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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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는 조선시대 도망간 노비와 이를 쫓는 추노꾼의 삶을 다룬 사극 드라마이다. 『추노』의 첫 화가 방영되자마자 시청자들은 주인공 이대길(장혁 분)에게 ‘대길 언니’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남자를 ‘형’이 아닌 ‘언니’라고 부르다니.『추노』를 안 본 사람은 별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드라마에서 남자들끼리 서로를 ‘언니’라고 부른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가진 남자가 형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장면이 신선하다. 조선 시대 ‘언니’는 절친한 관계에서 쓰인 호칭이다. 그래서 동성의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끼리도 ‘언니’라고 부르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형(兄)’의 순우리말이 ‘언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가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면 이곳은 천국이겠지. 우리 마음속의 성차별이 없어지고 얼마나 화목해질까?[1] 나는 벨 훅스(Bell Hooks)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언니’를 호출하고 싶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언니’는 자매로서의 언니가 아니다. 남녀 구분 없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고, 좀 더 가까운 사이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러므로 ‘언니’ 호칭을 듣는 대상에 남성이 포함된다. 여기에 착안하여 나는 ‘언니들의 페미니즘’에 남성도 참여할 수 있다는 과감한 생각마저 하게 됐다. 내게 생각할 용기를 불어넣어준 훅스 언니가 고맙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의 혁명파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제의 뿌리를 완전히 캐내어 버릴 기세로 등장했다. 그들은 ‘자매애는 강력하다(sister is powerful)’라는 문구를 내세워 남성들과 연대한 정치적 투쟁보다 여성들의 자매애를 부각했다. 벨 훅스는 이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했다. 페미니즘은 여성 문제를 남녀 간의 대립갈등과 투쟁의 문제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벨 훅스가 아주 간단하게 정의한 대로 페미니즘이란 남성 자체가 아닌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가 만들어 낸 오랜 착취와 억압을 명확하게 바라보고, 이를 종식하기 위해 싸우는 운동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페미니스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남성은 계속 늘어만 갔다. 게다가 자매애를 기반을 둔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점점 미미해졌다. 계급권력을 가진 백인 중산층 여성들은 여성 공동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백인 여성 중심의 페미니즘은 백인 남성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받는 흑인 또는 유색 인종 여성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잘 나가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의 힘을 약화한 것이다.

 

벨 훅스는 인종 및 계급을 뛰어넘어 모든 여성, 그리고 페미니즘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남성 모두 이해할 수 있는 페미니즘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가부장제의 억압을 받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은 부당한 체험을 주고받으며 자매애를 형성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의 대화는 조직적으로 형성된 강력한 목소리다. 그렇다면 남성도 남성 중심 사회를 거부하고, 여성운동의 주체가 되어 힘껏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나는 벨 훅스의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문제에 진지하게 고민했다. 심지어 가끔 나 자신이 페미니즘의 기본 정신에 부합하는 일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의심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키보드 페미니스트(keyboard feminist)’였다. 인터넷상에서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게시물을 작성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했지만, 오프라인상에서는 논란이 많은 성차별 문제(예를 들면 군 복무 가산점 제도 부활)를 만나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얼치기 페미니스트’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안 좋은 소리를 듣더라도 남성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남성들로부터 냉소적인 반응을 받아도,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해도 여성이 겪는 부당한 차별과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한다. 그러려면 여성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서 자신의 성차별주의적 시선을 확인할 수 있는 ‘의식화 과정’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벨 훅스는 ‘의식화 모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의식화 모임에 참석하려면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모임 참석자들은 발언 기회가 주어진다. 그다음에 토론과 논쟁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참석자는 거리낌 없는 대화를 통해 살면서 보지 못했던 성차별 의식, 즉 벨 훅스가 비유한 ‘내면의 적’을 발견하게 된다. 벨 훅스는 대중적인 페미니즘 운동을 만들기 위해 여성들을 조직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식화 모임의 방침이 ‘모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성도 모집할 수 있다.

 

나는 ‘자매애는 강력하다’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구호는 가부장제의 힘에 억눌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소극적인 여성들을 동참하게 하는 매력적인 문장이다. 그렇지만, 남성의 참여를 배제한 자매애는 남성을 여성 운동에 동참하는 방향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형의 순우리말 ‘언니’와 ‘언니들의 페미니즘’과의 조화를 시도하고 싶었다. 소년과 남성을 끌어들일 수 있는 페미니즘이라면 자매 형제애(siblinghood)도 강력해질 수 있다. 내 생각, 또는 자매 형제애의 의미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을 거로 확신한다. 물론 자매 형제애도 한계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부 남성은 페미니즘을 ‘성공적인 연애와 결혼을 하기 위한 교양’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가짜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처한 상황과 고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여성운동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이다. 여성이 자신의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도 바꿔내지도 못한 채 페미니즘 정치의 기치를 내건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끝내 소멸해버릴 것이다. (45쪽)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이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남성 내부의 적, 바로 성차별주의 사고와 행동에 스스로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말할 수 있는 적’에 대한 침묵은 페미니즘 운동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여성과 함께 성차별 문제를 공유하고, 경험하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아져야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가능해진다. 형, 아니 언니들, 함께 합시다! 다음 후손들이 ‘여자 대 남자’ 대결 구도로 싸우지 않도록.

 

 

 

[1]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면 이곳은 천국이겠지. 우리 마음속의 욕심도 없어지고 얼마나 화목해질까.” (진영이 부른 번안곡 ‘모두가 천사라면’ 노랫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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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16 21:08   좋아요 2 | URL
노예가 노예를 잡아야하는 세상. 실감나지 않지만, 정말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아야하는 사람들은 사는 게 지옥처럼 느꼈을 겁니다.

stella.K 2017-05-16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 맞어. 추노에서 언니라고 불렀던 기억나.
그 사실이 좀 놀랍긴 하더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금성과 화성의 길이 만큼이나 남성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요원할 수 있어.
하지만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봐.

cyrus 2017-05-16 21:12   좋아요 2 | URL
존 그레이의 ‘화성남자 금성여자‘가 이분법적 성차를 강화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남성이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주 당연한 일인데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깊이 고민해봐야겠어요. ^^

2017-05-16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16 21:14   좋아요 2 | URL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레디컬 페미니즘의 한계를 명확히 짚어낸 책입니다. ***님이 밝히신 생각들 모두 이 책 속에 있습니다. ^^

AgalmA 2017-05-16 2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 정체성으로 한 인간의 모든 취향과 판단을 몰아넣고 시합을 하는 듯한 대결이 늘 눈살 찌푸려지는 풍경입니다. 그러니 이해가 더 안 되는 동성애에서는 더 가관...
사회 속 맥락을 읽고 해석하는 훈련은 성 문제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cyrus 2017-05-16 22:23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일수록 성차별이 심해지고, 불필요한 성 대결 양상이 생깁니다.

