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이력 - 평범한 생활용품의 조금 특별한 이야기
김상규 지음 / 지식너머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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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저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먼저 든다. 스마트폰에 정착된 조그만 카메라 렌즈를 음식 앞에 내미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인다. 매혹적인 음식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그들은 맨눈 대신에 카메라의 액정화면을 통해 사물을 바라본다. 찍는다기보다는 저장한다고 해야 적합하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던 시절에 비해 손쉽게 사진을 얻을 수 있는 만큼 각자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속에는 수많은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숙고해서 셔터를 꾹 누르던 옛 시절과 비교하면 마음에 드는 사진이 오히려 적은 것도 아마 비슷하리라. 특별한 날에만 기념으로 사진을 찍던 그때와 달리 요즘은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고만고만한 사진들을 주로 찍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의 용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우리의 일상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의 발달이 아날로그 시대를 풍미했던 제품과 인간미까지 변화시키며 아날로그의 상징들을 골동품으로 몰아낸다. 과거 CD의 등장으로 LP와 카세트테이프의 입지가 좁아진 것처럼 이 역시 최신 기기의 등장과 온라인 음악파일 다운로드 등으로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추억을 되새기는 앨범의 가치도 사라진다. 개인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의 급속한 발전으로 사람들은 더 이상 두꺼운 앨범의 한 페이지를 손으로 넘기며 추억을 되새김질하지 않는다. ‘똑딱’거리는 마우스 클릭이 사람들의 손을 대신하게 됐다.

 

당시에는 정말 참신했던 제품들이 어느새 잊혀 사라져 버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는 혁신적이었던 제품이 일용품의 단계를 거쳐 결국 시장에서 사라지게 되는 과정은 일련의 제품 수명주기로 나타낼 수 있다. 즉 제품도 인간처럼 수명이 있는 것이다. 제조회사는 새로운 제품을 팔기 위해 기존에 만들었던 제품의 수명을 의도적으로 조절한다. 그러니까 소비자가 기존 제품을 오래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신상 제품을 살 수 있도록 유도한다.

 

세상은 모든 것이 속도 경쟁으로 귀결되고 있다. 예전엔 서서히 낡아가는 것들이 요새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낡아져 버린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아날로그 시대라면 한창 일할 나이인 사람도 요즘은 퇴장을 요구받는다. 낡은 사람들의 경험은 재활용을 거부당한 채 곧장 쓰레기 처리장으로 직행하고 만다.

 

의자 디자이너이며 디자인학과 교수 김상규는 이미 쓰레기 처리장으로 향했거나 언젠가는 쓰레기 처리장에서만 보게 될지도 모르는 사물의 일대기를 들려준다. 저자가 소개한 사물은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다가 늘 곁에 있어 온 보잘것없는 것이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잘 모를 수 있겠다. 중장년층이라면 누구나 백열전구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있다. 백열전구는 호롱불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밝았다. 무엇보다 집안에 그을음이 끼지 않는다는 게 획기적 변화였다. 하지만 전력을 너무 많이 먹는 데다 수명이 짧은 단점으로 인해 작년부터 전구 자리에 전력 효율이 뛰어난 LED가 새로 들어왔다. LED의 화려한 불빛이 커질수록 둥그런 유리알이 뿜어내는 전구의 은은한 불빛의 잔상마저도 점점 잊어버리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언제든지 마음껏 보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서툰 타자 솜씨로 편지를 작성하던 시절이 있었다. 타자기 버튼을 손으로 치면 둔탁한 소리가 난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서 화음을 내는 피아니스트가 된 것 마냥 손가락 끝에서 섬세하면서도 짜릿한 촉감을 느낄 수 있다. 요즘 나오는 스마트폰은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다. 평평한 터치스크린 화면만 있을 뿐이다. 사용하려면 화면에 손끝을 살짝 건드리면 된다. 디자인의 변화가 익숙했던 생활 방식을 달라지거나 아예 사라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디자인은 모양을 만드는 기술 이전에 생각을 만드는 기술이다. 우리는 디자인이 만든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을 디자인 식으로 생각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삶에서의 발견과 성찰은 인생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다. 디자인은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는 포장술이 아니다. 디자인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알면 삶을 멋지게 디자인할 수 있다.

 

어머니는 인생을 디자인할 줄 알았던 똑똑한 디자이너다. 어렸을 때,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어머니는 교과서에 비닐이나 지나간 달력 한 장을 씌웠다. 달력 숫자가 찍힌 종이가 씌워진 교과서가 무척 촌스럽게 보여서 새 교과서를 받으면 어머니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일부러 딴 곳에 몰래 숨기고 싶은 생각도 한 적 있다. 교과서를 험하게 다루면 훼손되기 쉽다. 특히 몇 달 지나면 표지에 지저분한 낙서가 덕지덕지 남아있고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어 찢어지기 일보 직전에 이르기도 한다. 교과서를 오래 쓸 수 있도록 어머니는 교과서에 커버를 씌웠다. 소박하면서도 일상 친화적 디자인은 투박해 보여도 어머니와 자식 간의 끈끈한 정(情)을 유지하게 만드는 인터페이스가 있다. 지금의 어머니들은 교과서에 커버를 씌우지 않는다. 자식이 학교 성적을 잘 받기를 원한다. 당연히 이런 관계라면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려면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우리가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그 사소한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사소한 것에서 무언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진정한 생활의 발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울수록 그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더욱 감동적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하루는 적어도 나도 모르게 바쁘게 흘러가버리는 그런 하루는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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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1-25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능이 디자인을 만든다는 말도 있듯이 디자인이 좋으면 편리하죠. 생각해 보니 요즘은 책 포장을 안하네요? 교과서도요. 책이 좋아져서 그런가요?흔해져서 일까요?

