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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여성 시집 : 찬란한 숲을 그대와 - 봄날에 출판사 여성주의 문학
제인 오스틴 외 지음, 박영희 옮김 / 봄날에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 앙증맞다. 이 책을 만든 출판사 이름이 예쁘다. ‘봄날에’다. ‘봄날’이 아니다. ‘봄날에’ 출판사는 1인 출판사다. 책 만드는 일, 번역, 홍보 등 모든 출판 업무를 한 사람이 전담한다. ‘봄날에’ 출판사 대표 박영희 님은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에 능통하다. 그녀는 2014년 네이버 포스트에 영어 회화 콘텐츠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 권의 영어 교재(《두근두근 이제 영어로 말해요》, 《겁 없이 잉글리시 20일 동사 편》)를 펴냈다. 박 대표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를 번역하기 위해 시를 공부한 대단한 노력파이다. 그 노력의 결과물이 ‘앙증맞은 책’이라고 부르고 싶은 《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여성 시집 : 찬란한 숲을 그대와》이다.
‘앙증맞다’가 주로 ‘깜찍하다’의 의미로 쓰이는데, 더 정확한 의미는 ‘작으면서도 갖출 것은 다 갖추어 아주 깜찍하다’이다. 내가 언급한 ‘앙증맞다’를 이해하려면 ‘갖출 것은 다 갖추다’에 중점이 돼야 한다. 이 시집에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열다섯 명의 여성 시인이 쓴 총 10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세 자매(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앤 브론테), 조지 엘리엇, 메리 셸리, 루이자 메이 올컷, 루시 몽고메리 등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들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낯설기만 하다. 그런데 소설가들도 생전에 시를 썼고, 시집을 출판한 적이 있다. 그녀들이 쓴 시는 작품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들은 ‘여성이 시를 쓸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 왜 19세기에 여성들은 시를 쓸 수 없었던 걸까. 남성 시인에 필적할 만한 여성 시인이 없어서였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여성의 문학적 재능은 남성보다 떨어지지 않는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제도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여성의 문학 활동을 제약했다. 19세기 문단은 여성에게 ‘작가’라는 지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출판사들은 여성이 쓴 글을 상품성이 높다고 보지 않았다.
이 부당한 상황은 제인 오스틴의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녀가 《오만과 편견》을 출간하여 출판사로부터 받은 인세가 110파운드였다. 19세기 영국 파운드 가치와 현재 파운드 가치를 비교하면 차이가 있지만, 110파운드를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6만 4천 2백 원 정도 된다. 오스틴은 기대에 못 미치는 수입 금액에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안타까운 건, 《오만과 편견》 2쇄가 나왔는데도 그녀는 인세를 받지 못했다. 에밀리 디킨슨과 브론테 세 자매는 가명으로 글을 발표했다. 특히 브론테 세 자매가 활동했던 영국 문단은 여성 작가의 글을 무시했고 조롱했다. 여성 작가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 중심 문단의 구태를 거부한 세 자매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기면서 글을 썼다.
이 시집에는 20세기에 활동한 여성 시인의 시도 있다. 사후에 퓰리처상을 받은 실비아 플라스의 시 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녀가 쓴 『거울』이라는 시를 읽어 보자.
나는 은색이고, 정확해. 나는 선입견이 없지.
내가 보는 건 뭐든지 바로 삼켜버려
있는 그대로, 사랑이나 증오로 부옇게 흐리지도 않아.
나는 잔인하지 않아, 그저 진실할 뿐.
자그마한 신의 눈, 모서리는 네 개.
나는 대개 맞은편 벽을 보며 명상하지.
벽은 분홍에 반점이 좀 있어. 오래도록 쳐다보니
마치 내 심장의 일부 같아. 하지만 점멸하지.
얼굴들과 어둠은 되풀이해서 우리를 갈라놓아.
지금은 나는 호수야. 한 여자가 내게로 고개를 숙여,
진짜 자신을 찾고자 내 범위를 조사하고 있지.
그리곤 거짓말쟁이들한테로 몸을 돌려, 촛불이나 달빛.
나는 그녀의 등을 봐, 그리고 진실하게 비추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불안한 손놀림으로 내게 보상해.
나는 그녀에게 중요해. 그녀는 왔다가 갔다가 하지.
아침이면 그녀의 얼굴이 어둠을 대체해.
내 속에 그녀는 소녀를 익사시켰고, 내 속에 늙은 여자가
하루하루를 향해 솟아올라, 꼭 끔찍한 물고기 같아.
(실비아 플라스 『거울』, 186쪽)
시의 화자인 ‘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다. 화자는 거울 속에 있고, 그녀는 거울 밖에 있는 ‘나’, 즉 실제 나의 모습을 편견 없이 그대로 바라보면서 묘사한다. 시인은 거울을 통해 진실 된 ‘나’를 보려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탐색한다. 『거울』은 ‘언어로 만들어진 자화상’이다. 플라스뿐만 아니라 여성 시인들은 자신의 재능과 정체성이 잘 드러나도록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에밀리 디킨슨은 ‘자기만의 방’에서 고독과 싸우며 고뇌의 진실을 체험했다. 그래서 그녀가 쓴 『상처받은 가슴 하나 위로할 수 있다면』은 외로운 날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상처받은 가슴 하나 위로할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쓰라린 삶의 고통을 덜어 주고
아픔을 가라앉힐 수 있다면
의식 잃어가는 울새 한 마리
둥지로 돌려보낸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에밀리 디킨슨 『상처받은 가슴 하나 위로할 수 있다면』, 41쪽)
시집의 후반부에는 열다섯 명의 시인들의 삶을 소개한 약전이 있다. 그녀들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및 사진 몇 점도 실려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앙증맞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인 출판사가 ‘앙증맞은 시집’을 만든 일은 아주 소중한 시도다. 남성 중심 문인들의 업적만으로 가득한 문학사에 가려질 뻔한 여성 시인들을 재발견하는 동시에 그녀들의 삶과 문학이 어떻게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어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