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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세트 - 전2권 - 신영복 1주기 특별기획 ㅣ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평점 :
5년간 한반도의 키를 맡길 사람을 선택해야 할 시기가 왔다. 정치판의 승자와 패자는 선거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 상대방에게 더 큰 손해를 끼칠 수 있다면,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경쟁 구도이다. 본능적으로 상생의 질서보다는 상극의 구도를 더 선호하는 게임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역주의와 사상적 대립, 세대 간 갈등이라는 현실에 부딪히고 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후보 지지자들 간에 사회적 · 이념적 갈등까지 확대 증폭되는 정도다. 선거 이후에도 두고두고 정치 · 경제 · 사회 각 분야에 걸쳐 갈등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특정 대선 후보자의 지지 세력은 이념적 · 정책적 순수성을 추구하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지도자를 잘못 선택함으로써 강력한 이념적 지지그룹의 활동을 암묵적으로 방조 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이들의 활동 영역이 점점 커질수록 정치적 · 이념적 틈새가 갈수록 넓혀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게 된다. 틈새에 피어난 '검은 꽃'에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는 힘을 발산한다. 그 검은 꽃이 바로 ‘갈등’이다. ‘갈등’이라는 검은 꽃은 사회 곳곳마다 군집 형태로 자라고 있다.
이 불쾌한 꽃들을 모조리 확 꺾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검은 꽃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만 없다. 신영복 선생의 말대로 ‘아픔을 외면하기보다는 일단 직시하고 나서 새로 시작하는 것’[1]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어떤 독자는 선생의 문장을 보면 볼수록 약간 짜증이 난다고 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외세의 침략에 무기력했던 뼈아픈 과거의 역사-를 언급한 선생의 글에 다소 비극적이고 비관적인 분위기를 감지했다. 살아생전에 선생도 이 점에 공감했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 또한 보기 나름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픔을 직시한 선생의 글에도 긍정적 측면이 있다. 선생의 글에 선험자의 깊은 성찰과 반성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희망의 근거가 된다. 선생의 글을 비판한 독자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본 사람일 수 있다. 그 독자처럼 비극적 인식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다. 일상이라는 핑계로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고, 급기야 다 같이 보듬어야 할 아픔의 눈물을 혐오하도록 강권하는 그들의 새까만 심장 한가운데에 ‘검은 꽃’의 뿌리가 깊게 자리 잡혀 있다. 그들은 ‘평화로운 사회’를 조성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의 신념 혹은 편견에 충실한 나머지 상대방의 생각과 의견을 멋대로 재단한다. 그들의 위협적인 가위질은 권력의 이름을 빌린 무자비한 ‘검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은 꽃 애호가들이 지지하고, 그들을 암묵적으로 두둔하는 권력자는 우리가 투표로 뽑은 것이다.
우리는 왜 이런 뼈아픈 반복을 겪게 되는 걸까. 그 이유가 새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개개인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끌어올린 능력들이 적법한 절차에 의해 상호 조정되면서 사회전체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성 없는 이상론'에 불과할 뿐 한국사회에서 이것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확신한 나머지 이상론에 매달렸다. 대선 후보자들은 ‘민주주의’를 거론하며 구체성이 결여된 야심만만한 이상론을 내세웠다.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촛불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후보라고 주장한다. 20대의 청년 신영복은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이상주의적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어설픈 결합을 긍정하는 이상론을 경계했다. 그가 학자가 되어서도 이상주의적 사고방식을 늘 경계했다.
민주주의를 긍정하는가. 더구나 그것의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긍정하겠는가? 이 양자의 결합을 승인하는 것은 자본의 무제한한 횡포를 승인하는 게다. 자본측근자(資本側近子)를 제왕(帝王)으로 모시는 것이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141쪽)
자본측근자는 대중의 표를 얻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옷을 잠깐 입힌 ‘포퓰리즘(populism)’을 내세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어설픈 결합이 포퓰리즘을 만들어 사회를 퇴보시킨다. 포퓰리즘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국민은 우민화되어 사회를 주체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변혁 역량이 줄어든다.
단순한 이익집단 간의 갈등이 아니라 국가적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실천의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 능력이 우리 삶을 침투하지 못하다 보니 이해관계자 간의 타협이 논리와 관용 그리고 인내에 입각한 연대 과정에서 벗어나고 있다. 연대감이 사라진 사회에서 사회구성원들은 최대한 강경한 자세로 자신의 전략적 위치를 확보한다. 이 과정에서는 민주적인 합리적인 조정절차는 무시되며, 힘 있는 소수에 의해 다수가 볼모로 잡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힘 있는 소수는 ‘승리자’가 된다. 선생은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모호한 모두가 ‘더불어 이기는 강한 승리자’[2]가 되라고 당부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밝힌 선생의 당부가 이상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더불어 이기는 강한 승리자’는 사회 변혁을 위한 이론에 주목하는 동시에 실천을 병행한다. 누구나 혼자서 ‘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외로운 패배자’가 된다. ‘더불어 이기는 강한 승리자’가 되려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선생이 자주 강조했던 ‘하방연대(下方連帶)’의 정신이다. 물이 자연스럽게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우리는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손을 잡아야 한다. 낮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놀랍게도 작년에 우리는 촛불의 힘으로 ‘하방연대’를 이루어냈다. 성별과 나이 구분 없이 사람들이 광화문에 거대한 촛불을 만들어 그동안 청와대의 지붕에 가려졌던 권력의 폐단이 보이도록 훤히 밝혔다. 그 연대의 중심에는 세월호 사고 유가족들도 있었다. 선생이 지금도 살아계셨더라면 아주 멋진 광경을 보면서 흐뭇해하셨을 텐데.
이틀 뒤에 결정될 새로운 지도자가 임기 내내 ‘검은 꽃들’을 전부 꺾을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진보든 보수든 이념의 간격을 좁히는 일이 쉽지 않다. 지도자의 능력에만 의지할 수 없다. 지금부터가 ‘우리부터 잘해야 되는 시기’[3]이다. 우리가 갈등을 유발하는 ‘검은 꽃들’을 직접 꺾어야 한다. ‘검은 꽃들’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갈등’이 살아남지 않게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숲’을 가꾸어야 한다. ‘더불어 숲’을 조성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손과 마음에 묻은 흙먼지, 즉 상대방을 미워하게 하는 ‘갈등’의 앙금까지 말끔히 털어내야 한다. ‘갈등’의 앙금이 묻은 더러운 손으로 상대방의 손을 잡을 수 없다. 서로를 미워해선 안 된다. '너나 잘해', '너는 틀렸어'라는 말을 삼가해야 한다. 근본적인 반성과 차분한 성찰은 ‘더불어 숲’이 잘 자라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준비 기간이다. 5월 9일 이후부터가 지도자의 실전이라면, 우리는 사회를 탄탄하게 만들기 위한 실천에 임해야 한다. 정말로 우리부터 잘해야 되는 시기가 왔다. 이 시기마저 또 놓치게 된다면...
[1] 『수많은 현재, 미완의 역사 - 희망의 맥박을 짚으며』 (대담: 홍윤기, 1998년, 《손잡고 더불어》 145쪽)
[2] 『모든 변혁 운동의 뿌리는 그 사회의 모순 구조 속에 있다』 (대담: 정운영, 1992년, 《손잡고 더불어》 113쪽)
[3]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 줘요』 (대담: 이진순, 2015년, 《손잡고 더불어》 3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