마립간 2017-05-17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별점을 5개 준 책인데, cyrus 님은 별 4개를 주셨네요.

cyrus 2017-05-17 14:31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도서에 별점 다섯 개는 없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 이론에 장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이론이 대세라고 해서 그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계가 있을 거고,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그 한계를 뛰어넘을 이론을 만듭니다.

니페딘1T 2017-05-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관련해서 남자가 읽어볼 만한 책좀 추천해 주심 안될까요? ㅠㅠ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어봤는데 공감이 잘 안되네요. 읽다가 포기했습니다.

이 책은 좀 나을까요?

cyrus 2017-05-27 18:53   좋아요 0 | URL
제일 어려운 일이 책을 상대방에게 추천하는 일입니다. 웬만하면 책을 추천하지 않아요. 그래도 남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페미니즘 책으로 <맨 박스>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권하고 싶어요. 내용이 어렵지 않습니다.

니페딘1T 2017-06-09 10:26   좋아요 0 | URL
오굿!!!! 감사합니다. 페미니즘...다시 도전해 봐야겠네요.

맨박스.... 오오.. 땡깁니다. 남자가 쓴 페미니즘 책이라 ㅎㅎㅎ 개다가 흑인!!! 이야, 땡기네요.
 

 

 

집에 창고가 된 방 하나가 있다. 거기에 어렸을 때 읽은 책이 보관되어 있다. 오랜만에 창고를 정리할 겸 창고 구석에 숨어있는 옛날 책들을 꺼내봤다. 책들을 창고 밖으로 완전히 끄집어내기까지 8년이라는 세월이 후딱 지나 가버렸다. 이 책들을 마지막으로 읽은 해가 2002년, 15년 전이다.

 

 

 

 

 

 

 

 

 

 

 

 

 

 

 

 

 

 

 

 

 

 

 

 

 

 

 

 

 

 

 

 

 

 

 

 

 

 

 

 

 

 

 

 

 

 

 

 

 

 

 

 

 

 

 

 

 

 

 

 

* 《셜록 홈즈의 모험》 (동서미스터리북스 2, 역자 : 조용만, 조민영)

* 《주홍색 연구》 (동서미스터리북스 15, 역자 : 김병걸)

* 《바스커빌의 개》 (동서미스터리북스 22, 역자 :진용우)

* 《셜록 홈즈의 회상》 (동서미스터리북스 43, 역자 : 조용만, 조민영)

* 《셜록 홈즈의 귀환》 (동서미스터리북스 53, 역자 : 조용만, 조민영)

*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 (동서미스터리북스 117, 역자 : 조용만, 조민영)

* 《셜록 홈즈 사건집》 (동서미스터리북스 131, 역자 : 조용만, 조민영)

 

 

※ 《주홍색 연구》에 ‘네 사람의 서명’ 수록,

《바스커빌의 개》에 ‘공포의 계곡’ 수록

 

 

 

내가 창고에서 찾으려고 했던 ‘옛날 책’이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셜록 홈스(Sherlock Holmes)’ 시리즈였다. 초등학생 때 엄청 많이 읽었던 책이 바로 ‘셜록 홈스’ 시리즈다. 셜록 홈스. 너무나도 유명한 이름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 책을 안 읽는 사람들도 홈스가 누군지 다 안다. 이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홈스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2, 30년 전만 해도 홈스는 소설 속 ‘사기캐(만화 또는 게임 등에서 다른 캐릭터보다 아주 강력한 캐릭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사기 캐릭터’의 준말-글쓴이 주)’ 주인공, 또는 ‘세기의 명탐정’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영화에서 훈훈한 비주얼로 사건 현장에 뛰어드는 멋진 명탐정으로 등장할지 누가 알았으랴. 사실 원작의 홈스는 괴팍하기 짝이 없다. 원작의 홈스는 잘생김과 거리가 멀다. 키가 멀대같이 크고 비쩍 마른 체형이다. 늘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사건이 없는 날에는 코카인이나 모르핀 주사를 팔뚝에 찌른다. 알다시피 홈스는 사건 해결에 힘을 쏟기 위해 감정에만 치우치는 상황을 싫어하며, 가끔은 여성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독선적인 발언을 한다. 그래도 어렸을 땐 사건을 척척 해결해나가는 홈스가 멋있어 보였다. 그의 단점은 내 눈에 확 들어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완역본을 읽고 나서야 홈스의 어두운 실체를 알게 되었다.

 

 

 

 

 

홈스가 나오는 소설을 좋아해서 수업 시간이 끝나자마자 초등학교 도서실에 가서 홈스 시리즈를 읽었다.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학교 도서실에 있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이때부터 ‘혼자 놀기’의 재미를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도서실에 있는 홈스 시리즈는 동서문화사의 ‘지능훈련 뤼뺑이냐 홈즈냐’ 시리즈 일부였다. ‘뤼뺑’은 프랑스의 모리스 르블랑(Maurice Leblanc)이 탄생시킨 ‘괴도 아르센 뤼팽(Arsène Lupin)’이다. 동서문화사는 뤼팽과 홈스 시리즈를 모두 모아 ‘지능훈련 뤼뺑이냐 홈즈냐’라는 이름을 달아 펴낸 적이 있다. 비록 문장이 썩 매끄럽지 않은 중역이라서 읽기 힘들었지만, 그땐 홈스가 무조건 나오는 이야기라면 전부 좋아했다.

