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읽은 소설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이다. 민음사의 새 번역본이 나오기 한창 전에 읽었으니 당연히 내가 읽은 번역본은 문학세계사 판이다. 문학세계사 번역본이냐 민음사 번역본이냐,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서 세대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은 문학세계사 번역본의 ‘상실의 시대’를 읽은 기억이 있을 것이며, 젊은 사람들은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을 것이다. 솔직히 민음사 번역본이 새로 나왔을 때 ‘노르웨이의 숲’이 원제임에도 무척 낯설었다. ‘상실의 시대’가 더 친숙하게 느껴진 탓이리라. 이웃의 블로그를 접속하면 하루키 소설에 관한 서평을 많이 볼 수 있다. 하루키의 소설을 안 읽어서 댓글로 남기고 싶은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다. 이제는 《노르웨이의 숲》 줄거리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져 간다. 그렇지만 《상실의 시대》와 관련된 이상야릇한 비화만큼은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
군 복무 시절 같이 지냈던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하나둘씩 잊혀도 그때 읽었던 《상실의 시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입대했을 때부터 군인들이 머무는 방의 명칭인 ‘내무실’이 ‘생활관’으로 변경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생활관에는 세 칸짜리 책꽂이가 있고, 책장 절반은 국방부가 지정한 ‘진중문고’로 채워져 있었다. 딱히 읽을 만한 책이 눈에 띄지 않아서 고심 끝에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되었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땐 지루했지만, 책 중반부에 이를수록 이야기에 점점 몰입되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느낀 독서의 몰입은 오랫동안 가지 못했다. 책 중간에 있는 2~3쪽의 책장이 뜯긴 채 사라졌다. 책의 낙장이 한 곳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네다섯 군데 낙장의 흔적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낙장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라지고 없는 책장에 나오게 될 장면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에서야 그 장이 사라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선임이 《상실의 시대》를 읽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 책 재미있냐?’고 물어봤다. 내가 크게 재미있진 않지만, 시간 때우기에 적합한 책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임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네가 좀 더 일찍 입대했으면 《상실의 시대》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거야.” 나는 선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선임은 《상실의 시대》 중간에 뜯긴 부분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있다고 대답하자 선임은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선임을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선임 XX가 미쳤나?’ 좀 더 자세히 선임의 말을 듣고 보니 선임이 했던 말과 웃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아직 자대 배치를 받지 않았던 시절, 선임도 《상실의 시대》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뜯긴 부분이 없는 좋은 상태였다고 한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군인들이 많아서 《상실의 시대》는 생활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책이었다. 그러다가 한 달이 지난 뒤에 《상실의 시대》 중간에 뜯긴 사실을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군 선임들은 책의 낙장 사실에 당황했다. 왜냐하면, 하필 뜯겨 나간 책장에 야한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임들은 이 중요한(?) 장면만 뜯은 범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상실의 시대》를 읽은 사람들이 범인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누구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처음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낙장 흔적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상실의 시대》를 한 번이라도 읽은 군인이 워낙 많아서 범인을 찾기가 불가능했다. 선임이 과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상실의 시대》는 야한 소설이라서 군대에 반입돼선 안 되는 책이라고.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책의 야한 장면만 뜯은 범인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군대 같은 폐쇄적인 장소를 생활하다 보면 군인은 성적 욕구를 풀 수 없는 방법이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군인들이 군대 반입 금지 물품에 포함된 ‘맥심’ 같은 남성 잡지를 휴가 나오는 후임에게 사오라고 부탁하는 이유가 있다. 여성이 나오는 사진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성적 욕구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간혹 남성 잡지가 화장실 변기 위에 놓일 때가 있다. 아마도 누군가가 《상실의 시대》를 읽다가 그 얼마 안 되는 성행위 묘사를 보자마자 성적 흥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묘사가 있는 부분만 뜯어서 야심한 밤에 혼자 몰래 읽었을 수도 있다. 어떤 선임은 낙장의 범인이 군 간부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간부 중에 누군가는 《상실의 시대》가 어떤 책인지 알았고, 병사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야한 장면이 있는 부분을 뜯었다고 본다. 아무튼, 이상한 낙장 사건 이후로 《상실의 시대》를 읽는 사람이 팍 줄어들었다고 한다. 《상실의 시대》보다 재미있는 책이 많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야한 장면이 없는 소설이 재미없던 것일까.
