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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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특이한 수법으로 사람을 죽인다. 그 이름은 ‘잡아 늘이는 자’라는 뜻을 가졌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하여 침대에 눕히고는 키가 침대 길이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 죽이고,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여 죽였다. 그의 이름이 붙여진 침대는 ‘자신의 주관적 기준’, ‘아집’을 비유하는 관용어가 된다. 이 악당은 ‘폴리페몬(Polypemon)’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의 뜻은 ‘해로운 자’이다. 아마도 프로크루스테스는 폴리페몬이라는 이름을 철저히 숨긴 채 나그네에 접근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폴리페몬과 그의 침대에 눕혀진 사람들이 많다. 오늘날의 폴리페몬은 ‘편견’을 가진 일반인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한다. 폴리페몬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와 침대에 눕힌다. 정신질환자 혹은 성범죄자로 차별받는 성소수자, 떠날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는 외국인노동자, 그리고 ‘김치녀’, ‘한남충’으로 부르면서 서로 비하하고 경멸하는 여성과 남성들…‥. 누구나 폴리페몬의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는 침대의 주인인 폴리페몬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 폴리페몬은 영웅 테세우스(Theseus)는 에게 자신이 저지르던 악행과 똑같은 수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폴리페몬의 아집은 독선으로 변질된다. 무수히 많은 독선은 혐오를 낳는 주범 중 하나이다. 결국 그 사회에 공감은 사라지고 혐오만 자라난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혐오의 형태는 다양해질 것이다.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혐오가 있는가 하면, 권력이 없어서 생긴 혐오도 있다. 특정 대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혐오가 발생하는 한편, 그저 경멸 때문에 혐오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처럼 혐오의 심각성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같은 낱말들만으로는 혐오의 진짜 원인을 담아내지 못한다. 혐오는 편견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암울하다. 카롤린 엠케는 사회 곳곳에 널려있을 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혐오 문화’의 실체를 규명한다. 성소수자에 속한 엠케는 동성애 혐오뿐만 아니라 난민 혐오, 여성 혐오 등의 현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분석한 언론인이다. 《혐오 사회》는 폭력과 사회적 갈등을 양산하는 혐오 문화의 형성 과정을 헤집는다.

     

이 책에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예화가 펼쳐진다. ‘반(反)난민’을 외치는 독일 극우들, 흑인에 대한 미국 경찰들의 과잉 진압, 성소수자들에게 자행하는 폭력. 저자의 시선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혐오는 개인의 정서적 형태가 아닌 적대심과 방관적 태도로 설계된 집단적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을 ‘폴리페몬의 침대’ 이야기로 비유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폴리페몬은 자기가 믿는 일방적 기준(곧 언급할 ‘동질성’, ‘본원성’, ‘순수성’과 같은 의미)에 따라 상대방을 혐오한다. 그리하여 폴리페몬은 ‘가해자’가 되고, 혐오 받는 대상은 폴리페몬의 침대에 누워 옴짝달싹 못 하는 ‘피해자’, ‘희생양’이 된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방관자’가 있다. 방관자는 피해자의 고통을 구경할 뿐 그들의 감정과 상처에 공감하지 못한다. 저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타자를 혐오하는 일이 가능한 ‘혐오 사회’를 지금까지의 모든 혐오범죄보다 한층 더 무서운 경종의 대상으로 여긴다. ‘혐오 사회’의 방관자는 잔혹한 사건의 중심에서 비켜 있는 비겁한 위치에 있다. 사실 방관자도 혐오범죄의 공모자이다. 따라서 저자가 정의하는 혐오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관습과 신념의 결과물’[1]이다.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은 자신의 정체성 또는 신념을 ‘표준’으로 내세우고, 이 ‘표준’에 맞지 않는 타인을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규정한다. 예컨대 ‘찬란하고 순수한 민족’이 사는 땅에 외래문화 또는 종교가 밀려 들어와 사회 불안정을 일으킨다는 단순한 논리가 의외로 꽤 완강한 힘을 보여준다.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보는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사회란 하나의 집단이고, 소속감에서 오는 안도와 심리적 평정을 유지케 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인간은 집단적 동질성과 본원성을 굳건히 하기 위해 구성원들끼리의 공감과 응집력을 강화한다. 소속감과 비뚤어진 편견이 뭉쳐 나오는 것이 바로 ‘혐오’이다. 사회 문제의 원인은 사회 내부에도 있는데 자신과 다른 타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든 이질성을 배제하고 동질성을 찾아 무리 지으려는 문화에 익숙하다. ‘우리끼리’ 뭉치는 ‘우리’ 의식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순혈주의에 매몰되기 일쑤였다. 지역, 피부색, 직업, 성별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차별하는 태도, 그리고 그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되는 혐오 언어는 타인과의 인격적 관계를 해치는 증오와 분노를 만든다. 분명한 것은 ‘혐오를 혐오로 대응하는 방식’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혐오로 가려진 눈을 여는 것만이 또 다른 갈등과 상처를 피하는 길이다. 혐오가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지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1] 《혐오 사회》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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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13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끼리끼리‘ 패거리 문화가 이러한 혐오사회를 만든 원흉이지요..이런 문화와 의식은 아마,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 관련있지 않을까요? 일단은 나부터 살고보자는...

cyrus 2017-11-13 18:52   좋아요 2 | URL
패거리 문화가 형성된 이유는 많을 거예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생존 본능일 것입니다. 나와 다른 타자에 두려움을 느끼면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거예요.

