌
《오뒷세이아》 호메로스 / 도서출판 숲
《내전기》 율리우스 카이사르 / 사이, 동서문화사

 

 

 

4. 동방의 신비, 알렉산드로스부터 사제왕 요한까지

 

※ 인용문 참고 문헌
《역사》 헤로도토스 / 도서출판 숲
《맨더빌 여행기》 존 맨더빌 / 오롯

 

 

 

5. 지상 낙원, 축복받은 자들의 섬, 엘도라도

 

※ 인용문 참고 문헌
‘일과 날’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에 수록, 출판사는 ‘도서출판 숲’)
《아이네이스》 베르길리우스 / 도서출판 숲
《광란의 오를란도》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 아카넷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 열린책들, 문학동네

 

 

 

6. 아틀란티스, 뮤, 레무리아

 

※ 본문에 언급된 문헌
《마라코트 심해》 아서 코난 도일 / 행복한책읽기
《그녀》 헨리 라이더 해거드 / 황금가지

(《동굴의 여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으나 절판)

 

※ 인용문 참고 문헌
《크리티아스》 플라톤 / 이제이북스
《새로운 아틀란티스》 프랜시스 베이컨 / 에코리브르
《수상록》 '식인종에 대하여' 미셸 드 몽테뉴 / 동서문화사
《해저 2만리》 쥘 베른 / 열림원
《포 시선》 '바닷속 도시' 에드거 앨런 포 / 지만지

 

 

 

7. 울티마 툴레와 히페르보레아

 

※ 인용문 참고 문헌
《안티크리스트》 프리드리히 니체 / 책세상, 아카넷

 

 

 

8. 성배의 이동

 

※ 인용문 참고 문헌
《그라알 이야기》 크레티앵 드 크루아 / 문학동네
《파르치팔》 볼프람 폰 에셴바흐 / 나남출판
《아서 왕의 죽음》 토머스 말로리 / 나남출판
《테니슨 시선》 '섈롯의 숙녀' 앨프리드 테니슨 / 지만지

 

 

 

9. 알라무트, 산상의 노인, 아사신파

 

※ 인용문 참고 문헌
《동방 견문록》 마르코 폴로 / 사계절

 

 

 

10. 코케인의 땅

 

※ 인용문 참고 문헌
《진실한 이야기》 루키아노스 / 아모르문디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 / 민음사

《피노키오》 카를로 콜로디 / 창비
《그림 동화집》 '뒤집힌 코케인' 그림 형제 (여러 권의 판본 목차를 확인한 결과, 비슷한 제목을 찾지 못했음. 더 찾아보고 발견하는 대로 수정하겠음)

 

 

 

11. 유토피아 섬

 

※ 본문에 언급된 문헌
《다른 세상》 ('달나라 이야기', '해나라 이야기')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 에코리브르
《新 죽은자들의 대화》 ('철학자 공화국 또는 아자오이엔 이야기') 베르나르 드 퐁트넬 / 케이시 (절판)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1984》 조지 오웰
《로봇》 카렐 차페크 ('R.U.R') / 모비딕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 문예출판사
《화씨 451》 레이 브래드버리 / 황금가지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필립 K. 딕 (단편) / 폴라북스
'일곱 번째 희생자' 로버트 셰클리 (단편, 국내 미번역)

 

※ 인용문 참고문헌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 펭귄클래식코리아, 을유문화사
《태양의 나라》 토마소 캄파넬라 / 이가서
《새로운 아틀란티스》 프랜시스 베이컨 / 에코리브르
《픽션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민음사

 

 


12. 솔로몬의 섬과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 본문에 언급된 문헌
《플랫랜드》 에드윈 애벗 / 늘봄 (《이상한 나라의 사각형》이라는 제목의 번역본도 있음, 출판사는 ‘경문사’)

 

 

 

13. 지구의 내부, 북극 신화, 아가르타

 

※ 본문에 언급된 문헌
《지구 속 여행》 쥘 베른 / 열림원
《펠루시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 / 새파란상상
《페르시아 원정기》('아나바시스') 크세노폰 / 도서출판 숲 
《잃어버린 지평선》 제임스 힐턴 / 문예출판사, 뿔(절판)

 

※ 인용문 참고문헌
《북극너머 지구 속 비행일지》 리처드 E. 버드 / 대원기획출판 (절판)

 

 


14. 렌르샤토의 발명

 

※ 인용문 참고문헌
《기암성》 모리스 르블랑 / 까치
《성혈과 성배》 마이클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머, 헨리 링컨 / 자음과모음

 


 

15. 허구적 장소와 그 진실

 

※ 인용문 참고문헌
《아라비안 나이트》 '신드바드 이야기' (두 번째 항해) / 동서문화사, 열린책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프랑수아 라블레 / 문학과지성사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 열린책들
《콜리지 시선》 '쿠블라 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 지만지
《보이지 않는 도시》 이탈로 칼비노 / 민음사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민음사
《하버드에서 한 문학 강의》 움베르토 에코 / 열린책들
《신곡》(천국편) 단테 알리기에리 / 열린책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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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2-26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읽을 때 참고문헌을 유심히 보는데, 읽은 책 얘기 나오면 엄청 반갑고 아직 안 읽은 책 얘기 나오면 낭패감에 빠지고 독서목록 롤러 코스터에 빠져요^^;;

cyrus 2015-12-27 17:31   좋아요 0 | URL
목록 만드는 일은 좋아하고 실천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문제예요. ^^

AgalmA 2015-12-27 17:32   좋아요 0 | URL
님 정도면 실천 상위 클래스입니다. 누가 믿으라고 그런 말씀을ㅎㅎ

cyrus 2015-12-27 17:42   좋아요 0 | URL
제가 책을 계획적으로 읽는 일을 하지 못해요. 그냥 기분에 맞춰 책을 읽는 편입니다. ^^;;

AgalmA 2015-12-27 17:46   좋아요 0 | URL
가열찬 발자크 전작독파 행렬을 저는 보았는데....음, cyrus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렇다고 해야죠ㅎㅎ; cyrus님 기분의 기준이 무서울 따름;
농담으로 이런다는 거 아시죠 :)

cyrus 2015-12-27 17:47   좋아요 1 | URL
ㅎㅎㅎ 기억해주셔서 부끄럽습니다. 독파 완료는 달성하지 못했어요.

csp 2015-12-26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참고문헌을 아주 유심히 읽는 편입니다. 저자가 참고문헌을 성실히 정리해 둘 수록 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는 건 물론이고 대략의 독서계획을 짤 수 있어 매우 유용하더군요. 참고문헌 목록을 그냥 넘기는 분들이 많던데 역시 cyrus님은 참 꼼꼼히 독서하시는 분이구나 새삼 느낍니다^^.

