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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ㅣ 문학동네 시인선 92
김상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어제 가을비가 내렸다. 도시에 살면서 가을비의 정취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분주히 살아가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면 반사적으로 우산을 펼치거나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어제 내리는 비 때문이었을까? 문득, 김상미 시인의 『보헤미안 광장에서』라는 시가 떠올랐다.
갑자기 내리는 비
그 비를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 펼쳐지는 우산들
그러나 우산은 지붕이 아니다
아내 있는 남자가 남편 있는 여자가
몰래 잠깐 피우는 바람 같은 것이다
갑자기 내린 비가 멎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러니 사랑을 하려거든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하려거든
한 지붕 아래에서 하라
갑자기 내린 비는 금방 지나가고
적은 우산에 묻은 빗방울들은
우산을 접는 순간 다 말라버린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40쪽)
산 넘어 바다 건너 도시까지 왔을 저 가느다란 빗줄기. 우산 받쳐 들고 무언가에 쫓기듯 걷는 도시인들이 발 딛고 선 이 풍진세상 굽어보며 사선을 긋는다. 세상을 너무 건조하게 살지 말라며, 빗줄기는 광장을 축축이 적신다. 논에 물을 대는 농부처럼 먼지 자욱한 거리 구석구석까지 살며시 다가간다. 빗줄기는 피라미 떼처럼 스멀스멀 사람들 가슴으로 기어들어 와 잔잔한 물결이 되어 아름다운 동행자가 되어준다. 허공에서 빈 가슴으로 하얗게 반짝여 다가온 빗줄기는 어느새 서성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인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비를 피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비 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우산을 찾고, 그것은 비를 막아주는 사람들의 동행자가 된다. 그러나 우리와 동행하는 시간이 짧다. 시인은 ‘진짜 사랑’이라는 행복한 감정을 만드는 방법을 저 빗줄기의 움직임에서 읽는다. ‘진짜 사랑’은 누군가에게 다가가 적셔 드는 빗줄기와 같다. 내가 먼저 진실한 사랑으로 누군가의 가슴을 적실 수 있다면 그것이 순수하고 소박한 행복이다. 비에 젖은 땅에 언젠가 바람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흔적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워갈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곧 멈출 비처럼 행복했던 기억을 흙에 묻을 것이다. 그 위에 ‘추억’이라는 이름의 묘비명을 세우고. 비는 그렇게 슬픔의 상징어이면서, 생명과 행복을 약동하는 힘을 타고 내리는 위대한 자연 현상이다.
비가 금방 그친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 없다. 빗방울이 떠난 빈자리에 꽃잎 피는 소리가 남는다. 빗줄기가 이내 큰 강물을 이루어 철썩철썩 힘차게 흘러간다. 자연의 순리는 아무 일 없는 듯 그렇게 지나간다. 자연도, 우리 삶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 생긴다. 시인은 시든 오렌지를 먹는 행위에서 ‘인생의 참맛’을 느낀다.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김상미 『오렌지』,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10쪽)
시간은 우리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언제인가 우리는 이 모든 소중한 것들과 헤어질 것이다. 우리 삶은 많은 가변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 머물러야 할 것들이 떠나는 상황에 슬퍼한다. 하지만 삶의 슬픈 의미 앞에 마음을 움츠리는 것보다 두려움 속 멋진 행복을 찾는 것이 낫다. 한 사람의 인생에도 미각이 압축되어 있다. 내가 내 삶을 다스리는 태도에 따라 행복의 열매를 따기도 하고, 상실의 쓴맛을 본다. 그러니 산다는 일은 누굴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 아무 말 말고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사이에서
그 사이만큼만 서로를 사랑하고 즐겨요
얼룩투성이 심연 같은 긴 이별, 짧은 편지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잘 익어가는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사이에서 마음 놓고 우리들의 취향대로 아주 작은 왕국을 만들어요
두 켤레 신발이 뜨거운 햇볕 아래 반짝이는!
(김상미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사이에서』 중에서,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81쪽)
시인은 ‘현재’에 의미를 두고 있다.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서둘러 염려하느라 기진하기보다 내가 지나가고 있는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미래의 어느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아무 말 말고, 서로를 사랑하고 즐겨요. 이별 따위 저 멀리 던져버리고.’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글의 제목은 홍진영의 노래 '산다는 건' 노랫말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