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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평점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특이한 수법으로 사람을 죽인다. 그 이름은 ‘잡아 늘이는 자’라는 뜻을 가졌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하여 침대에 눕히고는 키가 침대 길이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 죽이고,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여 죽였다. 그의 이름이 붙여진 침대는 ‘자신의 주관적 기준’, ‘아집’을 비유하는 관용어가 된다. 이 악당은 ‘폴리페몬(Polypemon)’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의 뜻은 ‘해로운 자’이다. 아마도 프로크루스테스는 폴리페몬이라는 이름을 철저히 숨긴 채 나그네에 접근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폴리페몬과 그의 침대에 눕혀진 사람들이 많다. 오늘날의 폴리페몬은 ‘편견’을 가진 일반인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한다. 폴리페몬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와 침대에 눕힌다. 정신질환자 혹은 성범죄자로 차별받는 성소수자, 떠날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는 외국인노동자, 그리고 ‘김치녀’, ‘한남충’으로 부르면서 서로 비하하고 경멸하는 여성과 남성들…‥. 누구나 폴리페몬의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는 침대의 주인인 폴리페몬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 폴리페몬은 영웅 테세우스(Theseus)는 에게 자신이 저지르던 악행과 똑같은 수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폴리페몬의 아집은 독선으로 변질된다. 무수히 많은 독선은 혐오를 낳는 주범 중 하나이다. 결국 그 사회에 공감은 사라지고 혐오만 자라난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혐오의 형태는 다양해질 것이다.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혐오가 있는가 하면, 권력이 없어서 생긴 혐오도 있다. 특정 대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혐오가 발생하는 한편, 그저 경멸 때문에 혐오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처럼 혐오의 심각성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같은 낱말들만으로는 혐오의 진짜 원인을 담아내지 못한다. 혐오는 편견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암울하다. 카롤린 엠케는 사회 곳곳에 널려있을 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혐오 문화’의 실체를 규명한다. 성소수자에 속한 엠케는 동성애 혐오뿐만 아니라 난민 혐오, 여성 혐오 등의 현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분석한 언론인이다. 《혐오 사회》는 폭력과 사회적 갈등을 양산하는 혐오 문화의 형성 과정을 헤집는다.
이 책에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예화가 펼쳐진다. ‘반(反)난민’을 외치는 독일 극우들, 흑인에 대한 미국 경찰들의 과잉 진압, 성소수자들에게 자행하는 폭력. 저자의 시선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혐오는 개인의 정서적 형태가 아닌 적대심과 방관적 태도로 설계된 집단적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을 ‘폴리페몬의 침대’ 이야기로 비유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폴리페몬은 자기가 믿는 일방적 기준(곧 언급할 ‘동질성’, ‘본원성’, ‘순수성’과 같은 의미)에 따라 상대방을 혐오한다. 그리하여 폴리페몬은 ‘가해자’가 되고, 혐오 받는 대상은 폴리페몬의 침대에 누워 옴짝달싹 못 하는 ‘피해자’, ‘희생양’이 된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방관자’가 있다. 방관자는 피해자의 고통을 구경할 뿐 그들의 감정과 상처에 공감하지 못한다. 저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타자를 혐오하는 일이 가능한 ‘혐오 사회’를 지금까지의 모든 혐오범죄보다 한층 더 무서운 경종의 대상으로 여긴다. ‘혐오 사회’의 방관자는 잔혹한 사건의 중심에서 비켜 있는 비겁한 위치에 있다. 사실 방관자도 혐오범죄의 공모자이다. 따라서 저자가 정의하는 혐오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관습과 신념의 결과물’[1]이다.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은 자신의 정체성 또는 신념을 ‘표준’으로 내세우고, 이 ‘표준’에 맞지 않는 타인을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규정한다. 예컨대 ‘찬란하고 순수한 민족’이 사는 땅에 외래문화 또는 종교가 밀려 들어와 사회 불안정을 일으킨다는 단순한 논리가 의외로 꽤 완강한 힘을 보여준다.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보는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사회란 하나의 집단이고, 소속감에서 오는 안도와 심리적 평정을 유지케 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인간은 집단적 동질성과 본원성을 굳건히 하기 위해 구성원들끼리의 공감과 응집력을 강화한다. 소속감과 비뚤어진 편견이 뭉쳐 나오는 것이 바로 ‘혐오’이다. 사회 문제의 원인은 사회 내부에도 있는데 자신과 다른 타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든 이질성을 배제하고 동질성을 찾아 무리 지으려는 문화에 익숙하다. ‘우리끼리’ 뭉치는 ‘우리’ 의식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순혈주의에 매몰되기 일쑤였다. 지역, 피부색, 직업, 성별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차별하는 태도, 그리고 그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되는 혐오 언어는 타인과의 인격적 관계를 해치는 증오와 분노를 만든다. 분명한 것은 ‘혐오를 혐오로 대응하는 방식’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혐오로 가려진 눈을 여는 것만이 또 다른 갈등과 상처를 피하는 길이다. 혐오가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지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1] 《혐오 사회》 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