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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평점 :
남한산성의 가을은 시방 절정이다. 가을이 얼마나 성큼 다가왔는지 산성의 성곽 뒤로 바람맞은 나무들은 잎을 땅바닥에 떨군다. 산길에는 낙엽이 제법 폭신하게 깔렸다. 남한산성하면 우리들의 뇌리에 굴욕의 장소로 각인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가 청 태종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이다. 산성이 완성된 지 10여 년 만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 타협하자는 주화파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로 갈렸다. 조선은 침략군과 대치하여 방어전을 펼쳤지만 47일 만에 항복했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짚은 ‘역사소설’로 알려졌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한국사전연구사, 1998)에 따르면 역사소설은 ‘실제의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특정의 실존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재창조 또는 재현한 소설’이다. 역사소설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가장 중요하다. 역사소설의 논점은 ‘역사적 사실성’과 ‘작가적 상상력’ 사이에 놓여 있다. 역사가 잊히거나 흩어진 사실(또는 사료)을 모아서 정리하는 것이라면, 역사소설은 그것들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서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에 지나치게 얽매일 때 극적 재미는 떨어질 수 있지만, 상상력에만 의존할 때 역사적 사실성이 간과된다. 대부분 독자는 ‘《남한산성》은 역사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은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이 우선한다. 역사소설은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과 해석능력이 더욱 중요시되는 ‘창작품’이지 ‘교과서’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소설에서 역사적 교훈만 찾으려는 독서법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간직하고 있어 후세에 길이길이 호국의 교훈을 주는 장소이다. 독자들이 ‘역사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 《남한산성》을 읽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처럼 의도가 뚜렷한 해석에 초점을 맞춘 독서는 재미없다. 《남한산성》에 평점을 적게 준 독자 리뷰 몇 편 봤다. 이 리뷰들의 공통점은 《남한산성》을 ‘지루한 소설’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김훈의 문체를 비판한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말처럼 ‘아득한 뱀’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는 문장을 쫓아가기가 힘든 건 사실이다. 《남한산성》은 2007년에 첫선을 보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SNS은 우리의 생활방식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방식까지도 변화시켰다. SNS에 길든 독자들은 긴 이야기를 압축한 짧은 글을 좋아하고 명료한 표현이 있는 짧은 문장에 열광한다. 종이 위를 느릿느릿하게 기어가는 김훈의 문어체는 가끔 독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소설’을 읽다가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적을 위한 독서법은 독자의 눈을 지치게 한다.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Nabokov)는 인간이란 큰 담론보단 ‘세밀한 잡담’에 집착하는 존재라고 했다. 김훈은 《남한산성》이 역사 담론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1] 《남한산성》에서 ‘역사’라는 큰 담론을 찾으려다가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둘러싼 주화파 최명길과 주전파 김상헌의 설전을 진지하게 분석하면서 누가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또 그들의 모습을 통해 현재를 비추어보는 것도 진부하다. 사실 이런 작업은 ‘역사소설’이 아닌 ‘역사책’을 보면서 해야 하는 일이다.
김훈은 『말과 사물』이라는 에세이[2]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불완전한 언어’로 소통하는 존재라고 썼다. 남한산성은 대화의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불완전한 세계’를 압축한 장소이다.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 백성과 지도층은 입으로 싸우고 또 싸운다. 이것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세밀한 잡담’이다. 그들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불완전한 언어, 즉 ‘말(言) 먼지’는 목표가 있는데도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화살과 같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피폐해진 성안에서 주전파와 주화파 간 대립은 계속된다. 언관(言官: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은 관원)들이 최명길이 ‘청과 밀통한 역적’, ‘왕을 미혹하는 자’라고 비난하면서 결사 항전을 고집한다. 그러나 언관의 주장은 의견과 사실이 구분되지 않는다.
