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에 ‘카페 스몰토크’에서 인문학 독서 모임이 진행된다. 스몰토크가 ‘레드스타킹’ 공식 모임 장소이기도 해서 두 가지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은 일요일, 월요일 이틀 연속으로 독서 모임에 참석한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인문학 독서 모임에 합류하게 됐다. 요즘 책을 읽으면서 지식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일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경험을 하려는 나 자신에게 놀랄 때가 있다.

 

 

 

 

 

 

 

 

 

 

 

 

 

 

 

 

 

* 토머스 새뮤얼 쿤 《과학 혁명의 구조》(까치, 2013)

 

 

 

 

 

 

 

 

 

 

 

 

 

 

 

 

*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지식플러스, 2015)

* 장대익 《쿤 & 포퍼 :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김영사, 2008)

* 앨런 차머스 《현대의 과학철학》(서광사, 1985)

 

 

 

 

인문학 독서 모임을 위해 읽고 있는 책은 토머스 새뮤얼 쿤《과학 혁명의 구조》(까치, 2013)이다. 4월 22일 일요일에 첫 번째 모임이 있었고, 매주 세 장씩 읽어와야 한다. 지난주(4월 29일)에 있었던 두 번째 모임은 불참했다. 지난주는 너무 바빠서 《과학 혁명의 구조》 4~6장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빠졌다고 해서 《과학 혁명의 구조》 읽기를 포기한 건 아니다. 책을 너무 좋아해서 완독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고약한 성질이 있지만, 뚜렷한 목표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할 때까지 읽는다. 인문학 독서 모임 참석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독서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쿤과 카를 포퍼가 양분하는 과학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내 독서 목표다.

 

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과학은 지속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계기로 인해 혁명의 형태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구 패러다임과 신 패러다임이 투쟁하면서 구 패러다임이 폐기되고 신 패러다임으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A가 주장한 어떤 이론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A 이론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B는 A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B는 A 이론을 새로 검증하고, 끝내 그것과 다른 ‘B 이론’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A 이론이 구 패러다임이라면, B 이론은 신 패러다임이다. 한 시대를 대표하거나 지배했던 A 이론은 전면 부정된다.

 

《과학 혁명의 구조》는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체로 이루어져 있어서 읽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정말 더럽게 재미없다. 물론, 책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을 쿤의 글쓰기 탓으로 돌릴 수만 없다. 개역판인데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다수의 의견이 있다. 여전히 이 책에 한 번에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더러 보인다. 쿤의 과학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처음부터 《과학 혁명의 구조》 읽기를 시도하면 지쳐서 독서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 토머스 새뮤얼 쿤 《코페르니쿠스 혁명》(지만지, 2016)

* 남영 《태양을 멈춘 사람들》(궁리, 2016)

 

 

 

《과학 혁명의 구조》가 쿤의 대표작으로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이 책을 ‘쿤의 첫 번째 저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쿤의 첫 번째 저서는 1957년에 발표된 《코페르니쿠스 혁명》(지만지, 2016)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에 코페르니쿠스가 많이 언급된다.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킨 과학 혁명 중 하나로 봤다. 《과학 혁명의 구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먼저 읽으면 된다. 이 책도 학술서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때문에 재미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보여준 쿤의 과학철학을 미리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집필하기 전에 쿤은 하버드 대학 과학사 강의 준비를 위해 과학사 문헌들을 탐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과학사를 바라보는 ‘기존 관점’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기존 관점’으로 과학사를 서술한 연구가들은 진공이나 중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각각 진공과 중력의 실체를 증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뉴턴의 새로운 견해가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쿤은 수천 년 동안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거 학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쿤은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코페르니쿠스로 이어지는 우주론과 천문학을 추적하여 ‘지식이 축적될수록 과학은 진보된다’는 관점을 반박한다. 그 반박의 입장을 담은 책이 바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수천 년 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구는 견고한 지지대에 의해 떠받혀 있다고 생각해왔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의하면 지구만이 천체 운동의 유일한 중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동설과 대치되는 우주론을 제시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천동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해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처음부터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거부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사실, 그는 반동적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동의했으며 이를 좀 더 간결하게 설명하기 위해 자신만의 우주론을 조심스럽게 제시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멈추기는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성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 덕분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생각이 수천 년 동안 지배해온 굳건한 세계관을 무너뜨릴 거라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죽고 난 후 훨씬 지나서야 후세 사람들은 그를 ‘비범한 인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에 씌워진 ‘신화’를 과감히 벗긴 다음에 과학 발전의 변화 과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또 낙하 실험을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논박한 것으로 알려진 갈릴레오의 업적도 ‘신화’라고 주장한다. 쿤의 견해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책이 《태양을 멈춘 사람들》(궁리, 2016)이다.