cyrus 2015-12-27 17:3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어떤 책을 읽은 뒤에 2차 도서로 참고문헌을 읽으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가끔 서로 배치되는 내용을 발견할 때도 있어요. 그래서 참고문헌 확인을 그냥 넘길 수 없게 되요. ^^

초딩 2015-12-27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속의 책의 경우 한국에 없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 좀 찾아보다 잘 안해지더라구여.
ㅎㅎ 사실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것도 다 보기 힘들지만 저는 ㅎㅎ :-)
언제나 엄지척입니다.

cyrus 2015-12-27 17:37   좋아요 0 | URL
미발간 책은 시간이 지난 뒤에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걸 잊고 지내면 책이 나온 소식을 몰라요. 목록 하나 작성하면 정기적으로 다시 확인하는 일이 번거로워요. ^^;;

살리미 2015-12-27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참고문헌들을 살펴보기는 하는데 대충대충 보거든요. 역시나 내공있으신 분들은 다르다니까!! 그나저나 책 한권에서 이렇게 많은 책들이 언급된다면... Agalma님 말씀처럼 독서목록 롤러코스터에 빠질듯 하네여 ㅎㅎ

cyrus 2015-12-27 17:39   좋아요 0 | URL
목록을 열심히 만들어놓고 나중에 다시 찾아보지 않아요. 쓰다만 목록들이 제 컴퓨터 파일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겁니다. ^^

alummii 2016-01-2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이 책 읽다말았는데 ..정리해놓으신 참고문헌들을보니 다시 꺼내 읽고싶어지네요^^

cyrus 2016-01-21 20:17   좋아요 0 | URL
alummii님이 마음에 드시니까 제가 기분이 좋습니다. 다른 분들의 독서에 도움이 되는 글을 남기고 싶습니다. ^^
 
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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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點心).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마음에 점을 찍듯이 조금 먹는 음식’이라는 뜻이 된다. 점심이란 말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아마도 선종(禪宗)에서 공복에 점을 찍듯 먹던 소식(小食)이 전파되어 중국으로부터 넘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옛사람들의 식사 횟수는 하루 두 번이었다고 한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왕족과 귀족 들이 하루에 세 끼를 먹었다. 한 끼를 더 먹는 것은 권력의 표현이다. 자신들이 충분히 배불리 먹고 살아간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다. 이때부터 잘 먹고 잘산다는 표현이 나왔던 것일까. 평민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지 안 봐도 뻔하다. 이들은 하루 세끼 챙겨 먹는 귀족들이 눈꼴사나워서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원망 섞인 악담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래도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은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안심의 표시였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하루에 한 끼 먹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삼순구식(三旬九食) 시절에는 하루 한 끼만 제대로 먹어도 풍족하다고 여겼다.

 

옛사람들은 그저 먹었다는 기분을 내려고 점심을 먹었다. 마음에 점을 찍듯이 가볍게 먹는 소소한 시간. 이게 점심의 원래 의미였다. 시대가 변할수록 식량 사정이 나아지고, 노동량이 늘어나자 낮에 먹는 끼니가 필요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몰려오는 시장기를 달래야 했다. 그렇게 해서 점심은 평범한 의미로 변신한다. 살고 있다는 기분을 내려고 점심을 먹어야 한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점심은 과중한 업무를 접어두고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중요한 휴식 시간이다. 아침 식사를 거르거나 늦게 퇴근해 저녁 식사가 늦어지는 직장인이라면 점심은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점심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 성인 절반 이상은 10분도 채 안 돼 식사를 끝낸다. 식사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점심에 누릴 수 있는 시간이 팍 줄어든다. 직장인들은 공감하리라. 빨리 먹고 일한다는 생각으로 살다 보면 굉장히 빨리 먹게 된다. 아예 5분 안에 다 먹으면 동료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생긴다. 밥을 늦게 먹는 동료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 눈치에 쫓기어 입안에 음식물을 허겁지겁 넣는다. 학생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1시간 내외 점심시간 안에 휴식을 취하려면 점심을 빨리 먹어야 한다. 그런데 평상시 식사를 15분 이내로 짧게 끝내면 위염 발생 확률이 높다는 연구 발표가 있다. 흡연·음주 여부 등 이외에도 식사시간 역시 위염에 영향을 준다. 빨리 식사를 하게 되면 식욕 억제 호르몬이 분비되기 전에 열량이 늘어난다. 몸속에 남은 열량은 지방이 된다. 밥을 빨리 먹어도 지방간이 생길 수 있다.

 

밥벌이가 힘든 마당에 밥 먹는 것마저도 괴롭다. 일하기 위해서 밥을 얼른 먹어야 하고, 밥을 먹기 위해서 밥을 벌어야만 한다. 이 지긋지긋한 순환의 삶을 유일하게 버틸 수 있는 점심마저 위태롭다. 마음에 점을 찍어가면서 여유롭게 음식을 먹는 점심은 옛말이 되었다. 자꾸만 움직이는 시계 초침을 눈빛으로 찍어가면서 급하게 음식을 삼켜야 한다. 김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직장인들이 먹는 모든 밥에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낚싯대를 쥐고 있는 자는 ‘시간’이다. 시간은 직장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근로감독관이다. 이 사람들아, 얼른 먹고 일해야지. 시간은 먹음직스러운 미끼로 자신의 노예들을 유혹한다. 어제도, 오늘도 시간의 노예들은 낚인다. 월척! 5분 만에 라면 국물을 깨끗이 비운 직장인이 자리에 일어선다.

 

김훈은 『라면을 끊이며』라는 글에서 김밥을 씹을 때의 느낌을 표현했다. 김밥의 속은 동그랗게 모은 재료의 에센스들로 채워져 있다. 김훈은 그런 김밥 한 개를 입안에 쏙 집어넣으면 경쾌함이 느껴진다고 썼다. 김밥도 ‘밥’이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김밥 하나를 입 안에 넣을 때 밥벌이의 비애를 느낀다.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면 뱃속이 서늘하다. 얼마 남지 않은 휴식 시간이 줄어들수록 목구멍으로 침만 삼킨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필사적으로 일해야 한다. 만드는 과정이 빠르고, 빨리 먹을 수 있고, 조금이나마 배를 채울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은 라면이다. 센 불로 라면을 끓이면 면발이 금방 익는다. 뜨거운 음식을 잘 먹는 사람이라면 면발을 빨리 먹을 수 있다. 면발을 씹어 먹는다기보다는 후루룩 빨아들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직장인들은 조리가 간편한 라면을 선호하고, 밥벌이를 재촉하는 시간도 라면을 빨리 먹는 직장인을 좋아한다. 먹을 장소를 찾지 못한 직장인은 급한 마음에 편의점으로 가서 컵라면을 호출한다. 시간은 미리 편의점에 가 낚싯바늘을 설치하고 노예들을 기다린다. 완성된 라면을 먹으려고 용기 뚜껑을 열면 낚싯바늘을 흔들어대는 시간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어서 와, 라면 먹고 일할래?

