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스로 만들었거나 만들어진 틀 속에 갇혀 산다.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객관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모두 왜곡된 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많은 편견으로 차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실험 하나 소개하겠다.

 

시카고대학 소속 심리학자들이 경찰관이 범인을 체포하는 방식의 시뮬레이션 컴퓨터 게임을 고안했다. 게임 규칙은 간단하다. 참가자는 경찰관이 되어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범인이 보이면 재빨리 총을 쏘면 된다. 범인은 한 손에 권총이 쥐어져 있고, 범인이 아닌 선량한 사람은 휴대폰 같은 위험하지 않은 물건을 손에 들고 있다. 화면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백인과 흑인으로 구성되었다. 선량한 사람이 다치지 않고, 정확하게 범인에게만 총을 쏜 참가자는 상금을 받는다. 참가자들은 상금을 얻기 위해 화면에 끝까지 집중했지만, 위험인물에게 총을 쏘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상당히 늦게 결정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고 있는 흑인 남성을 쏘고, 무기를 소지한 백인 남성을 보내주는 실수를 반복했다. 호주 심리학자가 시카고대학의 실험과 아주 비슷한 방식을 시도했다. 이번에 터번을 쓴 남성을 화면에 등장시켰다. 이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평범한 복장의 남성보다 머리에 터번을 쓴 남성을 볼 때 더 많이 총을 쏘았다.

 

 

 

 

알 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 그가 은신 생활을 하는 동안 외신은 하얀 터번, 길게 자란 수염의 빈 라덴 사진과 영상을 반복해서 공개했고, 터번과 수염은 테러리스트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상징이 각인된 사람은 터번을 쓴 긴 수염의 중동인만 보면 테러리스트로 의심한다.   

 

 

두 가지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 눈앞에 있는 사람이 위험인물인지 아닌지 식별하는 데 어려워한다. 게임을 하다가 간혹 생기는 단순한 실수로 가볍게 이해해선 안 된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 평범한 시민이 이슬람 테러리스트로 오인되어 경찰관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중동인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로 테러리스트로 의심받는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 내 반이슬람 정서가 높아지면서 아랍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성 범죄가 늘어났다. 이슬람계에 대한 보복성 범죄 증가는 전혀 놀라울 게 못 된다. 지금도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이슬람 공포증을 유발하는 수사적 표현을 구사하는 정치인, 언론인들이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 익숙한 미국인들은 무슬림과 아랍계 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해소되지 않은 채 증오감을 더 키운다. 터번을 쓴 남성만 보면 무조건 테러리스트로 의심하는 무시무시한 편견이 형성된다.

 

 

 

 

 

'수염 난 장난꾸러기' 스웨덴지부 단체 사진 (사진출처: 연합뉴스)

 

 

무장세력 IS의 난폭함이 갈수록 심해지면 무슬림에 대한 편견도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스웨덴에서 남성들로 구성된 친목모임 단체가 IS 일원으로 오인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성회원 30여 명으로 구성된 ‘수염 난 장난꾸러기들’이 스톡홀름에 있는 고성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단체 깃발을 가지고 왔는데, 검은색 바탕의 깃발에 ‘X’자로 교차한 두 개의 검이 그려져 있다. 멀리서 보면 흡사 해적 깃발과 비슷하게 생겼다. 깃발을 들고 무리 지어 고성을 찾은 단체 회원들을 목격한 사람은 처음에 그들이 IS조직인 줄 알고 경찰로 신고했다. 아마도 신고자는 수염 난 사내들이 오사마 빈 라덴과 비슷하게 생겨서 위험인물로 생각했을 것이다. 뉴스가 공개하는 이슬람 무장단체 일원들은 공통으로 수염이 많이 자라나 있다. ‘수염 난 장난꾸러기들’은 형제애, 자선, 친절을 목표로 생활하는 엘리트 남성들의 친목단체다. 스웨덴 지부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지부가 있다. 혹시 외국을 여행할 때 정장 차림에 덥수룩한 수염이 있는 남자들이 때로 모여 돌아다닌다면, 일단 무서운 사람으로 오해하지 마시라. ‘수염 난 장난꾸러기’의 단체 깃발도 기억해두시길.

 

인종 편견은 흑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나타난다. 흑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는 범죄가 잦아서 흑인 범죄 성향이 높다는 편견 때문에 비무장 흑인마저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 지난달 말에 휠체어를 탄 흑인 청년이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흑인 차별과 편견이 사라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자신과 다른 것을 선천적으로 두려워하는 심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이 흑인이어도 여전히 흑인을 범죄와 연관 지어서 두려워하는 미국인이 많다. 사실과 맞지 않은 원초적 두려움은 편견의 뿌리가 되어 우리 뇌 속에 자라난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드디어 세상에 공개된 하퍼 리의 소설 《파수꾼》에는 흑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로잡혀 편견에 쉽게 조종당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진 루이즈 핀처의 고모는 과거에 메이콤 마을에 일어난 흑인 폭동의 공포를 잊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NACCP(흑인 인권단체)에 반감을 품는다. 루이즈의 친구는 흑인 인권 운동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한 음모로 믿는다.  

 

뚜렷한 믿음은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훌륭한 지침이 된다. 삶을 지탱해주는 기준이 없으면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 중심이 없으니 늘 주변에 휘둘린다. 불안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가 가진 생각이나 행동이 나도 모르게 잘못된 편견에 매몰되지 않았는지 자문할 필요는 있다. 타인을 향한 편견은 증오가 담긴 화살이 되어 선량한 사람의 피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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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5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10-16 16:14   좋아요 1 | URL
그래서 편견이라는 게 정말 무서워요. 저 또한 그런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는데, 이런 위험을 감지하지 못해요.