cyrus 2015-01-26 10:50   좋아요 0 | URL
책이 좋아져서 커버를 덮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돌궐 2015-01-26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자주 읽거나 인용할 게 많을 거 같은 책은 비닐커버로 직접 쌉니다. 하드커버 책도 많이 보면 너덜거리거든요.^^

cyrus 2015-01-26 10:55   좋아요 0 | URL
저는 구입한 책들 중에 하드커버 책이 많지 않고, 여러 번 읽지 않아서 손상된 것이 없어요. ㅎㅎㅎ 돌궐님의 댓글을 보면서 위편삼절이 생각납니다.

남희돌이 2015-01-26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커버 하면 동네서점이 생각나요. 요즘은 그냥 바코드로 틱 찍고나서 책을 그냥 주지만 저 어릴 적에는 주인 아주머니가 얇은 포장지로 예쁘게 책을 싸주셨거든요. 하도 많은 책을 싸서 능숙한 솜씨로 책을 놓고 칼집을 위 아래로 낸 다음 착착 싸주시던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용돈만 생기면 서점으로 달려가곤 했답니다. 나중에 나도 서점 주인이 되어서 저렇게 예쁘게 책을 싸주어야지..했던 기억이..
사물의 이력, 타자기나 백열전구같이 아날로그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에 대한 내용이 가득할 것 같네요.

cyrus 2015-01-26 20:06   좋아요 0 | URL
낭만적인 경험인데요. 사실 제가 어렸을 때 교과서 비닐커버 혼자 만들다가 실패했던 적이 많았어요. ㅎㅎㅎ

sslmo 2015-01-2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손으로 꼬물거리는 걸 좋아해서, 헝겊으로 북커버를 가끔 만들기는 하는데요,
만들고 나면, 손때 묻을까봐, 고이 모셔두기만 하죠, ㅋ~.
정작 읽는 책은 잡지 책 `부욱~`뜯어서 대충 싸여.

글구 맛있는 요리가 나오면 스마트 폰을 들어요.
근데 맛있는 요리가 나올 때보다,
제가 요리를 했을 때 폰을 들어 인증샷을 찍죠, ㅋ~.

cyrus 2015-01-27 21:26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은 실제로 보면 무척 섬세하고 꾸미기를 잘 하실 것 같아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5-13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 님 본문과 댓글 읽다가.... 옛날에는 정말 책을 귀하게 대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책뿐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건 추억팔이`가 아니라 그 태도가 지구 생태계를 위해서도 좋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모든 회사들이 수명을 짧게 만든다고 하죠...


cyrus 2015-05-13 23:12   좋아요 0 | URL
회사가 제품의 수명 주기를 짧게 만든 이유에는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상품을 처음 사용했을 때는 정말 소중하게 다뤘는데 시간이 지나서 오래 사용하면 질리게 됩니다.
 

 

 

 

 

 

 

 

 

 

 

 

 

 

 

 

 

 

 

 

사드의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워크룸프레스, 2014)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 외설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사제와 죽어가는 자가 종교, 쾌락, 도덕관 등 종교적․철학적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죽어가는 자는 종교적 신념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신체적 쾌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반종교적이고 쾌락을 삶의 목표로 삼는 모습에서 리베르티나주(Libertinage) 사상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죽어가는 자는 사드가 선호하는 ‘방탕한 자유인’ 리베르탱(Libertin)이다.

 

이 대화에서 승기를 잡는 쪽은 죽어가는 자다. 사제가 리베르티나주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 죽어가는 자는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죽기 일보 직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질문에 바로바로 응답하는 걸로 봐서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짧은 대화는 죽어가는 자가 드디어 죽음이 임박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끝나게 된다. 점점 생명의 기운이 빠지면 말할 힘도 없을 텐데 죽어가는 자는 쾌락의 즐거움을 예찬한다. ‘살아남은 자’인 사제에게 종교를 내려놓고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볼 것을 권하기도 한다. 죽어가는 자는 쾌락주의자답게 죽는 순간도 평범하지 않다.

 

 

이제 나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네, 햇살보다 아름다운 여자 여섯 명이 지금 옆방에 있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대기시켜 놓았지. 자네도 동참하게나. 나처럼 여자들이나 품고서, 그 모든 미신의 허망한 궤변을 잊도록 해보게. 위선이 낳은 어리석은 착각들일랑 깡그리 잊어버리라구.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중에서, 36쪽)

 

 

죽어가는 자가 천상의 세계로 향하는 장면은 숭고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죽어가는 자의 영혼 주변에 거룩한 신과 천사들이 아닌 여자 여섯 명이 다가온다. 죽어서도 천상의 세계에서 여자, 그것도 여섯 명이나 품을 수 있다니. 역시 사드다운 발칙한 상상력이다.