 

김훈은 열심히 일하라고 부추기는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싫어한다. 이런 세계에서 스스로 도망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시간의 노예들은 이미 자각했다. 끝도 시작도 없는 종신 고문 같은 밥벌이 생활에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다는 것을. 밥벌이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한번 그런 감정을 가져보지 않았겠는가. 주머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벌려고 눈칫밥을 먹는다. 주머니 한 개만 있나. 내 주변 사람들의 주머니, 특히 자식들의 배에 최고로 맛있는 음식으로 채워주고 싶어 한다. 목숨 가진 사람이라면 감내해야 할 ‘밥’에 대한 원초적 책임이다. 김훈의 말처럼 ‘먹는’ 동작에 비애가 느껴진다. 밥 먹기의 애잔함이 더할수록 목구멍이 눈물을 삼킨다. 음식 맛이 짜다. 음식이 짠 건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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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5-12-24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도 왜 김밥과 라면은 아무리 먹어도 안 질리고 맛있는 걸까요?

cyrus 2015-12-25 21:42   좋아요 1 | URL
라면과 김밥은 최상의 조합이예요. 뜨끈한 라면 국물만 마시는 것이 허전할 때 김밥을 먹으면 속이 든든해요. ^^

yureka01 2015-12-24 2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공감 공감..점심 ..정말 5분이 걸리지 않아요. 밥을 30번씹어야 좋다고 하던데..30번 씹고 앉아 있으면 가만안둘듯한 눈치를 주는 감독자들이 많아서 일까 싶더군요. 한끼를 먹더라도 여유롭고 편안하게 오손도손 나눠먹을수 있는 시간이 그립네요....그래서 인스튼트 음식을 정크식품이라고 하는 거.....노비에게는 먹는 시간도 아까운 것이었나 싶습니다.허급지급 먹다보면 몸이 점점 망가지는거야 당연한 이치겠지요.

cyrus 2015-12-25 21:45   좋아요 0 | URL
아침 출근, 등교 시간 때문에 직장인, 학생은 식사를 거르는 경우가 많아요. 직장인 같은 경우 일 끝나고 회식. 집밥 먹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15-12-25 0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국시대부터 귀족들이 세 끼를 먹었다,에 깜짝 놀랐어요. 저도 꼬박꼬박 챙겨서 먹는 타입은 아니지만, 맞아요... 두 끼만 먹어도 괜찮은것 같아요.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cyrus 2015-12-25 21:47   좋아요 0 | URL
저는 가끔 점심 식사를 거릅니다. 아침 식사를 든든히 먹으면 점심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요. ^^

서니데이 2015-12-25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점심은 맛있게 드셨나요,^^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도 좋은하루되세요^^

cyrus 2015-12-25 21:49   좋아요 1 | URL
소중한 휴식날이 이렇게 금방 지나가네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어셔 가의 몰락』에서 우울한 주인공 어셔는 자작시 ‘유령의 궁전’을 읊는다. 소설에서는 어셔가 직접 쓴 시로 나오지만, 사실은 포가 썼다. 이 시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겼는지 궁금해서 여러 출판사의 번역본들을 확인해봤다. 책을 대조하는 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서로 다른 출판사에 나온 두 종의 번역본에서 문장이 겹친 부분이 보였다. 문제의 책은 《더 레이븐》(더클래식, 2012년), 《어셔 가의 몰락 외》(지식의 숲, 2013년)이다. 재미있게도 이 두 종의 번역본은 공통점이 있다. 번역본을 만든 두 개의 출판사는 집단 번역으로 세계문학전집을 만들어 파격적인 할인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해당 출판사들은 가독성 좋은 번역으로 고전작품들을 저렴하게 공급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음사나 문학동네 같은 세계문학전집 시장을 주도하는 대형 출판사들은 문학전집을 헐값에 판매하는 행태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수준 낮은 번역물만 양산하게 될 것이라고 비난한다.

 

지금까지 현재 더클래식 출판사는 ‘더클래식 도네이션 세계문학 컬렉션’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9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이번 달에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 이야기》 1권이 세계문학 컬렉션 91번째로 나왔다. 지식의 숲 출판사는 3개월 사이에 50권이나 되는 문학작품을 출간했다. 2013년 3월에 10권, 4월에 20권, 6월에 20권. 경이로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더클래식 출판사가 집단 번역을 동원해서 어마어마한 수의 책을 펴낸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알라딘에 검색해서 확인해보면 단독 번역자의 책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단 번역으로 만들어진 책은 다음과 같다. 두 권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베스트트랜스’가 번역했다.

 

 

 

 

※ 베스트트랜스가 번역한 책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인 조르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기 드 모파상의 《벨 아미》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에드거 앨런 포의 《더 레이븐》
(김미란, 김희정, 권지은 공동 번역. 책에서는 이 세 사람 모두 ‘바른번역’ 소속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바른번역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소속 번역자 명단을 보면 김미란 씨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탈퇴한 것으로 추측된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신윤진, 이수진 공동 번역. 이수진 씨만 ‘바른번역’ 소속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바른번역 소속 번역자 명단에 이수진 씨의 이름이 없다)

 

 

 

지식의 숲 ‘세계문학산책’을 구성하는 50권의 책 모두 ‘붉은여우’라는 번역가 모임 단체가 맡았다. 베스트트랜스와 붉은여우. 알라딘 소개에 의하면 베스트트랜스는 ‘세계 여러 곳에 숨겨진 작품을 발굴·기획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붉은여우는 ‘세계 고전 문학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번역하려는 번역가들의 모임’이다. 베스트트랜스는 더클래식 출판사와 손을 잡아 셜록 홈즈 전집을 번역했고, 붉은여우는 지식의 숲 출판사를 만나 아르센 뤼팽 전집을 번역했다. 역시 한 단체에 여러 명의 번역가가 활동해서 그런지 단시간 내에 엄청난 양의 번역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며, 소속된 번역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정보가 전무하다.

 

 

아 참! ‘바른번역’ 소개를 빠뜨릴 뻔했다.

