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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점심(點心).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마음에 점을 찍듯이 조금 먹는 음식’이라는 뜻이 된다. 점심이란 말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아마도 선종(禪宗)에서 공복에 점을 찍듯 먹던 소식(小食)이 전파되어 중국으로부터 넘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옛사람들의 식사 횟수는 하루 두 번이었다고 한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왕족과 귀족 들이 하루에 세 끼를 먹었다. 한 끼를 더 먹는 것은 권력의 표현이다. 자신들이 충분히 배불리 먹고 살아간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다. 이때부터 잘 먹고 잘산다는 표현이 나왔던 것일까. 평민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지 안 봐도 뻔하다. 이들은 하루 세끼 챙겨 먹는 귀족들이 눈꼴사나워서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원망 섞인 악담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래도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은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안심의 표시였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하루에 한 끼 먹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삼순구식(三旬九食) 시절에는 하루 한 끼만 제대로 먹어도 풍족하다고 여겼다.
옛사람들은 그저 먹었다는 기분을 내려고 점심을 먹었다. 마음에 점을 찍듯이 가볍게 먹는 소소한 시간. 이게 점심의 원래 의미였다. 시대가 변할수록 식량 사정이 나아지고, 노동량이 늘어나자 낮에 먹는 끼니가 필요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몰려오는 시장기를 달래야 했다. 그렇게 해서 점심은 평범한 의미로 변신한다. 살고 있다는 기분을 내려고 점심을 먹어야 한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점심은 과중한 업무를 접어두고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중요한 휴식 시간이다. 아침 식사를 거르거나 늦게 퇴근해 저녁 식사가 늦어지는 직장인이라면 점심은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점심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 성인 절반 이상은 10분도 채 안 돼 식사를 끝낸다. 식사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점심에 누릴 수 있는 시간이 팍 줄어든다. 직장인들은 공감하리라. 빨리 먹고 일한다는 생각으로 살다 보면 굉장히 빨리 먹게 된다. 아예 5분 안에 다 먹으면 동료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생긴다. 밥을 늦게 먹는 동료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 눈치에 쫓기어 입안에 음식물을 허겁지겁 넣는다. 학생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1시간 내외 점심시간 안에 휴식을 취하려면 점심을 빨리 먹어야 한다. 그런데 평상시 식사를 15분 이내로 짧게 끝내면 위염 발생 확률이 높다는 연구 발표가 있다. 흡연·음주 여부 등 이외에도 식사시간 역시 위염에 영향을 준다. 빨리 식사를 하게 되면 식욕 억제 호르몬이 분비되기 전에 열량이 늘어난다. 몸속에 남은 열량은 지방이 된다. 밥을 빨리 먹어도 지방간이 생길 수 있다.
밥벌이가 힘든 마당에 밥 먹는 것마저도 괴롭다. 일하기 위해서 밥을 얼른 먹어야 하고, 밥을 먹기 위해서 밥을 벌어야만 한다. 이 지긋지긋한 순환의 삶을 유일하게 버틸 수 있는 점심마저 위태롭다. 마음에 점을 찍어가면서 여유롭게 음식을 먹는 점심은 옛말이 되었다. 자꾸만 움직이는 시계 초침을 눈빛으로 찍어가면서 급하게 음식을 삼켜야 한다. 김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직장인들이 먹는 모든 밥에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낚싯대를 쥐고 있는 자는 ‘시간’이다. 시간은 직장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근로감독관이다. 이 사람들아, 얼른 먹고 일해야지. 시간은 먹음직스러운 미끼로 자신의 노예들을 유혹한다. 어제도, 오늘도 시간의 노예들은 낚인다. 월척! 5분 만에 라면 국물을 깨끗이 비운 직장인이 자리에 일어선다.
김훈은 『라면을 끊이며』라는 글에서 김밥을 씹을 때의 느낌을 표현했다. 김밥의 속은 동그랗게 모은 재료의 에센스들로 채워져 있다. 김훈은 그런 김밥 한 개를 입안에 쏙 집어넣으면 경쾌함이 느껴진다고 썼다. 김밥도 ‘밥’이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김밥 하나를 입 안에 넣을 때 밥벌이의 비애를 느낀다.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면 뱃속이 서늘하다. 얼마 남지 않은 휴식 시간이 줄어들수록 목구멍으로 침만 삼킨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필사적으로 일해야 한다. 만드는 과정이 빠르고, 빨리 먹을 수 있고, 조금이나마 배를 채울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은 라면이다. 센 불로 라면을 끓이면 면발이 금방 익는다. 뜨거운 음식을 잘 먹는 사람이라면 면발을 빨리 먹을 수 있다. 면발을 씹어 먹는다기보다는 후루룩 빨아들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직장인들은 조리가 간편한 라면을 선호하고, 밥벌이를 재촉하는 시간도 라면을 빨리 먹는 직장인을 좋아한다. 먹을 장소를 찾지 못한 직장인은 급한 마음에 편의점으로 가서 컵라면을 호출한다. 시간은 미리 편의점에 가 낚싯바늘을 설치하고 노예들을 기다린다. 완성된 라면을 먹으려고 용기 뚜껑을 열면 낚싯바늘을 흔들어대는 시간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어서 와, 라면 먹고 일할래?
김훈은 열심히 일하라고 부추기는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싫어한다. 이런 세계에서 스스로 도망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시간의 노예들은 이미 자각했다. 끝도 시작도 없는 종신 고문 같은 밥벌이 생활에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다는 것을. 밥벌이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한번 그런 감정을 가져보지 않았겠는가. 주머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벌려고 눈칫밥을 먹는다. 주머니 한 개만 있나. 내 주변 사람들의 주머니, 특히 자식들의 배에 최고로 맛있는 음식으로 채워주고 싶어 한다. 목숨 가진 사람이라면 감내해야 할 ‘밥’에 대한 원초적 책임이다. 김훈의 말처럼 ‘먹는’ 동작에 비애가 느껴진다. 밥 먹기의 애잔함이 더할수록 목구멍이 눈물을 삼킨다. 음식 맛이 짜다. 음식이 짠 건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