 

과학 이론은 ‘무에서 유’로 탄생하는 건 아니다. ‘천재’로 알려진 과학자들도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한 보수적인 세계관을 완강히 거부하지 못했다. 뉴턴은 자신의 과학적 성과가 스스로 일궈낸 창조적 결과물이 아닌 선대의 지식, 즉 ‘거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강조했다.

 

 

 

 

 

 

 

 

 

 

 

 

 

 

 

 

 

* [품절] 스티븐 호킹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까치, 2006)

 

 

때로는 새로운 세계상을 향해서 지적 도약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어쩌면 뉴턴은 이렇게 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거인들의 어깨를 도약판으로 사용했다.” (스티븐 호킹,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중에서)

 

 

 

뉴턴은 ‘거인들의 어깨’가 자신의 지적 도약을 위한 발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의 사다리’를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구 패러다임의 사다리 삼아 올라가 남들이 보지 못한 지식의 세계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나서야 ‘오래된 사다리’를 과감히 버렸다. 과학이 축적되면서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지식이 손실되는 과정(‘쿤의 손실’)[1]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과학자들이 쓰다 버린 사다리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그것은 비과학적이고 엉터리로 판명되었어도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요긴한 도구였다. 과학의 발전은 과거 성과를 긍정하면서 그 위에 한 층을 더 올리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을 부정하는 동시에 사다리 한 층 더 올라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1] 장대익의 책에는 ‘쿤의 손실’을 ‘Khunian loss’로, 장하석의 책은 ‘Khun loss’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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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8-05-03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 혁명의 구조 읽어보고 싶은데 여전히 손을 못 대겠네요. 내용도 만만찮은데다 번역의 질도 썩 좋지 않다고 들어서요...태양을 멈춘 사람들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

cyrus 2018-05-04 16:51   좋아요 2 | URL
오랜만입니다. 캐모마일님. 잘 지내고 계시죠? <태양을 멈춘 사람들>이 강연을 정리한 책이라 어려운 내용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진이 있어서 좋아요. ^^

고양이라디오 2018-05-03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과학혁명의 구조 조금 읽다가 포기했었습니다ㅎ 즐독 완독하세요ㅎ

cyrus 2018-05-04 16:52   좋아요 1 | URL
완독하려면 한 달 걸릴 듯합니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

transient-guest 2018-05-05 0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활발하시네요. 일도 하시고 책도 읽으시면서 이런 모임도 나가서 절차탁마하시니 앞으로도 큰 성장과 발전이 기대됩니다. 사실 저처럼 혼자 책을 읽는 사람은 자기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있을지언정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다른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좀처럼 느껴볼 기회가 없네요. 그나마 알라딘서재가 있어 다행입니다.

cyrus 2018-05-08 12:00   좋아요 1 | URL
예전의 알라딘 서재는 건전한 비판과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사람들 간의 관계가 두터웠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상대방의 생각이 압축된 글을 진지하게 보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오로지 내 생각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이렇다 보니 댓글로 소통을 해도 인간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요.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서재 활동을 하다보면 아쉬움을 많이 느껴요.

페크pek0501 2018-05-07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는 성적 욕구를 억압해서 생기는 문제에 주목했지만, 이 시대는 억압하지 않아도 되니까(다른 걸로 대체할 수도 있고) 그런 문제보다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문제로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시대가 바뀌니 이론도 바뀐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님이 쓰신 맨 마지막 글을 보고 생각났습니다.

cyrus 2018-05-08 12:04   좋아요 1 | URL
죽을 때까지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교과서로 배운 지식은 오래 가지 못해요. 그것을 부정하는 새로운 지식들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새로운 지식을 접하기 위해서 우리 같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건 독서예요. ^^

雨香 2018-05-09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을 때까지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에 백퍼 공감합니다. 몇 년전에 공룡에 대한 독서를 할 때도 그랬지만(이후의 연구결과가 전혀 다른 이론을 내더군요) 요즘 고려사를 독서와 팟캐스트를 통해 공부하고 있는데, 고려에 대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더군요