 

 

 

 

 

 

 

 

 

 

 

 

 

 

 

 

 

그런데 죽음을 초월한 쾌락 예찬은 누군가에게는 숭고한 장면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파블로 피카소의 「초혼」이라는 그림은 1901년에 그려진, 피카소의 초창기 작품이다. 이때 피카소는 주로 어두운 청록색의 색조를 띤 그림들을 많이 그렸는데, 그의 작품 활동 기간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 시기를 ‘청색 시대’라고 부른다. 푸른색이 지배한 피카소의 그림들을 보면 무척 우울하고 냉랭한 느낌을 받는다. 청색 시대는 피카소의 무명 시절이었고,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힘든 시기였다. 피카소가 푸른색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피카소는 음주와 음란한 공연을 즐기는 파리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삶에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는 파리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피카소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는 가끔 피카소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길지 않았다. 1901년 카사헤마스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일로 인해 자살한다. 친구의 죽음은 피카소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피카소의 캔버스에 푸른색이 눈에 띌 정도로 많아졌다. "나는 카사헤마스의 죽음을 알고부터 푸른색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라고 피카소 본인이 직접 말할 정도다. 죽은 친구를 애도하기 위해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 바로  「초혼」이다.

 

 

 

 

 

피카소   「초혼」(카사헤마스의 장례)  1901년

 

 

「초혼」의 다른 제목은 ‘카사헤마스의 장례’이다. 카사헤마스로 보이는 사람이 하얀 천이 덮인 채 누워있다. 죽은 자 주변에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서 있다. 여기까지가 지상의 세계이다. 이제 바로 위에 있는 천상의 세계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런데 천사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스타킹만 걸친 벌거벗은 여자 여섯 명이 있다. 그녀들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서 야릇한 자세를 취한다. 그렇다. 그녀들이 기다리는 사람들은 천상의 세계로 향하는 카사헤마스의 영혼이다. 거의 벌거벗은 여섯 명의 여자들은 창녀로 볼 수 있다.

 

피카소는 죽은 친구의 장례식을 성스러운 느낌의 종교화처럼 그리지 않았다. 엄숙한 장례식에 창녀가 등장하는 성(性)스러운 그림을 그린 이유가 무엇일까. 죽은 친구를 모욕하기 위해서 그린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피카소는 불행한 죽음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진심으로 슬퍼했고,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카사헤마스는 사랑에 실패한 채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 영혼이 된 카사헤마스는 지상에서의 육체적 쾌락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피카소는 친구가 천상에서도 마음껏 쾌락을 누릴 수 있도록 천사 대신에 창녀를 그려 넣은 것이다. 친구를 생각하는 화가의 배려인 셈이다.

 

 

 

            

 

 

 

피카소는 기존의 종교화 양식을 답습하면서도 죽은 친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자신만의 표현을 시도했다. 그렇다고 이 그림만으로 피카소가 무신론자이거나 리베르탱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피카소는 쾌락을 원하는 파리 사람들의 삶을 알고 있었을 터. 친구를 위해서 세속적인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그런데 사드의 글에서 숨을 거두는 죽어가는 자와 피카소의 그림에 나오는 카사헤마스를 하늘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신이 아닌 여섯 명의 여성이라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여기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결말에서 사제는 죽어가는 자의 말씀을 믿고 여자를 품에 안은 삶을 살게 된다. 아시다시피 피카소는 여성 편력으로 평생 7명의 연인을 뒀고, 두 차례 결혼했다. 피카소는 남성 누드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 대신 여성 누드가 많다. 피카소의 여성 누드는 내밀한 쾌락을 찬양하는 예술적 표현이었다. 결국, 쾌락이 두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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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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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우리 아빠가 통닭을 사가지고 오셨어요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면 가슴이 턱 막혀온다. 아버지들은 쉴 곳이 없다. 아버지들은 집과 가족을 떠나 먼 곳에 있다. 아버지는 가족의 안위를 위해 당신의 젊음과 맞바꾸는 희생과 고통을 감내했다. 이에 비해 노래 속 아버지는 집에 있었다. 일하느라 집에 쉴 여유가 적은 아버지는 가족으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다.

 

“어젯밤엔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음음”  (배따라기  ‘아빠와 크레파스’ 중에서)

 

그런데 이 노래에 나오는 아버지는 현실감으로 와 닿지 않는다. 원래 가사는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술 취하신 모습으로’라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약주를 하고 집에 들어오신다. 흥미로운 점은 다정한 아버지의 한 손에는 ‘선물’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목 빼고 기다렸던 기억을 떠올려보라. 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만, 아버지가 사오는 선물에 대한 기대감도 있다. 비록 선뜻 선물을 사주기 힘든 형편임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돈 벌어 선물을 사왔다.

 

그렇다고 노래 속 아버지처럼 현실의 모든 아버지가 크레파스를 사온 건 아니다. 쌩쌩 부는 겨울바람을 뚫고 퇴근한 아버지 품에 크레파스 대신에 누런색 종이봉투가 나오기도 했다. 기름에 젖은 종이봉투를 펼치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닭 한 마리가 있었다. 통닭 먹는 날은 정말로 행복했다. 칼바람에 식을세라 퇴근길 내내 품에 안았고, 버스 안에서 진동하는 통닭 냄새 때문에 퇴근하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야 했던 고충이 어땠을지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내 앞에 놓인 통닭이 얼른 먹고 싶었다.

