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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생각하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96
천양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평점 :
공자(孔子)는 인생을 나이별로 정리했다. 10대는 충년(沖年), 20세는 약관(弱冠), 30세는 이립(而立), 40세는 불혹(不惑), 50세는 지천명(知天命), 60세는 이순(耳順), 그리고 70세는 고희(古稀) 또는 종심(從心)이라 했다. 고희는 시인 두보(杜甫)가 읊은 「곡강(曲江)」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이 시에서 두보는 인생 칠십에 이르는 삶은 드문 일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백 세 인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균수명이 길어졌다. 종심은 《논어》에 나오는 단어이다. 공자는 칠순이 되면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성숙해진다고 말했다. 그만큼 삶이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거칠 것이 없다는 얘기다.
청춘만이 아름답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칠순도 좋은 나이임이 분명하다. 천양희 시인을 보면 그렇다. 10대의 순수함과 20대의 열정을 품고 있는 시인의 글은 매력적이다. 간결한 문장에서 강력한 삶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아마도 시인의 ‘나이’에 대한 질문은 우문(愚問)일 수 있겠다. 나이가 많아서 무엇을 못 한다는 것은 핑계이다. 시가 잘 써지는 때는 있어도 시가 잘 써지는 나이는 없다. 시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맞춤법, 띄어쓰기는 틀려도 배짱 있게 시를 쓴 ‘칠곡 할매들’이 있다. 올해 구순을 맞은 김남조 시인은 열여덟 번째 시집 《충만한 사랑》(열화당)을 냈다.
일흔의 나이에 접어든 시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 나이에도 생에 대한 미련이 얼룩처럼 자잘하게 번져나, 아직도 쓰고 싶은 시나 못다 한 말들이 남아 있을까. 아니면 과거에만 매달린 채 허송세월하는 모습일까. 천양희 시인은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립해 나간다.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는 연륜에서 우러난 지혜와 성숙한 삶의 교훈으로 치장하고 있다. 시집에는 원로 시인의 권위나 위엄은 찾기 어렵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느낌을 허물없이 표현한 시인의 모습에서 공자가 말하는 종심의 경지, 즉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도 자기 스스로 돌아볼 줄 아는 원숙한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당신이 무엇이 되고 싶었냐고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며 파도며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했을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치며
마흔 살의 그가 말했습니다
떨어진 꽃잎 앞에서도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참 좋은 인터뷰였다고
(『일흔 살의 인터뷰』 전문, 56~57쪽)
모든 생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통과의례를 거친다. 여러 번의 통과의례를 거치고 나서야 최종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청춘의 시기를 평탄하게 넘어서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냥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 것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정점’을 찍고 난 뒤에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곧 찍게 될 ‘인생의 종점’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시인은 달관의 자세로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일흔 살의 인터뷰』)라고 말하는 시인의 유연한 고백은 세월의 흐름을 가벼운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안정된 ‘문단의 원로’의 그늘에 벗어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시작법』) 시 쓰기에 몰입한다. 안주(安住)를 포기하고 ‘외로운 마음으로 시 쓰기’의 고단한 길을 걷는 셈이다. 그것은 곧 그녀가 아무 것에도 귀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생 동안 시 쓰기란 나에게는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이었고
삶을 철저히 앓는 위독한 병이었다
그래서 의연하게 고독을 살아내면서 나아가지만
시는 달리는 이들에게 멈추기를 요구하네
빠름보다는 느림을 준비하네 그러므로 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 것이네
그게 좋은 시를 읽어야 할 이유
이 세상에 눈물 가득한 예지는 이것뿐이네
(『시작법(詩作法)』 부분, 100쪽)
고독을 인내하는 의연함이 그녀의 시를 가능케 한다. 그녀의 시 쓰기는 창작을 위한 고통, ‘좋은 시’를 얻기 위한 수고로움이다. 그녀의 시는 고단함에 매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살아야―시를 써야―할 이유를 찾는다.
잘못 자란 생각 끝에 꽃이 핀다지요 그것이 시(詩)라지요
(『이처럼 되기까지』 부분, 70쪽)
쓸쓸한 영혼이나 편들까 하고
슬슬 쓰기 시작한 그날부터
왜 쓰는지를 안다는 말 생각할 때마다
세상은
아무나 잘 쓸 수 없는 원고지 같아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쓴다는 건
사는 것의 지독한 반복 학습이지
치열하게 산 자는
잘 씌어진 한 페이지를 갖고 있지
(『시라는 덫』 부분, 88쪽)
시는 시인의 마음에 난 상처에서 피는 ‘꽃’이다. 문학은 인간의 불완전성, 불행과 실패에 맞서는 과감한 항변이다. 삶을 몸서리치게 체험한 시인은 남모르는 곳에 홀로 숨어, 남모르는 상처를 제 혓바닥으로 핥아 몰래 치료한다. 독자는 시를 써본 적이 없어도 천양희 시인의 시에서 공감 이상의 감동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불행과 실패를 경험한 사람만이 삶의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시인의 저항에 감동한다. 시인에게 고독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철저한 작문은 곧 문학에 대한 진지한 애정과 정신적 성숙을 의미한다. 나는 시를 위해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치열하게 시를 쓰려는 의지를 드러낸 시인의 ‘자기 선언’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