두해전인가 와우북페스티벌에서 <태양을 멈춘 사람들>의 저자 남영 교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왜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론적으로 완벽해보여야(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으로 봐야하는지?) 받아들인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cyrus 2018-05-09 11:59   좋아요 1 | URL
최근에 이정모 씨의 <250만 분의 1>를 읽고, 제가 어렸을 때 접했던 공룡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우향 님은 남영 교수가 말한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셨어요.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보다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어 했어요. 쿤은 천동설을 바라보는 코페르니쿠스의 관점을 ‘미적 가치’를 되살리려고 한 자세라고 분석했어요.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비판했고,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쿤의 분석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 BBC가 방송하고 이종필이 해설하다
스티븐 호킹 지음, 이종필 옮김/해설 / 동아시아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노벨상은 죽은 사람에게 상을 주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수상 후보에서 제외된다. 다만, 생전에 수상자로 지명된 경우에는 사후에도 상을 받을 수 있다. 두 달 전에 영면한 스티븐 호킹은 노벨상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그는 이론 물리학자이다. 그의 이론이 대부분 현재 기술로는 검증할 수 없다. 언젠가 이론이 입증되어도 사후 수상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는 노벨상을 탄 여느 물리학자 이상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대중으로부터도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 것은 블랙홀의 연구를 통해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한층 깊게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불치병으로 전신이 마비된 가운데서도 과학자로서의 탐구 정신을 끊임없이 불태운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킹은 20대부터 루게릭병을 앓으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적 같은 생명력으로 온 힘을 다해 우주의 근원을 밝히려 노력해왔다.

 

호킹이 일반 독자를 위해 쓴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까치, 1998)를 읽어도 우주의 비밀에 대한 복잡한 생각은 쉽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이 과학서적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이지만, 또한 사놓고 가장 많이 읽지 않은 책이라는 평가처럼 가볍게 펼칠 수 있는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가 남긴 말이다. 야구를 비롯한 다른 스포츠는 물론 우리 인생도 끝까지 최선을 다할 때 극적인 반전이 있는 멋진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책을 이해하기 어려워도 독서를 포기하면 안 되고, 책 한 번 읽었다고 해서 잘 안다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발병 이후에 뛰어난 업적을 이룬 호킹처럼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도 독서도 그 끝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모든 끝은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호킹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동아시아, 2018)을 읽음으로써 다시 한번 우주에 대한 이해에 도전할 수 있다.

 

이 책은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호킹의 BBC 리스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강연록은 전문 용어와 수식의 사용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분량은 가볍게, 내용은 알차게, 그림을 더해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BBC 뉴스 과학편집자 데이비드 슈크먼이 호킹의 설명에 대한 보충 설명을 추가했고, 이종필이 밀도 있는 심화 해설을 덧붙였다. 강연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블랙홀은 털이 없을까’, ‘블랙홀은 흔히 블랙홀이 칠해져 있는 것처럼 검지 않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블랙홀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검은 구멍’이다. 그런데 블랙홀은 이름과는 달리 검지 않다. 또, 무조건 집어삼키기만 하는 천체도 아니다. 블랙홀은 엄청난 중력으로 주변의 물질을 모두 빨아들인다. 블랙홀에 한 번 흡수되면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다. 블랙홀 주위에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고 불리는 경계가 있다. 사건의 지평선은 블랙홀에 들어간 물질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블랙홀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존 아치볼드 휠러“블랙홀은 털이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1975년에 호킹은 입자들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소립자들이 빛보다 더 빨리 이동하기 때문에 블랙홀은 일정한 비율로 빛과 입자를 방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블랙홀은 검다고 말할 수 없다. 입자와 복사파를 내보내는 블랙홀은 질량을 잃게 되고 더욱 작아진다. 결국, 블랙홀은 줄어들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호킹은 ‘호킹 복사’라고 불리는 현상을 근거로 블랙홀이 사라지면 그 속에 들어간 물질의 정보도 사라져서 확인할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호킹은 자신이 주장했던 이론을 스스로 뒤집었다. 그는 블랙홀에 빠져들어 간 물질의 정보는 방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호킹은 블랙홀은 빨아들인 모든 것을 결코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며 블랙홀 안으로 들어간 정보를 바깥에서 확인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방출된 물질의 정보를 통해 블랙홀의 과거를 확인할 수 있고, 미래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말을 거의 할 수 없으며 눈꺼풀과 세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었던 스티븐 호킹. 생존은 그 자체로 ‘기적’이다. 보통의 루게릭병 환자는 발병 후 3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나 호킹은 50년이 넘게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우주론과 블랙홀의 비밀을 푸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되었다. 호킹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노벨상을 받지 못해도 호킹은 위대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의 연구 업적뿐만 아니라 살아생전 보여준 집념과 의지는 인류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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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3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3 19:50   좋아요 0 | URL
호킹의 이론은 검증되지 않아서 노벨상 수상 자격 조건에 맞지 않아요. 호킹 본인도 그 사실을 알더군요.. ^^;;

