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셔 가의 몰락(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은 음울함의 정점을 보여주는 포의 대표작이다. 어셔 저택에 사는 로더릭 어셔는 병적으로 신경 증세를 보이는 젊은 귀족이다. 이 귀족은 자신의 친구인 소설의 화자를 어셔 저택에 초대한다. 로더릭 어셔는 화자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자신의 집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면서 두려움을 떤다. 자신은 제정신이 아닌 채 죽게 될 것이라는 말도 한다. 이 집에 같이 사는 어셔의 여동생은 병을 앓고 있다. 초대한 친구를 위해 어셔는 자신이 쓴 시를 가사로 붙여 노래를 부른다. 시의 제목은 ‘유령의 왕궁(The Haunted Palace)’이다.
우리의 계곡 가장 짙푸른 곳에
착한 천사들이 사는 성 하나,
한때 아름답고 장엄하며
찬란했던 궁전 하나 고개 들고 서 있었네.
‘사유’ 대왕의 왕국
성은 바로 그곳에 서 있었네.
치품천사조차 그렇게 아름다운 궁전 위를
날아 본 적 없을지니.
황금빛에 물든 노란 영광의 깃발들,
지붕 위에서 펄럭이고 퍼덕이네.
(아아, 그러나 이 모든 건 멀고도 먼 태곳적 얘기)
달콤했던 그 시절
천사들을 희롱하던 산들바람도,
깃털 장식의 창백한 누벽을 따라 떠돌던
천사들의 향기도 떠나 갔네.
행복한 계곡의 방랑자들은
두 개의 빛나는 창문을 통해,
류트의 잘 조율된 리듬에 맞춰
(오, 포피로제니투스여!)
그대가 앉아 있는 옥좌를 돌며
춤을 추듯 움직이는 정령들을 보았네.
영광에 어울리는 위엄으로
옥좌에 앉은 지배자도 보았네.
아름다운 성문은 온통
반짝이는 진주와 루비로 장식했네.
성문을 통해 달리고, 달리고,
영원히 빛을 발하며 달리나니,
그대 메아리의 군대여,
그대들의 감미로운 임무는 오직 노래뿐이로다.
그러니, 노래하라,
주군의 기지와 지혜를 능가하는 목소리로.
아아, 슬픔의 갑옷으로 무장한 악귀들이
군주의 드높은 궁전을 공격했네.
(아, 통곡하라. 내일은 결코 그대에게 없을 지어다. 불쌍한 왕이여!)
한때 궁전을 온통 장식하며
찬란한 붉은 꽃을 피우던 영광이여,
지금은 무덤 속에 묻힌 옛 시절의
아련한 향수에 불과할지니.
이제 계곡의 여행자들은
붉은 빛의 창문을 통해
거대한 그림자들을 보네.
불협화음에 맞추어 기이하게 움직이는 존재들.
한편 어슴푸레한 문을 통해
빠르게 흘러가는 흙빛의 강물처럼
공포의 무리가 영원히 쏟아져 나오네.
그리고 웃네. 허나 더 이상 미소는 없으리니.
(‘유령의 왕궁’ 전문,《더 레이븐: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 ‘어셔 가의 몰락’ 중에서, 160~162쪽, 번역: 조영학)
당연히 이 시는 포가 직접 쓴 것이다. 포의 시와 소설이 늘 그렇듯 글의 화자는 아름답고 행복했던 왕국(지상 낙원)을 회상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왕국의 영광은 사라지고, 그곳에 악귀들이 지배한다. 화자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뒤로 한 채 악귀가 점령한 왕국을 떠나 방랑자가 된다. 찬란한 왕국이 서 있던 계곡이 어딘지, 궁전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시무시한 악의 세력에 점령당한 왕궁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불안해하는 어셔의 심리상태를 상징한다. 이 시는 ‘어셔 가의 몰락’이 임박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유령의 왕궁’을 원문으로 읽을 때 눈여겨 볼 단어가 있다. 바로 3연에 나오는 ‘Porphyrogene’이다. 번역자들은 ‘Porphyrogene’를 어떻게 우리말로 옮겨 써야할지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Porphyrogene’은 영어사전에 없는 단어다.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탓에 ‘어셔 가의 몰락’을 옮기는 번역자들은 제각각 다른 의미로 ‘Porphyrogene’를 해석했다. 이렇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시의 전체적 분위기에 어긋난 오역이 나오기도 한다.
Wanderers in that happy valley
Through two luminous windows saw
Spirits moving musically
To a lute’s well-tunéd law,
Round about a throne, where sitting
(Porphyrogene!)
In state his glory well befitting,
The sovereign of the realm was seen.
행복한 골짜기는 나그네를 불렀네
반짝이는 두 창이 그를 유혹하네
류트의 연주는 아름다웠지
춤추는 영혼이 왕좌를 도네
(프로피로게니투스여, 황태자여)
제왕의 영광, 제왕의 풍모
왕국의 지배자를 보네
(《포 소설 전집 2 : 공포 편》 ‘어셔 가의 몰락’ 중에서, 38쪽, 번역: 바른번역)
※ 원문을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건 좋으나, 마치 사람 이름처럼 쓴 것이 아쉽다. 그냥 ‘황태자여!’라고 쓰면 좋을 텐데. ‘프로피로게니투스’와 ‘황태자’를 같이 쓰는 바람에 같은 의미의 단어가 반복되는 구절이 되고 말았다.