 

도서실의 학생 사서로 활동한 덕분에 오래된 ‘홈스 시리즈’ 일부를 소유할 수 있었다. 학교 졸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학교 도서관의 모든 책을 재정리하는 일을 했다. 새로 들어온 책에 십진분류법 스티커를 붙이고, 낡고 오래된 책들은 폐품으로 처리하기 위해 따로 분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버려야 할 책이 아주 많았다. ‘뤼뺑이냐 홈즈냐’ 시리즈의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어떤 책은 너덜너덜해져 다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도서실 담당 선생님은 ‘폐품’으로 분류된 책 중에 읽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져가도 된다고 특별히 허락해주셨다. 나는 운 좋게 평소 즐겨 읽던 홈스와 뤼팽 시리즈를 챙겨왔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홈스를 좋아하는 학생이 여러 명 더 있었다. 결국 ‘홈스 편’ 모두 획득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지능훈련 뤼뺑이냐 홈즈냐’ 시리즈는 여러 명 학생의 손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집에 있는 홈스 시리즈(이 책은 나중에 따로 소개하겠다)에 없는 작품이 수록된 책만 골랐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지능훈련 뤼뺑이냐 홈즈냐’ 시리즈의 ‘홈스 편’은 6권에 불과하다. 그때도 홈스에 대한 인기가 워낙 높아서 ‘뤼팽 편’에 관심을 가지는 친구들이 없었다. 아무리 뤼팽이 약한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고, 절대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나름 정의로운 도둑이라고 해도 아이들 입장에서는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탐정 역할에 더 끌리기 마련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폐품처리장에 소각될 뻔한 ‘뤼팽 편’도 챙겼다. 어머니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책들을 가지고 왔다면서 등짝 스매싱을 여러 차례 날리면서 화를 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옛날 책들을 잘 챙겨왔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 책들을 구하기 힘들다.

 

 

 

 

 

 

 

 

 

 

표지 그림을 퍼즐 조각 형태로 그린 시도는 신선하다. 모든 책의 앞표지에 항상 ‘조각 두 개가 빠진 자리’가 있다. 그 자리에 ‘물음표’ 표시가 있다. 나는 ‘뤼뺑이냐 홈즈냐’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이 ‘물음표’가 어디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이 순간 벌써 짜릿해진다. 이야기에 몰입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심적 반응이다.

 

 

 

 

 

 

 

홈스 시리즈의 4대 장편이 《진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 《네 개의 서명(The Sign of the Four)》, 《배스커빌 가의 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공포의 계곡(The Valley of Fear)》이다.

 

 

 

 

 

 

《진홍색 연구》는 홈스와 왓슨(Watson)이 처음 만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당연히 홈스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동서문화사는 처음 이 작품의 제목을 ‘빨강글자 수수께끼’로 정했다. 요즘 나오는 홈스 시리즈 번역본은 원제를 그대로 따르는 편이다. 동서문화사도 홈스 시리즈를 ‘동서미스터리북스’로 재출간했을 때 원제와 거의 비슷한 제목을 새로 붙였다. 옛날 80년대 홈스 시리즈 번역본 중에는 ‘원제 파괴’에 가까운 이름이 많았다. 옛날 번역본의 제목과 요즘 번역본의 제목을 비교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삽화 상태가 썩 좋지 않다. 안 그래도 오래된 책인데 세월을 점점 먹을수록 종이뿐만 아니라 삽화 상태도 나빠진다. 선과 형태가 뚜렷하게 남은 온전한 상태의 삽화가 많지 않다. 게다가 이 삽화를 제작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다. 원서의 다른 삽화를 그대로 가져온 걸까,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이 직접 만든 것일까? 삽화 속 인물의 형태가 제각각 다르다. 한 사람이 다 그린 것 같지 않다. 여러 사람이 따로 삽화를 그렸을 거로 보인다. 다행히 동서미스터리문고 번역본의 삽화는 원작에 실린 삽화다.

 

 

 

 

 

 

 

 

 

 

 

 

 

 

 

 

 

 

이 번역본에는 홈스 시리즈 이외에 코난 도일이 쓴 다른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홈스 빠돌이’였던 나는 홈스가 나오지 않는 작품은 읽지 않았다. 그때는 그 작품이 코난 도일이 쓴 건 줄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홈즈가 나오지 않는 소설에 대한 역자의 설명이 단 한 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 개의 서명》에 수록된 『사라진 열차』의 원제는 ‘The Story of the Lost Special’이다. 도일이 홈스 시리즈 집필을 중단한 뒤에 발표한 소설이다. 다행히 이 소설은 지금도 읽을 수 있다.《아서 코난 도일, 미스터리 걸작선》(국일미디어, 2003)과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비채, 2011)에 수록되어 있다.

 

 

 

 

 

 

 

 

 

 

 

 

 

 

 

 

 

 

《춤추는 인형》 마지막에 있는 이야기 역시 홈스가 나오지 않는 작품이다. 제목이 『새서서 골짜기 유령』(The Mystery of the Sasassa Valley)이다. 도일이 1879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도일은 의사 일을 하면서 쉬는 시간에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나온 첫 결과물이 바로 『새서서 골짜기 유령』이다. 도일이 정식으로 발표한 첫 작품이다. 도일의 초기 작품으로 알려진 『북극성호의 선장』과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은 각각 1883년, 1884년에 발표되었다.

 

이 책의 마무리는 추리 퀴즈였다. 시리즈 제목에 생뚱맞게 ‘지능 훈련’이 붙여진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어린 나는 추리소설을 열심히 읽으면 추리력이 부쩍 늘어날 거로 믿었다. 정말 초딩스러운 발상이다.