[그장소] 2015-10-16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편견일까요? 조종일까요? 일종의 시그널에 계속 노출되서 무의식 중 세뇌라면..아니..의식중 세뇌일 수도..
계속 암시를 줬어요. 대중적 매체를 통해서..그들은
다르다고요...아닐까요...?! 선택되어지도록 ..이 실험은 이미 세팅 자체가 의미 없었는 건지 몰라요.

cyrus 2015-10-16 16:33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이 말씀하시는 ‘일종의 시그널’이 ‘편견’과 비슷한 의미로 본다면, 제가 소개한 실험이 대중매체가 전파한 편견에 조종당한 사람들의 심리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겠군요. 이 글의 요지는 편견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편견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 건지 알리고 싶었습니다.

마립간 2015-10-16 0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수꾼>에는 흑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로잡혀 편견에 쉽게 조종당하는 사람들. ; 이 문구를 보니, 고양이를 무서워 하는 사람들과 강간을 두려워하는 여성들이 떠오르네요.

cyrus 2015-10-16 16:39   좋아요 1 | URL
어떤 사람들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너무 무서워서, 고양이 자체를 싫어하기도 해요. 밤에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무섭게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고양기가 알고 보면 매력 있는 동물이에요.

AgalmA 2015-10-16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안-공포와 편견이 참 미묘해지는 지점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진화적인 자기 보호본능상 어떤 사건을 트라우마적으로 겪게 되면 편견이나 병증으로 뿌리내리게 되는 상황이 되는 듯 싶으니까요.
˝꼬마 앨버트˝ 실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포 조건반사를 보려고 한 잔인한 실험은, 꼬마 앨버트가 흰쥐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다른 조그만 털 난 동물 전체, 흰 수염에도 공포증을 갖게 만들어 산타클로스도 무서워했다고 하죠. 이처럼 ˝확장성˝이 편견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이죠.
여하간 이 행동주의 관점의 실험은 뇌과학 쪽에선 이의를 제기했죠. 조건형성 때문이 아니라 원래 인간 뇌가 쥐 같이 병원균을 옮기는 생물을 겁내게끔 만들어졌다는 의견.
이런 실험을 받은 아이들이 단명하거나 사회부적응으로 고통당하는 등의 뒷이야기들은 더 처참하고....

덧붙여 홀로코스트를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그 자녀들이 유전적으로 공포 불안 상황에 대한 뉴런이 더 많다는 것도 의미심장...
아무튼 참 복잡한 인간 심리...

[그장소] 2015-10-16 20:48   좋아요 0 | URL
음...더 가면 공포..그렇죠.
알게모르게 노출이 자연스레 이뤄지고 있다는걸.
저는 말한것이고.
cyrus 님은 딱 저 견해를 놓고 만 말씀하신 것이고요.
거기서 파생된 연쇄적 반응에 대해 마립간님 Agalma님이 정리를 해 주신 셈..
제 얘기는 좀 치우친 면이 있답니다 .전문 분야로 논한 게 아니니 너그럽게 양해를 바랍니다.^^

[그장소] 2015-10-16 20:50   좋아요 0 | URL
사람이 참 못할 짓을 과학이란 명분으로 많이해요.
이놈의 호기심...ㅎㅎㅎ
심리..이걸 탓해야하나? 인간 자체가 판도라의 상자.

AgalmA 2015-10-16 21:02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이 말씀하신 대중매체적 선동도 일리 있습니다.
저는 인간 자체의 심리 작동 방식에서 보려고 한 거여서 맥락이 서로 달랐을 뿐 서로 보족적이지 충돌될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과학이란 명분...뭘 모르니 여기도 찔러보고 저기도 찔러보고 아니겠습니까...빛과 어둠처럼 득이 있는 만큼 피해도 불가피하고요. 득보다 실을 더 피해야 할 텐데 그게 참...

cyrus 2015-10-19 20:01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의 의견은 틀리지 않습니다. 아갈마님이 지난주에 제가 달았던 댓글 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풀어쓰셨어요. 선동으로 인한 확장성이 편견을 조장하는 원인입니다. 제가 ‘선동’이라는 표현을 썼어야하는데, 그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어요. ‘대중매체가 전파한 편견에 조종당한’이라고 쓴 표현이 구체적이지 않아서 아마도 제 댓글이 그장소님의 의견을 반박하는 의미로 보인 것 같습니다. 큰 오해 없으면 합니다. ^^

[그장소] 2015-10-16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galma 님 말씀 대로 같은걸 놓고 서로 각자의 방향에서 보고자 한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하하핫~

[그장소] 2015-10-19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저는 반박으로 본적은 없는데 .왜 저는 선동 이란 단어를
선호치 않아 서 안썼거든요.^^ 너무 우회를 한 탓에 배려 토스가 서로..주어지다보니..조심성만 가득 해진 면이 있단 생각 이..들어요.그냥 포크로찍듯 그 단어를 적재적소에 써야 한단걸..또 배우네요.^^
cyrus님 오해나 반박이나..그런 느낌이 아니고 저는 즐거웠어요.진심으로.^^

cyrus 2015-10-19 20:39   좋아요 1 | URL
좋게 보셔서 고맙습니다. ^^

[그장소] 2015-10-19 20:43   좋아요 0 | URL
저야 다른 사례를 가져와 대입을 시킨 셈이니 이해를 바랄 쪽은 제 쪽이 분명하거든요.
잘 받아주셔서 전 이야기에 흥미가 한껏이었고요.
^^
다시 읽어봐도 논점에 벗어난 글이 아니고.
제 얘긴 다른 사례의 붙임 정도. .로 참고 해주시면 했었어요.ㅡ그러니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ㅎㅎ
 