캐모마일 2018-05-0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라길래 비전공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겠거니 했는데, 훑어보다 그냥 제자리에 놓고 왔었어요....ㅜㅜ 스티븐킹 박사 타계 뉴스 접하고 살까 말까 망설이다 그때 기억나서 그냥 뒀네요. 그나마 이 책은 방송 강연을 묶은 책이라 한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책소개 감사드립니다.

cyrus 2018-05-04 16:55   좋아요 1 | URL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이 <시간의 역사>보다 읽기 쉽습니다. 분량이 아주 얇아요. <블랙홀>을 읽고 난 뒤에 <시간의 역사>, <호두껍질 속의 우주>를 읽으면 될 것 같아요. 저는 <호두껍질 속의 우주>를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요. ^^

AgalmA 2018-05-0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물리학상 수상에 대해선 너무 단정하신 듯^^;
호킹 복사가 입증되면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53~54페이지 확인바랍니다/)
˝노벨물리학상은 이론이 ‘시간에 의해 검증‘되었을 때 수여됩니다.˝

생존한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주긴 하지만 사후 수여한 사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매우 중대한 발견일 경우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http://www.sciencetimes.co.kr/?news=%EC%97%AD%EB%8C%80-%EC%84%B8-%EB%B2%88%EC%A7%B8-%EC%82%AC%ED%9B%84-%EB%85%B8%EB%B2%A8%EC%83%81-%EC%88%98%EC%83%81%EC%9E%90
그래서 호킹도 자신의 이론이 입증되면 노벨물리학상 받을 거라고 기대했지요. 과연 언제 증명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cyrus 2018-05-04 22:11   좋아요 1 | URL
호킹이 노벨상 수상 여부를 언급한 연도가 2016년이었고, 그 당시 그는 살아있었어요. 지금도 그가 살아있다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ㅎㅎㅎ 호킹이 고인이라서 수상이 불가능할 거로 생각했는데, 호킹 복사가 최대한 빨리 검증된다면 예외로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결국, 노벨 위원회의 결정에 맡길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호킹 복사가 검증되면 호킹에게 노벨상을 주자는 여론이 생길 것 입니다.

올해는 노벨 문학상 시상식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네요. 스웨덴 한림원 미투 운동 여파가 있어서 올해 연기하고, 내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 2명을 선정한다고 합니다.

AgalmA 2018-05-04 22:15   좋아요 0 | URL
호킹은 자기가 살아 있을 때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상태였잖습니까ㅜㅜ;
미투 운동이랑 노벨상 수여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연기까지;;; 그렇담 올해는 노벨상 수상으로 갑작스레 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이 한꺼번에 늘어나는 일이 없어 좋긴 한데 내년으로 밀릴 뿐이라면 그 또한 걱정이네요ㅎ;;
 
얼굴은 인간을 어떻게 진화시켰는가
애덤 윌킨스 지음, 김수민 옮김, 김준홍 감수 / 을유문화사 / 2018년 2월
평점 :
품절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 반짝. 오이 같은 내 얼굴 길기도 하구나. 눈도 길쭉 귀도 길쭉 코도 길쭉길쭉. 호박 같은 내 얼굴 우습기도 하구나. 눈도 둥글 코도 둥글 입도 둥글둥글”

 

 

‘사과 같은 내 얼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동요를 누구나 어릴 적 한 번 정도는 배워봤을 동요다. 사과 같은 얼굴은 앙증맞고 귀여운 아이들의 얼굴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어릴 적에 동요를 듣고 있으면 정말 내 얼굴이 사과같이 예쁘긴 한지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얼굴 윤곽은 그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아름다운 얼굴에 대한 기준은 시대와 사회마다 다르지만, 호감 있는 얼굴은 얼굴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안정감을 준다. 우리는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보면서, 또 단순히 길을 걸을 때도 무심코 외모지상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아왔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보이는 얼굴이 예쁘냐 아니냐에 초점이 있을 뿐이다. 외모가 사생활은 물론 취업이나 승진 등 인생의 성공까지도 좌우하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외모 가꾸기에 나선다.