2017-11-13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13 18:57   좋아요 1 | URL
개인의 이익을 얻기 위해 모임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산악회에 가입해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자녀 결혼식 이후에 탈퇴하는 사람이 있어요. 축의금을 많이 받기 위해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던 거죠. 아버지가 그 산악회 회원으로 활동 중인데 탈퇴한 회원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저런 사람, 많이 있을 거예요. ^^;;
 
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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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가을은 시방 절정이다. 가을이 얼마나 성큼 다가왔는지 산성의 성곽 뒤로 바람맞은 나무들은 잎을 땅바닥에 떨군다. 산길에는 낙엽이 제법 폭신하게 깔렸다. 남한산성하면 우리들의 뇌리에 굴욕의 장소로 각인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가 청 태종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이다. 산성이 완성된 지 10여 년 만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 타협하자는 주화파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로 갈렸다. 조선은 침략군과 대치하여 방어전을 펼쳤지만 47일 만에 항복했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짚은 역사소설로 알려졌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한국사전연구사, 1998)에 따르면 역사소설은 실제의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특정의 실존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재창조 또는 재현한 소설이다. 역사소설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가장 중요하다. 역사소설의 논점은 역사적 사실성작가적 상상력사이에 놓여 있다. 역사가 잊히거나 흩어진 사실(또는 사료)을 모아서 정리하는 것이라면, 역사소설은 그것들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서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에 지나치게 얽매일 때 극적 재미는 떨어질 수 있지만, 상상력에만 의존할 때 역사적 사실성이 간과된다. 대부분 독자는 남한산성은 역사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은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이 우선한다. 역사소설은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과 해석능력이 더욱 중요시되는 창작품이지 교과서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소설에서 역사적 교훈만 찾으려는 독서법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간직하고 있어 후세에 길이길이 호국의 교훈을 주는 장소이다. 독자들이 역사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남한산성을 읽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처럼 의도가 뚜렷한 해석에 초점을 맞춘 독서는 재미없다. 남한산성에 평점을 적게 준 독자 리뷰 몇 편 봤다. 이 리뷰들의 공통점은 남한산성지루한 소설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김훈의 문체를 비판한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말처럼 아득한 뱀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는 문장을 쫓아가기가 힘든 건 사실이다. 남한산성2007년에 첫선을 보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SNS은 우리의 생활방식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방식까지도 변화시켰다. SNS에 길든 독자들은 긴 이야기를 압축한 짧은 글을 좋아하고 명료한 표현이 있는 짧은 문장에 열광한다. 종이 위를 느릿느릿하게 기어가는 김훈의 문어체는 가끔 독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소설을 읽다가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적을 위한 독서법은 독자의 눈을 지치게 한다.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Nabokov)는 인간이란 큰 담론보단 세밀한 잡담에 집착하는 존재라고 했다. 김훈은 남한산성이 역사 담론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1] 남한산성에서 역사라는 큰 담론을 찾으려다가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둘러싼 주화파 최명길과 주전파 김상헌의 설전을 진지하게 분석하면서 누가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또 그들의 모습을 통해 현재를 비추어보는 것도 진부하다. 사실 이런 작업은 역사소설이 아닌 역사책을 보면서 해야 하는 일이다.

 

김훈은 말과 사물이라는 에세이[2]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세계속에서 불완전한 언어로 소통하는 존재라고 썼다. 남한산성은 대화의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불완전한 세계를 압축한 장소이다.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 백성과 지도층은 입으로 싸우고 또 싸운다. 이것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세밀한 잡담이다. 그들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불완전한 언어, () 먼지는 목표가 있는데도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화살과 같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피폐해진 성안에서 주전파와 주화파 간 대립은 계속된다. 언관(言官: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은 관원)들이 최명길이 청과 밀통한 역적’, ‘왕을 미혹하는 자라고 비난하면서 결사 항전을 고집한다. 그러나 언관의 주장은 의견과 사실이 구분되지 않는다.

    

 

명길은 본래 이적의 무리와 밀통한 자이옵고, 이제 귓속말로 전하를 미혹하고 적의 말을 옮겨서 전하를 협박하는 자이옵니다. 명길이 사직을 헐어서 적의 마구간을 짓고, 백성의 나락을 거두어 적의 말먹이 풀로 내주려 하니 명길이 과연 누구의 신하이옵니까.

 

지금 성 안의 백성들은 명길을 빗대어 용골대의 아들 용골소라고 부르고 있으니, 민심은 이미 명길이 누구의 신하인지 가린 것이옵니다. [3]

 

 

인조에게 전하는 언관의 말은 의견이 사실을 압도하는 형태이다. 사실과 먼 의견은 편견과 배척과 단절을 낳고, 불신을 부른다. 이것이 김훈이 말과 사물에서 지적한 불완전한 말의 폐해이다. ‘불완전한 말은 사실과 의견이 좀처럼 구분되지 않는다.[4] 인조는 언관들의 말이 대의(大義)를 밝힐 수 있어서 아름답다고 했지만, 심히 가파르다고 말했다. 의견과 사실을 구분할 수 없는 말 먼지는 소통뿐만 아니라 의사 결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보이는 크고 작은 말과 언어의 부딪힘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불협화음이다. 따라서 인조는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한 채 허탈과 절망 속에 헤매는 모습을 보인다. 성안에 말 먼지가 자욱할수록 백성들의 삶과 국운은 기울어만 갔다.

 

항복 문서를 작성하는 과정은 합리적 언어 전달 행위의 불가능성을 바로 보여주는 중요한 묘사이다. 인조는 투항을 포기하고 화친을 원한다는 글을 쓰게 했다. 그러나 항복 문서를 쓰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왕이 보는 앞에서 나라를 팔아먹는 굴욕적인 일이다. 글을 쓰도록 명령받은 신하들은 쓰지 않으려고, 아니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쳤다. 정육품 정수찬은 항복 문서를 작성할 자격이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지병과 남루한 계급에 대해 호소했다가 곤장을 맞았다. 정오품 정랑은 미친 척하고 간택되지 않을 글을 써서 바쳤다. 결국, 신하들의 폭탄 돌리기끝에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작성하게 됐다. 그러나 (Khan)은 내용의 의미를 바로 확인하기 힘든 최명길의 항복 문서에 격노했다. 최명길의 항복 문서는 소통 불가능한 불완전한 말이다. 명분을 내세워 던진 말은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공중에서 허무하게 사라진다. 필자가 언어 전달이라고 하지 않고, ‘합리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이유가 있다. 작가는 전반적인 소통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 부인하지 않는다. 말과 언어가 합리적인 도구로 활용된 소통의 한계를 주장하고 있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은 허망한 몸짓에 불과했으며 적들의 비웃음에 짓밟힌다. 소설은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 다른 언어와 문화 외에도 권력의 위계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산성은 불완전한 의사소통에서 비롯된 인간들의 무기력한 방황이 어느 정도 필연적임을 인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 절망스러운 현실에 위안을 주는 단서가 있을까? 나는 거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김훈은 자신의 소설 속에 아무런 위안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5] 아마도 작가가 말한 위안이 없는 몇 편의 소설남한산성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완벽하게 전해지지 않는 것에 괴로워했다. 이것이 말과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은 독자들을 불편하기에 충분하다. 소설 속 남한산성에 갇힌 인물들처럼, 우리도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다.

