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에 ‘카페 스몰토크’에서 인문학 독서 모임이 진행된다. 스몰토크가 ‘레드스타킹’ 공식 모임 장소이기도 해서 두 가지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은 일요일, 월요일 이틀 연속으로 독서 모임에 참석한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인문학 독서 모임에 합류하게 됐다. 요즘 책을 읽으면서 지식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일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경험을 하려는 나 자신에게 놀랄 때가 있다.

 

 

 

 

 

 

 

 

 

 

 

 

 

 

 

 

 

* 토머스 새뮤얼 쿤 《과학 혁명의 구조》(까치, 2013)

 

 

 

 

 

 

 

 

 

 

 

 

 

 

 

 

*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지식플러스, 2015)

* 장대익 《쿤 & 포퍼 :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김영사, 2008)

* 앨런 차머스 《현대의 과학철학》(서광사, 1985)

 

 

 

 

인문학 독서 모임을 위해 읽고 있는 책은 토머스 새뮤얼 쿤《과학 혁명의 구조》(까치, 2013)이다. 4월 22일 일요일에 첫 번째 모임이 있었고, 매주 세 장씩 읽어와야 한다. 지난주(4월 29일)에 있었던 두 번째 모임은 불참했다. 지난주는 너무 바빠서 《과학 혁명의 구조》 4~6장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빠졌다고 해서 《과학 혁명의 구조》 읽기를 포기한 건 아니다. 책을 너무 좋아해서 완독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고약한 성질이 있지만, 뚜렷한 목표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할 때까지 읽는다. 인문학 독서 모임 참석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독서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쿤과 카를 포퍼가 양분하는 과학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내 독서 목표다.

 

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과학은 지속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계기로 인해 혁명의 형태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구 패러다임과 신 패러다임이 투쟁하면서 구 패러다임이 폐기되고 신 패러다임으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A가 주장한 어떤 이론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A 이론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B는 A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B는 A 이론을 새로 검증하고, 끝내 그것과 다른 ‘B 이론’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A 이론이 구 패러다임이라면, B 이론은 신 패러다임이다. 한 시대를 대표하거나 지배했던 A 이론은 전면 부정된다.

 

《과학 혁명의 구조》는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체로 이루어져 있어서 읽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정말 더럽게 재미없다. 물론, 책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을 쿤의 글쓰기 탓으로 돌릴 수만 없다. 개역판인데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다수의 의견이 있다. 여전히 이 책에 한 번에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더러 보인다. 쿤의 과학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처음부터 《과학 혁명의 구조》 읽기를 시도하면 지쳐서 독서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 토머스 새뮤얼 쿤 《코페르니쿠스 혁명》(지만지, 2016)

* 남영 《태양을 멈춘 사람들》(궁리, 2016)

 

 

 

《과학 혁명의 구조》가 쿤의 대표작으로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이 책을 ‘쿤의 첫 번째 저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쿤의 첫 번째 저서는 1957년에 발표된 《코페르니쿠스 혁명》(지만지, 2016)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에 코페르니쿠스가 많이 언급된다.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킨 과학 혁명 중 하나로 봤다. 《과학 혁명의 구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먼저 읽으면 된다. 이 책도 학술서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때문에 재미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보여준 쿤의 과학철학을 미리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집필하기 전에 쿤은 하버드 대학 과학사 강의 준비를 위해 과학사 문헌들을 탐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과학사를 바라보는 ‘기존 관점’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기존 관점’으로 과학사를 서술한 연구가들은 진공이나 중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각각 진공과 중력의 실체를 증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뉴턴의 새로운 견해가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쿤은 수천 년 동안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거 학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쿤은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코페르니쿠스로 이어지는 우주론과 천문학을 추적하여 ‘지식이 축적될수록 과학은 진보된다’는 관점을 반박한다. 그 반박의 입장을 담은 책이 바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수천 년 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구는 견고한 지지대에 의해 떠받혀 있다고 생각해왔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의하면 지구만이 천체 운동의 유일한 중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동설과 대치되는 우주론을 제시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천동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해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처음부터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거부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사실, 그는 반동적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동의했으며 이를 좀 더 간결하게 설명하기 위해 자신만의 우주론을 조심스럽게 제시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멈추기는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성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 덕분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생각이 수천 년 동안 지배해온 굳건한 세계관을 무너뜨릴 거라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죽고 난 후 훨씬 지나서야 후세 사람들은 그를 ‘비범한 인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에 씌워진 ‘신화’를 과감히 벗긴 다음에 과학 발전의 변화 과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또 낙하 실험을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논박한 것으로 알려진 갈릴레오의 업적도 ‘신화’라고 주장한다. 쿤의 견해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책이 《태양을 멈춘 사람들》(궁리, 2016)이다.