경제학자들은 왜 싸우는가 - 세상을 움직이는 4가지 경제이론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간결한 입문서!
질 라보 지음, 권지현 옮김 / 서해문집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우선이냐. 경제학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고전적인 명제다. 효율과 평등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중요시하느냐는 것으로, 이 문제는 경제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국민이 배불리 먹으려면 일단 파이를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고, 파이를 크게 만드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공정하게 나누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 역시 타당하다. 그래서 이 논쟁은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정당은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갈라지고, 선거 때마다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 이렇듯 경제학은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친숙한 학문이다.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은 이제 일상이 되었고 더 이상 경제가 빠진 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경제가 학문이 되는 순간, 우리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경제학의 거장이라는 애덤 스미스, 리카도, 케인스 같은 학자들도 학창시절 한번쯤 우리를 골탕먹였던 악명 높은 인물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질 라보의 《경제학자들은 왜 싸우는가》는 그러한 거부감을 줄여주는 책이다. 학자들의 핵심 이론과 좀 더 편하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에 다루는 경제학자는 애덤 스미스, 케인스, 마르크스, 칼 폴라니다. 교과서에서처럼 그래프와 공식으로 뒤덮인 난해한 설명은 없다. 대신 이러한 이론들이 경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아주 쉽게 소개하고 있다.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처럼 딱 필요할 만큼의 내용을 알려주는 방식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지식을 너무 얇게 진열되다 보니 독자의 궁금증을 완벽하게 해갈해주지 못한다. 예를 들면,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국부론》를 잘못 해석한 용어라고 주장하는데, 저자의 말에 뒷받침해주는 인용문이 없다.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독자는 질 라보의 책을 읽고 난 다음에 애덤 스미스에 관한 또 다른 책을 참고한다. 그러면 질 라보의 설명이 옳은 건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정보를 터득하게 된다. 이론을 쉽게 설명한 책이라고 해서 저자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하면서 읽는 건 잘못된 독서 방식이다. ‘경제학’을 하나의 건물로 비유하자면, 질 라보의 책은 ‘경제학’을 세우려고 마련한 기본적인 토대와 같다. 달랑 토대만 세워놓은 상태만으로 ‘경제학’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질 라보는 4가지 경제이론이 인류의 경제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준 ‘표상’이라고 말한다. ‘표상’이라는 용어가 이 책에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대목일 수 있다. 철학 용어로서의 ‘표상’이 먼저 떠오른다면 잠시 잊어도 좋다. 저자는 ‘표상’을 단순하게 설명한다. ‘경제’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미지를 의미한다. 그래도 용어의 의미가 난해하다고 생각하면, ‘본보기’로 순화하여 이해해도 된다.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경제학자들은 이 ‘본보기’를 둘러싸고 설전을 펼친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네 가지 경제 이론이 역사의 무대에 여러 번 재등장했다.

 

처음에 애덤 스미스는 경제를 시장 자체로 인식했다. 시장은 완전히 자유롭게 내버려 둘 때 최고의 상태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지적 토양이 되어주었고, 오늘날 주류경제학의 전제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1930년에 들이닥친 대공황으로 대세는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 케인스의 이론으로 흘러갔다. 케인스는 경제를 순환적인 흐름으로 이해했다. 경제가 잘되려면 시장경제를 그대로 내버려둬선 안 되고, 선순환이 이루어지도록 정부 지출을 확대하는 ‘큰 정부’ 역할을 강조한다. 1960년대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다시 애덤 스미스의 고전학파가 전성기를 맞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누어지는 권력관계로 본다. 애덤 스미스가 생각한 대로 부는 교환을 통해서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자본가가 노동자의 착취로 자본을 축적할 때 형성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칼 폴라니는 시장중심주의 경제의 틀에 벗어나 환경을 해치지 않는 지속 가능한 경체체제로 구상하자고 주장한다.

 

이 네 가지 경제이론을 이해하고 나면 심오한 질문처럼 느껴지는 책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제목의 ‘경제학자’를 ‘정치인’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경제이론이 교과서에 있어야 할 지루한 내용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에도 시장경제에 모두 맡기자는 고전학파 이론과 감세로 부를 분배하자는 케인스 이론의 자리다툼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의 상황에 따라 두 이론이 번갈아 선택되고 있다. 어느 것이 최선인가의 정답은 단지 상황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어느 이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방향은 크게 달라진다. 이 고민은 경제학자,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 숙고해야 할 기본적인 삶의 물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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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0-15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낙수효과는 작동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죠..

그러나 아무리 물을 부어도 물이 다른데로 세버리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돈이 되어 버렸어요.

이젠 경제학자들이 분수효과를 이야기 하더군요..^^

cyrus 2015-10-16 16:43   좋아요 0 | URL
낙수/분수 효과에도 각각 장단점이 있을 겁니다. 그나저나 분수효과 얘기나 나온다면 새누리당과 자유경제원을 어떻게든 이 분수효과를 깎아내리려고 홍보를 하겠군요. ^^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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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정치에 관해 얘기할 수 있고 잘못된 정책이라고 판단되면 신랄하게 꼬집을 수 있어야 한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해 어느 시점에 몸을 던져 저항할 것인가 하는 결단의 강박 아래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가장 먼저 앞장서서 저항의 등불을 밝힌 청년들이 있었다. 대학 강의를 듣는 일보다 시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고, 조국의 현실 앞에 눈물을 쏟아냈으며, 때로는 온몸을 불살라 절규도 했다. 그들이 공유하는 문학도 새로웠다. 저항시가 문학적 위세를 떨쳤다. 80년대에 노동자시 혹은 농민시라는 이름으로 시들이 시대의 아픔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심어 주었다. 시인들은 저항과 투쟁의 거리 한가운데를 달리며 의연한 싸움으로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길거리에 최루가스 냄새가 사라진 이후 대학생들은 자유분방해졌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과거에 들끓던 민주화운동을 정리할 필요를 느낄 만한 시점이다. 그래서일까.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젊은 작가들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문단을 주도하는 중견, 원로급 작가가 되었고, ‘역사의 시간’으로 남은 그 시절을 복원하려고 노력한다. 역사라 이름 지어진 순간들은 과연 시간의 저 너머 어딘가에 묻혀 발굴을 기다리는 유물 같은 것일까. 유신체제 시절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역사를 거꾸로 돌아가려고 한다. 역사의 오욕과 역류가 벌어지는 오늘의 역사에 삶의 정당성을 위해 싸웠던 지식인들을 지금 무엇 하고 있는가. 그들의 모습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달려오게 한 저항의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다. 부정한 사회에 따끔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에너지로 전환되기는커녕 과거 추억팔이에 한창이다.