 

 

 

 Scene #2  촌스러운 통닭, 화려한 치킨으로 변신하다  

 

 

          

 

 

 

1980년대 전기구이통닭은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남녀노소 좋아했던 원조 ‘치느님’이었다. 통닭은 온 가족을 한 자리에 둘러앉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기름기를 쏙 뺀 바삭바삭한 껍질과 부드럽게 익은 속살의 조화는 세상에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맛있었다. 요즘처럼 외식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니 뭔가를 먹기 위해 온 가족이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이 드물었다. 지금은 흔한 배달 서비스도 정착되지 않은 시절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가족의 맛을 책임지는 배달원이 되었다. 퇴근길에 명동영양센터나 시장에 들러 먹을거리를 사들고 귀가했다. 그때는 이런 낭만이 있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 곳곳에 통닭의 흔적이 있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즐거운 자리에 통닭이 있었고, 생일잔치의 터줏대감인 케이크와 쌍벽을 이루었다. 항상 즐거운 자리에 우리는 늘 통닭과 함께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식탁 위의 닭고기도 조금씩 변했다. 한때 ‘통닭’이라고 하면 ‘치킨’의 이음동의어였다. 요즘은 통닭 대신에 치킨이라는 외국말이 더 친숙해졌다. 프라이드치킨, 새콤달콤한 양념에 버무린 양념치킨, 눈물 쏙 나게 매운맛이 나는 불닭까지. 기름옷을 입은 촌스러운 통닭이 두꺼운 튀김옷과 우리 입맛을 자극하는 양념 옷을 입으면서 팔색조 매력을 뽐낸다. 배달을 시켜서 먹을 수 있고, 월드컵 같은 국제 대회가 있는 날에 집에 혼자 중계를 보더라도 치킨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다. ‘1인 1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치킨은 특별한 외식이 아닌 특별한 주식이 되었다. 치킨은 소위 전례 없는 ‘절대 음식’의 독보적인 지위를 갖게 됐고 ‘치느님’이라는 영광스러운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치킨은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많이 사랑하고, 많이 먹는 야식이다. 특히 젊은 소비자들을 치킨의 매력에 푹 빠지는 데 성공했다. 젊은 소비자층의 외식소비성향이 늘어나면서 치킨 사업은 젊은 세대들을 타깃으로 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제 치킨 전문점은 입맛으로만 승부해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를 치킨 광고 모델로 출연시키고, 각종 사은품을 제공한다. 치느님을 믿는 젊은 소비자들은 치킨을 맛으로 먹기보다는 즐기기 위해서 먹는다. 여러 사람과 함께 모여 치맥을 즐긴다. 이를 반영하듯이 대구에 ‘치맥페스티벌’이 개최되기도 했다. 고작 몇 조각 치킨과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은 맥주를 받기 위해 행사장에 일렬로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행사에 그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치느님의 역사와 함께했던 그들은 행사장에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바로 아버지 세대였다.  
 

 


  Scene #3  아버지의 땀은 기름이 되어 닭을 튀긴다   

 

어린 시절 가족을 위해 통닭을 사들고 온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은퇴를 앞둔 중년이 된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오늘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인생 2막을 위해 창업에 뛰어든다. 불황의 골이 깊어질수록 아버지의 애환을 달래줄 휴식처로 치킨 전문점이 각광받기 시작하자 중년 예비 창업자들은 치킨 전문점을 차리고 싶어 한다. 국내 굴지의 치킨 프랜차이즈인 BBQ는 예비 창업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 ‘BBQ 치킨대학’을 설립했다. 치킨을 직접 만들고, 치킨 가게를 차리는 방법을 배우는 수강생 대부분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버지들이다.  

 

치킨 먹는 날은 치느님의 은혜가 내리는 즐거운 시간이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은혜를 못 받는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아버지’다. “치킨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끓는 기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함, 단언컨대 치킨은 가장 완벽한 물질입니다” 한때 인터넷에 떠돌던 ‘치킨 명언’이다. 우리의 입맛을 위해 펄펄 끓는 기름 속으로 몸을 던지는 닭은 희생하사 치킨이 되어 무한 사랑을 받는다. 아버지는 다 큰 자녀들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도록 돈을 벌기 위해 느끼한 기름 냄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흐르는 땀은 기름이 되어 닭을 튀긴다. 집에서 푹 쉬지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치킨 먹을 시간마저 없다. 아이들은 집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치맥을 즐긴다. 과거 가족들의 환영을 한몸에 받았던 ‘치킨-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시절은 없다. 서로 엇갈리고만 운명의 비극이 서글프다.

 

가끔 통닭을 먹었던 시절이 그립다. 통닭의 옛 맛이 아닌 가족과 함께 먹는 화목했던 시간 말이다. 음식의 냄새, 장소 그리고 함께 한 사람 등 온몸의 감각들이 저마다 나누어 갖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딱 들어맞았을 때 비로소 하나의 추억으로 완성된다. 얼마 되지 않은 통닭 조각을 둘러싸고 온 가족이 머리 맞대고 먹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 그때의 통닭은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해준 위대한 치느님이었다. 창밖 기온이 떨어질수록 통닭에 얽힌 추억의 온기는 아버지의 냉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오늘 금요일 밤에 흔한 치킨 대신에 시장에 파는 통닭을 직접 사들고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먹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떠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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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5-01-23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어릴 적 아빠가 술에 취하셔서 노란봉투에 담긴 전기구이 통닭을 사오시고는 잠들어 있는 나를 깨우던 기억이 가장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있는데.. 지금은 같이 드실 아빠가 안계시지만 아이들하고라도 따뜻한 닭튀김 함께 해야겠어요.

cyrus 2015-01-24 10:59   좋아요 0 | URL
치킨은 가족들과 함께 먹으면 맛있어요. 점점 젊은 세대가 결혼을 기피하고 혼자 산다면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생기는 가족의 정을 느끼는 시간이 없을거에요.