 

 

바른번역은 전문 번역가들이 소속된 출판 번역 전문 기업으로 알려졌다. 일반 독자도 접근이 가능한 공식 홈페이지(http://www.translators.co.kr)가 있다. 여기에 들어가면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일반 독자들의 의견이나 질문사항을 보낼 수 있는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번역 전공자만 회원 가입이 가능한 것 같다. 이제 막 번역을 시작하려는 초보 번역자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홈페이지를 개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는 코너스톤 출판사와 손을 잡아 셜록 홈즈 전집, 뤼팽 전집, 포 전집 심지어 데일 카네기 자기계발서 시리즈까지 번역했다. 2012년에 나온 홈즈 전집이 새로운 표지로 재출간되었다. 코너스톤 출판사가 아닌 타 출판사 번역본으로는 더클래식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두 권의 책(위의 번역본 목록 참고)과 2009년에 나온 비즈니스 경영 서적 시리즈이다.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경영, 인문 관련 서적도 번역했으며, 전문 번역가 양성을 목적으로 ‘글밥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전자책 번역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트랜스베스트, 붉은여우, 그리고 바른번역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 하겠다. 최대한 찾을 수 있는 정보를 모아 정리했다. 여전히 트랜스베스트, 붉은여우의 정체를 모르겠다. 열심히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트랜스베스트, 붉은여우, 바른번역이 서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봤는데, 확실한 정보가 발견되지 않았다. 잘못된 정보, 또는 더 추가할 정보가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셔도 좋다.

 

앞서 말하지 못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글을 줄이겠다. 다음에 나오는 문장들은 《더 레이븐》과 《어셔 가의 몰락 외》, 이 두 권의 책을 대조하다가 발견한 것들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더 레이븐》의 『어셔 가의 몰락』을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실명이 공개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붉은여우에 소속된 번역자이길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집단 번역가들의 능력을 의심해야 하고, 문제 있는 책을 단기간 내에 만드는 출판사의 태도에 생각해봐야 한다. 번역물을 많이 만든다고 해서 번역 수준이 높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  시 ‘유령의 궁전’ 전문 1 (더클래식 《더 레이븐》, 103~105쪽)

 

 

‘유령의 궁전’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진한 초록으로 물든 골짜기에

선한 천사들과 함께

한때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궁전

빛나는 궁전이

우뚝 솟아 있도다.

‘사색’의 군주 영토에

궁전이 솟아 있도다!

제일 높은 천사도 그토록 아름다운 궁전 위로

날개를 펼쳐 본 적 없으리.

 

황금빛으로 빛나는 노란 깃발

궁전 지붕 위에 나부꼈도다.

(이는 모두 먼 옛날 일이니)

행복했던 날에

깃털이 나부끼는 창백한 성벽을 다라

스쳐 가는 부드러운 바람이

향기로운 깃을 타고 살며시 스쳤노라.

 

행복의 골짜기를 헤매는 방랑자들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비파 선율에 맞춰

옥좌를 돌며 춤을 추는 요정들

(황제 포오피로진!)

그 명예에 어울리는 당당한 위엄을 갖춘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이도다.

 

아름다운 궁전의 문은

진주와 루비로 빛나고

그 문을 통해 흐르고 흘러

끊임없이 반짝이며

무리로 뛰어 들어온 메아리는

천상의 목소리로

왕의 재기와 지혜를 노래하는 것이

그들의 즐거운 임무였도다

 

그러나 슬픔의 옷을 두른 악마들이

왕의 높은 자리를 습격했으니

(아아 애통하도다.

이제는 다시 왕의 모습을 영영 보지 못할 것이니)

궁전 터에 떠도는

붉게 빛나던 영광도

이제는 묻혀 버린 먼 옛날의

부질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도다.

 

이제 골짜기를 여행하는 자들은

붉은 등불이 켜진 창문 너머로 바라본다.

불협화음에 맞춰

기이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형상들을

광폭하게 흐르는 급류처럼

창백한 문을 지나

사악한 무리가 끊임없이 뛰쳐나와

큰 소리로 웃어 대지만

더 이상 그 옛날의 미소는 볼 수가 없도다.

 

 

 

 

※ 시 ‘유령의 궁전’ 전문 2 (지식의 숲 《어셔 가의 몰락 외》, 25~28쪽)

 

 

'유령의 궁전'이라고 제목 붙인 그 시는 다소 부정확할지는 모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초록빛이 짙은 골짜기에
천사들이 깃들어 살던
아름답고 웅장한 궁전,
위엄 있고 빛나는 궁전이
우뚝 솟아 있도다!
‘사색’이라는 왕의 영토 위에
궁전이 솟아 있도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노란 깃발
지붕 위에 펄럭였도다.
'이것은 모두가 먼 옛날의 일'
그 즐겁고 행복했던 날에
엄숙하고 창백한 성벽에 불어오는
온갖 부드러운 바람이
향기로운 깃을 달고 살며시 스쳤도다.

 

행복한 골짜기를 헤매는 사람들은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비파 소리에 맞춰
옥좌를 돌면서 춤을 추는
신들을 바라본다네.
'황제 포오피로진!'
그 영광에 어울리는 위엄을 갖춘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였다네.

 

아름다운 궁전의 문은
진주와 루비로 빛나고
그 문을 통해 산울림의 무리가
흐르고 흘러 부딪혀 왔다네.
세상에서 드물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왕의 크신 공덕을 노래하는 것이
산울림의 즐거운 임무였도다.

 

그러나 슬픔의 옷을 입은 악마들이
왕의 용상을 습격했다네.
'아아, 슬프도다.
이제는 영영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할 이로다.'
궁전 터에 떠도는
붉게 피어오르던 영광도
지금은 묻힌 그 옛날의
허무한 추억일 뿐이도다.

 

이제 골짜기를 찾는 여행자들은
붉은빛이 비치는 창문을 통해,
미친 듯이 터져 나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기이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그림자를 볼 뿐.
무서운 급류와도 같이
창백한 문을 지나
부정한 것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뛰쳐나와
소리 높여 웃어 대지만,
그 옛날의 미소는 더 이상 찾아 수가 없었다네.

 

 

 

 

※ 더클래식 《더 레이븐》, 113쪽

 

 이 구절을 읽자마자, 마치 그 순간에 놋쇠 방패가 실제로 은 마루 위로 둔탁하게 떨어진 것처럼, 희미하지만 또렷한 금속성 소리가,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겁먹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어셔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 지식의 숲 《어셔 가의 몰락 외》, 42쪽)

 

 이 구절이 내 입에서 나오자마자 - 놋쇠 방패가 은이 깔린 마룻바닥 위에 큰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기나 한 것처럼  - 뚜렷하면서도 공허한, 금속성의 물건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울리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무겁게 누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이 빠져서 뛸 듯이 놀라며 벌떡 일어섰는데, 어셔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 더클래식 《더 레이븐》, 114~115쪽 (소설 마지막 부분,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분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인용문을 읽을 때 유의하세요)

 

 

어셔가 초인간적인 기세로 내뱉은 절규 속에 마치 주술의 힘이라도 있었던 마냥 그가 가리킨 거대하고 낡은 벽판의 육중한 흑단이 별안간 서서히 벌어졌다. 그것은 밖에서 불어닥친 폭풍 때문이었지만, 때마침 문 밖에는 매들린 양이 수의로 완전히 감싸진 채 꼿꼿이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흰 옷에는 피가 배어 있었고, 수척한 전체에처절하게 몸부림 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잠시 문턱에 선 채 몸을 떨며 이리저리 비틀대더니,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방 안에 있던 자신의 오빠 위로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죽기 전 격렬한 짧은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오빠를 마룻바닥에 쓰러뜨렸다. 어셔는 자신이 예견한 대로 공포의 희생양이 되어 이제는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중략)

 

 거센 파도 소리 같은 거친 고함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더니 내 발 밑에 있는 깊고 음침한 늪이 ‘어셔 가’의 잔해를 소리 없이 천천히 집어삼겼다.