 

시는 비틀거리고 있다. 자기 성찰 하나 없이 지고지순한 세상이 온다는 희망만 노래할 뿐, 진실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진짜 큰 문제는 시인을 구속하는 현실이다. 시인의 희망을,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불법이라고 낙인찍는 나라다. 송경동 시인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문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들이 과거의 학습효과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까.

 

시가 휘청거릴 때 서경식 선생의 책이 구원의 손길처럼 다가온다. 만약에 서 선생이 시인이었다면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만한 사랑, 민주주의, 인권, 자유를 담았을 것이다. 선생은 독서와 시 창작에 매달리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이겨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개인 소장판 시집을 펴낸 적도 있다. 그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 ‘시’라는 작은 창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삶과 자유를 갈망하는 ‘실천자’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시는 그를 국가와 언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을 고발하는 지식인으로 끌어들인 안내자가 됐다. 선생은 ‘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오늘날 시가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지 자문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학에서 ‘저항시’라는 장르는 도드라진다. 시어는 감각적이고 함축적이어서 다른 장르에 비해 저항의 정치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빼앗긴 국토에 대한 상실감과 그것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력이 담겨 있다. 윤동주는 하늘, 바람, 별 같은 서정적인 시어를 골라 썼지만, 그것들이 속한 것은 ‘조국’이었다. 조국의 현실에 아파하던 시인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면서 삶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이겨나갈 것을 다짐한다. 찌그러진 사회에 몸을 굽히지 않는 시인들의 의식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대에도 이어진다. 양성우가 ‘겨울공화국’이라고 칭했던 유신 때도 시인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박노해는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에 진지한 관심을 드러낸다.

 

정치와 문학의 결합. 서 선생은 사회 앞에 침묵하지 않는 시를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빌려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생각하는 시의 힘이요, 비정한 권력의 힘에 저항하게 하는 의지다. 선생은 여전히 저항시가 현실에 유효한지 의문부호를 단다. 그런데도 마땅한 좌표를 찾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저항시의 흐름이 이어지기를 원한다. 직설적 언어로 사회 개혁의 의지만을 천명하기보다는 거대한 대중들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실천의 언어가 절실히 필요하다.

 

문학의 비판 기능이 사라진다면 사회의 가치 체계는 전도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의 적을 닮아버렸다. 정직하게 분노하는 방법을 잊고 만다. 부조리한 현실을 회의하고 생각하는 문학이 너무도 드물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불운하다. 직관과 영감으로 번뜩이는 아름다운 노래를 읊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좋은 것만 보고 싶은 마음으로 시를 만든다면 그 시는 정말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 김수영, 송경동처럼 정의와 도덕이 무의미해지는 시대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이 우리 사회에 존재해야 한다. 이들은 절대 침묵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시를 쓰면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그러한 문학을 꿈꾼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더 정확하게는 회피할 수 없도록 정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시의 힘》을 읽고 있을 때, 김수영이 '눈'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재채기하라고 했던 구절이 퍼뜩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직한 분노를 묵살해버리는 백색으로 위장한 어두운 현실에 대고 ‘기침’을, 재채기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일본은 타이완과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고 ‘만주’의 패권을 러시아 다투고 있다. (102쪽) → '러시아와 다투고 있다'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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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0-15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지금 젊은이들이 그때보다 더 치열하게 사는 건지도 모르죠.
치열이 개인화 되어 버렸더군요..
포기된 시대에 각자도생만 나부낍니다.

cyrus 2015-10-15 21:20   좋아요 0 | URL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다 보니 정작 정치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이렇다 보니 사람들이 정치에 `정` 자만 들어도 냉소적으로 생각해요.

csp 2015-10-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우리의 적을 닮아간다˝는 서평 속 문장이 와닿는군요.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

cyrus 2015-10-15 21:22   좋아요 0 | URL
책 속에 좋은 글이 많습니다. 특히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정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글이 좋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에 연연하는 우리 사회를 반성하게 되는 글입니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
아모스 오즈 지음, 정영문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 Touch the Water, Touch the Wind (197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물과 기름에 비유되는 두 나라 간의 유혈충돌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이들의 다툼은 삶의 터전을 둘러싼 생존의 문제였기에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5세기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으나 기원전 63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대부분 해외로 이주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왔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 건국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유대인들은 고향 땅인 팔레스타인과 미국으로 줄을 이어 이주했고 그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유엔은 1947년 마침내 유대인들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팔레스타인 땅의 52% 지역에 유대 국가를 세우고 나머지 48%에는 아랍 국가를 수립한다는 분리된 국가건설 방안을 제시했다. 유대민족으로서는 2,000년 만에 약속의 땅에 돌아온 것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교도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셈이 됐다. 그 뒤 이 땅을 두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4차례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19673차 중동전쟁(6일 전쟁)으로 점령한 요르단 강 서안과 가지 지구 등에 유사시에는 전진기지역할을 할 수 있는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 왔다. 유대인들은 키부츠(집단농장)로 상징되는 개척자로서의 이스라엘이란 이미지를 버리고 홀로코스트를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은 점령지 전부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정착촌을 자신의 관할 하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아모스 오즈의 소설을 읽으려면 이스라엘 건국 역사를 먼저 이해해두는 것이 좋다. 아모스 오즈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삼거나 제4차 중동전쟁 후 이스라엘 사회 모습 등을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해왔다. 이스라엘 역사를 파악하지 않고, 오즈(Oz)문학나라로 들어가면 독서의 여정이 순탄치 않게 된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를 펼치는 순간, 독일군을 피해 도망치는 주인공을 만난다. 엘리샤 포메란스는 수학을 가르치는 유대인 교사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소설이 디아스포라(유랑)를 계속하는 유대인의 여정을 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엘리샤의 아내 스테파도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엘리샤는 생사가 걸린 유랑을 선택한 남편과 반대로 자신의 집에 끝까지 남는다. 그녀의 첫 등장 또한 예사롭지 않다. 집밖에 울려 퍼지는 독일군의 총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예 전쟁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녀의 이력도 독특하다. 철학자 하이데거와 텔레파시로 의견을 주고받은 적 있으며 괴테 학회 회원이기도 하다. 뒤숭숭한 상황 속에서도 스테파는 집에 있는 모든 창문을 닫은 채 너무나도 평온하게 지낸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교수를 자신의 집에 불러들여 함께 살기도 한다. 그녀는 남편과 다른 행보를 보인다.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고 건너나 비밀 첩보원의 수장이 된다.