원문에는 ‘Porphyrogene’인데 보통 번역자들은 ‘포피로제니투스’, ‘프로피로게니투스’, ‘포오피로진’ 등으로 썼다. ‘Porphyrogene’이 영어사전에 없어도, 이와 비슷한 단어로 ‘porphyrogenite’가 있다. 왕후귀족, 황태자, 왕자를 뜻한다. ‘porphyrogenite’의 복수형이 ‘porphyrogenitus’다. 그래서 시에 나오는 ‘porphyrogenite!’를 직역하면 ‘황태자들이여!’라고 쓸 수 있다. 복수형 대신에 단수형으로 ‘황태자여!’라고 써도 충분하다.
《더 레이븐 :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RHK, 2012)의 번역자는 시의 원문을 어색하지 않게 우리말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문맥이 아주 자연스럽다. 다만, 아쉬운 점은 ‘포피로제니투스’에 대한 역주이다. 번역자는 ‘포피로제니투스’의 역주를 너무 간단하게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한 라틴 왕. 1261년 퇴위”이라고 썼다. 번거롭지만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1261년에 퇴위한 라틴 왕이 누군지 찾을 수 있다. 역주를 따르면 ‘포피로제니투스’는 요한네스 4세(1250~1305, 재위 1258~1261)가 된다.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세워진 라틴 제국은 니케아 제국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요한네스 4세는 니케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혔듯이 ‘Porphyrogene’은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정말 포가 실존 인물을 염두에 두고 시 ‘유령의 왕궁’을 썼을까. 그러면 시에 나오는 ‘왕국’은 니케아 제국이며, ‘악귀’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다시 세운 미카엘 8세(1224? ~ 1282)가 된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원작의 의미에 완전히 벗어난 해석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용도가 부적합한 ‘수정 망치’와 같다. 이러한 ‘수정 망치’는 원작의 본래 의미를 훼손한다.
‘Porphyrogene’을 특정 인물로 해석하는 방식은 오히려 시의 의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번역자의 논리대로 해석하면 ‘포피로제니투스’ 혹은 ‘프로피로게니투스’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905~959)로 볼 수 있다. 그의 별명이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다. 이처럼 원작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현학적인 해석은 위험하다. 시도는 좋으나, 너무 앞서갔다. 포는 소설을 집필할 때, 자신의 유식한 지식을 뽐내고 싶어 했다.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고대 라틴 어로 쓰인 책의 문장을 인용한 구절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유령의 궁전’을 쓰려고 비잔티움 제국을 소재로 한 역사책까지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까지 소개한 번역자의 실수는 새 발의 피다. 이것보다 더 심한 오역이 있다. 역시 ‘유령의 궁전’ 3연을 번역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원문과 같이 비교해서 읽은 당신은 ‘Oh! My God!’이라고 말할 것이다.
두 개의 빛나는 창으로부터
은은하게 들려오는 비파 소리에 맞춰
춤추며 옥좌를 돌고 도는
파란 옷 입은 예수 그리스도,
옥좌에 앉아 그럴듯한 위엄을 띠고
나라의 왕 임함이 보이도다.
(《에드거 앨런 포 대표 단편선》 218쪽, 번역: 이경숙)
번역자님, 저는 (원문에) ‘예수’를 보지 않았습니다.
꽤 많은 영문학 작품을 번역한 故 김병철 선생은 ‘Porphyrogene’을 ‘남빛 옷을 입은 천자(天子)’로 옮겼다. 동서문화사 책 대부분은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선례가 많으므로 아마도 김병철 선생도 일본식 번역을 그대로 따른 듯하다. 일본은 덴노(てんのう, 天皇)가 지배하는 나라여서 그런지, 이 나라의 번역자들은 황태자를 ‘덴노의 대리자’로 이해했을 것이다.
행복의 골짜기를 헤매는 방랑의 무리들
빛나는 두 개의 창으로부터
은은히 들리는 비파 소리에 따라
춤추며 옥좌를 돌고 도는
신들을 보네
옥좌에는 남빛 옷 입은 천자(天子)!
그럴듯한 위엄을 띠고
나라의 제왕 계신 것이 보인다.
(《황금 벌레》 34쪽, 번역: 김병철)
※ ‘유령의 궁전’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궁금해서 일단 구할 수 있는 대로 여러 권의 번역본을 참조했다. 역량이 부족한 번역자가 쓴 책을 만나면 책값과 시간을 낭비할뿐더러, 나처럼 진지한 사람들은 이것저것 자료를 찾느라 개고생한다. 그래도 가끔 자료를 찾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두 개의 인용문을 비교해보시라. 다른 출판사의 책인데 문장 구조가 비슷하다. 《어셔 가의 몰락 외》는 2013년 ‘지식의 숲’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고,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가 작품 해설을 맡았다. ‘붉은 여우’는 코너스톤 포 전집을 번역한 ‘바른 번역’처럼 번역가 모임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더 레이븐 - 더클래식 도네이션 세계문학 컬렉션 5》는 세 명의 번역자가 참여한 번역본이다. 더클래식 출판사의 번역본이 2012년에 먼저 나왔고, 이듬해에 지식의 숲 출판사 번역본이 나왔다. 이 두 책의 문장을 같이 보면 유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중에 시의 전문을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이 행복한 골짜기를 헤매는 사람들은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비파 소리에 맞추어
옥좌를 돌면서 춤을 추는
신들을 바라본다네.
‘황제 포오피로진!’
그 영광에 어울리는 위엄을 갖춘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였다네.
(《어셔 가의 몰락 외》 26쪽, 번역: 붉은 여우)
행복의 골짜기를 헤매는 방랑자들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비판 선율에 맞춰
옥좌를 돌며 춤을 추는 요정들
(황제 포오피로진!)
그 명예에 어울리는 당당한 위엄을 갖춘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이도다.
(《더 레이븐 - 더클래식 도네이션 세계문학 컬렉션 5》 104쪽, 번역: 김미란, 김희정, 권지은)
번역자님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