 

 

 

 

 

 

 

 

 

 

 

 

 

 

 

 

 

 

 

‘지능훈련 시리즈’의 ‘홈스 편’은 소설가 조용만 씨(1909~1995)와 이화여대 영문과에 졸업한 사실만 알려진 조민영 씨가 공동으로 번역했다. ‘뤼팽 편’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추리작가협회 회장을 지낸 이가형 씨(1921~2001)가 번역했다. 동서미스터리북스에 포함된 홈스와 뤼팽 시리즈의 역자도 똑같이 이 세 사람이다. 동서문화사는 변함없이 ‘중역’을 고집하고, 이미 고인이 된 역자의 이름만 올리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유령 역자’ 이름을 내세우기도 한다. 이런 출판사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

 

 

 

 

 

 

 

 

나는 ‘조민영 씨’가 누군지 궁금하다. ‘지능훈련 시리즈’에서 조민영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고만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조용만 씨의 출생연도(1909년)를 밝힌 것과 대조적으로 조민영 씨의 출생연도는 언급되지 않았다. 조민영 씨의 소개가 왜 이리 빈약해 보일까? 동서미스터리문고로 나온 홈스 시리즈 역시 이전 번역본의 역자 소개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조민영 씨의 ‘옮긴 책’이 ‘코난 도일 셜록 홈즈 시리즈’가 유일한데,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지능훈련 시리즈’로 보인다. 이것만 봐도 조민영 씨가 실존 인물인지 의심이 든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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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5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5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5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6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7-05-16 0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홈즈보다 뤼팽을 더 좋아했어요. 아마도 뤼팽이 더 낭만적으로 느껴서인것같은데, 베니 덕분에 홈즈가 쪼금 좋아지려해요.^^

옛날책들을보니 신기하고 재미있는데, 다시 한번 더 cyrus님의 책사랑이 느껴집니다.

cyrus 2017-05-16 10:02   좋아요 1 | URL
홈즈 정주행 독서가 마무리되면, 뤼팽 시리즈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

보슬비 2017-05-17 00:06   좋아요 1 | URL
아마도 저는 로맨스가 있어서 좋아했던것 같아요. 홈즈는 남성적이라면 뤼팽은 여성적인것 같아요.^^ 홈즈를 좋아하신다면 뤼팽은 가볍다고 생각하실지도...^^

양손잡이 2017-05-16 2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읽기의 즐거움을 뤼팽에서 느꼈습니다! ㅎㅎ 저도 홈즈보단 뤼팽~!

cyrus 2017-05-16 21:15   좋아요 0 | URL
얼른 뤼팽 전집을 읽고 싶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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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한반도의 키를 맡길 사람을 선택해야 할 시기가 왔다. 정치판의 승자와 패자는 선거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 상대방에게 더 큰 손해를 끼칠 수 있다면,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경쟁 구도이다. 본능적으로 상생의 질서보다는 상극의 구도를 더 선호하는 게임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역주의와 사상적 대립, 세대 간 갈등이라는 현실에 부딪히고 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후보 지지자들 간에 사회적 · 이념적 갈등까지 확대 증폭되는 정도다. 선거 이후에도 두고두고 정치 · 경제 · 사회 각 분야에 걸쳐 갈등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특정 대선 후보자의 지지 세력은 이념적 · 정책적 순수성을 추구하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지도자를 잘못 선택함으로써 강력한 이념적 지지그룹의 활동을 암묵적으로 방조 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이들의 활동 영역이 점점 커질수록 정치적 · 이념적 틈새가 갈수록 넓혀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게 된다. 틈새에 피어난 '검은 꽃'에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는 힘을 발산한다. 그 검은 꽃이 바로 ‘갈등’이다. ‘갈등’이라는 검은 꽃은 사회 곳곳마다 군집 형태로 자라고 있다.

 

이 불쾌한 꽃들을 모조리 확 꺾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검은 꽃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만 없다. 신영복 선생의 말대로 ‘아픔을 외면하기보다는 일단 직시하고 나서 새로 시작하는 것’[1]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어떤 독자는 선생의 문장을 보면 볼수록 약간 짜증이 난다고 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외세의 침략에 무기력했던 뼈아픈 과거의 역사-를 언급한 선생의 글에 다소 비극적이고 비관적인 분위기를 감지했다. 살아생전에 선생도 이 점에 공감했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 또한 보기 나름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픔을 직시한 선생의 글에도 긍정적 측면이 있다. 선생의 글에 선험자의 깊은 성찰과 반성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희망의 근거가 된다. 선생의 글을 비판한 독자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본 사람일 수 있다. 그 독자처럼 비극적 인식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다. 일상이라는 핑계로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고, 급기야 다 같이 보듬어야 할 아픔의 눈물을 혐오하도록 강권하는 그들의 새까만 심장 한가운데에 ‘검은 꽃’의 뿌리가 깊게 자리 잡혀 있다. 그들은 ‘평화로운 사회’를 조성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의 신념 혹은 편견에 충실한 나머지 상대방의 생각과 의견을 멋대로 재단한다. 그들의 위협적인 가위질은 권력의 이름을 빌린 무자비한 ‘검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은 꽃 애호가들이 지지하고, 그들을 암묵적으로 두둔하는 권력자는 우리가 투표로 뽑은 것이다.

 

우리는 왜 이런 뼈아픈 반복을 겪게 되는 걸까. 그 이유가 새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개개인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끌어올린 능력들이 적법한 절차에 의해 상호 조정되면서 사회전체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성 없는 이상론'에 불과할 뿐 한국사회에서 이것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확신한 나머지 이상론에 매달렸다. 대선 후보자들은 ‘민주주의’를 거론하며 구체성이 결여된 야심만만한 이상론을 내세웠다.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촛불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후보라고 주장한다. 20대의 청년 신영복은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이상주의적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어설픈 결합을 긍정하는 이상론을 경계했다. 그가 학자가 되어서도 이상주의적 사고방식을 늘 경계했다.

 

민주주의를 긍정하는가. 더구나 그것의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긍정하겠는가? 이 양자의 결합을 승인하는 것은 자본의 무제한한 횡포를 승인하는 게다. 자본측근자(資本側近子)를 제왕(帝王)으로 모시는 것이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141쪽)

 

자본측근자는 대중의 표를 얻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옷을 잠깐 입힌 ‘포퓰리즘(populism)’을 내세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어설픈 결합이 포퓰리즘을 만들어 사회를 퇴보시킨다. 포퓰리즘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국민은 우민화되어 사회를 주체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변혁 역량이 줄어든다.

