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어셔 가의 몰락』에서 우울한 주인공 어셔는 자작시 ‘유령의 궁전’을 읊는다. 소설에서는 어셔가 직접 쓴 시로 나오지만, 사실은 포가 썼다. 이 시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겼는지 궁금해서 여러 출판사의 번역본들을 확인해봤다. 책을 대조하는 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서로 다른 출판사에 나온 두 종의 번역본에서 문장이 겹친 부분이 보였다. 문제의 책은 《더 레이븐》(더클래식, 2012년), 《어셔 가의 몰락 외》(지식의 숲, 2013년)이다. 재미있게도 이 두 종의 번역본은 공통점이 있다. 번역본을 만든 두 개의 출판사는 집단 번역으로 세계문학전집을 만들어 파격적인 할인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해당 출판사들은 가독성 좋은 번역으로 고전작품들을 저렴하게 공급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음사나 문학동네 같은 세계문학전집 시장을 주도하는 대형 출판사들은 문학전집을 헐값에 판매하는 행태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수준 낮은 번역물만 양산하게 될 것이라고 비난한다.
지금까지 현재 더클래식 출판사는 ‘더클래식 도네이션 세계문학 컬렉션’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9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이번 달에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 이야기》 1권이 세계문학 컬렉션 91번째로 나왔다. 지식의 숲 출판사는 3개월 사이에 50권이나 되는 문학작품을 출간했다. 2013년 3월에 10권, 4월에 20권, 6월에 20권. 경이로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더클래식 출판사가 집단 번역을 동원해서 어마어마한 수의 책을 펴낸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알라딘에 검색해서 확인해보면 단독 번역자의 책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단 번역으로 만들어진 책은 다음과 같다. 두 권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베스트트랜스’가 번역했다.
※ 베스트트랜스가 번역한 책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인 조르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기 드 모파상의 《벨 아미》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에드거 앨런 포의 《더 레이븐》
(김미란, 김희정, 권지은 공동 번역. 책에서는 이 세 사람 모두 ‘바른번역’ 소속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바른번역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소속 번역자 명단을 보면 김미란 씨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탈퇴한 것으로 추측된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신윤진, 이수진 공동 번역. 이수진 씨만 ‘바른번역’ 소속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바른번역 소속 번역자 명단에 이수진 씨의 이름이 없다)
지식의 숲 ‘세계문학산책’을 구성하는 50권의 책 모두 ‘붉은여우’라는 번역가 모임 단체가 맡았다. 베스트트랜스와 붉은여우. 알라딘 소개에 의하면 베스트트랜스는 ‘세계 여러 곳에 숨겨진 작품을 발굴·기획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붉은여우는 ‘세계 고전 문학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번역하려는 번역가들의 모임’이다. 베스트트랜스는 더클래식 출판사와 손을 잡아 셜록 홈즈 전집을 번역했고, 붉은여우는 지식의 숲 출판사를 만나 아르센 뤼팽 전집을 번역했다. 역시 한 단체에 여러 명의 번역가가 활동해서 그런지 단시간 내에 엄청난 양의 번역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며, 소속된 번역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정보가 전무하다.
아 참! ‘바른번역’ 소개를 빠뜨릴 뻔했다.
바른번역은 전문 번역가들이 소속된 출판 번역 전문 기업으로 알려졌다. 일반 독자도 접근이 가능한 공식 홈페이지(http://www.translators.co.kr)가 있다. 여기에 들어가면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일반 독자들의 의견이나 질문사항을 보낼 수 있는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번역 전공자만 회원 가입이 가능한 것 같다. 이제 막 번역을 시작하려는 초보 번역자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홈페이지를 개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는 코너스톤 출판사와 손을 잡아 셜록 홈즈 전집, 뤼팽 전집, 포 전집 심지어 데일 카네기 자기계발서 시리즈까지 번역했다. 2012년에 나온 홈즈 전집이 새로운 표지로 재출간되었다. 코너스톤 출판사가 아닌 타 출판사 번역본으로는 더클래식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두 권의 책(위의 번역본 목록 참고)과 2009년에 나온 비즈니스 경영 서적 시리즈이다.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경영, 인문 관련 서적도 번역했으며, 전문 번역가 양성을 목적으로 ‘글밥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전자책 번역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트랜스베스트, 붉은여우, 그리고 바른번역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 하겠다. 최대한 찾을 수 있는 정보를 모아 정리했다. 여전히 트랜스베스트, 붉은여우의 정체를 모르겠다. 열심히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트랜스베스트, 붉은여우, 바른번역이 서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봤는데, 확실한 정보가 발견되지 않았다. 잘못된 정보, 또는 더 추가할 정보가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셔도 좋다.