쉽싸리 2015-01-23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 힘든 시절을 헤쳐온 모든 아버지들. 그시대 그들 나름의 역할이 있었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힘든 아버지들이 많지요. 어쩌면 예전보다더 많고 앞으로도 있겠지요. 그들의 삶을 단지 과거와 오버랩시키면서 눈물바람이나 측은함으로 소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힘든 아버지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으면 합니다. 슬픈 통닭이 더이상 소비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

cyrus 2015-01-24 11:0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지금은 요원해보지만 아버지들이 기를 펼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transient-guest 2015-01-28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페리카나 치킨을 참 맛있게 먹었어요. 지금은 거의 없어진 것으로 압니다. 미국에서는 교촌치킨이 들어온 곳이 몇 군데 있어 꽤 인기라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별로에요. 그 맛도 그렇고. 한국의 닭강정을 제대로 들여오면 대박칠 것 같다능..ㅎ

cyrus 2015-01-28 09: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페리카나도 예전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졌어요. 닭강정은 뼈가 없는 닭튀김이니까 외국에서 판매한다면 대박 날 수 있는 아이템이 될 것 같습니다. ^^
 
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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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옮겨보기 전에는 체험을 완성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의 소설가 르 클레지오였다. 르 클레지오가 글을 쓰는 행위는 살아있는 사람(작가)의 몸을 석고로 떠내는 표현방식과 비슷하다. 이런 글은 체험에 묻어있는 거짓과 허위의 껍질이 벗겨져 있고 진실 된 삶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누군가의 생이 멈추었을 때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에 석고를 덧칠해 만드는 데스마스크(Death marsk)도 그렇다. 죽은 이의 얼굴을 보는 문화에 익숙지 않은 우리에겐 아무래도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데스마스크는 딱히 특별한 용도는 없다. 죽은 사람의 무표정한 표정만 남아있을 뿐이다.

 

박범신의 소설 《소소한 풍경》이 시작되는 첫 장면을 기억하시는가. 소설가의 제자가 스승에게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를 본 적이 있느냐고 전화로 물어보는 장면.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혹시 문장으로 뜬 데스마스크를 본 적이 있느냐고.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본 적이 있다. 살아생전에 쓴 여러 가지 원고들을 모은 유고집이 작가의 데스마스크라고 생각한다. 유고집도 데스마스크처럼 작가가 죽은 뒤에 나온다. 또 유고집은 작가의 평소 모습을 오롯이 담겨 있다.

 

작년에 우리 곁을 갑자기 떠나버린 어느 뮤지션의 데스마스크가 나왔다. 신해철의 유고집, 제목은 《마왕 신해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신해철은 이렇다. 음악과 사회에 대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다. 했다 하면 직격탄이다. 그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대마초 비범죄화를 주장했고, 급기야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연예인들과 비교해 심하게 튀는 그의 이런 행보들은 많은 안티 세력을 생겨나게 하였다. 그를 마왕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까칠하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신해철 스타일은 성향에 따라 심하게 거슬려 보일 수 있다.

 

과연 신해철은 어떤 사람인가? 마왕을 추종하는, 소위 ‘고스 식구’가 아닌 독자는 그의 정체가 무척 궁금할 것이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공포물을 읽는 것이 두려운 마냥 유고집을 펼치기 망설여진다. 책 표지 사진을 뚫고 나오는 신해철의 카리스마가 오버랩되어 ‘까칠한’ 글만 있을 거로 생각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라. 이 유고집을 생전 신해철의 말투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해철의 쾌변독설》(지승호, 부엔리브로, 2008)과 같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 책의 카피처럼 신해철의 데스마스크는 세상을 씹어서 여러분에게 ‘퉤’ 뱉어내지 않는다. 그 대신, 신해철 자신이 세상을 불량스럽게 씹어대는 이유를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사실 표현이 거칠 뿐이지 그렇다고 어리숙한 독자 앞에 감정의 배설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유고집을 읽는다고 해서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피해, 불면증, 정서불안, 과대망상, 인성변화, 귀차니즘, 대인기피, 왕따, 식욕감퇴, 발육부진, 성적하락, 가정불화, 업무능력 저하, 소득감소, 직장생활 부적응 같은 증상이 생기지 않으니 전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여전히 ‘신해철’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 일으키고 혐오하는 독자가 있다면 ‘마왕’이라는 가면을 쓴 신해철에 너무 익숙해져서 생긴 이상 신호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신해철의 글은 자신의 안티를 배려하지 않는다. 고스트스테이션 오프닝에 나오는 경고 문구 비슷한 것도 없다. 신해철에 대한 악감정을 지울 수 없거나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면 저자나 출판사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마시라)

 

유고집의 제목이 아쉽다. 마왕 신해철이라니. 책의 제목은 그 책의 얼굴과 같다. 아무리 그가 카리스마의 대명사로 통한다고 해도 진짜 신해철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 낸 신해철의 얼굴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건 아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마왕’이라는 수식어만 붙이면 고인의 삶이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것인가. 유고집은 ‘마왕’ 신해철이 아닌 ‘인간’ 신해철의 삶을 본뜬 데스마스크다. 제목만 보고 조건반사처럼 마왕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인간’ 신해철의 진짜 얼굴 그리고 그 얼굴 속에 새겨진 굴곡진 삶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차라리 책 제목을 이름 석 자만 놓고 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이름만으로도 신해철이 어떤 존재인지 독자에게 보여주는 데 충분하다.

