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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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는 조선시대 도망간 노비와 이를 쫓는 추노꾼의 삶을 다룬 사극 드라마이다. 『추노』의 첫 화가 방영되자마자 시청자들은 주인공 이대길(장혁 분)에게 ‘대길 언니’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남자를 ‘형’이 아닌 ‘언니’라고 부르다니.『추노』를 안 본 사람은 별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드라마에서 남자들끼리 서로를 ‘언니’라고 부른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가진 남자가 형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장면이 신선하다. 조선 시대 ‘언니’는 절친한 관계에서 쓰인 호칭이다. 그래서 동성의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끼리도 ‘언니’라고 부르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형(兄)’의 순우리말이 ‘언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가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면 이곳은 천국이겠지. 우리 마음속의 성차별이 없어지고 얼마나 화목해질까?[1] 나는 벨 훅스(Bell Hooks)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언니’를 호출하고 싶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언니’는 자매로서의 언니가 아니다. 남녀 구분 없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고, 좀 더 가까운 사이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러므로 ‘언니’ 호칭을 듣는 대상에 남성이 포함된다. 여기에 착안하여 나는 ‘언니들의 페미니즘’에 남성도 참여할 수 있다는 과감한 생각마저 하게 됐다. 내게 생각할 용기를 불어넣어준 훅스 언니가 고맙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의 혁명파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제의 뿌리를 완전히 캐내어 버릴 기세로 등장했다. 그들은 ‘자매애는 강력하다(sister is powerful)’라는 문구를 내세워 남성들과 연대한 정치적 투쟁보다 여성들의 자매애를 부각했다. 벨 훅스는 이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했다. 페미니즘은 여성 문제를 남녀 간의 대립갈등과 투쟁의 문제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벨 훅스가 아주 간단하게 정의한 대로 페미니즘이란 남성 자체가 아닌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가 만들어 낸 오랜 착취와 억압을 명확하게 바라보고, 이를 종식하기 위해 싸우는 운동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페미니스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남성은 계속 늘어만 갔다. 게다가 자매애를 기반을 둔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점점 미미해졌다. 계급권력을 가진 백인 중산층 여성들은 여성 공동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백인 여성 중심의 페미니즘은 백인 남성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받는 흑인 또는 유색 인종 여성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잘 나가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의 힘을 약화한 것이다.

 

벨 훅스는 인종 및 계급을 뛰어넘어 모든 여성, 그리고 페미니즘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남성 모두 이해할 수 있는 페미니즘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가부장제의 억압을 받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은 부당한 체험을 주고받으며 자매애를 형성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의 대화는 조직적으로 형성된 강력한 목소리다. 그렇다면 남성도 남성 중심 사회를 거부하고, 여성운동의 주체가 되어 힘껏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나는 벨 훅스의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문제에 진지하게 고민했다. 심지어 가끔 나 자신이 페미니즘의 기본 정신에 부합하는 일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의심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키보드 페미니스트(keyboard feminist)’였다. 인터넷상에서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게시물을 작성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했지만, 오프라인상에서는 논란이 많은 성차별 문제(예를 들면 군 복무 가산점 제도 부활)를 만나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얼치기 페미니스트’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안 좋은 소리를 듣더라도 남성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남성들로부터 냉소적인 반응을 받아도,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해도 여성이 겪는 부당한 차별과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한다. 그러려면 여성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서 자신의 성차별주의적 시선을 확인할 수 있는 ‘의식화 과정’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벨 훅스는 ‘의식화 모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의식화 모임에 참석하려면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모임 참석자들은 발언 기회가 주어진다. 그다음에 토론과 논쟁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참석자는 거리낌 없는 대화를 통해 살면서 보지 못했던 성차별 의식, 즉 벨 훅스가 비유한 ‘내면의 적’을 발견하게 된다. 벨 훅스는 대중적인 페미니즘 운동을 만들기 위해 여성들을 조직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식화 모임의 방침이 ‘모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성도 모집할 수 있다.