 

 

 

 

 

[1] [김훈 남한산성’ 100모호한 관념의 말이 현실 발전 막아”] 한겨레, 201767

 

[2] 김훈 바다의 기별(생각의나무, 2008)에 수록되어 있음.

 

[3] 김훈 남한산성(학고재, 2007) 183

 

[4] 사람이 말을 하거나 언어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의견과 사실을 구분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다의 기별147)

 

[5] 김훈 바다의 기별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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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11-12 22: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이 ˝꿈이라는 것이 희망같지만 알고보면 위안이 아니더냐˝라는 대사를 했었는데요. 역사에 대해 반성을 한다는 것은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다는 각오와 다짐, 기대를 아우르는 것일테니 희망도 있고 위안도 없지는 않아 보여요..

cyrus 2017-11-13 14:3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

임모르텔 2017-11-1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먼지 .............!! 뇌리에 박히네요. 말때문에 허탈한 경험들이 다 있다고봐요.

cyrus 2017-11-13 14:34   좋아요 0 | URL
‘말 먼지‘는 제가 만든 단어가 아니에요. 김훈 작가가 만든건데 소설에 나옵니다. ^^

2017-11-12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13 14:37   좋아요 0 | URL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였죠. 여러 모로 아쉬운 역사의 장면들이 많아요.

겨울호랑이 2017-11-12 2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말씀처럼 역사소설도 목적 지향적이 되면 문학적인 매력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의 생각이 없는 글은 또 산만하게 전개되어 읽을 가치가 없을 것 같기도 하구요.. 둘 사이 균형을 잡는 일이 작가에게는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7-11-13 14:39   좋아요 1 | URL
작가 입장에서 보면 역사소설 한 편 쓰는 일이 제일 어려울 거예요. ^^

풀꽃놀이 2017-11-13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동안 김훈의 문장들이 너무 아프고 그 위안 없음이 견딜 수 없이 미워서 그의 모든 책을 내다버린 적이 있어요. 지금와서 많이 후회가 됩니다. 제가 이제 상처를 직시할 수 있을만큼 성숙한 것인지...체념에 익숙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요새는 종종 아득한 뱀 같은 그의 문장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의 책을 다시 갖추려해도 제가 기억하는 초판본과는 만듦새가 달라져서 아쉽더군요. 새삼 깨닫습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모질게 이별하면 못쓴다는 것을...

cyrus 2017-11-13 14:44   좋아요 1 | URL
저는 김훈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해요. 에세이를 읽으면 좋은 문장들을 발견해요. 그래서 헌책방이나 중고서점에 가면 절판된 김훈의 에세이집을 구입해요.

sprenown 2017-11-13 0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깊이있고, 분석적인 리뷰 잘 읽었습니다..‘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사이에서의 균형있는 조화‘라는 역사소설에 대한 정의도 훌륭하고요..김훈작가는 기본적으로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또는 그들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이냐, 거기서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 라는 관점에서 언어의 한계를 얘기하는 것 같더군요. ‘공터에서‘에 와서는 그분도 이제 기력이 거의 다 소진된 듯한 느낌입니다. 더이상 단행본으로서의 장편소설작품은 나오지 않을 듯...감히 예측해 봅니다.ㅎㅎ

cyrus 2017-11-13 14:47   좋아요 0 | URL
저는 《공터에서》의 실망감 때문인지 《남한산성》을 읽었을 때 느낌은 그저 그랬어요.. ^^;;

표맥(漂麥) 2017-11-13 1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문체에 대한 부분을 다시 한번 더 읽었습니다. 김훈의 건조한 듯 느린 문체를 전 별로 안좋아하지만 그 만의 ‘의식의 흐름‘은 확실하다고 전 인정합니다. 그래서 다른 독자들이 ‘문체‘이야기할 때마다 눈이 반짝, 귀가 쫑긋해 집니다...^^

cyrus 2017-11-13 14:51   좋아요 1 | URL
작가가 늘 좋은 문장만 쓸 수 없어요. 독자가 보기에 어리둥절한 반응이 나올만한 문장도 있어요. ^^

sprenown 2017-11-13 15: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적으로는 김훈작가의 건조하면서도 비장미 넘치는 문체는 단연 ‘칼의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또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는 ‘자전거 여행‘이 최고이고요... 이후 소설이든, 산문이든 이 두 작품을 뛰어넘지는 못한 것 같더라구요..사실 ‘공터에서‘는 마치 소설과 산문을 뒤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서사가 빈약해서..스스로 겨우 쓴다고 밝히기도 하였고..

cyrus 2017-11-14 13:24   좋아요 1 | URL
저랑 취향이 비슷하군요. 《칼의 노래》, 《자전거 여행》은 넘사벽이죠. ^^

캐모마일 2017-11-2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대회 수상 축하드립니다. 항상 양질의 서평과 정보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cyrus 2017-11-21 19:07   좋아요 2 | URL
댓글 덕분에 기분 좋은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축하 인사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일 글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

sprenown 2017-11-21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대회라는 것도 있었나요? 암튼, 축하드립니다! cyrus님은 충분한 수상자격이 있지요..

cyrus 2017-11-21 19: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입상하지 못한 리뷰 대회 횟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1등으로 수상한 리뷰 대회 횟수가 적어요. 더 노력해야 합니다. ^^

서니데이 2017-11-2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리뷰대회 응모가 되었나요?
위의 댓글 읽고 알았어오.
축하드립니다.^^

cyrus 2017-11-22 14: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정해진 리뷰대회 기간에 리뷰를 작성하면 됩니다. ^^

표맥(漂麥) 2017-11-21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랬구나... 보통 때의 글보다 뭔가 났다 싶었더니...^^ 축하하옵니다...^^

cyrus 2017-11-22 14: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리뷰대회 응모 글을 쓸 때 정말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리뷰대회 글 한 편 다 쓰고 나면 기가 빨려나간 기분이 들어요.. ㅎㅎㅎ
 

 

 

조르조네(Giorgio, 1477?~1510)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베르메르) 못지않게 베일에 싸인 화가이다. 조르조네는 짧은 생애동안 뛰어난 재능을 가진 화가로 활동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삶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 [구판] 조르조 바자리 《이태리 르네상스의 미술가 평전》 (한명출판사, 2000)

* [개정판] 조르조 바자리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2》 (올재, 2017)

※ 두 책 모두 같은 역자(이근배)임.