명길은 본래 이적의 무리와 밀통한 자이옵고, 이제 귓속말로 전하를 미혹하고 적의 말을 옮겨서 전하를 협박하는 자이옵니다. 명길이 사직을 헐어서 적의 마구간을 짓고, 백성의 나락을 거두어 적의 말먹이 풀로 내주려 하니 명길이 과연 누구의 신하이옵니까.
지금 성 안의 백성들은 명길을 빗대어 용골대의 아들 용골소라고 부르고 있으니, 민심은 이미 명길이 누구의 신하인지 가린 것이옵니다. [3]
인조에게 전하는 언관의 말은 의견이 사실을 압도하는 형태이다. 사실과 먼 의견은 편견과 배척과 단절을 낳고, 불신을 부른다. 이것이 김훈이 『말과 사물』에서 지적한 ‘불완전한 말’의 폐해이다. ‘불완전한 말’은 사실과 의견이 좀처럼 구분되지 않는다.[4] 인조는 언관들의 말이 대의(大義)를 밝힐 수 있어서 아름답다고 했지만, 심히 가파르다고 말했다. 의견과 사실을 구분할 수 없는 ‘말 먼지’는 소통뿐만 아니라 의사 결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보이는 크고 작은 말과 언어의 부딪힘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불협화음이다. 따라서 인조는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한 채 허탈과 절망 속에 헤매는 모습을 보인다. 성안에 ‘말 먼지’가 자욱할수록 백성들의 삶과 국운은 기울어만 갔다.
항복 문서를 작성하는 과정은 ‘합리적 언어 전달 행위의 불가능성’을 바로 보여주는 중요한 묘사이다. 인조는 투항을 포기하고 화친을 원한다는 글을 쓰게 했다. 그러나 항복 문서를 쓰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왕이 보는 앞에서 나라를 팔아먹는 굴욕적인 일이다. 글을 쓰도록 명령받은 신하들은 쓰지 않으려고, 아니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쳤다. 정육품 정수찬은 항복 문서를 작성할 자격이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지병과 남루한 계급에 대해 호소했다가 곤장을 맞았다. 정오품 정랑은 미친 척하고 간택되지 않을 글을 써서 바쳤다. 결국, 신하들의 ‘폭탄 돌리기’ 끝에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작성하게 됐다. 그러나 칸(Khan)은 내용의 의미를 바로 확인하기 힘든 최명길의 항복 문서에 격노했다. 최명길의 항복 문서는 소통 불가능한 ‘불완전한 말’이다. 명분을 내세워 던진 말은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공중에서 허무하게 사라진다. 필자가 ‘언어 전달’이라고 하지 않고, ‘합리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이유가 있다. 작가는 전반적인 소통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 부인하지 않는다. 말과 언어가 ‘합리적인 도구’로 활용된 소통의 한계를 주장하고 있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은 허망한 몸짓에 불과했으며 적들의 비웃음에 짓밟힌다. 소설은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 다른 언어와 문화 외에도 권력의 위계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산성》은 불완전한 의사소통에서 비롯된 인간들의 무기력한 방황이 어느 정도 필연적임을 인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 절망스러운 현실에 위안을 주는 단서가 있을까? 나는 거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김훈은 자신의 소설 속에 아무런 위안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5] 아마도 작가가 말한 ‘위안이 없는 몇 편의 소설’에 《남한산성》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완벽하게 전해지지 않는 것에 괴로워했다. 이것이 말과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은 독자들을 불편하기에 충분하다. 소설 속 남한산성에 갇힌 인물들처럼, 우리도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다.
[1] [김훈 ‘남한산성’ 100쇄…“모호한 관념의 말이 현실 발전 막아”] 한겨레, 2017년 6월 7일
[2] 김훈 《바다의 기별》 (생각의나무, 2008)에 수록되어 있음.
[3]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007) 183쪽
[4] 사람이 말을 하거나 언어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의견과 사실을 구분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다의 기별》 147쪽)
[5] 김훈 《바다의 기별》 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