 

단순한 이익집단 간의 갈등이 아니라 국가적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실천의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 능력이 우리 삶을 침투하지 못하다 보니 이해관계자 간의 타협이 논리와 관용 그리고 인내에 입각한 연대 과정에서 벗어나고 있다. 연대감이 사라진 사회에서 사회구성원들은 최대한 강경한 자세로 자신의 전략적 위치를 확보한다. 이 과정에서는 민주적인 합리적인 조정절차는 무시되며, 힘 있는 소수에 의해 다수가 볼모로 잡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힘 있는 소수는 ‘승리자’가 된다. 선생은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모호한 모두가 ‘더불어 이기는 강한 승리자’[2]가 되라고 당부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밝힌 선생의 당부가 이상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더불어 이기는 강한 승리자’는 사회 변혁을 위한 이론에 주목하는 동시에 실천을 병행한다. 누구나 혼자서 ‘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외로운 패배자’가 된다. ‘더불어 이기는 강한 승리자’가 되려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선생이 자주 강조했던 ‘하방연대(下方連帶)’의 정신이다. 물이 자연스럽게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우리는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손을 잡아야 한다. 낮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놀랍게도 작년에 우리는 촛불의 힘으로 ‘하방연대’를 이루어냈다. 성별과 나이 구분 없이 사람들이 광화문에 거대한 촛불을 만들어 그동안 청와대의 지붕에 가려졌던 권력의 폐단이 보이도록 훤히 밝혔다. 그 연대의 중심에는 세월호 사고 유가족들도 있었다. 선생이 지금도 살아계셨더라면 아주 멋진 광경을 보면서 흐뭇해하셨을 텐데.

 

이틀 뒤에 결정될 새로운 지도자가 임기 내내 ‘검은 꽃들’을 전부 꺾을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진보든 보수든 이념의 간격을 좁히는 일이 쉽지 않다. 지도자의 능력에만 의지할 수 없다. 지금부터가 ‘우리부터 잘해야 되는 시기’[3]이다. 우리가 갈등을 유발하는 ‘검은 꽃들’을 직접 꺾어야 한다. ‘검은 꽃들’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갈등’이 살아남지 않게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숲’을 가꾸어야 한다. ‘더불어 숲’을 조성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손과 마음에 묻은 흙먼지, 즉 상대방을 미워하게 하는 ‘갈등’의 앙금까지 말끔히 털어내야 한다. ‘갈등’의 앙금이 묻은 더러운 손으로 상대방의 손을 잡을 수 없다. 서로를 미워해선 안 된다. '너나 잘해', '너는 틀렸어'라는 말을 삼가해야 한다. 근본적인 반성과 차분한 성찰은 ‘더불어 숲’이 잘 자라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준비 기간이다. 5월 9일 이후부터가 지도자의 실전이라면, 우리는 사회를 탄탄하게 만들기 위한 실천에 임해야 한다. 정말로 우리부터 잘해야 되는 시기가 왔다. 이 시기마저 또 놓치게 된다면...

 

 

 

 

 

 

[1] 『수많은 현재, 미완의 역사 - 희망의 맥박을 짚으며』 (대담: 홍윤기, 1998년, 《손잡고 더불어》 145쪽)

 

[2] 『모든 변혁 운동의 뿌리는 그 사회의 모순 구조 속에 있다』 (대담: 정운영, 1992년, 《손잡고 더불어》 113쪽)

 

[3]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 줘요』 (대담: 이진순, 2015년, 《손잡고 더불어》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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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7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08 11:06   좋아요 1 | URL
차기 지도자가 야당 인물이 되어도 대구 어르신들의 새누리 ᆞ자유한국당 사랑은 여전할 겁니다.

겨울호랑이 2017-05-07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제가 선거에 나간 것도 아닌데 많이 긴장되네요.. ㅋ

cyrus 2017-05-08 11:09   좋아요 2 | URL
촛불을 들었던 분들의 마음도 겨울호랑이님과 같을 겁니다. 대선 투표는 늘 중요한 일이지만, 내일은 역대 대선 중 가장 중요한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향후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린 일이니까요. ^^

dellarosa 2017-05-07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과적으로 모두가 행복했으면 합니다. 불가능할까요 ?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가 미래에는 지금보다는 나은 사회가 되어 있으리라는 점입니다. ^^

cyrus 2017-05-08 11:19   좋아요 2 | URL
모두가 행복해하는 사회가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놓고 보면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적대적으로 대하고, 혐오하는 상황은 사회통합에 반하는 일입니다.

나비종 2017-05-07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빛은 매질을 경계로 굴절합니다. 있는 자리에서 어떤 매질을 향해 달려가느냐에 따라 꺾이는 방향이 달라진다죠.
결국 방향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낮은 곳,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도. 시선이,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 누구를 향하느냐에 대한 선택이니까요.
시험을 앞두고 D- 를 헤아리는 학생이 된 듯 긴장되네요, 저 역시.

cyrus 2017-05-08 11:22   좋아요 2 | URL
저는 우리 사회에 하상연대의 정신이 아직 살아있다고 믿습니다. 촛불 집회가 하상연대 정신이 만들어낸 변혁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내일 대구 투표 결과가 더 궁금합니다. ^^

transient-guest 2017-05-08 0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회적 갈등과 충돌은 당분간 피할 수 없겠지만, 잘 정리되어 미래로 가는 시작이 되었으면 합니다.

cyrus 2017-05-08 11:24   좋아요 1 | URL
내일 투표 결과가 나온 이후부터 험난한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생길 것 같습니다. 첫 단추를 잠그는 일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걸 막는 세력들의 견제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stella.K 2017-05-08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윤복 교수의 글이 그런데가 있었나?
오래 전 <더불어 숲>을 읽고 감동했었는데
그동안 한번쯤 더 읽어 보고 싶었는데
마음만 그렇다뿐 손도 못 대고 있었다.