 

‘마왕’의 가면을 벗은 신해철의 모습은 자아가 매우 강한 편이다. 그러나 경거망동과 거리가 멀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듯하지만, 더 자세히 보면 그의 말과 글은 기본적으로 논리적인 뼈대가 세워져 있고, 직설적인 그의 카리스마가 입혀진 것이다. 물론, 그의 생각에 무조건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그를 생각해서 신해철의 생각을 건전하게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신이 만약 신해철 팬이라고 자처한다면 그 생각을 다시 한 번 고려해봐야 한다. 신해철의 눈에는 그런 당신을 본인의 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 비판을 하고 싶다면, 신해철의 팬임을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다. 신해철이 생각하는 팬이란 누군가를 남이 아닌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좋으면, 그냥 좋아하면 된다. 스타를 열렬히 좋아하는 이 맹목적 반응은 곧 가장 원초적인 팬심으로 볼 수 있다. 주관적이면서도 맹목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신해철은 팬을 가족의 일원처럼 여긴다. 그래서 그의 팬들은 새벽에도 잠 못 들고 ‘고스트스테이션’이 시작하는 시간대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고스트스테이션’은 단순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넘어서서 신해철과 팬들이 함께 떠들고 놀 수 있는 유일한 만남의 장소였다. 오랜 시간 그와 교감하면서 나눈 그 지나간 시간이 팬들의 가슴속에 남아있기에 지금도 그를 그리워한다.

 

신해철은 노래를 통해 팬들과 소통을 하고 싶었고, 그저 자신의 노래를 기억해주는 팬들이 무척 고마워했을 사람이다. 그의 까칠한 성깔에 카타르시스를 느껴 그를 좋아하는 팬들이 있었기에 그는 마왕이 되었다. 하지만 신해철 본인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면이었을 것이다. 신해철 팬이든 그의 팬이 아니든 관계없이 《마왕 신해철》을 읽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팬민정음」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한다. 신해철이 대중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마왕’의 가면을 쓰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왜곡된 이미지를 벗어내 ‘가수’에서 더 나아가 ‘인간’ 신해철로서 팬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다.

 

‘마왕’ 신해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 신해철은 살아 있다. 데스마스크로 남은 유고집 속에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혹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진짜 신해철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신해철의 삶을 신해철이 직접 손으로 글로 옮긴 유고집은 대중이 만들어 낸 낡은 허물을 완전히 벗겨내어 완성된 신해철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필 그가 떠난 빈자리가 커다랗게 느껴지고, 그가 남긴 수많은 노래만으로도 깊은 슬픔을 달래지 못하는 지금에서야 우리는 진짜 ‘인간’ 신해철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진작 인간 신해철을 알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니 제발 양심이 있다면 유고집을 읽고 난 뒤에 ‘나, 이제부터 신해철 팬이다’ 하면서 법석을 부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당신의 모습을 신해철이라면 침 같은 독설 한 마디 뱉어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를 가족처럼 여기고 노래를 좋아했던 팬들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살아있다」라는 짧은 글 마지막 문장이 자꾸 팬들의 귓가에 메아리가 되어 맴돈다. “있을 때 잘하라고. 나는 여러분의 곁에 영원히 있지 못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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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5-01-23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대한 상식의 의문, 그 상식이 과연 상식적인가에 대한 신해철의 독설, 솔직히 공감이 컸지요. 진중권 교수의 후기글을 보면서 마음이 찡했습니다. 신해철 동급의 독설가인 진중권 교수의 글은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보니 말이죠. 노무현 대통령 서거 기념 공연에서 삭발하던 그가 ˝그대에게˝를 부르기 전에 내뱉은 말이 가슴이 아리네요. 진짜 2달동안 술에 찌들린 그의 고통....

이젠 그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사실이 참 착찹하네요

cyrus 2015-01-23 19:4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만화애니비평님, 신해철의 진정한 팬이시군요. 사실 저는 신해철의 음악을 듣곤 했지만, 제 입으로 신해철 팬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에 있어요. 생전 신해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유고집을 읽고 나서야 그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되었어요. 진작 이 글이 생전에 나왔더라면 신해철을 좋아했었을 것입니다. 그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yamoo 2015-01-23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이 언제나 저보다 한 발 빠르군요. <군주론>포스트도 그렇고, <올재 클래식> 포스트도 그렇고 이 포스트도 그렇고...매번 한 발 늦어 글 올리기를 포기하게 됩니다..ㅎㅎ

cyrus 2015-01-23 19:49   좋아요 0 | URL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글에 허점이 있을 겁니다. 수박 겉핥기 수준이에요. 이 허점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글을 올려주세요. 기대하겠습니다! ^^
 

 

 

            

 

 

 

내가 유일하게 계정을 가지고 있는 SNS는 페이스북이다. 원래 카카오스토리도 있었는데 카카오톡 검열 논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탈퇴했다. SNS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고치고 싶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북플도 SNS이군. 요즘 페이스북보다 북플을 애용한다. 하지만, 접속 횟수를 늘어나지 않도록 스스로 조절한다. PC 상태에서 글을 작성하고 난 뒤에 접속한다. 주로 서재 이웃의 글에 댓글을 단다. 그 외에는 접속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북플은 무궁무진한 책 이야기와 도서 정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그래도 내 독서 시간만큼은 북플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

 

페이스북을 접속하면 궁금할 때가 있다. 자신의 일상을 하나하나 정성껏 사진과 글로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여유와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말이다. 셀카 사진을 하루에 한두 장 찍어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본인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넘친다. 그들의 외모가 출중한 것은 인정은 하나, 자꾸 페이스북으로 들이대면 부담스럽다. 이제 셀카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 주는 것도 질린다.