 

얼굴이 예쁘면 만사형통인가. 정말 얼굴은 꼭 필요한가. 인간에게 얼굴이 없다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인간은 얼굴을 가지게 되었을까. 왜 얼굴에는 눈, 코, 입이 달려 있을까. 나는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얼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하게 여긴 적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을 어떻게 진화시켰는가》(을유문화사, 2018)는 이러한 궁금증을 해소한 책이다. 이 책은 얼굴의 해부학적 구조뿐만 아니라 얼굴이 탄생되는 진화 과정, 사회적 의미, 언어 능력 등 ‘얼굴이라는 세계’의 역사를 소개한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진화생물학자이다. 저자는 ‘얼굴의 진화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생물학, 유전학, 뇌과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동원한다. 이 책에 다뤄진 내용이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하다.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아니면 서론, ‘결론’에 해당하는 이 책의 각 장 끝부분 순으로 먼저 읽어도 좋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핵심 주장을 미리 파악하고 난 후에 얼굴과 관련된 지식을 총괄하여 정리한 ‘총론’에 해당하는 본문에 접근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얼굴 진화의 핵심은 언어다. 언어는 인간에게 고유하다. 침팬지는 훈련을 통해 몇 개의 말을 배울 수 있지만, 얼굴 근육을 잘 움직일 수 없어 극히 제한된 단어만 발음할 수 있다. 얼굴 근육을 가진 인간은 언어를 통해 대량의 정보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 인간이 가진 얼굴 근육은 지구상의 어떤 동물보다 많다.

 

찰스 다윈은 표정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했다. 다윈의 주장은 얼굴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한 탐구의 시작점이다. 개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것은 막 공격을 하겠다는 신호다. 인간의 표정은 동물처럼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진화는 인간이 표정을 통해 무언가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누군가에겐 직접 그의 입을 통해 기분 상태를 듣지 않더라도 조심하게 된다. 멀리 맹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공포감을 느끼는 표정을 지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불러올 수 있다. 얼굴은 인류 초기에 형성된 진화의 산물이다. 인간은 진화하는 과정에서 초기 인류의 조상에 가까운 유인원에 속하는 호미닌(hominin)과 다른 형태의 얼굴을 가지게 된다. 얼굴에 자란 털이 사라졌고, 주둥이는 짧아졌다. 인간의 얼굴은 손과 입을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됐다. 얼굴 표정과 말하기 행위가 활발해지자 얼굴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뇌의 신경 회로와 언어를 생산하는 또 다른 신경 회로가 서로 연결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얼굴이 완전히 발달하려면 그것을 촉진하는 화학적 물질이 필요하다. 신경능선세포에 의해 분비되는 섬유모세포성장인자8(FGF8)이 없으면 뇌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뇌가 발달하면 소닉 헤지호그(sonic hedgehog, SHH)라는 단백질이 분비된다. 이 물질은 얼굴의 형체를 결정할 뿐만 손가락과 발가락의 성장도 결정한다. 신경능선세포, FGF8, 그리고 SHH 이 세 가지 화학적 물질이 생소할 수 있지만, 알고 보면 인간의 생존에 직결된 신체 구조를 만들어내는, ‘절대로 없으면 안 될 존재’이다. 저자는 얼굴을 형성하는 유전적 기반을 설명하기 위해 타당성 있는 가설들을 제시하고, 비교 검토한다. 비록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나 저자는 지금까지 나온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얼굴 발달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최대 2만 개까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나온다면 책 속 저자의 견해는 수정될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얼굴의 진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간은 상대방의 얼굴을 인식하고, 상대방의 표정을 읽으며, 자신의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자신의 말을 전달한다.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얼굴도 마주쳐야 말이 나온다.