촛불 집회 봐서라도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정신 바짝 차리고
잘 해 줬으면 좋겠다. 정신 못 차리고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딴주머니 차고하면 이건 단순히 국민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민족에 대한 반역이지.
지금이야 저리 눈에 불을 키고 대통령이 못되 안달을 내겠지만
되고 나서도 정말 잘할 건지 의문일뿐이다.

cyrus 2017-05-08 22:57   좋아요 0 | URL
《손잡고 더불어》는 신영복 교수의 생전 인터뷰한 내용들을 정리한 책이고요, 《냇물아 흘러흘러...》는 미발표 글이 있는 유고집입니다. 역시 신 교수의 책을 읽으면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납니다. ^^

저는 박근혜 싫어하던 사람들이 유승민이든 안철수든 누굴을 뽑아주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홍준표(혹은 조원진)를 믿고 뽑는 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일 대구 투표 결과 기대됩니다. 내일은 대구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는지 못 차렸는지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지구는 늘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더라도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지각은 계속 운동하고 있다. 지구 내부에 급격한 지각변동이 생기면 그 충격으로 지진이 일어난다. 지진의 원인 중 하나로 알려진 ‘판구조론’이다. 지각과 맨틀의 윗부분으로 이루어진 두께 100㎞ 정도의 판들이 움직임에 따라 그 위에 얹혀 있는 대륙도 이동한다. 또한, 판이 갈라지거나 충돌하는 곳에 새로운 바다가 만들어지거나 습곡 산맥이 생성된다. 여기서 판을 움직이는 힘의 유래를 설명하는 학설이 앨프레드 베게너(Alfred Wegener)가 제시한 ‘대륙이동설’이다.

 

 

 

 

 

 

 

 

 

 

 

 

 

 

 

 

* 앨프레드 베게너 《대륙과 해양의 기원》 (나남출판, 2010년)

*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까치, 2003년)

* 리처드 포티 《살아 있는 지구의 역사》 (까치, 2005년)

 

 

베게너는 지도를 보다가 우연히 남미 대륙의 동쪽 해안선과 아프리카 대륙의 서해안선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지구상의 여러 대륙이 약 3억 년 전까지는 하나의 초대륙(Pangaea, 판게아)으로 이루고 있었다. 초대륙은 고생대 말에 분리되기 시작하여 현재의 5대양 6대륙이 됐다며 ‘대륙이동설’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가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대륙이동설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질학자들은 대륙이동설을 비웃었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 대륙을 이동시키는 힘의 근원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과 새로운 증거들이 발표되면서 대륙이동설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베게너는 지질학자가 아니라 기상대에 근무하는 기상학자였다. 대륙이동설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지구가 딱딱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강력한 믿음에 사로잡힌 과학자들은 ‘믿는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대륙이동설을 무시한 지질학자들은 베게너의 이론을 검증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2006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Yogi Berra)가 남긴 명언이다. 그의 말처럼 과학은 한 번 발전한다고 해서 거기서 딱 멈추고 끝나는 게 아니다. 과학은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원리들로 이루어진 학문이 아니다. 어떤 자연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작업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칼 세이건(Carl Sagan)은 지나친 믿음으로 교만에 빠진 과학자들을 비판한다.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제시한 것만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제시한 가설들 중에도 훗날 틀렸다고 밝혀지는 것이 많다. 그러나 과학은 자기 검증을 생명으로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증거 제시라는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코스모스》 195쪽)

 

상대방의 가설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비판하는 태도는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검증 없는 비판은 유사과학 또는 사이비 과학의 기세를 절대로 꺾지 못한다.

 

 

 

 

 

 

 

 

 

 

 

 

 

 

 

 

 

 

 

 

 

 

 

 

 

 

* 다나 맥켄지 《대충돌 : 달 탄생의 비밀》 (이지북, 2006년)

* 로버트 토드 캐롤 《회의주의자 사전》 (잎파랑이, 2007년)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년)

* 로널드 프리츠 《사이비역사의 탄생》 (이론과실천, 2010년)

 

 

 

1950년 유대계 러시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임마누엘 벨리코프스키(Immanuel Velikovsky)<충돌하는 세계(Worlds in Collision)>라는 책에서 금성이 불과 3,500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초창기의 금성은 목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혜성이었다. 혜성처럼 우주를 떠돌던 금성은 두 번이나 지구를 스쳤다. 벨리코프스키는 거대한 홍해가 갈라진 모세의 기적이 지구에 가까이 다가온 혜성의 영향에 의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고 했다. <충돌하는 세계>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충돌하는 세계>의 출판사(맥밀런 출판사)에서 펴낸 천문학 교재의 저자인 할로 섀플리(Harlow Shapley)는 벨리코프스키의 책을 혹평했다. 섀플리는 출판사에게 <충돌하는 세계> 출간을 멈출 것을 촉구했고, 이를 지켜지지 않으면 자기가 쓴 천문학 교재의 판권을 회수하겠다고 밝혔다. 섀플리의 불매 운동에 동참하는 학자와 저자 들이 점점 늘어났다. 결국 위기감을 느낀 <충돌하는 세계>의 담당 출판사는 벨리코프스키가 쓴 책의 판권들을 다른 출판사(더블데이 출판사)에 팔아넘긴다. 판권을 손에 넣은 더블데이 출판사는 벨리코프스키의 또 다른 책들을 펴낸다. 벨리코프스키는 ‘격변론’을 지지하는 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격변론은 화산, 지진과 홍수 같은 급작스러운 자연 재난에 의해 지구가 현재의 모습으로 단 순간에 형성됐다고 보는 가설이다. 다윈(Darwin)의 진화론을 반박하는 창조론자들이 격변론을 지지한다.