 

 

 

 

 

서경식 《시의 힘》 (현암사, 2015)

 

 

 

엘리샤와 스페타는 전쟁에 직면하는 유대인(혹은 유대인 출신 지식인)의 상반된 태도를 상징한다. 이들의 모습을 서경식 선생이 표현한 동심원의 패러독스로 설명할 수 있다. 전쟁의 중심부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그곳 비극의 진실을 상상할 수도 없고,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면 전쟁의 중심부에 가까이 있을수록 인간은 공포를 느끼는가. 서경식 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비극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런 구조가 장기화하면 비인간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인식이 형성된다.

 

엘리샤는 전쟁의 중심부를 벗어나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수학, 특히 무한을 주제로 하는 연구에 몰두한 끝에 누구도 풀지 못한 수학의 난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또 음악을 멜로디가 있는 수학으로 본다. 그러면서 음악이 난폭함을 없애고, 조화로운 세계를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를 번역한 정영문 작가는 엘리샤가 믿는 음악의 힘이 스테파와의 극적인 재회로 이끌게 하는 화해의 힘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엘리샤가 수학과 음악 연구에 매달리는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지고,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정영문의 해석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겠다. 피난길 도중에 엘리샤가 자신의 하모니카 연주에 흠뻑 취하는 장면은 생사 벼랑으로 내몰리는 전쟁 피란민의 현실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한 감이 있다.

    

 

독일군의 사냥이 가까이서 이루어질 때면 그는 하루 종일 황량한 마을 외곽에 있는 헛간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해가 지면 은신처를 떠나 어둠 속에서 여윈 몸을 꼿꼿이 세운 채로 서서 완전히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드럽게 하모니카를 불었다. 폴란드의 공기는 그 즉시 음악에 젖어들었다. 포메란스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땅을 손으로 때리며 힘을 가다듬고 트림을 했다. 그는 땀을 흘리며 팔꿈치를 자신의 주위에 내보낸 음악에 기댔다. (중략) 그는 몸을 일으켜 어두운 하늘 위로 떠올랐다. 애를 쓰다 지쳐 축 늘어진 그의 몸은 숲과 초지 위로, 교회와 오두막과 들판 위로 높게 그리고 조용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장애를 뛰어넘었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중에서, 16~17)

    

 

엘리샤는 디아스포라의 비극에 휘말린 피해자이면서도 가혹한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수학과 음악 세계에 탐닉한다. 디아스포라의 운명이라는 해일에 맞서려는 고민의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전쟁으로 인해 비극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디아스포라 문제를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독일군 공습에 도망가지 않고, 자기 집에서 머무르는 스테파의 모습은 위험한 지역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전쟁의 비극을 외면하는 소극적 자세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도 행복하게 살지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들의 이야기가 더 진행된다면 작가는 이들의 모습을 또 어떻게 그릴 것인지 궁금하다. 과연 음악의 힘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적대적 갈등을 잠재우고 평화를 염원하는 하나의 소통 창구가 될 수 있을까.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 점점 커지고 있는 중동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동화 같은 소설이 중동 분쟁의 희생자들에게 거짓 위로를 주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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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0-14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모스 오즈 도 이번에 노벨문학상 수상자 대열에 오르긴 했던 문동카페기준으로인지 몰라도!

cyrus 2015-10-14 20:31   좋아요 1 | URL
노벨 문학상 발표 전에 해외 도박 사이트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 유력 후보 배당률을 공개하는데, 가끔 순위권에 아모스 오즈가 언급됩니다. 이번에 오즈의 소설이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나오기 때문에 출판사 측은 오즈의 수상을 기대해봤을 겁니다. ^^

[그장소] 2015-10-14 21:15   좋아요 0 | URL
그런건..참..소치.(수치?)스러워...요.어쩐지...그래선지 국가가 이번 그녀를 조명하는데 지난 출신지들부터 못박는 느낌. 이름은 명백히 러시아 인데..우리나라에선 러시아에 뭐 좋을리 없으니...

[그장소] 2015-10-1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 방식으로 보았는데 앨런 튜링이 2차 세계 대전의 복판에 있으면서 수학에 공식에 빠져있었죠. 에니그마 라고 하는 지금과는 형태와 본질이 좀 다르게 변형이 되었지만 해독의 기술이
단순히 아녔어요.
음파를 가지고 독일 쪽에선 특히나 묘하게 숨기는 암호만들기에 집착을 많이 보인 걸로 알거든요.
음악의 종류이기도 하고요.그게 보이는 눈이 있는 거죠.모두 어떤 기하학이나 숫자.혹은 그림의 형태로..영화에선 제대로 잘 전달이 안되어서 결국 나타낸 모양이 에니악같은 모양새가 되버렸지만
ㅡ그런 기호와 그림에서 읽어낸 같은 흐름의 반복적 규칙을 도식화 했고 기계는 사람이 계산하면 그 인원이 수년을 매달려야 할 일을 줄여 줬어요. 여기까진 영화의 이야기라면 이제 그 유대인의 피와 살..을 이은 그녀가 집착해 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전 으로 옮겨 가 볼 수 있어요. 모든 것이 암호의 세계이고 무궁무진한 신비로 가득하다는 것을 저는 느꼈는데..수학에 아주 정확한 답이 나온다는 것 만큼이나 그 반대로 미지수라는 것 또한 존재한다는 걸..알잖아요.
불협화음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도 알고 말예요. 뭐 단적인 예일 뿐입니다. 폭풍의 핵 .그 안은 오히려 고요 하다죠...그렇다고 사정권 밖이냐 면 그것도 아니면서요.중심에 있으니..쓸데없이 길게 떠들어서 죄송하고요.저는 안타깝긴 하지만
이해불가영역이 ..아니라고..말하고 싶었네요.

cyrus 2015-10-14 20:45   좋아요 1 | URL
미안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은 의견입니다. ^^

제가 앨런 튜링의 영화를 보지 못해서 소설 속 주인공과 튜링을 비교할 자신은 없지만, 수학의 반복적 규칙이 음악과 유사하다고 보는 그장소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수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피타고라스가 최초로 수학의 원리를 음악에 적용하여, `피타고라스 음계‘를 만들었어요. 오늘날의 화음과 비교하면 이 음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수학이 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한 공로는 인정합니다.