 

 

얼굴을 인식하는 능력은 그 자체로 다가 아니라 흔히 사회적 상호작용의 서막을 여는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서로를 인식한 후에 일반적으로 적절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짧은 말을 주고받는다. 사실상 대부분의 얼굴 표정은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특히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만들어진다. (361쪽)

 

 

사람과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마음도 나누는 행위라는 의미가 있다. 1인 가구가 많아지면서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이 늘고 있다. TV나 스마트폰, 컴퓨터를 앞에 두고 김밥을 먹고, 햄버거를 먹고, 라면을 먹는 사람이 많다. 집 바로 옆에 사는 이웃인데도 얼굴만 몇 번 마주치고, 말 한마디 한 번도 나눠본 적이 없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매일 말을 맞대고 얼굴을 마주 보고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유대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러면 더 많은 소통을 가능케 하는 사회성이 결핍된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사회적 상호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이 사라진 일부 얼굴은 퇴화의 조짐을 보인다. 사람보다는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고, 이웃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 시대 속에 얼굴은 본심을 위장하는 ‘가면’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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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8-05-01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답다.잘생겼다. 라는 미의 기준이 언제부터 생겨나 오늘날 성형열풍으로
이어졌는지, 또 차별의 기준이 되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cyrus 2018-05-01 18:45   좋아요 1 | URL
제가 서론을 책의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쓴 것 같군요. 사실 이 책에 ‘미의 기준’을 다룬 내용은 없어요. 미의 기준은 아주 오래된 시절부터 존재했죠.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를 보면 시대별로 나타난 미의 기준들을 살펴볼 수 있어요. ^^

stella.K 2018-05-01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이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았는가 아닌가가
얼굴에 나타나잖아. 밝기도 그렇지만 표정이 풍부하거든.
그게 얼굴 근육을 많이 써서라잖아.

딴 얘기지만 엊그제 머리 짜르러 미용실 갖는데
헤어 디자이너들은 머리 카락에서 그 사람의 나이를
알아 맞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나더군.ㅋ

cyrus 2018-05-01 21:39   좋아요 1 | URL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해서 친구 이외에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없어요. 그래서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표정 관리를 못해요. 민망한 말을 듣거나 민망한 상황에 처하면 얼굴이 쉽게 붉어지고 그래요.. ㅎㅎㅎ

육안으로 머리카락을 보고 사람의 나이를 맞추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요. ^^;;
 
일곱 원소 이야기 - 주기율표의 마지막 빈칸을 둘러싼 인간의 과학사
에릭 셰리 지음, 김명남 옮김 / 궁리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현대 화학의 발전은 주기율표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소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오래전부터 계속됐지만, 화학의 지식이 폭발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은 바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제작이었다. 지금의 주기율표를 완성하는 데 기여한 사람이 멘델레예프다. 주기율표는 ‘화학의 지도’이다. 이 믿음직한 지도를 가지고 있어야 화학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 주기율표는 원소를 성질의 대칭성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그렇게 성질에 맞도록 배열하다 보면 빈칸이 생기고, 여기에 들어갈 원소를 과학자들이 찾아낸다. 멘델레예프는 주기율표를 만들면서 빈칸을 그냥 두었다.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그는 빈칸에 다른 원소를 억지로 채워 넣지 않았다. 대신에 빈칸에 채워지게 될 원소의 이름과 성질을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주기율표는 이과 계열 학생들에게 암기의 고통을 안긴다. 그러나 주기율표 때문에 고통받는 과학자들도 있다. 《일곱 원소 이야기》 (궁리, 2018)주기율표의 빈 칸을 채우려고 했던 과학자들의 노력과 시련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일곱 원소는 프로트악티늄(Pa), 하프늄(Hf), 레늄(Re), 테크네튬(Tc), 프랑슘(Fr), 아스타틴(At), 프로메튬(Pm)이다. 이 일곱 원소는 멘델레예프가 남긴 빈칸을 차지하고 있다. ‘멘델레예프의 숙제’에 도전한 수많은 과학자들은 빈칸에 채워질 원소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옥신각신했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무언가를 발견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발견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과학을 갖고 놀았다. 그렇지만 일곱 원소를 발견하기 위해 뛰어든 과학자들은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멘델레예프의 숙제는 ‘발견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상, 즉 ‘명예’를 건 숙명의 과제였다.