앞서 말하지 못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글을 줄이겠다. 다음에 나오는 문장들은 《더 레이븐》과 《어셔 가의 몰락 외》, 이 두 권의 책을 대조하다가 발견한 것들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더 레이븐》의 『어셔 가의 몰락』을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실명이 공개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붉은여우에 소속된 번역자이길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집단 번역가들의 능력을 의심해야 하고, 문제 있는 책을 단기간 내에 만드는 출판사의 태도에 생각해봐야 한다. 번역물을 많이 만든다고 해서 번역 수준이 높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 시 ‘유령의 궁전’ 전문 1 (더클래식 《더 레이븐》, 103~105쪽)
‘유령의 궁전’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진한 초록으로 물든 골짜기에
선한 천사들과 함께
한때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궁전
빛나는 궁전이
우뚝 솟아 있도다.
‘사색’의 군주 영토에
궁전이 솟아 있도다!
제일 높은 천사도 그토록 아름다운 궁전 위로
날개를 펼쳐 본 적 없으리.
황금빛으로 빛나는 노란 깃발
궁전 지붕 위에 나부꼈도다.
(이는 모두 먼 옛날 일이니)
그 행복했던 날에
깃털이 나부끼는 창백한 성벽을 다라
스쳐 가는 부드러운 바람이
향기로운 깃을 타고 살며시 스쳤노라.
행복의 골짜기를 헤매는 방랑자들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비파 선율에 맞춰
옥좌를 돌며 춤을 추는 요정들
(황제 포오피로진!)
그 명예에 어울리는 당당한 위엄을 갖춘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이도다.
아름다운 궁전의 문은
진주와 루비로 빛나고
그 문을 통해 흐르고 흘러
끊임없이 반짝이며
무리로 뛰어 들어온 메아리는
천상의 목소리로
왕의 재기와 지혜를 노래하는 것이
그들의 즐거운 임무였도다
그러나 슬픔의 옷을 두른 악마들이
왕의 높은 자리를 습격했으니
(아아 애통하도다.
이제는 다시 왕의 모습을 영영 보지 못할 것이니)
궁전 터에 떠도는
붉게 빛나던 영광도
이제는 묻혀 버린 먼 옛날의
부질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도다.
이제 골짜기를 여행하는 자들은
붉은 등불이 켜진 창문 너머로 바라본다.
불협화음에 맞춰
기이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형상들을
광폭하게 흐르는 급류처럼
창백한 문을 지나
사악한 무리가 끊임없이 뛰쳐나와
큰 소리로 웃어 대지만
더 이상 그 옛날의 미소는 볼 수가 없도다.
※ 시 ‘유령의 궁전’ 전문 2 (지식의 숲 《어셔 가의 몰락 외》, 25~28쪽)
'유령의 궁전'이라고 제목 붙인 그 시는 다소 부정확할지는 모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초록빛이 짙은 골짜기에
천사들이 깃들어 살던
아름답고 웅장한 궁전,
위엄 있고 빛나는 궁전이
우뚝 솟아 있도다!
‘사색’이라는 왕의 영토 위에
궁전이 솟아 있도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노란 깃발이
그 지붕 위에 펄럭였도다.
'이것은 모두가 먼 옛날의 일'
그 즐겁고 행복했던 날에
엄숙하고 창백한 성벽에 불어오는
온갖 부드러운 바람이
향기로운 깃을 달고 살며시 스쳤도다.
이 행복한 골짜기를 헤매는 사람들은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비파 소리에 맞춰
옥좌를 돌면서 춤을 추는
신들을 바라본다네.
'황제 포오피로진!'
그 영광에 어울리는 위엄을 갖춘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였다네.