[그장소] 2015-10-14 21:11   좋아요 0 | URL
그 피타고라스의 음계를 최적으로 사용한 이가 저는 바흐라고 생각해요.
그.평균율을 놓고 고민하면서..ㅎㅎㅎㅎ
음악하는 이들이 천재적이고 다분야에 걸쳐 재능이 있는걸 악기를 만드는 것..공명을 ..조율하는 그 미묘한 차이를 잡아 내는 기술까지..물론 세대간 에 차이는 엄청 큽니다만..뭐 제 생각일 뿐..ㅎㅎㅎ피타고라스정리가 거짓이라는 지식채널을 얼핏보기까지..해서..

cyrus 2015-10-15 21:26   좋아요 1 | URL
피타고라스가 제자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자기가 독창적으로 발견한 것으로 꾸몄다는 설이 있어요. 이게 사실이라면 피타고라스의 공은 바흐가 가져가야 합니다. ^^

[그장소] 2015-10-16 04:02   좋아요 0 | URL
아이쿠 ㅡ기원전 과 그 시간차를 놓고 보면 제가 우겨도 많이 우기는 거죠. ^^ 중간에 뭐 저같은 생각을 하는 분은 비슷하게 다른 사례로도 없나..궁금했어요.^^ 하하하..피타고라스의 공은 ..던지면..개가 달려나가는.물어오는 ...역.ㅎㅎ
제자의 몫 ㅡ그럴테죠.맞다면 ? ! 얼렁뚱땅 우기는 얘기 잘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읽은 소설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이다. 민음사의 새 번역본이 나오기 한창 전에 읽었으니 당연히 내가 읽은 번역본은 문학세계사 판이다. 문학세계사 번역본이냐 민음사 번역본이냐,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서 세대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은 문학세계사 번역본의 ‘상실의 시대’를 읽은 기억이 있을 것이며, 젊은 사람들은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을 것이다. 솔직히 민음사 번역본이 새로 나왔을 때 ‘노르웨이의 숲’이 원제임에도 무척 낯설었다. ‘상실의 시대’가 더 친숙하게 느껴진 탓이리라. 이웃의 블로그를 접속하면 하루키 소설에 관한 서평을 많이 볼 수 있다. 하루키의 소설을 안 읽어서 댓글로 남기고 싶은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다. 이제는 《노르웨이의 숲》 줄거리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져 간다. 그렇지만 《상실의 시대》와 관련된 이상야릇한 비화만큼은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

 

군 복무 시절 같이 지냈던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하나둘씩 잊혀도 그때 읽었던 《상실의 시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입대했을 때부터 군인들이 머무는 방의 명칭인 ‘내무실’이 ‘생활관’으로 변경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생활관에는 세 칸짜리 책꽂이가 있고, 책장 절반은 국방부가 지정한 ‘진중문고’로 채워져 있었다. 딱히 읽을 만한 책이 눈에 띄지 않아서 고심 끝에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되었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땐 지루했지만, 책 중반부에 이를수록 이야기에 점점 몰입되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느낀 독서의 몰입은 오랫동안 가지 못했다. 책 중간에 있는 2~3쪽의 책장이 뜯긴 채 사라졌다. 책의 낙장이 한 곳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네다섯 군데 낙장의 흔적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낙장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라지고 없는 책장에 나오게 될 장면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에서야 그 장이 사라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선임이 《상실의 시대》를 읽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 책 재미있냐?’고 물어봤다. 내가 크게 재미있진 않지만, 시간 때우기에 적합한 책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임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네가 좀 더 일찍 입대했으면 《상실의 시대》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거야.” 나는 선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선임은 《상실의 시대》 중간에 뜯긴 부분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있다고 대답하자 선임은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선임을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선임 XX가 미쳤나?’ 좀 더 자세히 선임의 말을 듣고 보니 선임이 했던 말과 웃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아직 자대 배치를 받지 않았던 시절, 선임도 《상실의 시대》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뜯긴 부분이 없는 좋은 상태였다고 한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군인들이 많아서 《상실의 시대》는 생활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책이었다. 그러다가 한 달이 지난 뒤에 《상실의 시대》 중간에 뜯긴 사실을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군 선임들은 책의 낙장 사실에 당황했다. 왜냐하면, 하필 뜯겨 나간 책장에 야한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임들은 이 중요한(?) 장면만 뜯은 범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상실의 시대》를 읽은 사람들이 범인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누구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처음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낙장 흔적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상실의 시대》를 한 번이라도 읽은 군인이 워낙 많아서 범인을 찾기가 불가능했다. 선임이 과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상실의 시대》는 야한 소설이라서 군대에 반입돼선 안 되는 책이라고.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책의 야한 장면만 뜯은 범인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군대 같은 폐쇄적인 장소를 생활하다 보면 군인은 성적 욕구를 풀 수 없는 방법이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군인들이 군대 반입 금지 물품에 포함된 ‘맥심’ 같은 남성 잡지를 휴가 나오는 후임에게 사오라고 부탁하는 이유가 있다. 여성이 나오는 사진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성적 욕구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간혹 남성 잡지가 화장실 변기 위에 놓일 때가 있다. 아마도 누군가가 《상실의 시대》를 읽다가 그 얼마 안 되는 성행위 묘사를 보자마자 성적 흥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묘사가 있는 부분만 뜯어서 야심한 밤에 혼자 몰래 읽었을 수도 있다. 어떤 선임은 낙장의 범인이 군 간부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간부 중에 누군가는 《상실의 시대》가 어떤 책인지 알았고, 병사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야한 장면이 있는 부분을 뜯었다고 본다. 아무튼, 이상한 낙장 사건 이후로 《상실의 시대》를 읽는 사람이 팍 줄어들었다고 한다. 《상실의 시대》보다 재미있는 책이 많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야한 장면이 없는 소설이 재미없던 것일까.