 

누구든지 SNS을 하게 되면, 타인에게 주목받고 싶어 한다. 여기에 과하게 몰입하면 자신의 감정까지도 공개한다. 살다 보면 상황에 따라 기쁨과 우울, 분노, 슬픔을 느낀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고, 함께 이 즐거운 기분을 공유하고 싶어진다. 반면에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내 감정을 상대방과 공유한다는 것은 곧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작용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감정 과잉하는 성향이 많아지면 부작용을 낳는다. 정작 본인은 잘 모르지만, 계속 보는 사람들은 피곤하다. 내가 보는 개인적 기준으로 감정 과잉형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원인을 알려주지 않는 사람.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느닷없이 페이스북에 ‘화가 난다’라거나 ‘우울하다’라고 올리는 사람이 있다. 페이스북 친구들이 답글을 단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상황을 설명해준다면 친구들이 이해하고 위로를 건네줄 수 있다. 그런데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그냥, 좀 안 좋은 일이 있어’라고 말할 뿐이다. 두 번째, 감정 조절 없이 그냥 표출하는 사람. 그러니까 첫 번째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 원인과 그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런 글 상당수는 별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많다. 페이스북에 공개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본인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고 풀 수 있는데도 말이다. 혼자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니까 감정을 남들에게 공개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러한 감정 과잉형은 충만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작성해보지만 보는 이들은 당최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채연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렸던 ‘눈물 셀카’다. 지금도 채연의 흑역사로 언급할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채연은 미니홈피에 “난 가끔 눈물을 흘린다. 가끔은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내가 별로다. 맘이 아파서 소리치며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야. 꼭 슬퍼야만 우는 건 아니잖아. 난 눈물이 좋다. 아니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우는 내가 좋다”는 글과 눈물을 머금고 찍은 사진을 올렸다. 눈물을 흘리면서 눈물이 좋다고? 나름 멋있어 보이려고 국어 시간에 배운 역설법을 시도한 것 같은데 오히려 이 사진 공개 이후로 채연의 안티팬이 생기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자화상도 엄연히 말하면 화가의 ‘예술적 셀카’이다. 일반적으로 자화상은 화가가 표현기법을 늘리기 위해서 모델이 있어야만 그릴 수 있는 초상화 대신에 그리는 것이다. 인물화는 단순히 모델의 외형을 똑같이 그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모델의 감정도 그림으로 온전히 옮길 줄 알아야 한다. 모델의 속마음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훈련으로 자화상이 적합하다. 모델이 없어도 자신이 직접 모델이 되어 본인 감정을 표현하면 된다. 그래서 화가의 자화상에 당시 화가의 심리 상태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SNS에서 볼 수 있는 감정 과잉형은 ‘이 사람’의 자화상과 비교하면 애교에 가깝다.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비참한 삶을 살다 간 인간이 그린 자화상을 소개해본다. 진짜 이 그림의 사연을 알게 되면, 이 그림 앞에서 숙연해질 것이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웃는 자화상」 1907년

 

리하드르 게르스틀(1883~1908)이라는 독일의 화가가 그린 「웃는 자화상」이다.  그림 속 화가는 입을 벌리고 웃고 있다. 그런데 웃음이 영 부자연스럽다. 억지로 웃는 것 같은 화가의 얼굴에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발산한다. 이 그림과 관련된 뒷이야기가 슬프면서도 약간 무섭다. 자화상은 게르스틀 최후의 작품이다. 다시 말하자면, 1907년 게르스틀은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이 그림을 완성하고 난 뒤, 이듬해 자신의 작업실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결국, 이 자화상은 비극적 죽음으로 내몰리기 일보 직전에 그려진 화가의 모습인 것이다. 곧 자살을 눈앞에 둔 화가는 초연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웃어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자신의 운명이 우습고도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리하르트 게르스틀  「마틸데 쇤베르크 II」  1907년

 

자살 동기와 관련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에 의하면 실패한 사랑을 원인으로 본다. 게르스틀은 사랑에 빠졌는데 하필 그 여인은 작곡가 쇤베르크의 아내 마틸데였다. 젊은 화가와 여설 살 연상의 유명 작곡가 아내와의 사랑, 이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게르스틀은 쇤베르크의 음악을 좋아해서 그와 친분을 맺은 인연으로 음악가의 자녀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곤 했다. 여기서 게르스틀은 마틸데에게 연정을 품기 시작했다. 마침 마틸테도 괴팍한 예술가 남편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시도한다. 하지만, 마틸데는 자녀를 버리고 떠나버린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마틸데는 쇤베르크의 인생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떠나 보내야하는 게르스틀은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음악가의 아내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자신이 인생에 패배한 화가처럼 느껴졌고,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세기말의 우울감은 젊은 게르스틀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비관적인 감정의 늪을 헤어 나오지 못한 게르스틀은 유서와 같은 「웃는 자화상」을 남긴 채 짧은 예술가의 생애를 끝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도록 절망적인 상황을 겪은 사람은 내 신체 일부 하나하나가 떨어나가는 듯한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린다. 화가는 마틸데를 잊기 위해서 자기위안으로 웃어보지만, 그의 눈가는 눈물이 촉촉하게 번지기 시작한다. 웃음 속에 숨겨진 눈물, 이것이야말로 진짜 슬픈 사람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활짝 입을 벌린 웃음은 어느새 절규로 변하고, 화가는 점점 미쳐간다. 게르스틀의 웃음에 예술과 사랑 둘 다 실패한 한 인간의 원초적인 슬픔과 원망이 응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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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1-2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cyrus님 글은 책 읽는 것 만큼 생각하며 읽게 되네요.