아름다운 궁전의 문은
진주와 루비로 빛나고
그 문을 통해 산울림의 무리가
흐르고 흘러 부딪혀 왔다네.
세상에서 드물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왕의 크신 공덕을 노래하는 것이
산울림의 즐거운 임무였도다.
그러나 슬픔의 옷을 입은 악마들이
왕의 용상을 습격했다네.
'아아, 슬프도다.
이제는 영영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로다.'
궁전 터에 떠도는
붉게 피어오르던 영광도
지금은 묻힌 그 옛날의
허무한 추억일 뿐이도다.
이제 골짜기를 찾는 여행자들은
붉은빛이 비치는 창문을 통해,
미친 듯이 터져 나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기이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그림자를 볼 뿐.
무서운 급류와도 같이
창백한 문을 지나
부정한 것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뛰쳐나와
소리 높여 웃어 대지만,
그 옛날의 미소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네.
※ 더클래식 《더 레이븐》, 113쪽
이 구절을 읽자마자, 마치 그 순간에 놋쇠 방패가 실제로 은 마루 위로 둔탁하게 떨어진 것처럼, 희미하지만 또렷한 금속성 소리가,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겁먹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어셔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 지식의 숲 《어셔 가의 몰락 외》, 42쪽)
이 구절이 내 입에서 나오자마자 - 놋쇠 방패가 은이 깔린 마룻바닥 위에 큰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기나 한 것처럼 - 뚜렷하면서도 공허한, 금속성의 물건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울리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무겁게 누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이 빠져서 뛸 듯이 놀라며 벌떡 일어섰는데, 어셔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 더클래식 《더 레이븐》, 114~115쪽 (소설 마지막 부분,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분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인용문을 읽을 때 유의하세요)
어셔가 초인간적인 기세로 내뱉은 절규 속에 마치 주술의 힘이라도 있었던 마냥 그가 가리킨 거대하고 낡은 벽판의 육중한 흑단이 별안간 서서히 벌어졌다. 그것은 밖에서 불어닥친 폭풍 때문이었지만, 때마침 문 밖에는 매들린 양이 수의로 완전히 감싸진 채 꼿꼿이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흰 옷에는 피가 배어 있었고, 수척한 몸 전체에는 처절하게 몸부림 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잠시 문턱에 선 채 몸을 떨며 이리저리 비틀대더니,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방 안에 있던 자신의 오빠 위로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죽기 전 격렬한 짧은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오빠를 마룻바닥에 쓰러뜨렸다. 어셔는 자신이 예견한 대로 공포의 희생양이 되어 이제는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중략)
거센 파도 소리 같은 거친 고함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더니 내 발 밑에 있는 깊고 음침한 늪이 ‘어셔 가’의 잔해를 소리 없이 천천히 집어삼겼다.
※ 지식의 숲 《어셔 가의 몰락 외》, 44쪽
어셔가 초인간적인 기세로 내뱉는 절규 속에 마력이라도 숨겨져 있었던 것처럼, 흑단 나무로 된 입구에서 그가 가리킨 거대하고 낡은 문이 별안간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서서히 뒤쪽으로 열어젖혀졌다.
그것은 불어닥친 폭풍 때문이었지만, 이미 문밖에는 수의를 입은 매들린이 창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흰옷에는 피가 배어 있었고, 그 여윈 몸 전체에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문지방 근처에서 일순간 부들부들 떨면서 이리저리 흐느적거리고 있었는데, 잠시 뒤 낮은 신음 소리를 지르면서 방안에 있던 오빠의 몸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녀는 격렬하게, 그때야말로 단말마의 괴로움을 토해 내며 오빠를 마룻바닥 위로 밀어 쓰러뜨린 것이다.
어셔도 이제는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그가 예기한 대로 격렬한 공포에 희생되어 쓰러진 것이다.
(중략)
파도 소리같이 길고 거친 고함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것 같더니, 내 발밑에 있던 깊고 음침한 늪이 '어셔 가'의 잔해를 아무 소리 없이 천천히 삼켜 버렸다.
* '예기한' : 1판 1쇄에 있는 오자, 설마 '예견한'을 잘못 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