 

소설가 겸 PD 이재익은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야한 소설’로 소개한 적이 있다. 특히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정사 장면은 자신이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야한 장면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최재봉 한겨레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하루키의 소설들은 ‘몽환적 에로티시즘’을 구현하고 있다. 사실, 작년에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적 색채에 어울리는 상을 받을뻔 했다. 그 상은 바로 ‘Bad Sex Fiction Award’, 일명 ‘배드 섹스 상’이다.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잡지인 리터러리 리뷰(Literary Review)는 문학 작품 속에 불필요하게 묘사된 성 묘사를 자제하기 위해서 1993년부터 배드 섹스 상을 수여하고 있다. 과도하게 성 묘사가 많은 소설을 쓴 작가가 이 상을 받는다. 단, E.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같은 노골적인 포르노 작품은 심사 대상에서 제외된다. 수상자 발표는 연말에 한다. 작년에 벤 오크리의 <The Age of Magic> (2014년 작)이 선정되었다. 오크리와 함께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 중에 하루키도 포함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 전날에 배드 섹스 상 수상자가 발표된다면, 문학상의 ‘골든 라즈베리’(아카데미 시상식 전날에 열리는, ‘최악의 영화’를 선정하는 시상식)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도 예외일 수 없다. (오크리도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자로 새로 거론되는 작가다) 맨 부커상,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들도 배드 섹스 상 최종 후보에 오르거나 (재수가 없으면) 수상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배드 섹스 상을 받은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1993년 : 멜빈 브래그 《A Time to Dance》

 

 

1994년 : 필립 후크 《The Stonebreakers》

 

 

1995년 : 필립 커 《Gridiron》

 

 

1996년 : David Huggins 《The Big Kiss: An Arcade Mystery》

 

 

1997년 : Nicholas Royle 《The Matter of the Heart》

 

 

1998년 : 시배스천 폭스 《Charlotte Gray》

 

 

1999년 : A. A. Gill 《Starcrossed》

 

 

2000년 : 션 토머스 《Kissing England

 

 

2001년 : Christopher Hart Rescue Me

 

 

2002년 : Wendy Perriam Tread Softly

 

 

2003년 : Aniruddha Bahal Bunker 13

 

 

2004년 : 톰 울프 《I Am Charlotte Simmons》

 

 

2005년 : Giles Coren 《Winkler

 

 

2006년 : Iain Hollingshead 《Twenty Something

 

 

2007년 : 노먼 킹슬러 메일러 《숲 속의 성》

 

 

2008년 : Rachel Johnson Shire Hell

 

 

 ※ 공로상 : 존 업다이크

 

 

2009년 : Jonathan Littell The Kindly Ones

 

 

2010년 : Rowan Somerville The Shape of Her

 

 

2011년 : David Guterson Ed King

 

 

2012년 : 낸시 휴스턴 《Infrared

 

 

2013년 : Manil Suri The City of Devi

 

 

2014년 : 벤 오크리 《The Age of Magic

 

 

 

※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은 원서 제목을 그대로 썼다. 배드 섹스 상 수상작을 제외한 작품 번역본이 있는 작가는 한글로, 국내 번역본이 단 한 개도 없는 작가는 원어로 표기했다. 

 

 

 

 

 

 

 

 

 

 

 

 

 

 

 

배드 섹스 수상 작품 중에 유일하게 번역된 것이 노먼 메일러의 《숲 속의 성》(뿔, 2007)이다. 존 업다이크는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에 공로상을 받았다. 업다이크의 소설은 농도 짙은 에로티시즘 묘사로 유명하다. 특히 1968년 작 ‘Couples’(1994년에 ‘커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은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짜릿한 소설 베스트 10’(Top 10 Racy Novels)에 포함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배드 섹스 상은 업다이크가 생전에 받은 마지막 상이 되었다. (업다이크는 2009년 1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런 상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작가들은 입에 부르기도 민망한 이 상을 영원히 받고 싶지 않을 테지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배드 섹스 상 때문에 야한 장면이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 책의 정체가 궁금한 사람들이 많아질 수 있다. 그러면 배드 섹스 상의 취지가 어긋나게 된다. 성 묘사가 있는 부분만 골라 읽는다거나 무척 좋아한 나머지 그 부분만 뜯는 별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전자는 이해해줄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책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사람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특정 여성 연예인이 좋다고 해서 그 연예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만 자르고 사라지는 얌체 독자와 같은 몰상식한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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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애 2015-10-12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우리 소설에 그런 상을 줄 법한 책들이 좀 있는데 공교롭게도 90년대 소설이 대부분이네요. 가령 <경마장 가는 길>.

cyrus 2015-10-13 15:35   좋아요 0 | URL
저도 하일지의 소설이 배드 섹스 상 수상작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stella.K 2015-10-12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진짜 이런 상이 있었구나. 자세하게 써 놨네.
그런데 이런 상이 좀 새삼스럽다는 생각도 들어.
섹스를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풍토에서 작가들의 성묘사는
에로스, 즉 예술의 표현일뿐일텐데 뭐 이런 상을 제정해서
자기네들의 짖궂음을 드러내나 싶어. 예술은 자유로워야 한다면서 말야.ㅋ

그런데 이달의 당선작 어느 부문에도 니 글이 없네.
이상한 일이야. 이번에도 좋은 글이 많았는데...
좀 아쉽겠어.ㅠ

cyrus 2015-10-13 15:41   좋아요 0 | URL
판매 부수를 올리려고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성적 묘사가 있는 소설을 출간하는 출판사를 경계하기 위해서 이런 상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만큼 영국이 표현의 자유가 우리나라보다 보장된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우리나라는 아예 음란한 문장이 있는 책을 판매 금지시키잖아요. ㅎㅎㅎ

