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일하게 계정을 가지고 있는 SNS는 페이스북이다. 원래 카카오스토리도 있었는데 카카오톡 검열 논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탈퇴했다. SNS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고치고 싶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북플도 SNS이군. 요즘 페이스북보다 북플을 애용한다. 하지만, 접속 횟수를 늘어나지 않도록 스스로 조절한다. PC 상태에서 글을 작성하고 난 뒤에 접속한다. 주로 서재 이웃의 글에 댓글을 단다. 그 외에는 접속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북플은 무궁무진한 책 이야기와 도서 정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그래도 내 독서 시간만큼은 북플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
페이스북을 접속하면 궁금할 때가 있다. 자신의 일상을 하나하나 정성껏 사진과 글로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여유와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말이다. 셀카 사진을 하루에 한두 장 찍어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본인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넘친다. 그들의 외모가 출중한 것은 인정은 하나, 자꾸 페이스북으로 들이대면 부담스럽다. 이제 셀카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 주는 것도 질린다.
누구든지 SNS을 하게 되면, 타인에게 주목받고 싶어 한다. 여기에 과하게 몰입하면 자신의 감정까지도 공개한다. 살다 보면 상황에 따라 기쁨과 우울, 분노, 슬픔을 느낀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고, 함께 이 즐거운 기분을 공유하고 싶어진다. 반면에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내 감정을 상대방과 공유한다는 것은 곧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작용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감정 과잉하는 성향이 많아지면 부작용을 낳는다. 정작 본인은 잘 모르지만, 계속 보는 사람들은 피곤하다. 내가 보는 개인적 기준으로 감정 과잉형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원인을 알려주지 않는 사람.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느닷없이 페이스북에 ‘화가 난다’라거나 ‘우울하다’라고 올리는 사람이 있다. 페이스북 친구들이 답글을 단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상황을 설명해준다면 친구들이 이해하고 위로를 건네줄 수 있다. 그런데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그냥, 좀 안 좋은 일이 있어’라고 말할 뿐이다. 두 번째, 감정 조절 없이 그냥 표출하는 사람. 그러니까 첫 번째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 원인과 그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런 글 상당수는 별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많다. 페이스북에 공개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본인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고 풀 수 있는데도 말이다. 혼자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니까 감정을 남들에게 공개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러한 감정 과잉형은 충만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작성해보지만 보는 이들은 당최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채연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렸던 ‘눈물 셀카’다. 지금도 채연의 흑역사로 언급할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채연은 미니홈피에 “난 가끔 눈물을 흘린다. 가끔은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내가 별로다. 맘이 아파서 소리치며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야. 꼭 슬퍼야만 우는 건 아니잖아. 난 눈물이 좋다. 아니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우는 내가 좋다”는 글과 눈물을 머금고 찍은 사진을 올렸다. 눈물을 흘리면서 눈물이 좋다고? 나름 멋있어 보이려고 국어 시간에 배운 역설법을 시도한 것 같은데 오히려 이 사진 공개 이후로 채연의 안티팬이 생기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자화상도 엄연히 말하면 화가의 ‘예술적 셀카’이다. 일반적으로 자화상은 화가가 표현기법을 늘리기 위해서 모델이 있어야만 그릴 수 있는 초상화 대신에 그리는 것이다. 인물화는 단순히 모델의 외형을 똑같이 그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모델의 감정도 그림으로 온전히 옮길 줄 알아야 한다. 모델의 속마음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훈련으로 자화상이 적합하다. 모델이 없어도 자신이 직접 모델이 되어 본인 감정을 표현하면 된다. 그래서 화가의 자화상에 당시 화가의 심리 상태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SNS에서 볼 수 있는 감정 과잉형은 ‘이 사람’의 자화상과 비교하면 애교에 가깝다.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비참한 삶을 살다 간 인간이 그린 자화상을 소개해본다. 진짜 이 그림의 사연을 알게 되면, 이 그림 앞에서 숙연해질 것이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웃는 자화상」 1907년
리하드르 게르스틀(1883~1908)이라는 독일의 화가가 그린 「웃는 자화상」이다. 그림 속 화가는 입을 벌리고 웃고 있다. 그런데 웃음이 영 부자연스럽다. 억지로 웃는 것 같은 화가의 얼굴에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발산한다. 이 그림과 관련된 뒷이야기가 슬프면서도 약간 무섭다. 자화상은 게르스틀 최후의 작품이다. 다시 말하자면, 1907년 게르스틀은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이 그림을 완성하고 난 뒤, 이듬해 자신의 작업실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결국, 이 자화상은 비극적 죽음으로 내몰리기 일보 직전에 그려진 화가의 모습인 것이다. 곧 자살을 눈앞에 둔 화가는 초연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웃어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자신의 운명이 우습고도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리하르트 게르스틀 「마틸데 쇤베르크 II」 1907년
자살 동기와 관련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에 의하면 실패한 사랑을 원인으로 본다. 게르스틀은 사랑에 빠졌는데 하필 그 여인은 작곡가 쇤베르크의 아내 마틸데였다. 젊은 화가와 여설 살 연상의 유명 작곡가 아내와의 사랑, 이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게르스틀은 쇤베르크의 음악을 좋아해서 그와 친분을 맺은 인연으로 음악가의 자녀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곤 했다. 여기서 게르스틀은 마틸데에게 연정을 품기 시작했다. 마침 마틸테도 괴팍한 예술가 남편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시도한다. 하지만, 마틸데는 자녀를 버리고 떠나버린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마틸데는 쇤베르크의 인생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떠나 보내야하는 게르스틀은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음악가의 아내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자신이 인생에 패배한 화가처럼 느껴졌고,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세기말의 우울감은 젊은 게르스틀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비관적인 감정의 늪을 헤어 나오지 못한 게르스틀은 유서와 같은 「웃는 자화상」을 남긴 채 짧은 예술가의 생애를 끝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도록 절망적인 상황을 겪은 사람은 내 신체 일부 하나하나가 떨어나가는 듯한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린다. 화가는 마틸데를 잊기 위해서 자기위안으로 웃어보지만, 그의 눈가는 눈물이 촉촉하게 번지기 시작한다. 웃음 속에 숨겨진 눈물, 이것이야말로 진짜 슬픈 사람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활짝 입을 벌린 웃음은 어느새 절규로 변하고, 화가는 점점 미쳐간다. 게르스틀의 웃음에 예술과 사랑 둘 다 실패한 한 인간의 원초적인 슬픔과 원망이 응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