 

 

 

 

조르조네의 생애를 소개한 조르조 바자리(Giorgio Vasari)에 따르면 피렌체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라는 거장이 활동하고 있었을 때, 조르조네가 베네치아를 주름잡고 있었다고 한다. 조르조네의 등장이 베네치아 회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르조네는 카스텔프랑코(Castelfranco)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인들의 이름에는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 이름이 들어가 있다. 빈치(Vinci)는 피렌체 근교에 있는 자치도시(Comune, 코무네) 이름이다. 이곳에 레오나르도가 태어나서 그의 이름이 ‘빈치 출신의 레오나르도’, 즉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알려졌다. 이렇듯 조르조네의 본명은 조르조 바바렐리 다 카스텔프랑코(Giorgio Barbarelli da Castelfranco)이다.

 

조르조네는 ‘젊고 유능한 예술가’로서의 레오나르도와 비슷한 행보를 걷었다. 레오나르도와 조르조네는 공통으로 류트(Lute)라는 악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조르조네는 사교계 모임에 자주 참석했고 베네치아 사교계 최고의 인기 예술가로 알려졌다. 바자리는 빛과 그늘을 다루는 조르조네의 표현력을 레오나르도와 비교했다. 조르조네도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스푸마토(Sfumato: 물체의 윤곽선을 자연스럽게 희미하게 그리는 명암법)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그러나 조르조네는 천부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지 못하고 33세(혹은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교계 연회에서 알게 된 여성과 사랑에 빠져 교제를 하게 됐는데, 이 여성이 흑사병(Plague, 페스트)에 걸렸다. 이 사실을 몰랐던 조르조네는 흑사병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 마크 로스킬 《미술사란 무엇인가》 (문예출판사, 1990)

* 스티븐 파딩 《501 위대한 화가》 (마로니에북스, 2009)

 

 

 

 

르네상스 미술 전공 미술사가인 마크 로스킬은 바자리가 조르조네의 생애에 관한 내용을 수집할 때 상당히 애먹었을 거로 추정한다. 이상하게도 조르조네의 생전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조르조네가 죽고 난 후 그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스킬은 조르조네의 죽음에 관련된 일화를 전설로 치부하고 있다. 《501 위대한 화가》 ‘조르조네’ 편에 보면 조르조 바사리가 조르조네를 ‘머리를 멋있게 기른 온화한 성격의 미남’이라고 썼다는 내용이 나온다. 바자리의 기록에 근거하면 조르조네가 뛰어난 외모와 성품을 지닌 미남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머리를 멋있게 길렀다’는 내용은 바자리의 책(그가 쓴 《예술가 열전》을 번역한 책)에 나오지 않는다. 바자리는 조르조네를 ‘몸집이 큰 남자’라고 묘사했다.[1] 이 내용이 조르조네의 외모를 짐작할 수 있는 바자리의 유일한 설명이다.

 

 

 

 

 

 

 

 

 

 

 

 

 

 

 

 

 

 

 

 

 

 

 

 

 

 

 

 

 

 

 

 

 

 

 

* 에른스트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예경, 2003, 2013, 2017)

* 진중권 《교수대 위의 까치》 (휴머니스트, 2009)

 

 

 

 

조르조네의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가장 불가사의한 작품은 『폭풍우』이다. 아쉽게도 우린 그림 속에 서 있는 남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영원히 알아낼 수 없다. 그밖에도 관람자의 눈을 사로잡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또 있다.

 

 

 

 

 

남자 옆에 있는 부러진 원주(圓柱)와 회색빛 구름 사이에 번쩍거리면서 빛나는 번개. 이 그림 속 수수께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까지 이 그림을 해석하기 위해 주장한 가설이 무려 스무 개나 넘는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미술사가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진중권은 『폭풍우』의 번개에 주목한다. 『폭풍우』는 ‘눈으로 보는 풍경화’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 그림에 숲, 하늘, 물, 도시 그리고 날씨 현상 등 눈으로 보는 소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풍우』는 자연현상의 변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풍경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이 그림 속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폭풍우』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숨겨진 텍스트’이며 그림 속 대상은 알레고리(Allegory)이다. 진중권은 『폭풍우』에 묘사된 자연을 ‘신이 떠난 세상’, 즉 자연현상의 실체를 파악한 인간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 그림을 알레고리 측면으로 바라보면 또 다른 해석이 튀어나온다. 그림 속 남녀가 신화 또는 기독교와 관련된 전설적인 인물을 상징한 것이라면, 번개는 신의 능력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상징물이 된다.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는 아기가 장래에 영웅으로 성장하는 존재,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성은 아기의 어머니(젖을 먹이는 여성이 ‘유모’일 수도 있다), 남성은 의지할 데 없는 어머니와 아기를 보살펴주는 친절한 목동으로 해석했다. 곰브리치의 해석과 연관 지어 부러진 원주와 번개를 설명하면 각각 ‘아기 영웅이 겪게 될 시련’, ‘영웅의 성장을 지켜보는 신’이다. 결국, 이 그림에 나타난 자연은 ‘여전히 신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관람자는 그림의 ‘진짜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도상학적 분석 방식을 동원할 수 있고, 자신만의 색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폭풍우』는 ‘마음으로 보는 풍경화’이다. 관람자의 감정이입은 ‘보이는 것(직접적 표현)’과 ‘보이지 않은 것(암시적 표현)’의 간극을 채운다.

 

나는 『폭풍우』가 종교적 알레고리가 들어간 풍경화라고 생각한다. 세 명의 인물은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 가족(Holy Family)’이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폭풍우』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중세 시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마크 로스킬은 『폭풍우』와 『카스텔프랑코의 성모』(약칭 ‘성모’)에서 발견되는 유사점을 근거로 두 그림 모두 조르조네의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폭풍우』 그림 왼쪽에 있는 목동은 『성모』 그림 왼쪽에 있는 갑옷 입은 기사(율리우스 1세의 뒤를 이어 로마 교황으로 축성된 성 리베리우스라고 한다)의 자세와 똑같다. 그리고 『폭풍우』 속 어머니와 아기는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모습과 닮았다. 그러면 『폭풍우』의 목동의 정체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Saint Joseph)이다. 기사 복장을 한 성인과 요셉. 이 두 사람은 성모와 아기 예수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진 남성이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성모 마리아를 절망과 피폐해진 정신에 안식과 활력을 불어넣는 은혜로운 존재로 묘사했고, 성모는 ‘중세 남성들이 존경하는 여성상’으로 자리 잡았다.

