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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가 된 청소부 - 산다는 것과 초월한다는 것
바바 하리 다스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99년 3월
평점 :
1988년은 ‘성자’의 해이다. 그 당시 백담사에 숨어 지내던 전(前) 대통령 영부인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니다. 맨 끝에 ‘아들 자(子)’를 쓰는 여자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결하고 성스러운 사람(saint)을 의미한다. 1988년 7월, 《성자가 된 청소부》(약칭 ‘청소부’)라는 책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저자는 바바 하리 다스. 그는 침묵을 지키면서 자신의 허리춤에 매단 작은 칠판에 짤막한 글을 써서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전달한다. 바바는 1935년부터 ‘침묵의 수행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23년에 태어나서 열두 살부터 수행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묵언 수행을 했다. 현재 바바는 92세의 나이로 장수를 누리고 있는데, 삶의 절반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살아왔다. (70년 동안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은 묵언 수행의 달인 ‘음 소거’ 바바 선생님)
《성자가 된 청소부》는 스스로 삶의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총 일곱 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가 바로 ‘성자가 된 청소부’다. 바바는 동화 또는 우화 형식을 빌려 자신이 터득한 소중한 지혜를 전달했다. 책 마지막에는 바바가 칠판에 남긴 경구들을 가려 뽑아 정리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평범하거나 지위가 낮은 천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여러 차례 역경을 딛고,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어 성자의 반열에 오른다. 몇 년간 시 쓰기를 중단했던 류시화는 《청소부》를 번역함으로써 재기에 성공한다. 이 책의 출간을 기점으로 류시화는 본격적으로 명상서적 번역에 몰두한다. 《청소부》의 인기는 이듬해 89년에도 이어졌다. 책의 인기에 탄력받은 정신세계사는 또 한 번 ‘성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다. 연이어 《꼬마 성자》(미국 수피즘 협회 엮음), 《성자들의 마을》(김정빈 저) 등이 출간되었다. (84년에 정신세계사는 ‘환단고기’ 사관을 바탕으로 쓴 환뽕 소설 《단》을 출간했다. 이 책의 저자가 김정빈이다)
10% 넘는 시청률을 돌파한 케이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약칭 ‘응팔’)에 아주 짧게 《청소부》가 등장했다. 덕선(혜리 분)은 당시 인기 작가로 상한가를 치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그 옆에 선우(고경표 역)는 《청소부》를 읽고 있다. 88년에 나온 《청소부》는 처음에 연녹색 표지였다. 98년에 2판을 찍으면서 표지 색을 흰색으로 바뀐다.
1988년 서점가에 이문열, 서정윤, 김초혜 같은 작가와 시인들의 문학 작품들이 강세를 보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신수양 관련 서적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정신세계사 대표는 모 언론의 인터뷰에서 도시화의 흐름에 피로감을 느낀 독자들이 정신적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정신수양 서적을 펴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는 정신수양을 소재로 한 책들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에 칼릴 지브란, 오쇼 라즈니쉬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저작자의 정식 계약을 거치지 않은 해적판들도 무분별하게 나왔다.
지난 주말 헌책방에서 연녹색 표지의 1판을 샀다. 원래 명상서적을 잘 읽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책들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런데 자꾸 ‘응팔’의 그 장면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드라마 간접광고에 낚이고 말았다) 우화 형식이라서 그런지 이야기는 별 무리 없이 술술 읽어나갔지만, 바바가 전달하려는 심오한 교훈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니까 삶의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주인공 삶의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허구적인 요소가 있는 소설이라서 그런지 현실에 맞지 않은 과장된 장면이 보였다. ‘눈먼 시인과 아내’ 편을 읽다가 제일 황당한 것이 장님 친뚜가 뱀의 독성분이 들어간 연기를 맞고 두 눈이 보이는 장면이다. 친뚜의 아내는 몰래 사귀는 남자와 함께 도망치려고 친뚜를 살해하는 음모에 가담한다. 친뚜의 음식을 담는 냄비에 생선 대신 독사를 넣는다. 친뚜는 냄비 안에 생선이 있는 줄 알고, 열을 가한다. 냄비에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가 친뚜의 눈을 치료했고, 그제야 친뚜는 아내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상황에서 친뚜는 한바탕 웃으면서 초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준 신이 자비롭다고 말한다. 자신이 장님이었을 때 신이 아내를 줬고, 아내가 떠나니 이번에는 두 눈을 줬다고 생각한다. 친뚜는 신의 위대함을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뱀의 독성분이 있는 뜨거운 열기가 장님을 위한 특효약이 될 수 없다. 범인이 신비로운 체험을 하면서 성자로 거듭나도록 뻔한 결말을 유도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다소 아쉬운 면으로 남는다.
대부분 책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라든가 책을 읽고 나서 스스로 깨쳤다는 등 자기반성의 시도를 고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나는 이 책을 좋게 보는 독자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벗어나 지나치게 내면세계로 집중하지 않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마음이 평안해진 느낌을 받았어도 고작 한순간일 뿐이다. ‘세상은 존나 힘들어,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면 편해.’ 식으로 결론을 이끄는 책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정신승리만 부단히 일으킨다. 특히 초논리의 세계를 그려내는 정신수양 서적은 치열한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심오한 동양정식을 쉽고 간편하게 풀어냈다는 이유만 믿고, 이런 책을 청소년들에게 권장하는 어른이 있으면 경계하자.
※ 우리나라에 바바 하리 디스를 맨 처음 소개한 출판사는 정신세계사가 아니다. 1984년에 샘터사가 《침묵은 말한다 – 바바 하리 다스의 칠판에서》를 펴냈다. 바바의 칠판에 쓰인 경구들을 모아놓은 《Silence Speaks - from the chalkboard of Baba Hari Dass》(1977년 출간)을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책의 번역자는 안정효. 류시화 번역의 책이 워낙에 잘 팔린 탓에 샘터사의 안정효 번역본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꽤 가격이 비싼 희귀본으로 거래된다.
※ 88년 초판본부터 1998년(9월 28일)에 나온 2판까지 바바 하리 다스의 영문 표기가 고쳐지지 않았다. ‘Baba Hari Das’로 적혀 있다. 이 스펠링으로 검색하면 ‘바바 하리 다스’ 위키피디아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 뒤에 ‘s’ 하나 더 붙여야 한다. ‘Baba Hari Dass’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