 

프로트악티늄은 발견되기 전까진 ‘우라늄에 든 미지의 물질 Urx’로 알려졌다. 독일의 화학자 리제 마이트너오토 한, 프리슈 슈트라스만 이 세 사람은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함으로써 원자폭탄 제조의 가능성을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오토 한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독가스 연구에 차출되었다. 실험실에 남게 된 마이트너는 혼자서 연구를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했다. 이 물질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녀는 엄청 고생했다. 마이트너는 한에게 보내는 편지에 연구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악티늄 실험에 쓸 백금 용기들을 주문했으니 며칠 안에는 받을 테고, 받자마자 시작할 겁니다. (…‥) 역청 실험이 지연된다는 데 화내지 마세요. 정말로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요. 나 혼자서는 우리 셋이 함께 실험하던 때만큼 많은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어제는 고무관 3미터를 무려 22마르크나 주고 샀지 뭡니까! 청구서를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죠. (141쪽)

 

 

마이트너는 두 사람이 해야 할 연구까지 혼자서 진행했다. 그러나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섰고, 유대인이었던 마이트너는 교수직을 박탈당한 채 스웨덴으로 도피했다. 마이트너와 한은 서로 떨어져 지내면서도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핵분열 연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마이트너는 자신의 업적이 오토 한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한은 핵분열 발견의 공로로 1944년엔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마이트너가 세상을 떠난 후 1992년에 109번 원소가 발견되었고, 새로운 원소는 그녀의 이름을 따 ‘마이트너륨(Mt)’으로 명명되었다. 사후에 그녀의 업적이 재조명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한 공로는 오토 한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프로트악티늄의 정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마이트너의 외로운 노력을 부각한다.

 

하프늄을 먼저 발견한 공로를 차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과학자들은 ‘총성 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프늄을 발견한 디르코 코스터죄르지 헤베시는 독일의 화학자 닐스 보어가 소장으로 몸담은 덴마크 코펜하겐 연구소 소속 학자였다. 하프늄은 72번 원소인데 코스터와 헤베시가 하프늄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프랑스 학자 팀이 72번 원소는 ‘셀튬’이라고 발표했다. 코스터와 헤베시는 프랑스 학자 팀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였다. 총성은 멈췄으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유럽 국가 간의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랑스와 영국은 연합국을 형성하여 독일과 맞붙었다. 연합국의 과학자들은 전쟁 중립국인 덴마크를 독일과 같은 편으로 여겼고, 코스터와 헤베시의 논문을 재반박했다. 이 ‘진흙탕 싸움’에 그 당시 물리학과 화학을 대표하는 러더퍼드와 보어까지 휘말렸다.

 

 

새 원소를 둘러싼 끔찍한 진흙탕 싸움이 싫습니다. 죄 없는 우리까지 말려들고 말았지요. (보어가 러더퍼드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71쪽)

 

 

하프늄이 정식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영국의 <런던 타임스>는 자기 나라 출신 과학자가 72번 원소를 발견했다면서 자화자찬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국수주의에 취한 영국은 웃지 못할 ‘흑역사’를 남겼다.

 

《일곱 원소 이야기》는 원소를 둘러싼 과학자들의 치열한 경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학, 아니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과학 업적에 대한 관심이 뜨거우면 과학자들은 국수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정치적 접근은 오히려 과학 연구의 진전과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다. 과학자로서의 국수주의적 시각은 연구 자료를 오독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프늄의 발견 사례처럼 ‘국가 싸움에 학자 머리 터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일곱 원소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주기율표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주기율표를 외워야 하는 학생? 아니면 주기율표의 빈칸만 보면 참을 수 없는 과학자들? 지금도 주기율표는 학생과 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화학의 지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당분간 학생과 학자들은 주기율표를 만나면 학을 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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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9 23:34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 시절에 정기(중간, 기말)고사 화학 시험을 친 적이 있어요. 시험 범위에 주기율표가 포함되어 있었어요. 화학 시험치기 전에 진짜 열심히 외운 게 주기율표였어요.. ㅎㅎㅎ
 
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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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아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1]

 

 