 

 

 

 

 

 

 

 

 

 

 

 

 

 

 

 

 

 

 

* 크리스틴 드 피장 《여성들의 도시》 (아카넷, 2012)

* 프랑수아 라블레 《팡타그뤼엘 제3서》 (한길사, 2006)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은 ‘원죄 의식’을 근거로 여성을 ‘타락하고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바라봤다. 기독교 내 여성차별 인식은 여성에 대한 차별의 이데올로기로 형성됐고, 편협한 사고방식은 중세로 이어졌다.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zan)은 펜을 무기 삼아 여성을 비하하는 풍조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 르네상스가 도래했는데도 여성 차별적 편견은 여전했다. 중세의 낡은 관행을 풍자한 프랑수아 라블레(Francois Rabelais)는 ‘남성보다 못한 여성’을 무시하는 구시대적 인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 아일린 파워 《중세의 여인들》 (즐거운상상, 2010)

*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연암서가, 2012)

* 카리 우트리오 《이브의 역사》 (도서출판 자작, 2000)

* 섀리 엘 서러 《어머니의 신화》 (까치, 1995)

 

 

 

 

중세 절정기에 성모 숭배와 기사도 정신이 하나가 되는 ‘어설픈 접목’이 이루어졌다. 중세 사람들은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를 ‘존경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특히 기사들은 성모와 같은 여성을 숭배하고 수호하는 일이 기사도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조르조네의 『카스텔프랑코의 성모』는 성모 숭배와 ‘갑옷으로 무장한 성인’의 조합을 도상학적으로 나타낸 그림이다. 그림 속 성인은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성모를 지키기 위해서 언제든지 싸울 수 있는 ‘전사’에 가깝다. 중세 시대가 무너지고 기사의 역할이 사라져도 남성들의 ‘성모 바라기’는 멈추지 않았다. 중세 말기부터 아기 예수에게 젖을 주는 성모를 묘사한 그림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남성 기독교인들은 모유 수유를 하는 여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성모의 모유 수유는 인정했다. 이때부터 그림 속 성모는 가슴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때론 헐벗은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자, 이제 당신이 여성을 이중적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못된 시선을 이해했다면,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볼 때마다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폭풍우』의 여성이 수유하는 자세가 어설프다. 그녀는 오른쪽 허벅지를 드러내 보인다. 남성 관람자의 시선은 그녀의 허벅지와 가슴으로 향한다. 따라서 『폭풍우』의 여성은 남성의 욕망이 반영된 ‘에로틱한 성모’를 상징한다. 성모를 지켜야 할 기사가 사라지자 그 자리에 ‘한층 젊어진 요셉’이 등장했다. 요셉은 아기 예수를 양육하는 성모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 주변을 감시해야 한다. 그리하여 여성은 ‘자녀 양육에 힘써야 하고, 남성에게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가 된다.

 

『폭풍우』는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 이어지는 편협한 여성 차별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불쾌한 그림’이다. 나의 그림 해석에 이견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림을 곰곰이 따져 보면 남성 중심적 세계를 보여주는 알레고리가 읽힌다.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남성들이 열광한 성모 마리아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이상적인 존재’이다.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의 위력을 경험한 남성들은 암울한 현실이 주는 괴로움을 잊기 위해 성모를 예찬했다. 조르조네는 『폭풍우』와 『카스텔프랑코의 성모』를 그리는 내내 흑사병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불길한 예감을 감지했던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성모는 천부적인 능력을 갖춘 젊은 화가의 영혼을 지켜주지 못했다.

 

 

 

 

 

[1] 이근배 역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2》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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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6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07 09:00   좋아요 2 | URL
지금도 흑사병의 원인, 전파 경로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어요. 여전히 풀리지 못한 것들이 있어요.

서니데이 2017-11-08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밖에 바람이 많이 불어요.
cyrus님 좋은 오후 보내세요.^^

cyrus 2017-11-08 16:34   좋아요 2 | URL
오늘 미세먼지가 엄청 많이 날렸겠죠? 이럴 때 퇴근 생각이 간절합니다. ^^

임모르텔 2017-11-12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일간 대전 대청호수로 가을여행을 다녀왔는데, 금새 단풍이 누렇게 떨어지더군요.
짧네요 가을이..환절기 비염 조심하세요..^^

cyrus 2017-11-12 20:04   좋아요 1 | URL
내일부터 기온이 떨어진다고 해요. 이렇게 겨울이 오는가 봐요. 올빼미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
 
꽃은 바퀴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49
박설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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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독을 두려워한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고독’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스마트폰은 우리 삶을 바꿔 놓았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와 접속돼 있다는 데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고독’은 문학 속에서나 등장하는 언어가 되었다. 긴 겨울을 홀로 지낼 수 있는 인내심은 인간보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더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우리들은 집에 홀로 지내는 것보다 송년회를 통한 겨울나기를 더 선호한다.

 

고독은 눈물겨운 아픔이다. 모두가 다 내 곁을 떠나가고 홀로 된 느낌을 든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고독을 친구로 삼을 수만 있다면 고독처럼 좋은 친구는 없다. 고독을 아는 자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살아있는 존재의 상처를 사랑하는 시선도 갖게 된다. 박설희 시인『오후 네 시』는 우리가 늘 잊고 있던 거리낌 없는 연민의 감정을 되살려 낸다.

 

 

뒷다리를 끌며 걷던 흰 개가

웅크리고 앉아

아픈 제 발을 오래 핥고 간다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 물푸레나무도

날렵한 곤줄박이도

 

곰곰 생각하는 길

 

흔들리는 이파리

뾰족한 발끝

 

갸우뚱한 해가 매달아준 긴 그림자 끌고

 

 

 

- 『오후 네 시』 전문 (100쪽)

 

 

 

겨울에 사람만 쓸쓸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스산한 겨울바람을 맞아 앙상해진 나무도 외롭다. 지그재그로 하늘로 향한 나뭇가지는 잎도 열매도 없이 겨울을 견딘다. 시인은 『11월』이라는 시를 통해 겨울나무가 죽지 않았음을, 그리고 고갈되어가던 생명이 다시 소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석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중얼거리며 내다본

부연 창밖, 11월의 나무는

먼 여행을 떠나는 수도자를 닮았다

모든 것이 겹으로 보이는 내 나이를 닮았다

 

지금은 안으로 뜨거워질 때

어디라도 향하지만

어느 곳도 향하지 않는다.

