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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
아모스 오즈 지음, 정영문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 Touch the Water, Touch the Wind (197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물과 기름’에 비유되는 두 나라 간의 유혈충돌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이들의 다툼은 삶의 터전을 둘러싼 생존의 문제였기에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5세기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으나 기원전 63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대부분 해외로 이주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왔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 건국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유대인들은 고향 땅인 팔레스타인과 미국으로 줄을 이어 이주했고 그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유엔은 1947년 마침내 유대인들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팔레스타인 땅의 52% 지역에 유대 국가를 세우고 나머지 48%에는 아랍 국가를 수립한다는 분리된 국가건설 방안을 제시했다. 유대민족으로서는 2,000년 만에 ‘약속의 땅’에 돌아온 것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교도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셈이 됐다. 그 뒤 이 땅을 두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4차례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으로 점령한 요르단 강 서안과 가지 지구 등에 유사시에는 ‘전진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 왔다. 유대인들은 키부츠(집단농장)로 상징되는 개척자로서의 이스라엘이란 이미지를 버리고 홀로코스트를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은 점령지 전부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정착촌을 자신의 관할 하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아모스 오즈의 소설을 읽으려면 이스라엘 건국 역사를 먼저 이해해두는 것이 좋다. 아모스 오즈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삼거나 제4차 중동전쟁 후 이스라엘 사회 모습 등을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해왔다. 이스라엘 역사를 파악하지 않고, 오즈(Oz)의 ‘문학’ 나라로 들어가면 독서의 여정이 순탄치 않게 된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를 펼치는 순간, 독일군을 피해 도망치는 주인공을 만난다. 엘리샤 포메란스는 수학을 가르치는 유대인 교사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소설이 디아스포라(유랑)를 계속하는 유대인의 여정을 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엘리샤의 아내 스테파도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엘리샤는 생사가 걸린 유랑을 선택한 남편과 반대로 자신의 집에 끝까지 남는다. 그녀의 첫 등장 또한 예사롭지 않다. 집밖에 울려 퍼지는 독일군의 총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예 전쟁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녀의 이력도 독특하다. 철학자 하이데거와 텔레파시로 의견을 주고받은 적 있으며 괴테 학회 회원이기도 하다. 뒤숭숭한 상황 속에서도 스테파는 집에 있는 모든 창문을 닫은 채 너무나도 평온하게 지낸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교수를 자신의 집에 불러들여 함께 살기도 한다. 그녀는 남편과 다른 행보를 보인다.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고 건너나 비밀 첩보원의 수장이 된다.
서경식 《시의 힘》 (현암사, 2015)
엘리샤와 스페타는 전쟁에 직면하는 유대인(혹은 유대인 출신 지식인)의 상반된 태도를 상징한다. 이들의 모습을 서경식 선생이 표현한 ‘동심원의 패러독스’로 설명할 수 있다. 전쟁의 중심부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그곳 비극의 진실을 상상할 수도 없고,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면 전쟁의 중심부에 가까이 있을수록 인간은 공포를 느끼는가. 서경식 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비극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런 구조가 장기화하면 비인간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인식이 형성된다.
엘리샤는 전쟁의 중심부를 벗어나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수학, 특히 무한을 주제로 하는 연구에 몰두한 끝에 누구도 풀지 못한 수학의 난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또 음악을 멜로디가 있는 수학으로 본다. 그러면서 음악이 난폭함을 없애고, 조화로운 세계를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를 번역한 정영문 작가는 엘리샤가 믿는 음악의 힘이 스테파와의 극적인 재회로 이끌게 하는 화해의 힘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엘리샤가 수학과 음악 연구에 매달리는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지고,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정영문의 해석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겠다. 피난길 도중에 엘리샤가 자신의 하모니카 연주에 흠뻑 취하는 장면은 생사 벼랑으로 내몰리는 전쟁 피란민의 현실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한 감이 있다.
독일군의 사냥이 가까이서 이루어질 때면 그는 하루 종일 황량한 마을 외곽에 있는 헛간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해가 지면 은신처를 떠나 어둠 속에서 여윈 몸을 꼿꼿이 세운 채로 서서 완전히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드럽게 하모니카를 불었다. 폴란드의 공기는 그 즉시 음악에 젖어들었다. 포메란스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땅을 손으로 때리며 힘을 가다듬고 트림을 했다. 그는 땀을 흘리며 팔꿈치를 자신의 주위에 내보낸 음악에 기댔다. (중략) 그는 몸을 일으켜 어두운 하늘 위로 떠올랐다. 애를 쓰다 지쳐 축 늘어진 그의 몸은 숲과 초지 위로, 교회와 오두막과 들판 위로 높게 그리고 조용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장애를 뛰어넘었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 중에서, 16~17쪽)
엘리샤는 디아스포라의 비극에 휘말린 피해자이면서도 가혹한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수학과 음악 세계에 탐닉한다. 디아스포라의 운명이라는 해일에 맞서려는 고민의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전쟁으로 인해 비극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디아스포라 문제를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독일군 공습에 도망가지 않고, 자기 집에서 머무르는 스테파의 모습은 위험한 지역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전쟁의 비극을 외면하는 소극적 자세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도 행복하게 살지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들의 이야기가 더 진행된다면 작가는 이들의 모습을 또 어떻게 그릴 것인지 궁금하다. 과연 음악의 힘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적대적 갈등을 잠재우고 평화를 염원하는 하나의 소통 창구가 될 수 있을까.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 점점 커지고 있는 중동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동화 같은 소설이 중동 분쟁의 희생자들에게 거짓 위로를 주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