추석 연휴 때 글 쓰는 일에 권태기를 많이 느꼈는데, 이제부터 다시 열심히 쓰려고요. 당선작이 안 뽑혀서 아쉽지만, 더 잘 쓰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의 자극제로 받아들어야겠습니다. ^^

stella.K 2015-10-13 17:41   좋아요 0 | URL
맞아. 그럴 필요가 있겠군. 거 잘하는 거네.^^

2015-10-12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3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10-12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상실의 시대로 더 익숙한 독자네요~ 그 때는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노르웨이의 숲도 있긴 한데 아직 읽어보진 못 했어요~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해지기는 합니다~
저런 상이 있다는 것 처음 알았는데 호기심이 확~~ 일어나는데요 ㅎㅎ

cyrus 2015-10-13 15:44   좋아요 0 | URL
올해는 누가 받을지 궁금하긴 한데, 왠지 생소한 작가가 받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름만 알고 있는 작가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ㅎㅎㅎ

간서치 2015-10-12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상실의 시대를 읽고 너무 우울하고 허무해져서 우울증 올뻔 했어요.. 20살때 읽었거든요. 스무살이라는 나이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상황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 어쨋든 .... 제 가슴에 깊이 남은 책이에요

cyrus 2015-10-13 15:47   좋아요 0 | URL
저도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었을 때, 분위기가 너무 음울해서 계속 읽을까 말까 고민했어요. 결국 다 읽긴 했는데,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지 여러 잡생각이 많았어요. 군 복무만 아니었으면 소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오히려 그게 다행한 일인 것 같습니다.

물고기자리 2015-10-13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루키의 묘사는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질 않아서 야하다는 생각이 들질 않더라고요ㅎ 세수하고 양치질하는 것처럼 일상적인 행위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다른 국면으로 전환하거나 이동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전 상실의 시대를 떠올리면 첫 장면이 제일 먼저 생각나요. 비행기에서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잃어버린 기억들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요. 사람들보단 오히려 당시엔 눈여겨보지도 않던 배경과 풍경들만 기억나서 서글퍼지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그 감정이 뭔지 알 것 같아서 굉장히 몰입되었었죠. 빈 상자만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상실의 느낌말이죠.

하루키는 마음의 정경을 정말 잘 표현해서 글을 읽다 보면 나의 빈 상자를 다시 채우는 느낌이 들어요. 맞아, 그런 것도 있었지.. 하면서요. 번역자가 다르니 노르웨이의 숲으로도 언젠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아무튼 작가를 하려면 이런저런 상도 받아야 하니 보통 멘탈은 아니어야 할 것 같습니다ㅎ

cyrus 2015-10-13 15:49   좋아요 0 | URL
소설 속 묘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에 대한 느낌까지 언급하시는 물고기자리님은 하루키 소설을 제대로 읽으신 분 같아요. 저는 야한 장면만 빼고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ㅎㅎㅎ

단발머리 2015-10-13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실의 시대> 독자이니 나이가 좀 있는 사람입니다. ^^ 전 하루키는 너무 야해서... 성적인 요소를 조금 배제하고서 읽어야 합니다. 감당하기가...@@

cyrus 2015-10-13 15:53   좋아요 0 | URL
저는 <상실의 시대> 완전판을 군 제대하고 난 뒤에 다시 읽었습니다. 역시 야한 장면만 뜯긴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

표맥(漂麥) 2015-10-13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상실의 시대...^^
읽을 맛이 쫄깃쫄깃~한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쩜 이런 글을 쓰실 수 있는지... 늘 감탄합니다...^^

cyrus 2015-10-15 21:27   좋아요 0 | URL
예전 추억을 오랜만에 회상하다 보니 글이 길어졌어요. 그래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transient-guest 2015-10-14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이를 많이 먹고서 하루키를 읽어서 그런지 특별히 성적묘사에 대한 거부감이나 야하는 느낌은 없구요, 그저 장면의 일부 같기도 하고, 풋풋하기도 합니다. 글자만 놓고 보면 꽤 야한데 말이죠. 그런데 이런 풋풋함이랄까, 이걸 갖고 강신부 박사 같은 분은 하루키를 `포르노`소설이라고 비판합니다. 경험하지 못한 자의 몽상이라는 취지 같아요. 좀 다른 각도로 보는 듯 합니다만, 전 그저 있는 그대로, 너무 행간을 짚지 않고 읽으니 즐겁기만 합니다. 아련한 추억의 느낌도 받구요. 상실의 시대는 5-6번은 읽은 듯 하네요.

cyrus 2015-10-15 21:30   좋아요 0 | URL
강신주의 평가는 너무 심하군요. 이래서 대중을 자극시키는 듯한 발언으로 평가하는 강신주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요. 포르노 소설만 써대는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면, 강신주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

보물선 2016-06-2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때 <상실의 시대>읽었는데, 야한게 있었는지도 생각이 안나는거보면 저는 뭘 읽은걸까요? ㅋㅋ 다시 <노르웨이의 숲>을 읽어보고 야한가 아닌가 봐야겠어요^^

cyrus 2016-06-26 16:34   좋아요 0 | URL
보물선님이 아직 마음이 순수하셔서 보지 못했던 겁니다. 저처럼 마음이 오염된 사람은 음란마귀에 늘 달라붙어 다닙니다. ㅎㅎㅎ

alummii 2016-07-09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역시 정곡을 찌르는 리뷰였네요 ㅎㅎ 이 소설이 발간 후 젊은 층의 사랑 받았던 이유 중에 야한 장면 묘사 부분도 한 몫했다고 생각되었거든요...ㅋㅋㅋ뜯긴 부분...뿜고가네요 ㅎㅎㅎ

cyrus 2016-07-10 16:56   좋아요 0 | URL
리뷰라기보다는 그냥 책과 관련된 경험담입니다.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