 

 

- 『11월』 부분 (66~67쪽)

 

 

 

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는 삭막한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즉 고독을 받아들이는 길이다. 시인은 ‘먼 여행’과도 같은 고단한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겨울나무를 보면서 깨닫는 고독의 의미는 나 자신과 스스럼없이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된다. 이런 내적 대화는 고독을 견뎌내는 힘이 되며 몸과 정신을 뜨겁게 해준다.

 

 

시멘트 블록의 벽면이 서서히 기울었다

마지막으로 슬레이트 지붕이 털썩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 나무들이 모여 산다

리어카, 함지박, 깨진 항아리, 하늘에는 별자리

누군가는 어떻게든 가업을 잇기 마련

살은 내리고 뼈대만 남은 리어카를

참나무가 온몸을 들이밀어 꽉 껴안았다

공중으로 불끈 들어 올렸다

어린 오리나무는 가시철조망을 놓칠세라

꽉 다문 입이 철가시를 물고 붙어버렸다

쑥쑥 자라는 나무, 기억의 집

점점 높이 떠오르는 가계

공중을 들어 올린다

포탄이 떨어지고

홍수가 휩쓸어 가도

묵묵히 천문을 살펴가며

세상의 중심은 여기

그늘에 돋아난 무성한 입들을 위해

 

 

- 『이후』 전문 (32~33쪽)

 

 

『이후』 에 묘사된 장소는 사람이 떠나버린 ‘이후’의 텅 빈 곳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쑥쑥 자라는 나무’의 생명력은 폐허를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 내는 신비한 힘이다. 나무는 생존을 위해 날마다 위로 향해야만 한다. 이들의 역할은 실패한 공간의 상처와 흔적을 서서히 지워나가는 일이다. 이 시의 ‘나무들’은 궁극적으로는 희망과 재생에 대한 시인의 염원이 반영된 은유이다.

 

박설희 시인의 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절망과 단절’이 아닌 ‘희망과 재생’이다. 숙명적인 삶의 암흑 속에서도 시인은 부단히 상처를 치유하고 실존적 사유를 시도할 자신만의 시선을 추구한다. 그녀의 시집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시 한번 삶에 대해 진한 감동을 경험하며, 그러한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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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02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으~ 이젠 시집에 대한 리뷰까지... 전문가적 솜씨와 풍부한 감성.. 팔방미인 이네요..

cyrus 2017-11-03 20:03   좋아요 0 | URL
자꾸 저를 띄워주시니까 부담스럽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7-11-0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ㅎㅎ..

cyrus 2017-11-03 20:03   좋아요 0 | URL
시가 어렵지 않아서 좋습니다. ^^

임모르텔 2017-11-0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독하면서도 황홀한 고독에 중독되면 주기적으로 찾게되죠...고독은 마약같아요~^^
와~ 오후 네시.. 코가 찡하네요.

cyrus 2017-11-03 20:07   좋아요 0 | URL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방에서 혼자 책 읽으면 마음이 편해요. ^^

2017-11-02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03 20:08   좋아요 0 | URL
태양이 물러나기 전에 빛을 강렬히 내리쬐는 시간이기도 하죠. ^^

수이 2017-11-03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데~ 오랜만에 와서 시 읽으니 더 좋고 :)

cyrus 2017-11-03 21:17   좋아요 0 | URL
최근에 장문이 많은 책 위주로 읽어서 그런지 시가 읽고 싶어졌어요. ^^

나비종 2017-11-05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물체는 그 온도에 해당하는 복사에너지를 내보냅니다. cyrus님의 리뷰를 읽다보니 사람의 감성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기쁨이나 열정은 뜨거운 에너지를, 고독이나 슬픔은 보다 낮은 에너지를 뿜어낼 것만 같습니다.
고독의 에너지는 대체로 낮고 시리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인과 만나 글로 표출되었을 때 바라보는 이들을 토닥이는 따스함이 되나 봅니다. 깊고 담담한 시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마음의 온도를 조금 높이고 갑니다.^^

cyrus 2017-11-06 10:15   좋아요 0 | URL
이 시집에 딱 어울리는 좋은 평입니다. 나비종님의 댓글처럼 멋있는 문장으로 시집 리뷰를 써보고 싶군요. ^^

페크pek0501 2017-11-06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감상하는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와 관련한 님의 글도 좋습니다.
시집 리뷰라면 쓰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이런 형식 좋네요. 배워 갑니다.

cyrus 2017-11-07 08:53   좋아요 0 | URL
리뷰라기 보다는 독후감에 가까워요. 제 글에 배울 건 없어요. ^^
 

 

 

어제 퇴근길에 중고 책 전문 서점 ‘글수레’에 들렸다. 그곳에서 희귀한 절판본을 발견했다.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성애소설을 총 세 권으로 번역한 《완역 돈 쥬앙》(보람, 1995)이다. 필자는 이 책의 1권과 2권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완역 돈 쥬앙》을 처음 공개했을 때 ‘두 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잘못 소개했다(관련 글: <야설작가 아폴리네르> 2014년 10월 23일 작성). 이 글은 2014년에 작성한 글을 수정하기 위해 썼다.