소설가 겸 PD 이재익은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야한 소설’로 소개한 적이 있다. 특히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정사 장면은 자신이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야한 장면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최재봉 한겨레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하루키의 소설들은 ‘몽환적 에로티시즘’을 구현하고 있다. 사실, 작년에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적 색채에 어울리는 상을 받을뻔 했다. 그 상은 바로 ‘Bad Sex Fiction Award’, 일명 ‘배드 섹스 상’이다.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잡지인 리터러리 리뷰(Literary Review)는 문학 작품 속에 불필요하게 묘사된 성 묘사를 자제하기 위해서 1993년부터 배드 섹스 상을 수여하고 있다. 과도하게 성 묘사가 많은 소설을 쓴 작가가 이 상을 받는다. 단, E.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같은 노골적인 포르노 작품은 심사 대상에서 제외된다. 수상자 발표는 연말에 한다. 작년에 벤 오크리의 <The Age of Magic> (2014년 작)이 선정되었다. 오크리와 함께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 중에 하루키도 포함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 전날에 배드 섹스 상 수상자가 발표된다면, 문학상의 ‘골든 라즈베리’(아카데미 시상식 전날에 열리는, ‘최악의 영화’를 선정하는 시상식)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도 예외일 수 없다. (오크리도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자로 새로 거론되는 작가다) 맨 부커상,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들도 배드 섹스 상 최종 후보에 오르거나 (재수가 없으면) 수상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배드 섹스 상을 받은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1993년 : 멜빈 브래그 《A Time to Dance》
1994년 : 필립 후크 《The Stonebreakers》
1995년 : 필립 커 《Gridiron》
1996년 : David Huggins 《The Big Kiss: An Arcade Mystery》
1997년 : Nicholas Royle 《The Matter of the Heart》
1998년 : 시배스천 폭스 《Charlotte Gray》
1999년 : A. A. Gill 《Starcrossed》
2000년 : 션 토머스 《Kissing England》
2001년 : Christopher Hart 《Rescue Me》
2002년 : Wendy Perriam 《Tread Softly》
2003년 : Aniruddha Bahal 《Bunker 13》
2004년 : 톰 울프 《I Am Charlotte Simmons》
2005년 : Giles Coren 《Winkler》
2006년 : Iain Hollingshead 《Twenty Something》
2007년 : 노먼 킹슬러 메일러 《숲 속의 성》
2008년 : Rachel Johnson 《Shire Hell》
※ 공로상 : 존 업다이크
2009년 : Jonathan Littell 《The Kindly Ones》
2010년 : Rowan Somerville 《The Shape of Her》
2011년 : David Guterson 《Ed King》
2012년 : 낸시 휴스턴 《Infrared》
2013년 : Manil Suri 《The City of Devi》
2014년 : 벤 오크리 《The Age of Magic》
※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은 원서 제목을 그대로 썼다. 배드 섹스 상 수상작을 제외한 작품 번역본이 있는 작가는 한글로, 국내 번역본이 단 한 개도 없는 작가는 원어로 표기했다.
배드 섹스 수상 작품 중에 유일하게 번역된 것이 노먼 메일러의 《숲 속의 성》(뿔, 2007)이다. 존 업다이크는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에 공로상을 받았다. 업다이크의 소설은 농도 짙은 에로티시즘 묘사로 유명하다. 특히 1968년 작 ‘Couples’(1994년에 ‘커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은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짜릿한 소설 베스트 10’(Top 10 Racy Novels)에 포함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배드 섹스 상은 업다이크가 생전에 받은 마지막 상이 되었다. (업다이크는 2009년 1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런 상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작가들은 입에 부르기도 민망한 이 상을 영원히 받고 싶지 않을 테지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배드 섹스 상 때문에 야한 장면이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 책의 정체가 궁금한 사람들이 많아질 수 있다. 그러면 배드 섹스 상의 취지가 어긋나게 된다. 성 묘사가 있는 부분만 골라 읽는다거나 무척 좋아한 나머지 그 부분만 뜯는 별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전자는 이해해줄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책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사람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특정 여성 연예인이 좋다고 해서 그 연예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만 자르고 사라지는 얌체 독자와 같은 몰상식한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