 

 

※ 지식의 숲 《어셔 가의 몰락 외》, 44쪽

 

 어셔가 초인간적인 기세로 내뱉는 절규 속에 마력이라도 숨겨져 있었던 것처럼, 흑단 나무로 된 입구에서 그가 가리킨 거대하고 낡은 문이 별안간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서서히 뒤쪽으로 열어젖혀졌다.
 그것은 불어닥친 폭풍 때문이었지만, 이미 문밖에는 수의를 입은 매들린이 창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흰옷에는 피가 배어 있었고, 그 여윈 몸 전체에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문지방 근처에서 일순간 부들부들 떨면서 이리저리 흐느적거리고 있었는데, 잠시 뒤 낮은 신음 소리를 지르면서 방안에 있던 오빠의 몸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녀는 격렬하게, 그때야말로 단말마의 괴로움을 토해 내며 오빠를 마룻바닥 위로 밀어 쓰러뜨린 것이다.
 어셔도 이제는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그가 예기한 대로 격렬한 공포에 희생되어 쓰러진 것이다.

 

 (중략)

 

 파도 소리같이 길고 거친 고함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것 같더니, 내 발밑에 있던 깊고 음침한 늪이 '어셔 가'의 잔해를 아무 소리 없이 천천히 삼켜 버렸다.

 

 

 * '예기한' : 1판 1쇄에 있는 오자, 설마 '예견한'을 잘못 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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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5-12-23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cyrus 2015-12-24 19:31   좋아요 0 | URL
요즘 번역 문제에 신경 써서 그런지 이런 거 또 발견하면 헛웃음도 나오지 않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12-23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을 읽고 싶은 충동이 확~~ 드는군요......

cyrus 2015-12-24 19:33   좋아요 0 | URL
제가 독해 실력이 부족해서 원문 읽을 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

초딩 2015-12-24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책을 내셔도 좋겠습니다. 저는 꼭 사고 전파 할 것이에요 ㅎㅎㅎ

cyrus 2015-12-24 19:33   좋아요 1 | URL
제가 책을 펴낼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남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습니다. ^^
 

 

 

 

 

 

 

 

 

 

 

 

 

 

 

 

 

 

 

어셔 가의 몰락(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은 음울함의 정점을 보여주는 포의 대표작이다. 어셔 저택에 사는 로더릭 어셔는 병적으로 신경 증세를 보이는 젊은 귀족이다. 이 귀족은 자신의 친구인 소설의 화자를 어셔 저택에 초대한다. 로더릭 어셔는 화자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자신의 집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면서 두려움을 떤다. 자신은 제정신이 아닌 채 죽게 될 것이라는 말도 한다. 이 집에 같이 사는 어셔의 여동생은 병을 앓고 있다. 초대한 친구를 위해 어셔는 자신이 쓴 시를 가사로 붙여 노래를 부른다. 시의 제목은 유령의 왕궁(The Haunted Palace)’이다.

 

 

우리의 계곡 가장 짙푸른 곳에

착한 천사들이 사는 성 하나,

한때 아름답고 장엄하며

찬란했던 궁전 하나 고개 들고 서 있었네.

사유대왕의 왕국

성은 바로 그곳에 서 있었네.

치품천사조차 그렇게 아름다운 궁전 위를

날아 본 적 없을지니.

 

황금빛에 물든 노란 영광의 깃발들,

지붕 위에서 펄럭이고 퍼덕이네.

(아아, 그러나 이 모든 건 멀고도 먼 태곳적 얘기)

달콤했던 그 시절

천사들을 희롱하던 산들바람도,

깃털 장식의 창백한 누벽을 따라 떠돌던

천사들의 향기도 떠나 갔네.

 

행복한 계곡의 방랑자들은

두 개의 빛나는 창문을 통해,

류트의 잘 조율된 리듬에 맞춰

(, 포피로제니투스여!)

그대가 앉아 있는 옥좌를 돌며

춤을 추듯 움직이는 정령들을 보았네.

영광에 어울리는 위엄으로

옥좌에 앉은 지배자도 보았네.

 

아름다운 성문은 온통

반짝이는 진주와 루비로 장식했네.

성문을 통해 달리고, 달리고,

영원히 빛을 발하며 달리나니,

그대 메아리의 군대여,

그대들의 감미로운 임무는 오직 노래뿐이로다.

그러니, 노래하라,

주군의 기지와 지혜를 능가하는 목소리로.

 

아아, 슬픔의 갑옷으로 무장한 악귀들이

군주의 드높은 궁전을 공격했네.

(, 통곡하라. 내일은 결코 그대에게 없을 지어다. 불쌍한 왕이여!)

한때 궁전을 온통 장식하며

찬란한 붉은 꽃을 피우던 영광이여,

지금은 무덤 속에 묻힌 옛 시절의

아련한 향수에 불과할지니.

 

이제 계곡의 여행자들은

붉은 빛의 창문을 통해

거대한 그림자들을 보네.

불협화음에 맞추어 기이하게 움직이는 존재들.

한편 어슴푸레한 문을 통해

빠르게 흘러가는 흙빛의 강물처럼

공포의 무리가 영원히 쏟아져 나오네.

그리고 웃네. 허나 더 이상 미소는 없으리니.

    

 

(‘유령의 왕궁전문,더 레이븐: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어셔 가의 몰락중에서, 160~162, 번역: 조영학)

    

    

 

당연히 이 시는 포가 직접 쓴 것이다. 포의 시와 소설이 늘 그렇듯 글의 화자는 아름답고 행복했던 왕국(지상 낙원)을 회상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왕국의 영광은 사라지고, 그곳에 악귀들이 지배한다. 화자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뒤로 한 채 악귀가 점령한 왕국을 떠나 방랑자가 된다. 찬란한 왕국이 서 있던 계곡이 어딘지, 궁전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시무시한 악의 세력에 점령당한 왕궁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불안해하는 어셔의 심리상태를 상징한다. 이 시는 어셔 가의 몰락이 임박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유령의 왕궁을 원문으로 읽을 때 눈여겨 볼 단어가 있다. 바로 3연에 나오는 ‘Porphyrogene’이다. 번역자들은 ‘Porphyrogene’를 어떻게 우리말로 옮겨 써야할지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Porphyrogene’은 영어사전에 없는 단어다.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탓에 어셔 가의 몰락을 옮기는 번역자들은 제각각 다른 의미로 ‘Porphyrogene’를 해석했다. 이렇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시의 전체적 분위기에 어긋난 오역이 나오기도 한다.