 

《완역 돈 쥬앙》의 번역 저본은 『Les Onze Mille Verges』(1907), 『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1911)이다. 아폴리네르는 이 두 편의 소설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완역 돈 쥬앙》 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완역 돈 쥬앙》 1권 목차

제1부 우연한 로맨스

제2부 프랑스에서는 향수를 사지 마라 (내용이 2권으로 이어짐)

 

《완역 돈 쥬앙》 2권 목차

제2부 프랑스에서는 향수를 사지 마라 (완결 편)

제3부 여자의 환상에 마침표를 찍을 때

 

《완역 돈 쥬앙》 3권 목차

제4부 일만 일천 개의 채찍

 

 

 

출판사는 이 책을 ‘장편소설’로 소개했지만, 아폴리네르가 익명으로 발표한 두 편의 소설은 ‘장편’으로 보기 어렵다. 제1부(‘우연한 로맨스’)는 『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을 번역한 것이고, 제4부(‘일만 일천 개의 채찍’)는 『Les Onze Mille Verges』를 번역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제2부, 제3부는 무엇일까. 이야기의 흐름과 표현력을 봐서는 확실히 아폴리네르가 쓴 글이 아니다. 출판사가 책의 분량을 장편소설 정도로 늘려서 판매하려고 이름 모를 작가의 성애소설 두 편을 끼워 넣었다. 외국 작가의 저작권을 무시하고 원작을 임의대로 편집하면서까지 책을 펴냈던 90년대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출판사의 거짓 홍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 아폴리네르, 곽효원 역 《돈 주앙 : 소년 돈 주앙의 회상》 (예문, 2014)

* 아폴리네르, 곽효원 역 《돈 주앙 : 일만 일천 개의 채찍》 (예문, 2014)

 

 

 

글수레 서점에 가보면 전권이 다 갖춰진 《완역 돈 쥬앙》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의 정가는 6,500원이다. 만나기 힘든 희귀 중고책이라서 중고가가 비싸다. 한 권당 15,000원이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완역 돈 쥬앙》 3권만 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낱권을 사기 위해 내야 할 15,000원은 ‘매몰 비용’이 될 수 있다. 또 《완역 돈 쥬앙》 3권과 같은 내용인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문학수첩, 1999)을 가지고 있어서 다시 살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 책의 상태를 확인했으며 구매 결정을 포기했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완역 돈 쥬앙》 전 3권을 사고 싶은 분이 있으면 지금 당장 책을 주문하라고 권하고 싶다. 글수레 서점에 전화로 문의해서 주문할 수 있다. 대구에 거주하고 있으면 서점에 직접 방문해서 사면 된다. 《완역 돈 쥬앙》 전 3권의 가격은 총 45,000원이다. 이 책을 사는 것보다 전자책으로 만들어진 번역본을 사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다.

 

 

 

 

 

 

 

 

 

 

 

 

 

 

 

 

 

 

 

 

* 아폴리네르, 용광남 역 《신역 돈 쥬앙》 (픽션뱅크, 1999)

 

 

 

 

1999년에 세 권짜리로 된 《신역 돈 쥬앙》(픽션뱅크)이 출간되었다. 이 책 역시 정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 책정되어 있다. 이 책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신역 돈 쥬앙》은 1995년에 나온 《완역 돈 쥬앙》과 비슷한 형식의 번역본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도서관 서고 자료실에 《신역 돈 쥬앙》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을 보려면 서고 자료실 관리를 담당하는 사서에게 대출 요청을 하면 된다.

 

 

 

 

 

 

 

 

 

 

 

 

 

 

 

 

 

 

* 아폴리네르, 성귀수 역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 (문학수첩, 1999)

 

 

 

《신역 돈 쥬앙》이 나오고 두 달 뒤에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이 출간되었다. 알라딘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의 초판 발행일이 ‘1999년 1월’로 나오는데, 틀린 내용이다. 정확한 초판 발행일은 ‘1999년 9월 4일’이다. 《신역 돈 쥬앙》의 초판 발행일은 1999년 7월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아르센 뤼팽(Arsène Lupin)’ 시리즈,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오페라의 유령》(문학세계사, 2009) 등 불문학 작품들을 번역한 성귀수 시인이다.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에 표제와 같은 제목의 소설과 또 다른 성애소설 『어린 동쥬앙의 무용담』이 수록되어 있다. 『어린 동 쥬앙의 무용담』의 원제는 『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이다.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은 철저하게 비밀에 휩싸인 채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렇다 보니 아폴리네르는 소설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성애소설을 출판하기로 했던 출판업자는 아폴리네르가 제출한 원고에 실망했다. 출판업자는 원고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길 원했다. 그러나 아폴리네르는 출판업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출판하기로 계약했던 『사랑스러운 검둥이 여자』 집필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출판업자는 기다리다가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다른 작가가 쓴 성애소설인 『하얀 에르민』을 아폴리네르의 소설과 함께 묶어 책을 만들었다. 그래서 아폴리네르 사후에 출판업자가 만든 책이 세상에 공개됐을 때 『하얀 에르민』을 아폴리네르가 쓴 작품으로 잘못 소개되기도 했다.

 

필자는 2014년에 작성한 글을 통해 『하얀 에르민』을 《완역 돈 쥬앙》 2부 이야기와 같은 작품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추정이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완역 돈 쥬앙》의 번역자가 출판 뒷이야기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완역 돈 쥬앙》 2부와 3부의 원제가 무엇이고 누가 썼는지를 알 수 없다.

 

『일만 일천 개의 채찍질』이 정액과 피가 난무하는 ‘하드코어 포르노’라면 『어린 동 쥬앙의 무용담』은 자극적인 성애 묘사에 충실한 ‘B급 포르노’이다. 『일만 일천 개의 채찍질』에 세세하게 나온 성애 묘사들을 학문적 용어로 분류, 정리하면 이렇다.

 

난교, 사디즘(Sadism), 마조히즘(Masochism), 남색(Sodomy), 스카톨로지(Scatology), 색정광(Satyriasis), 님포마니아(Nymphomania, 여성 색정광), 페도필리아(Pedophilia),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등장하는 색정광들은 주저 없이 섹스의 향연에 뛰어든다. 색정광이 타자를 대하는 인식은 무척 단순하다. 타자를 자신의 성족 욕구를 채워주는 장난감으로 대할 뿐이다.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이성의 판단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섹스에 미쳐버려서 감정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통제하지 못한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인륜을 저버린 범죄자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은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열광했다. 초현실주의적 선언에 참여한 시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은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을 ‘포에지(poésie: 시 또는 시적 정취)와 섹스를 결부시킨 작가의 독신자(瀆神子: 신을 모독함)적, 예언자적 의식’이라고 극찬했다.