공자《논어》 술이(述而) 편에서 자기 자신을 평한 말이다. 학문이란 배우고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옛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사색을 많이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간절하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할 가능성도 높고 훨씬 즐겁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흥미와 열정을 쏟지 않는다면 좋은 글이 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흥미를 갖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 그 무언가에 이끌려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빌 헤이스 올리버 색스가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함께 했던 동성 연인이다(색스는 동성애자다). 빌 헤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글쓰기에 집중한 연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2015년 8월, 어쩌면 그는 곧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올리버는 갑자기 원기를 회복했다. 책상에 앉아 마지막 저서가 될 책의 목차를 불러줬다. 그 일은 ‘죽어간다는 것’의 ‘끔찍한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반가운 기분전환거리였기 때문이리라. 올리버에게 지루함이란 그가 그동안 견뎌온 불편함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2]

 

 

죽는 순간에 유난히 고운 소리로 운다는 백조. 색스의 마지막 책 《의식의 강》(알마, 2018)은 바로 그 아름다운 백조의 노래를 닮았다. 이 책은 색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언론에 발표한 열 편의 에세이를 선별하여 묶은 것이다. 색스는 자신에게 남겨진 길지 않은 삶을 가장 즐겁게 살기 위해 글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글쓰기는 흥미와 열정을 동반한 행위이다. 세상과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 시간에는 약간의 재미를 위한 시간도 있을 것이다.

 

색스의 글은 과학 에세이면서도 독자들에게 각별한 감동을 준다. 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바탕으로 어려운 과학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풀어낸다. 《의식의 강》에서는 인간과 과학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자연과 생명에 경외와 찬미를 바친 색스의 생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진화, 시간, 의식, 인간의 한계 등 심오한 주제를 응시하는 저자의 고독한 성찰은 ‘딱딱한 과학’을 ‘부드러운 문학’으로 바꾸어놓았다(그런데 이 책의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한다. 간혹 매끄럽게 읽혀지지 않은 문장들이 보인다).

 

『의식의 강』은 ‘인간’을 만든 ‘의식’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간만이 시간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현재에 몰두하기보다는 보통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에 연연한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며 언젠가 닥쳐올 죽음 앞에서 불안해한다. 따라서 인간은 현재의 순간순간이 제공하는 삶의 풍요를 그냥 놓치고 만다. 색스가 『의식의 강』 도입부에 언급한 보르헤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간 의식’이라는 강에 몸을 맡기면서 살아가는 ‘시간적 존재’이다. 고독을 느끼는 외로운 인간이나 죽음 앞에 한없이 무력감을 느끼는 인간은 혼자, 따로, 분절되어 살면서 ‘잉여롭게’ 의식을 흘려보내면서 산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의 의식을 주체적으로 활용하여 사상, 믿음, 관습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진다.

 

죽은 영혼은 ‘망각의 강’ 레테(Lethe)의 물을 마시며 이전 삶을 잊어버리게 된다. 망각은 죽음과 연결되며, 기억은 삶과 동의어인 셈이다. 사실 인간은 기억함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축적하고, 시행착오를 줄이고, 해야 할 일을 해낸다. 색스는 인간이란 ‘뇌 마음대로’가 아닌 ‘내 마음대로’ 기억하는 오류투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억을 때로 망각의 강에 흘러 보내는 것도 창의적인 기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기억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취약하며 불완전하지만, 굉장히 유연하고 창의적이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읽고 들은 것’과 ‘타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쓰고 그린 것’을 통합하여, 마치 1차기억인 것처럼 강렬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고,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예술, 과학, 종교가 포함된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3]

 

 

유머는 단순한 웃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웃음의 대상에게 보내는 연민과 동정이 함께 들어 있다. 삶에 대한 애착과 반복되는 자기기만, 한 순간의 짧은 성찰 등이 뒤섞여 불안하고 부조리한 것이 인간의 천성이다. 그러나 건강한 유머에는 그것마저 여유롭게 관조하는 힘이 있다. 《의식의 강》 곳곳에는 건강한 유머가 배어 있다. 특히 『잘못 듣기』라는 글 후반부에 자신의 잘못 듣는 행위를 즐기는 색스의 긍정적인 태도가 눈길을 끈다. 저자의 낙관적인 모습은 좀 더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 바로 그 유머 때문에 《의식의 강》은 독자에게도 낙관의 힘을 보태주고 있다.

 

 

 

 

 

[1] 김원중 역, 180쪽, 《논어》(휴머니스트, 2017)

[2] 《의식의 강》 뒤표지

[3]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억』,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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