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의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워크룸프레스, 2014)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 외설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사제와 죽어가는 자가 종교, 쾌락, 도덕관 등 종교적․철학적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죽어가는 자는 종교적 신념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신체적 쾌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반종교적이고 쾌락을 삶의 목표로 삼는 모습에서 리베르티나주(Libertinage) 사상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죽어가는 자는 사드가 선호하는 ‘방탕한 자유인’ 리베르탱(Libertin)이다.
이 대화에서 승기를 잡는 쪽은 죽어가는 자다. 사제가 리베르티나주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 죽어가는 자는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죽기 일보 직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질문에 바로바로 응답하는 걸로 봐서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짧은 대화는 죽어가는 자가 드디어 죽음이 임박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끝나게 된다. 점점 생명의 기운이 빠지면 말할 힘도 없을 텐데 죽어가는 자는 쾌락의 즐거움을 예찬한다. ‘살아남은 자’인 사제에게 종교를 내려놓고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볼 것을 권하기도 한다. 죽어가는 자는 쾌락주의자답게 죽는 순간도 평범하지 않다.
이제 나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네, 햇살보다 아름다운 여자 여섯 명이 지금 옆방에 있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대기시켜 놓았지. 자네도 동참하게나. 나처럼 여자들이나 품고서, 그 모든 미신의 허망한 궤변을 잊도록 해보게. 위선이 낳은 어리석은 착각들일랑 깡그리 잊어버리라구.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중에서, 36쪽)
죽어가는 자가 천상의 세계로 향하는 장면은 숭고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죽어가는 자의 영혼 주변에 거룩한 신과 천사들이 아닌 여자 여섯 명이 다가온다. 죽어서도 천상의 세계에서 여자, 그것도 여섯 명이나 품을 수 있다니. 역시 사드다운 발칙한 상상력이다.
그런데 죽음을 초월한 쾌락 예찬은 누군가에게는 숭고한 장면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파블로 피카소의 「초혼」이라는 그림은 1901년에 그려진, 피카소의 초창기 작품이다. 이때 피카소는 주로 어두운 청록색의 색조를 띤 그림들을 많이 그렸는데, 그의 작품 활동 기간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 시기를 ‘청색 시대’라고 부른다. 푸른색이 지배한 피카소의 그림들을 보면 무척 우울하고 냉랭한 느낌을 받는다. 청색 시대는 피카소의 무명 시절이었고,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힘든 시기였다. 피카소가 푸른색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피카소는 음주와 음란한 공연을 즐기는 파리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삶에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는 파리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피카소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는 가끔 피카소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길지 않았다. 1901년 카사헤마스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일로 인해 자살한다. 친구의 죽음은 피카소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피카소의 캔버스에 푸른색이 눈에 띌 정도로 많아졌다. "나는 카사헤마스의 죽음을 알고부터 푸른색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라고 피카소 본인이 직접 말할 정도다. 죽은 친구를 애도하기 위해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 바로 「초혼」이다.
피카소 「초혼」(카사헤마스의 장례) 1901년
「초혼」의 다른 제목은 ‘카사헤마스의 장례’이다. 카사헤마스로 보이는 사람이 하얀 천이 덮인 채 누워있다. 죽은 자 주변에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서 있다. 여기까지가 지상의 세계이다. 이제 바로 위에 있는 천상의 세계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런데 천사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스타킹만 걸친 벌거벗은 여자 여섯 명이 있다. 그녀들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서 야릇한 자세를 취한다. 그렇다. 그녀들이 기다리는 사람들은 천상의 세계로 향하는 카사헤마스의 영혼이다. 거의 벌거벗은 여섯 명의 여자들은 창녀로 볼 수 있다.
피카소는 죽은 친구의 장례식을 성스러운 느낌의 종교화처럼 그리지 않았다. 엄숙한 장례식에 창녀가 등장하는 성(性)스러운 그림을 그린 이유가 무엇일까. 죽은 친구를 모욕하기 위해서 그린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피카소는 불행한 죽음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진심으로 슬퍼했고,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카사헤마스는 사랑에 실패한 채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 영혼이 된 카사헤마스는 지상에서의 육체적 쾌락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피카소는 친구가 천상에서도 마음껏 쾌락을 누릴 수 있도록 천사 대신에 창녀를 그려 넣은 것이다. 친구를 생각하는 화가의 배려인 셈이다.
피카소는 기존의 종교화 양식을 답습하면서도 죽은 친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자신만의 표현을 시도했다. 그렇다고 이 그림만으로 피카소가 무신론자이거나 리베르탱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피카소는 쾌락을 원하는 파리 사람들의 삶을 알고 있었을 터. 친구를 위해서 세속적인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그런데 사드의 글에서 숨을 거두는 죽어가는 자와 피카소의 그림에 나오는 카사헤마스를 하늘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신이 아닌 여섯 명의 여성이라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여기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결말에서 사제는 죽어가는 자의 말씀을 믿고 여자를 품에 안은 삶을 살게 된다. 아시다시피 피카소는 여성 편력으로 평생 7명의 연인을 뒀고, 두 차례 결혼했다. 피카소는 남성 누드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 대신 여성 누드가 많다. 피카소의 여성 누드는 내밀한 쾌락을 찬양하는 예술적 표현이었다. 결국, 쾌락이 두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