 

 

 

 

 

 

 

 

 

 

 

 

 

 

 

 

 

 

 

 

 

 

 

 

 

 

 

 

 

 

 

 

 

 

 

 

 

 

 

 

 

 

 

 

 

 

* 호세 피에르, 르네 파스롱 《초현실주의》 (열화당, 1994)

*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한길아트, 2001)

* 피오나 브래들리 《초현실주의》 (열화당, 2003)

* 카트린 클링죄어 르루아 《초현실주의》 (마로니에북스, 2008)

* 앙드레 브르통 외 《초현실주의 선언》 (미메시스, 2012)

* 로라 톰슨 《초현실주의》 (시공아트, 2014)

* 알렉산드리앙 《에로틱 문학의 역사》 (한숲출판사, 2005)

 

 

 

초현실주의는 현실 세계로부터 단절을 추구하는 예술사조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력보다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신, 성(性), 이성을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억압으로 규정한다. 그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인간 해방’의 실체는 ‘상상력의 해방’이다. 아라공은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서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 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무너뜨리는 초현실주의적 면모를 확인했다.

 

 

 

 

 

 

 

 

 

 

 

 

 

 

 

 

 

 

 

*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문학과지성사, 2004)

* 프랑수아 라블레 《팡타그뤼엘 제3서》 (문학과지성사, 2006)

* 프랑수아 라블레 《팡타그뤼엘 제4서》 (문학과지성사, 2006)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미셸 데코댕(Michel Decaudin)은 아폴리네르를 ‘라블레(Francois Rabelais)의 소스에 맛 들인 사드(Marquis de Sade)’라고 평가했다.[1] 그의 분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라블레는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문학과지성사, 2004)을 통해 풍요롭고 자유로운 인간 해방을 제시했다. 소설 속 거인 팡타그뤼엘(Pantagruel)의 이름에서 딴 팡타그뤼엘리슴‘육체적 만족을 통해 삶을 즐기려는 태도’[2]를 의미한다.

 

 

 

 

 

 

 

 

 

 

 

 

 

 

 

 

 

 

 

 

 

 

 

 

 

 

 

 

 

 

 

 

* 사드 《사드의 규방철학》 (도서출판b, 2005)

* 사드 《소돔의 120일》 (동서문화사, 2012)

* 사드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워크룸프레스, 2014)

* 존 필립스 《HOW TO READ 사드》 (웅진지식하우스, 2008)

 

 

 

 

라블레는 ‘웃음’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사회를 비판하고 구시대를 파괴했다면, 사드는 극단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법과 종교를 거부하고 조롱했다. 사드가 선택한 행동은 펜과 종이를 통해 외설과 부도덕, 신성모독의 악취를 뿜어내는 일이었다. 사드는 사회를 위반하는 행동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무신론을 이용한다. 그러므로 신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관습과 규범을 뛰어넘는 위반 행동을 할 수 있으면 여기에 대해 비난을 받지 않게 된다. 또 본능에 충실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팡타그뤼엘리슴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섹스를 즐기면서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쾌락주의라면 사드의 리베르탱(libertin)은 팡타그뤼엘리슴을 뛰어넘는 극단적 자유주의다. ‘무신론’을 이용하여 사회적 금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일탈을 관용한다.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맛있는 육체’를 노리고, 마음껏 누린다. 자신들의 행동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팡타그뤼엘리슴과 리베르탱 일부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 아폴리네르 《티레시아스의 유방》 (연극과인간, 2004)

 

  

 

그러나 사드와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의 차이점이 있다. 사드는 법에 얽매인 결혼 관계와 인간의 종족 번식을 반대했다. 사드는 오로지 자기 삶의 일차적 목표인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집중했다. 『어린 동 쥬앙의 무용담』의 주인공은 하렘(harem) 분위기가 있는 성에 거주하면서 성안의 모든 여성을 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방탕한 여성 편력을 조국의 인구를 늘려주는 애국적인 의무라고 말한다. 주인공의 황당한 생각은 아폴리네르의 초현실주의 희곡 《티레시아스의 유방》 (연극과인간, 2004)에도 나온다. 방탕한 성 생활을 출산과 연관 짓는 주인공의 생각은 자손 번식을 거부하는 사드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다.  

 

아폴리네르, 라블레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는 공통으로 ‘인간 해방’을 갈망했으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범주에 ‘여성’을 배제했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부터 시작해서《팡타그뤼엘 제3서》《팡타그뤼엘 제4서》(한길사, 2006)까지 남성 인물들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성적 쾌락을 누리는 여성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여성 인물의 주체적인 정체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보기 어렵다. 아폴리네르의 성애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끝내 남성의 쾌락을 위해 희생당하며 쾌락에 미친 남성들의 손에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에 초현실주의를 ‘남성 명사’라고 적은 내용을 볼 수 있다.[3] 식자층 집단을 지배한 남성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상식, 관습 등을 부정했으면서도 ‘여성은 열등하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상하로 나뉜 지배 구조를 만들었다. 이 경우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존재는 누굴까?

 

 

 

 

 

[1] 《일만 일천 개의 채찍질》 8쪽

[2]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14쪽

[3] 《초현실주의 선언》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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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2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02 18:53   좋아요 2 | URL
자고 일어나면 나오는 신간도서들이 반갑긴 하지만, 사람들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책이 태반입니다. 북플에 신간도서를 소개하는 분들이 많아요. 재미는 없지만, 저 같은 별난 독서 취향을 가진 놈도 있어야 합니다. ㅎㅎㅎ

sprenown 2017-11-02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리뷰는 읽을때 마다 항상 입이 떡 벌어지네요..도대체 이 해박한 지식과 열정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cyrus 2017-11-02 18:58   좋아요 2 | URL
제 글의 80%는 책에서 나온 것이에요. 제 역할은 책 속의 내용을 추려서 내 입맛에 맞춰서 편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글에 편향과 오류가 있어요. 그것을 확인하고 고치기 위해서 책을 읽어요. ^^

syo 2017-11-02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올라올 때 보면, 정말 ‘꾼‘인데....^-^b

cyrus 2017-11-02 19:00   좋아요 0 | URL
저는 말 많고, 아는 척하는 지적 허영꾼입니다.. ㅎㅎㅎ

sprenown 2017-11-0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대단해요!

임모르텔 2017-11-0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졸리니 감독의 <살로,소돔의 120일>을 예전에 봤어요. 이 영화를 만든후에 살해당했다고해요.책으로도 읽어보고 싶네요.

cyrus 2017-11-03 20:12   좋아요 0 | URL
악랄하고, 불쾌한 묘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