 

현재 벨리코프스키의 금성 탄생설과 격변론은 과학 원리를 무시한 오류투성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벨리코프스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각종 고대 신화들(그리스, 인도, 수메르 등)을 억지로 끼워 맞춰 해석했다. 벨리코프스키는 신화를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설명했다. 당연히 그의 작업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목성은 주로 수소, 헬륨 등의 가스들로 이루어졌다. 반면 금성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행성이다. 목성과 금성의 성분을 비교해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

 

벨리코프스키는 금성이 목성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에 언급된 제우스(Zeus)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나(Athena)의 탄생에 빗대어 설명한다. 신화에 관심 많은 사람들도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목성(jupiter)은 제우스의 로마식 이름이고, 금성(Venus)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의 로마식 이름에서 따왔다. 벨리코프스키는 아프로디테와 아테나를 동일한 존재로 취급했다. 그렇게 되면 헤라(Hera), 아프로디테, 아테나의 매력을 상징하는 ‘삼미신’의 의미가 달라져야 한다. 그밖에도 그는 아테나가 제우스의 눈썹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화 속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벨리코프스키는 신화의 원전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입맛대로 소개, 해석했다.

 

 

 

 

 

 

 

 

 

 

 

 

 

 

* 마이클 셔머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바다출판사, 2007년)

 

 

벨리코프스키와 그를 지지하는 추종자들은 ‘믿음 엔진(belief engine)’의 오류에 빠졌다.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고, 믿고 싶은 것들이 우선이고, 그다음에 보고 싶은 것과 믿고 싶은 것에 대한 근거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자신들의 믿음이 불확실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벨리코프스키가 작동시킨 ‘믿음 엔진’의 원료는 고대 신화였다.

 

과학과 신화에 대한 기초적인 내용만 알고 있어도 벨리코프스키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진리에 대한 검증 시도가 가능하다. 물론, 상대방의 신념이나 의견을 강압적으로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열린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이성적으로 신중하게 검증하는 것이 올바른 회의주의의 원칙이다. 섀플리와 그 외의 학자들이 <충돌하는 세계> 불매 운동을 이끄는 대신에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조목조목 반박했으면 벨리코프스키의 추종자들의 기세를 충분히 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과학자들의 ‘검증 없는 비판’이 오히려 벨리코프스키를 ‘기성 과학에 도전하는 천재’ 또는 ‘과학의 순교자’로 과대 포장하는 데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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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5-02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자들이 제시한 가설들 중에도 훗날 틀렸다고 밝혀지는 것이 많다.˝
ㅡ 그래서 문학은 고전을 읽고 과학은 최신 서적을 읽어야 하나 봅니다.

cyrus 2017-05-02 13:24   좋아요 1 | URL
문학, 특히 번역본은 새로 나올 때마다 읽어야 합니다. 요즘 홈즈 시리즈를 읽으면서 느꼈습니다. 어렸을 때 읽은 (축약본) 셜록과 완역본 셜록의 번역을 비교해서 읽어보니까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생각한 셜록은 ‘진짜 셜록‘이 아니었어요. ^^;;

yureka01 2017-05-02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태양계도 은하를 중심으로 볼텍스 운동을 하거든요...아마 우주 전체가 단 가만 있는적이 없을듯~~에너지는 곧 움직임~^^..

닷슈 2017-05-02 15:43   좋아요 2 | URL
이거 아는사람이 거의없죠 일전읽은책은 지구빙하기는 태양빛을 많이차단하는 지역으로태양계가진입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cyrus 2017-05-03 07:16   좋아요 1 | URL
To. yureka01님 / 별과 행성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의 실체를 몰라서 옛날 사람들은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

cyrus 2017-05-03 07:18   좋아요 0 | URL
To. 닷슈님 / 가설이지만 그럴 듯합니다. ^^

yureka01 2017-05-03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www.youtube.com/watch?v=b4LzhlDcB-U 찾아 보니 이거 였네요..ㅎㅎ 재미있어서 찾아 봤습니다. 맞습니다.몰랐던 게 맞죠..^^

transient-guest 2017-05-0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벨리코프스키 책을 좋아해서, 영문으로 여러 권 구해 읽었지요. 대학교 땐 책을 구할 수 없어서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복사를 뜨기도 했구요. 과학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는 일종의 SF나 유사과학이지만, 그 직관이랄까, 뭔가 의문을 던지는 그런 부분은 무시할 수가 없더라구요. 아직 과학적으로 풀리지 않은 태양계의 행성배열의 missing link나 자전방향이 다른 금성 같이, 당시만 해도 아무도 의문을 던지지 않던 것들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갔는데, 문제는 그가 과학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진지한 과학자들이 논증을 하기 보다는 그냥 부정해버린 점, 그리고 일부분 그가 제기했던 가설들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니까요.

cyrus 2017-05-08 11:04   좋아요 0 | URL
댓글을 뒤늦게 확인했습니다. 못 보고 그냥 지나칠뻔했어요.

《대충돌 : 달 탄생의 비밀》의 저자는 벨리코프스키의 상상력을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행성의 충돌로 또 다른 행성이 탄생했다는 벨리코프스키의 가설이 달 탄생 가설과 유사해요.
 

 

 

어린 시절에 끝없는 호기심으로 자연과 우주를 동경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발명왕’ 에디슨(Thomas Alva Edison)처럼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암탉처럼 달걀을 품고 있으면 병아리가 부화할 수 있을지 궁금했을 것이다.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들을 혼내기는커녕 그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린 에디슨에게 과학은 일상의 호기심을 해결해주는 재미있는 놀이였다.

 

그러나 지나친 호기심은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실험을 시도하게 한다. 에디슨 위인전에서 본 일화인데,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실험 정신이 투철했던 에디슨의 독특한 면모를 부각하기 위해 위인전 작가가 각색한 건지 확실하지 않다.

 

소년 에디슨은 먹으면 공중부양이 가능한 약을 만들었다. 약의 재료가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약은 액체 형태였고, 병에 담겨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에디슨은 자신이 혼자서 만든 첫 발명품(?)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약의 효능을 확인하고 싶었다. 에디슨은 실험 대상자로 자신의 친구를 선택했다. 이 친구도 순진했다. 약을 먹으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에디슨의 말을 믿어버렸다. 친구는 의심 없이 병에 담긴 에디슨의 약을 마셨다. 약을 삼킨 지 3분이 지났는데도 몸은 공중에 뜨지 않았다. 약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에디슨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고, 친구에게 다시 한 번 약을 마셔보라고 했다. 에디슨이 시키는 대로 친구는 약을 마셨다. 정체불명의 약을 두 번이나 마신 친구는 갑자기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배야!”