cyrus 2015-01-21 16:06   좋아요 0 | URL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면 글이 길어지는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후즈음 2015-01-20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양물감님 덧글에 공감해요! 리뷰도 좋지만 저는 이런글이 더 좋아서 찾아 들어와 읽고갑니다ᆞ

cyrus 2015-01-21 16:07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반응이 좋을 줄 몰랐어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qualia 2015-01-2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남성들의 ‘찌질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봅니다.
최근 인터넷/에스엔에스 따위에서 자행되고 있는 한국 남자들의
마녀사냥, 언어폭력, 인격테러 등등을 보면
얼마나 한국 남자들이 저열하고 짐승스러운지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런 한국 남성들의 짐승스런 짓들이 인터넷/SNS에서
소수로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노소/학력고하를 막론하고
짐승스런 찌질남들이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전쟁의 99% 이상을 남성들이 획책하고 터트린 것입니다.
아직도 한국은 남존여비, 봉건적 가부장적 관념이
하나의 관습적/전통적 폭력으로 적법하게 관철되고 있는 미개국가입니다.

개인적 경험을 하나 말하자면, 제가 다종다양한 직업군의 한국 남성들 차에 동승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거의 모든 한국 남성 운전자들이 여성 운전자를 욕하고 부정적으로 비난해댔습니다. 운전대만 잡으면 거의 예외없이 (미친) 개가 되는 게 한국 남성들 즉 찌질남들의 정체입니다. 그렇게 비루하고 비겁하고 천박한 종자들은 한국 밖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디스패치라는 찌라시를 필두로 기레기 언론들이 연예인 추문 건을 동시다발로 터트려 누리당 정권으로 향한 국민들의 비판과 불만의 화살을 다른 데로 돌리려 획책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기획을 위해 한 여성 연예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더군요. 바로 그 당사자는 인터넷/SNS에서 야만적 한국 남성들의 마녀사냥/인격테러를 계속해서 무차별로 당해오던 연예인입니다. 이 억울하고 힘 없는 희생양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하이에나떼한테 던져준 것입니다. 너무나 악의적이고 쓸개 빠진 기레기/찌라시들의 주구(走狗)질이라고 판단합니다.

저는 채연의 윗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요. 하지만 채연한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봅니다. 왜 채연이 저 건으로 비난 받아야 하죠? 오히려 저런 비난질은 그저 남존여비 사상/봉건적 남성우위 관념/가부장적 권력을 폭력적으로 휘둘러대는 한국 찌질남들의 언어폭력/인격테러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cyrus 2015-01-21 16:1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정말 심해요. SNS 중독에 상대방을 비하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자도 많아요. 우리 사회는 ‘SNS 중독자=여자’라는 편견이 심해요. 그리고 페이스북의 정보만 가지고 단적으로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강해요. 이러니 마녀사냥. 언어테러가 생기죠. quila님 말씀처럼 저도 페이스북에 떠도는 찌라시를 믿고, 사실인 냥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고, 한편으론 무섭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누군가를 희생양 만들고, 악성 루머를 만들기에 페이스북이 아주 적당한 곳이에요.

채연 같은 경우, 저도 안티팬이 생겨날 줄 몰랐어요. 최근에 방송에 나왔는데 채연 본인이 당시 눈물 셀카 이후의 반응에 대해서 그렇게 언급하더라고요. 사실 채연의 눈물 셀카는 SNS 허세를 희화화할 때 자주 회자되곤 했어요. 그래서 이 채연의 셀카가 SNS로 허세 떠는 모습으로 조롱받게 되었고, 그 중에 대다수는 채연의 안티팬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SNS 허세는 남자도 많아요.

맥거핀 2015-01-2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그림을 보니 영화 [올드보이]에 나왔던 대사가 생각이 나는군요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 것이다.˝ 거기 나왔던 그림도요. (찾아보니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슬퍼하는 남자]라는 그림이군요.)

cyrus 2015-01-21 16:18   좋아요 0 | URL
저도 게르스틀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딱 그 영화대사와 앙소르의 그림이 생각났어요. 역시 영화마니아답습니다. ^^

수이 2015-01-21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셀카 사진 내 이야기 같아서 막 찔리면서 막 웃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페북 잘 안 하니까 코콧_ 비극적인 사랑은 사람을 마모시키니까_ 물론 그렇다고 비극적인 연인들이 일부러 비극적인 사랑을 골라서 하는 건 아니지만_ 그대는 예쁜 사랑 하면 좋겠습니다. (채연의 저 이야기를 듣고보니 채연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나도 윽 -_- 싫군요)

cyrus 2015-01-21 16:22   좋아요 0 | URL
저는 야나 누님이 셀카 사진 많이 찍는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항상 지민이랑 같이 찍는 셀카나 지민이 단독샷 좋아요. 그나저나 요즘 지민이 나오는 사진이 줄어든 것 같은데요... ㅎㅎㅎ

수이 2015-01-21 16:29   좋아요 1 | URL
곧_ 북플에 중독중이니 북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셀카는 자제하고_ 민이 나오는 사진으로 호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