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꽃은 바퀴다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49
박설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7년 1월
평점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독을 두려워한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고독’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스마트폰은 우리 삶을 바꿔 놓았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와 접속돼 있다는 데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고독’은 문학 속에서나 등장하는 언어가 되었다. 긴 겨울을 홀로 지낼 수 있는 인내심은 인간보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더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우리들은 집에 홀로 지내는 것보다 송년회를 통한 겨울나기를 더 선호한다.
고독은 눈물겨운 아픔이다. 모두가 다 내 곁을 떠나가고 홀로 된 느낌을 든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고독을 친구로 삼을 수만 있다면 고독처럼 좋은 친구는 없다. 고독을 아는 자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살아있는 존재의 상처를 사랑하는 시선도 갖게 된다. 박설희 시인의 『오후 네 시』는 우리가 늘 잊고 있던 거리낌 없는 연민의 감정을 되살려 낸다.
뒷다리를 끌며 걷던 흰 개가
웅크리고 앉아
아픈 제 발을 오래 핥고 간다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 물푸레나무도
날렵한 곤줄박이도
곰곰 생각하는 길
흔들리는 이파리
뾰족한 발끝
갸우뚱한 해가 매달아준 긴 그림자 끌고
어
디
로
- 『오후 네 시』 전문 (100쪽)
겨울에 사람만 쓸쓸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스산한 겨울바람을 맞아 앙상해진 나무도 외롭다. 지그재그로 하늘로 향한 나뭇가지는 잎도 열매도 없이 겨울을 견딘다. 시인은 『11월』이라는 시를 통해 겨울나무가 죽지 않았음을, 그리고 고갈되어가던 생명이 다시 소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석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중얼거리며 내다본
부연 창밖, 11월의 나무는
먼 여행을 떠나는 수도자를 닮았다
모든 것이 겹으로 보이는 내 나이를 닮았다
지금은 안으로 뜨거워질 때
어디라도 향하지만
어느 곳도 향하지 않는다.
- 『11월』 부분 (66~67쪽)
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는 삭막한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즉 고독을 받아들이는 길이다. 시인은 ‘먼 여행’과도 같은 고단한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겨울나무를 보면서 깨닫는 고독의 의미는 나 자신과 스스럼없이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된다. 이런 내적 대화는 고독을 견뎌내는 힘이 되며 몸과 정신을 뜨겁게 해준다.
시멘트 블록의 벽면이 서서히 기울었다
마지막으로 슬레이트 지붕이 털썩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 나무들이 모여 산다
리어카, 함지박, 깨진 항아리, 하늘에는 별자리
누군가는 어떻게든 가업을 잇기 마련
살은 내리고 뼈대만 남은 리어카를
참나무가 온몸을 들이밀어 꽉 껴안았다
공중으로 불끈 들어 올렸다
어린 오리나무는 가시철조망을 놓칠세라
꽉 다문 입이 철가시를 물고 붙어버렸다
쑥쑥 자라는 나무, 기억의 집
점점 높이 떠오르는 가계
공중을 들어 올린다
포탄이 떨어지고
홍수가 휩쓸어 가도
묵묵히 천문을 살펴가며
세상의 중심은 여기
그늘에 돋아난 무성한 입들을 위해
- 『이후』 전문 (32~33쪽)
『이후』 에 묘사된 장소는 사람이 떠나버린 ‘이후’의 텅 빈 곳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쑥쑥 자라는 나무’의 생명력은 폐허를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 내는 신비한 힘이다. 나무는 생존을 위해 날마다 위로 향해야만 한다. 이들의 역할은 실패한 공간의 상처와 흔적을 서서히 지워나가는 일이다. 이 시의 ‘나무들’은 궁극적으로는 희망과 재생에 대한 시인의 염원이 반영된 은유이다.
박설희 시인의 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절망과 단절’이 아닌 ‘희망과 재생’이다. 숙명적인 삶의 암흑 속에서도 시인은 부단히 상처를 치유하고 실존적 사유를 시도할 자신만의 시선을 추구한다. 그녀의 시집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시 한번 삶에 대해 진한 감동을 경험하며, 그러한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