 

복통이 점점 심해지자 친구는 바닥에 쓰러져 몸을 이리저리 뒹굴뒹굴하면서 울부짖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에디슨은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어른의 도움으로 친구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고,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소년 에디슨은 임상시험을 처음으로 시도했으나 최악의 결과가 나올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다. 만약 에디슨이 직접 그 약을 마시고 천국으로 날아갔더라면, ‘천재 발명가’라는 명예가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실험 결과를 끝까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지나친 호기심이 ‘진정한 과학자의 자세’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진정한 과학자’의 생존 능력과 호기심은 반비례한다. 전기 콘센트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던 도킨스의 사촌과 정체불명의 약을 꿀꺽 삼켜버린 에디슨의 친구는 십년감수 했다. 이들보다 생존 능력이 더 떨어지는 과학자들은 무모한 실험을 시도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어야 했고, 죽고 나서야 ‘진정한 과학자’의 명예를 얻었다.

 

 

 

 

 

 

 

 

 

 

 

 

 

* 톰 잭슨 《냉장고의 탄생》 (Mid, 2016년)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가장 확실한 증거가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과학 방법론으로 ‘실험’을 강조했다. 베이컨은 고기를 오랫동안 보관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자신이 직접 닭고기를 차가운 눈 속에 묻어두었다. 엄청나게 추운 겨울 날씨 속에 베이컨은 눈에 묻어놓은 닭고기의 상태를 관찰했다. 예순을 넘긴 베이컨의 몸은 영하의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결국, 그는 독감(혹은 폐렴)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았다. 죽기 전에 베이컨은 자신의 무모한 실험이 ‘매우 뛰어나게 성공적’이라고 확신했다.

 

영국의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프랑스의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그리고 스웨덴의 셸레(Carl Wilhelm Scheele)는 산소를 처음 발견하고, 산소의 성질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화학자들이다. 그런데 세 명 모두 사인(死因)이 평범하지 않다. 프리스틀리는 라부아지에와 셸레보다 더 오래 살았으며 생전에 과학적 업적을 남긴 공로로 명예를 누렸다. 그러나 프리스틀리는 일산화탄소와 수은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화학 실험을 하는 동안 인체에 해로운 일산화탄소와 수은 등의 화학 물질에 노출되었다. 셸레는 화학 물질을 직접 맛보는 습관이 있었다. 독성이 강한 화학 물질까지 맛봤으니 그의 건강이 좋아질 리가 없다. 셸레는 비교적 젊은 4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인 역시 수은 중독이었다.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잘 나갔다. 그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세금 징수원으로 활동했다. 혁명파들은 그의 세금 징수원 활동을 문제 삼았고, 라부아지에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프랑스의 수학자 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는 “라부아지에의 목을 자르는 건 순간이었지만, 그와 같은 인물을 만들려면 100년도 더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 존 월러 《왜 하필이면 세균이었을까?》 (몸과마음, 2004년)

* 강신익 《불량 유전자는 왜 살아남았을까?》 (페이퍼로드, 2013년)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질병이 세균과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체에 의해 전파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페텐코퍼(Max Joseph von Pettenkofer) 등의 의학자들은 세균의 실체를 믿지 않았다. 코흐와 파스퇴르가 등장하기 이전에 의학자들은 질병이 전파되는 원인이 ‘나쁜 공기’라고 생각했고, 페텐코퍼 역시 ‘나쁜 공기’설을 받아들였다. 페텐코퍼는 ‘세균전염설’을 반박하기 위해 콜레라균이 들어간 배양액을 직접 마셨다. 그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다행히 그는 약간의 설사 통증을 느꼈을 뿐, 멀쩡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의 희생정신에도 불구하고, 세균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위생학의 패러다임을 뒤집을 수 없었다. 위생학의 새로운 권위자로 급부상한 코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페텐코퍼는 점점 실의에 빠졌다. 그는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권총으로 자살했다.

 

 

 

 

 

 

 

 

 

 

 

 

 

 

 

* 프란츠 부케티츠 《이타적 과학자》 (서해문집, 2004년)

 

 

지금까지 언급된 사람들 이외에도 과학의 발전을 위해 희생한 과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생전에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이타적 과학자》에 소개된 과학자들의 삶을 보게 되면 도킨스의 농담이 그저 웃고 지나갈 일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과학자들이 생존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그들의 용기와 이타심이 보통 사람들보다 높다는 점은 인정하고 싶다. 그런데 도킨스의 말이 계속 회자할까 봐 약간 걱정된다. 안 그래도 장래희망으로 과학자를 꿈꾸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 과학자가 ‘극한 직업’으로 오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 글의 제목은 폴 호프만의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승산, 1999)를 패러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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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5-01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일견 무모한 호기심으로 만들어낸 발명품도 있으니까요..ㅎㅎㅎ

투명 망또 매고 하늘을 날면 날 수 있는 그런 ~~발명.ㅎㅎㅎ

cyrus 2017-05-01 19:15   좋아요 0 | URL
황당한 상상력이 언젠가는 현실이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

AgalmA 2017-05-0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의 입자》 읽으며 실험과학자들의 노고를 많이 생각하게 됐죠.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실험체로 쓰는 경우가 부지기수니... 초창기 과학은 물질의 위험성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일이 더 많았을테니.
퀴리 부인도 결국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했잖아요. 노벨상이 다 무언가ㅜㅜ

cyrus 2017-05-18 20:16   좋아요 1 | URL
댓글을 늦게 확인했어요. AgalmA님이 댓글을 남겼던 시점에 제가 서재 접속을 안 하고 있어서 댓글 확인을 못했어요. ^^;;

퀴리 부인의 남편 피에르 퀴리도 오래 못 살았죠. 마차에 치어 사망한 걸로 알고 있어요.

AgalmA 2017-05-18 21:59   좋아요 0 | URL
제가 한참 지나 댓글 달아 그러셨을 수도 있지 뭘 그리 미안해 하십니까. 저도 대댓글 모두 화답하는 게 아니라서^^a
네, 퀴리 부부 인생도 참 안타까웠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