 

과학 이론은 ‘무에서 유’로 탄생하는 건 아니다. ‘천재’로 알려진 과학자들도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한 보수적인 세계관을 완강히 거부하지 못했다. 뉴턴은 자신의 과학적 성과가 스스로 일궈낸 창조적 결과물이 아닌 선대의 지식, 즉 ‘거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강조했다.

 

 

 

 

 

 

 

 

 

 

 

 

 

 

 

 

 

* [품절] 스티븐 호킹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까치, 2006)

 

 

때로는 새로운 세계상을 향해서 지적 도약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어쩌면 뉴턴은 이렇게 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거인들의 어깨를 도약판으로 사용했다.” (스티븐 호킹,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중에서)

 

 

 

뉴턴은 ‘거인들의 어깨’가 자신의 지적 도약을 위한 발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의 사다리’를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구 패러다임의 사다리 삼아 올라가 남들이 보지 못한 지식의 세계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나서야 ‘오래된 사다리’를 과감히 버렸다. 과학이 축적되면서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지식이 손실되는 과정(‘쿤의 손실’)[1]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과학자들이 쓰다 버린 사다리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그것은 비과학적이고 엉터리로 판명되었어도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요긴한 도구였다. 과학의 발전은 과거 성과를 긍정하면서 그 위에 한 층을 더 올리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을 부정하는 동시에 사다리 한 층 더 올라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1] 장대익의 책에는 ‘쿤의 손실’을 ‘Khunian loss’로, 장하석의 책은 ‘Khun loss’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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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8-05-03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 혁명의 구조 읽어보고 싶은데 여전히 손을 못 대겠네요. 내용도 만만찮은데다 번역의 질도 썩 좋지 않다고 들어서요...태양을 멈춘 사람들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

cyrus 2018-05-04 16:51   좋아요 2 | URL
오랜만입니다. 캐모마일님. 잘 지내고 계시죠? <태양을 멈춘 사람들>이 강연을 정리한 책이라 어려운 내용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진이 있어서 좋아요. ^^

고양이라디오 2018-05-03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과학혁명의 구조 조금 읽다가 포기했었습니다ㅎ 즐독 완독하세요ㅎ

cyrus 2018-05-04 16:52   좋아요 1 | URL
완독하려면 한 달 걸릴 듯합니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

transient-guest 2018-05-05 0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활발하시네요. 일도 하시고 책도 읽으시면서 이런 모임도 나가서 절차탁마하시니 앞으로도 큰 성장과 발전이 기대됩니다. 사실 저처럼 혼자 책을 읽는 사람은 자기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있을지언정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다른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좀처럼 느껴볼 기회가 없네요. 그나마 알라딘서재가 있어 다행입니다.

cyrus 2018-05-08 12:00   좋아요 1 | URL
예전의 알라딘 서재는 건전한 비판과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사람들 간의 관계가 두터웠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상대방의 생각이 압축된 글을 진지하게 보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오로지 내 생각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이렇다 보니 댓글로 소통을 해도 인간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요.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서재 활동을 하다보면 아쉬움을 많이 느껴요.

페크pek0501 2018-05-07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는 성적 욕구를 억압해서 생기는 문제에 주목했지만, 이 시대는 억압하지 않아도 되니까(다른 걸로 대체할 수도 있고) 그런 문제보다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문제로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시대가 바뀌니 이론도 바뀐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님이 쓰신 맨 마지막 글을 보고 생각났습니다.

cyrus 2018-05-08 12:04   좋아요 1 | URL
죽을 때까지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교과서로 배운 지식은 오래 가지 못해요. 그것을 부정하는 새로운 지식들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새로운 지식을 접하기 위해서 우리 같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건 독서예요. ^^

雨香 2018-05-09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을 때까지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에 백퍼 공감합니다. 몇 년전에 공룡에 대한 독서를 할 때도 그랬지만(이후의 연구결과가 전혀 다른 이론을 내더군요) 요즘 고려사를 독서와 팟캐스트를 통해 공부하고 있는데, 고려에 대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더군요

두해전인가 와우북페스티벌에서 <태양을 멈춘 사람들>의 저자 남영 교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왜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론적으로 완벽해보여야(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으로 봐야하는지?) 받아들인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cyrus 2018-05-09 11:59   좋아요 1 | URL
최근에 이정모 씨의 <250만 분의 1>를 읽고, 제가 어렸을 때 접했던 공룡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우향 님은 남영 교수가 말한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셨어요.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보다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어 했어요. 쿤은 천동설을 바라보는 코페르니쿠스의 관점을 ‘미적 가치’를 되살리려고 한 자세라고 분석했어요.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비판했고,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쿤의 분석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