 

나는 ‘자매애는 강력하다’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구호는 가부장제의 힘에 억눌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소극적인 여성들을 동참하게 하는 매력적인 문장이다. 그렇지만, 남성의 참여를 배제한 자매애는 남성을 여성 운동에 동참하는 방향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형의 순우리말 ‘언니’와 ‘언니들의 페미니즘’과의 조화를 시도하고 싶었다. 소년과 남성을 끌어들일 수 있는 페미니즘이라면 자매 형제애(siblinghood)도 강력해질 수 있다. 내 생각, 또는 자매 형제애의 의미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을 거로 확신한다. 물론 자매 형제애도 한계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부 남성은 페미니즘을 ‘성공적인 연애와 결혼을 하기 위한 교양’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가짜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처한 상황과 고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여성운동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이다. 여성이 자신의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도 바꿔내지도 못한 채 페미니즘 정치의 기치를 내건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끝내 소멸해버릴 것이다. (45쪽)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이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남성 내부의 적, 바로 성차별주의 사고와 행동에 스스로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말할 수 있는 적’에 대한 침묵은 페미니즘 운동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여성과 함께 성차별 문제를 공유하고, 경험하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아져야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가능해진다. 형, 아니 언니들, 함께 합시다! 다음 후손들이 ‘여자 대 남자’ 대결 구도로 싸우지 않도록.

 

 

 

[1]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면 이곳은 천국이겠지. 우리 마음속의 욕심도 없어지고 얼마나 화목해질까.” (진영이 부른 번안곡 ‘모두가 천사라면’ 노랫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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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16 21:08   좋아요 2 | URL
노예가 노예를 잡아야하는 세상. 실감나지 않지만, 정말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아야하는 사람들은 사는 게 지옥처럼 느꼈을 겁니다.

stella.K 2017-05-16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 맞어. 추노에서 언니라고 불렀던 기억나.
그 사실이 좀 놀랍긴 하더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금성과 화성의 길이 만큼이나 남성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요원할 수 있어.
하지만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봐.

cyrus 2017-05-16 21:12   좋아요 2 | URL
존 그레이의 ‘화성남자 금성여자‘가 이분법적 성차를 강화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남성이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주 당연한 일인데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깊이 고민해봐야겠어요. ^^

2017-05-16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16 21:14   좋아요 2 | URL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레디컬 페미니즘의 한계를 명확히 짚어낸 책입니다. ***님이 밝히신 생각들 모두 이 책 속에 있습니다. ^^

AgalmA 2017-05-16 2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 정체성으로 한 인간의 모든 취향과 판단을 몰아넣고 시합을 하는 듯한 대결이 늘 눈살 찌푸려지는 풍경입니다. 그러니 이해가 더 안 되는 동성애에서는 더 가관...
사회 속 맥락을 읽고 해석하는 훈련은 성 문제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cyrus 2017-05-16 22:23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일수록 성차별이 심해지고, 불필요한 성 대결 양상이 생깁니다.

마립간 2017-05-17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별점을 5개 준 책인데, cyrus 님은 별 4개를 주셨네요.

cyrus 2017-05-17 14:31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도서에 별점 다섯 개는 없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 이론에 장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이론이 대세라고 해서 그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계가 있을 거고,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그 한계를 뛰어넘을 이론을 만듭니다.

니페딘1T 2017-05-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관련해서 남자가 읽어볼 만한 책좀 추천해 주심 안될까요? ㅠㅠ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어봤는데 공감이 잘 안되네요. 읽다가 포기했습니다.

이 책은 좀 나을까요?

cyrus 2017-05-27 18:53   좋아요 0 | URL
제일 어려운 일이 책을 상대방에게 추천하는 일입니다. 웬만하면 책을 추천하지 않아요. 그래도 남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페미니즘 책으로 <맨 박스>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권하고 싶어요. 내용이 어렵지 않습니다.

니페딘1T 2017-06-09 10:26   좋아요 0 | URL
오굿!!!! 감사합니다. 페미니즘...다시 도전해 봐야겠네요.

맨박스.... 오오.. 땡깁니다. 남자가 쓴 페미니즘 책이라 ㅎㅎㅎ 개다가 흑인!!! 이야, 땡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