 

 

Wanderers in that happy valley

Through two luminous windows saw

Spirits moving musically

To a lute’s well-tunéd law,

Round about a throne, where sitting

(Porphyrogene!)

In state his glory well befitting,

The sovereign of the realm was seen.

 

 

행복한 골짜기는 나그네를 불렀네

반짝이는 두 창이 그를 유혹하네

류트의 연주는 아름다웠지

춤추는 영혼이 왕좌를 도네

(프로피로게니투스여, 황태자여)

제왕의 영광, 제왕의 풍모

왕국의 지배자를 보네

 

(포 소설 전집 2 : 공포 편어셔 가의 몰락중에서, 38, 번역: 바른번역)

 

 

원문을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건 좋으나, 마치 사람 이름처럼 쓴 것이 아쉽다. 그냥 황태자여!’라고 쓰면 좋을 텐데. 프로피로게니투스황태자를 같이 쓰는 바람에 같은 의미의 단어가 반복되는 구절이 되고 말았다.

 

 

 

원문에는 ‘Porphyrogene’인데 보통 번역자들은 포피로제니투스’, ‘프로피로게니투스’, ‘포오피로진등으로 썼다. ‘Porphyrogene’이 영어사전에 없어도, 이와 비슷한 단어로 ‘porphyrogenite’가 있다. 왕후귀족, 황태자, 왕자를 뜻한다. ‘porphyrogenite’의 복수형이 ‘porphyrogenitus’. 그래서 시에 나오는 ‘porphyrogenite!’를 직역하면 황태자들이여!’라고 쓸 수 있다. 복수형 대신에 단수형으로 황태자여!’라고 써도 충분하다.

 

 

 

 

 

 

 

 

 

 

 

 

 

 

 

 

 

 

 

 

더 레이븐 :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RHK, 2012)의 번역자는 시의 원문을 어색하지 않게 우리말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문맥이 아주 자연스럽다. 다만, 아쉬운 점은 포피로제니투스에 대한 역주이다. 번역자는 포피로제니투스의 역주를 너무 간단하게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한 라틴 왕. 1261년 퇴위이라고 썼다. 번거롭지만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1261년에 퇴위한 라틴 왕이 누군지 찾을 수 있다. 역주를 따르면 포피로제니투스요한네스 4(1250~1305, 재위 1258~1261)가 된다.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세워진 라틴 제국은 니케아 제국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요한네스 4세는 니케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혔듯이 ‘Porphyrogene’은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정말 포가 실존 인물을 염두에 두고 시 유령의 왕궁을 썼을까. 그러면 시에 나오는 왕국은 니케아 제국이며, ‘악귀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다시 세운 미카엘 8(1224? ~ 1282)가 된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원작의 의미에 완전히 벗어난 해석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용도가 부적합한 수정 망치와 같다. 이러한 수정 망치는 원작의 본래 의미를 훼손한다.

 

‘Porphyrogene’을 특정 인물로 해석하는 방식은 오히려 시의 의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번역자의 논리대로 해석하면 포피로제니투스혹은 프로피로게니투스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7(905~959)로 볼 수 있다. 그의 별명이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 이처럼 원작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현학적인 해석은 위험하다. 시도는 좋으나, 너무 앞서갔다. 포는 소설을 집필할 때, 자신의 유식한 지식을 뽐내고 싶어 했다.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고대 라틴 어로 쓰인 책의 문장을 인용한 구절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유령의 궁전을 쓰려고 비잔티움 제국을 소재로 한 역사책까지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까지 소개한 번역자의 실수는 새 발의 피다. 이것보다 더 심한 오역이 있다. 역시 유령의 궁전’ 3연을 번역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원문과 같이 비교해서 읽은 당신은 ‘Oh! My God!’이라고 말할 것이다.

 

 

두 개의 빛나는 창으로부터

은은하게 들려오는 비파 소리에 맞춰

춤추며 옥좌를 돌고 도는

파란 옷 입은 예수 그리스도,

옥좌에 앉아 그럴듯한 위엄을 띠고

나라의 왕 임함이 보이도다.

    

 

(에드거 앨런 포 대표 단편선218, 번역: 이경숙)

    

 

 번역자님, 저는 (원문에) ‘예수를 보지 않았습니다.

 

    

 

 

 

 

 

 

 

 

 

 

 

 

 

 

 

 

 

 

꽤 많은 영문학 작품을 번역한 김병철 선생은 ‘Porphyrogene’남빛 옷을 입은 천자(天子)’로 옮겼다. 동서문화사 책 대부분은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선례가 많으므로 아마도 김병철 선생도 일본식 번역을 그대로 따른 듯하다. 일본은 덴노(てんのう, 天皇)가 지배하는 나라여서 그런지, 이 나라의 번역자들은 황태자를 덴노의 대리자로 이해했을 것이다.

 

 

행복의 골짜기를 헤매는 방랑의 무리들

빛나는 두 개의 창으로부터

은은히 들리는 비파 소리에 따라

춤추며 옥좌를 돌고 도는

신들을 보네

옥좌에는 남빛 옷 입은 천자(天子)!

그럴듯한 위엄을 띠고

나라의 제왕 계신 것이 보인다.

    

 

(황금 벌레34, 번역: 김병철)

    

 

 

 

 

 

 

 

 

 

 

 

 

 

 

 

  

  

 

유령의 궁전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궁금해서 일단 구할 수 있는 대로 여러 권의 번역본을 참조했다. 역량이 부족한 번역자가 쓴 책을 만나면 책값과 시간을 낭비할뿐더러, 나처럼 진지한 사람들은 이것저것 자료를 찾느라 개고생한다. 그래도 가끔 자료를 찾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두 개의 인용문을 비교해보시라. 다른 출판사의 책인데 문장 구조가 비슷하다. 어셔 가의 몰락 외2013 지식의 숲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고,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가 작품 해설을 맡았다. 붉은 여우는 코너스톤 포 전집을 번역한 바른 번역처럼 번역가 모임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더 레이븐 - 더클래식 도네이션 세계문학 컬렉션 5는 세 명의 번역자가 참여한 번역본이다. 더클래식 출판사의 번역본이 2012년에 먼저 나왔고, 이듬해에 지식의 숲 출판사 번역본이 나왔다. 이 두 책의 문장을 같이 보면 유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중에 시의 전문을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이 행복한 골짜기를 헤매는 사람들은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비파 소리에 맞추어

옥좌를 돌면서 춤을 추는

신들을 바라본다네.

황제 포오피로진!’

그 영광에 어울리는 위엄을 갖춘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였다네.

 

(어셔 가의 몰락 외26, 번역: 붉은 여우)

 

      

행복의 골짜기를 헤매는 방랑자들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비판 선율에 맞춰

옥좌를 돌며 춤을 추는 요정들

(황제 포오피로진!)

그 명예에 어울리는 당당한 위엄을 갖춘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이도다.

 

(더 레이븐 - 더클래식 도네이션 세계문학 컬렉션 5104, 번역: 김미란, 김희정, 권지은)

    

 

 

 번역자님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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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12-21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제겐 넘사벽의 영역 입니다...^^

cyrus 2015-12-22 22:50   좋아요 0 | URL
단어 한 개 때문에 번역본 여러 권 찾아다니느라 힘들었습니다. ^^;;

초딩 2015-12-2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도서정가제 덕에 턱 없이 모자라지만 원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ㅎㅎ 물론 지금은 ㅠㅠ iBook 키즈의 책을 보긴합니다만 ㅎㅎㅎ

cyrus 2015-12-22 22:53   좋아요 0 | URL
포의 문장이 긴데다가 고어가 많습니다. 라틴어 문장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포의 소설이 전문 번역가들이 난감해하는 텍스트일 것 같습니다. ^^

hnine 2015-12-22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번역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Porphyrogene은 나비목 곤충에 속하는 종 이름 (genus name)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셔가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설마 아니겠지만 철자는 정확히 일치하네요. 골짜기를 이리 저리 배회하는 모습을 나비가 비행하는 모습 (wanderers in that happy valley) 으로 비유하여 일종의 메타포로 쓰인걸까요?

표맥(漂麥) 2015-12-22 12:44   좋아요 0 | URL
오호~ 나비 즈음의 비행체가 들어가니 해석이 딱 들어맞아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집단지성의 장점을 봅니다)

cyrus 2015-12-22 23:03   좋아요 0 | URL
좋은 의견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Porphyrogene의 뜻을 알고 있는 hnine님이 대단합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아셨는지요? ㅎㅎㅎ

오늘도 `유령의 궁전` 원문 텍스트에 관련된 주석을 찾아봤어요. 제가 영어 독해 실력이 좋지 않아서 Porphyrogene의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hnine님의 독창적인 해석에 저도 동의합니다. ^^

만병통치약 2015-12-2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자님들, 판사님! 이 글에 접속한 것은 제가 아니고 고양이입니다. 저는 그냥 보기만 했습니다 ^^ / 와우 !

cyrus 2015-12-22 23:02   좋아요 0 | URL
판사님 드립을 알아보셨군요. 이 글의 웃음 포인트였습니다. ㅎㅎㅎ

서니데이 2015-12-23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오늘도 편안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5-12-23 20:5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
 
성자가 된 청소부 - 산다는 것과 초월한다는 것
바바 하리 다스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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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은 성자의 해이다. 그 당시 백담사에 숨어 지내던 전() 대통령 영부인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니다. 맨 끝에 아들 자()’를 쓰는 여자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결하고 성스러운 사람(saint)을 의미한다. 19887, 성자가 된 청소부(약칭 청소부’)라는 책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저자는 바바 하리 다스. 그는 침묵을 지키면서 자신의 허리춤에 매단 작은 칠판에 짤막한 글을 써서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전달한다. 바바는 1935년부터 침묵의 수행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23년에 태어나서 열두 살부터 수행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묵언 수행을 했다. 현재 바바는 92세의 나이로 장수를 누리고 있는데, 삶의 절반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살아왔다. (70년 동안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은 묵언 수행의 달인 음 소거바바 선생님) 

 

성자가 된 청소부는 스스로 삶의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총 일곱 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가 바로 성자가 된 청소부. 바바는 동화 또는 우화 형식을 빌려 자신이 터득한 소중한 지혜를 전달했다. 책 마지막에는 바바가 칠판에 남긴 경구들을 가려 뽑아 정리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평범하거나 지위가 낮은 천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여러 차례 역경을 딛고,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어 성자의 반열에 오른다. 몇 년간 시 쓰기를 중단했던 류시화청소부를 번역함으로써 재기에 성공한다. 이 책의 출간을 기점으로 류시화는 본격적으로 명상서적 번역에 몰두한다. 청소부의 인기는 이듬해 89년에도 이어졌다. 책의 인기에 탄력받은 정신세계사는 또 한 번 성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다. 연이어 꼬마 성자(미국 수피즘 협회 엮음), 성자들의 마을(김정빈 저) 등이 출간되었다. (84년에 정신세계사는 환단고기사관을 바탕으로 쓴 환뽕 소설 을 출간했다. 이 책의 저자가 김정빈이다)

 

 

 

 

 

10% 넘는 시청률을 돌파한 케이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약칭 응팔’)에 아주 짧게 청소부가 등장했다. 덕선(혜리 분)은 당시 인기 작가로 상한가를 치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 옆에 선우(고경표 역)청소부를 읽고 있다. 88년에 나온 청소부는 처음에 연녹색 표지였다. 98년에 2판을 찍으면서 표지 색을 흰색으로 바뀐다.

    

 

1988년 서점가에 이문열, 서정윤, 김초혜 같은 작가와 시인들의 문학 작품들이 강세를 보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신수양 관련 서적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정신세계사 대표는 모 언론의 인터뷰에서 도시화의 흐름에 피로감을 느낀 독자들이 정신적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정신수양 서적을 펴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는 정신수양을 소재로 한 책들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에 칼릴 지브란, 오쇼 라즈니쉬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저작자의 정식 계약을 거치지 않은 해적판들도 무분별하게 나왔다.

 

지난 주말 헌책방에서 연녹색 표지의 1판을 샀다. 원래 명상서적을 잘 읽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책들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런데 자꾸 응팔의 그 장면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드라마 간접광고에 낚이고 말았다) 우화 형식이라서 그런지 이야기는 별 무리 없이 술술 읽어나갔지만, 바바가 전달하려는 심오한 교훈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니까 삶의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주인공 삶의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허구적인 요소가 있는 소설이라서 그런지 현실에 맞지 않은 과장된 장면이 보였다.눈먼 시인과 아내 편을 읽다가 제일 황당한 것이 장님 친뚜가 뱀의 독성분이 들어간 연기를 맞고 두 눈이 보이는 장면이다. 친뚜의 아내는 몰래 사귀는 남자와 함께 도망치려고 친뚜를 살해하는 음모에 가담한다. 친뚜의 음식을 담는 냄비에 생선 대신 독사를 넣는다. 친뚜는 냄비 안에 생선이 있는 줄 알고, 열을 가한다. 냄비에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가 친뚜의 눈을 치료했고, 그제야 친뚜는 아내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상황에서 친뚜는 한바탕 웃으면서 초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준 신이 자비롭다고 말한다. 자신이 장님이었을 때 신이 아내를 줬고, 아내가 떠나니 이번에는 두 눈을 줬다고 생각한다. 친뚜는 신의 위대함을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뱀의 독성분이 있는 뜨거운 열기가 장님을 위한 특효약이 될 수 없다. 범인이 신비로운 체험을 하면서 성자로 거듭나도록 뻔한 결말을 유도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다소 아쉬운 면으로 남는다.

 

대부분 책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라든가 책을 읽고 나서 스스로 깨쳤다는 등 자기반성의 시도를 고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나는 이 책을 좋게 보는 독자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벗어나 지나치게 내면세계로 집중하지 않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마음이 평안해진 느낌을 받았어도 고작 한순간일 뿐이다. ‘세상은 존나 힘들어,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면 편해.’ 식으로 결론을 이끄는 책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정신승리만 부단히 일으킨다. 특히 초논리의 세계를 그려내는 정신수양 서적은 치열한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심오한 동양정식을 쉽고 간편하게 풀어냈다는 이유만 믿고, 이런 책을 청소년들에게 권장하는 어른이 있으면 경계하자.

 

 

 

 

우리나라에 바바 하리 디스를 맨 처음 소개한 출판사는 정신세계사가 아니다. 1984년에 샘터사침묵은 말한다 바바 하리 다스의 칠판에서를 펴냈다. 바바의 칠판에 쓰인 경구들을 모아놓은 Silence Speaks - from the chalkboard of Baba Hari Dass(1977년 출간)을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책의 번역자는 안정효. 류시화 번역의 책이 워낙에 잘 팔린 탓에 샘터사의 안정효 번역본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꽤 가격이 비싼 희귀본으로 거래된다.

 

88년 초판본부터 1998(928)에 나온 2판까지 바바 하리 다스의 영문 표기가 고쳐지지 않았다. ‘Baba Hari Das’로 적혀 있다. 이 스펠링으로 검색하면 바바 하리 다스위키피디아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 뒤에 ‘s’ 하나 더 붙여야 한다. ‘Baba Hari Dass’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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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6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12-17 22:15   좋아요 0 | URL
쌍팔년에 제가 이 세상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12-16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자가 된 청소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에요~ 이런스타일의 책을 좋아하지 않아 저는 읽지 않았지만 책 좀 읽는다는 문학소녀들 중 안 읽은 사람이 없을거에요 ㅎ
저는 음지의 책들을 더 좋아했어서 ㅎㅎ

cyrus 2015-12-17 22:19   좋아요 0 | URL
음지의 책이라면 어떤 내용인가요? 응팔에 정봉이가 읽던 야설 제목이 `황홀한 사춘기`였습니다.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12-18 00:09   좋아요 0 | URL
ㅋㅋ 로맨스소설이지요 ㅎㅎ 여러이름을 달고 나온 로맨스 소설...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12-1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호불호를 떠나서 이런 책 정보는 정말 재미도 있고 유익하네요...

cyrus 2015-12-17 22:21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 가면 알라딘에 검색되지 않는 좋은 책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책의 가치를 알게 될 때 기분이 뿌듯합니다.

살리미 2015-12-16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이 책을 구하셨군요 ㅎㅎ 저도 예전에 읽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닙니다^^ 다만 제목이 너무 낯익어서 응팔에서 보고 반가웠어요. 당시엔 세상이 존나 힘들어서 이런 책들이 붐을 일으켰을까요?
왜그런지는 모르지만 (한참 겉멋들 나이라 그랬나..) 한때 이런 동양적인 정서에 많이 끌렸던 기억이 나네요.

cyrus 2015-12-17 22:23   좋아요 0 | URL
운이 좋게도 응팔에 나왔던 책을 만났습니다. 80년대 명상 서적 붐이 몇 년 전에 유행했던 힐링 서적 붐과 유사한 것 같아요.

새아의서재 2015-12-17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샀었고 읽었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처음 사진보고 읽기 시작하면서 응팔에 나왔나, 했더니 나왔네요.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저는 사실 주변에 누가 책 가이드를 해주는 사람들이 전혀없었는데..어떻게 자꾸자꾸 비교적 깊이있는 독서를 할수 있도록 성장했을까 하는 거예요. 동력같은거랐까요? 즉, 중학교 때부터 순정만화에 일본만화들 엄청 팠고 할리퀸로맨스보면서 설레였던 여고시절 보냈고, 저런 베스트셀러도 거의 다 섭렵하면서 지내다가... 어느날부터는 베스트셀러는 안읽는 똥고집쟁이가 되었거든요.

새아의서재 2015-12-17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읽어온 책의 길 같은 게 궁금한 거죠. 누구나 처음부터 철학서를 읽지는 않았을테니까요. 어떻게 신달자에서 이문열에서 이러한 책들이 한심할 수 있는 그 반대의 책들로 넘어오게 되었나. 그 눈은 누가 혹은 어떻게 얻게되었나... 뭐 이런 궁금증? ^^ (제가 외국인지라 말을 할 사람이 별로 없어서..여기다 풀어놓고...가네용)

cyrus 2015-12-17 22:32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입니다. 8, 90년대는 지금처럼 서평가라는 사람이 없었어요. 출판사 홍보가 전부였어요. 좋은 책을 알아본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대박난 책들이 많았어요. 저는 이 시절에 꼬꼬마라서 이런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본 적이 없어요. 이때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독서하던 좋은 시절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으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자신도 그 책을 읽게 되거든요. 요즘은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들어서 그런지 지하철에 책 읽는 사람을 신기하게 쳐다봐요. ^^

표맥(漂麥) 2015-12-1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팔 그거 재미있나 봅니다. 직장 한담시간에 자주 나오는게...^^
이 책은 지금 깔끔히 재출간해도 여전히 인기 있을 듯한 생각을 해 봅니다... 스테디셀러 반열에 들어가는 책 맞죠? ^^

cyrus 2015-12-17 22:33   좋아요 0 | URL
지금도 판매되고 있어요. 다른 출판사들도 바바 하리 다스의 이름으로 책을 낸 적이 있는데 절판되었어요. ^^

인디언밥 2015-12-19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팔년 생이셨구나.. 근데 저보다 훨씬 형같은 느낌 ㅠ

cyrus 2015-12-21 10:24   좋아요 0 | URL
이래서 제가 실제로 애늙은이 소리 듣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