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아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1]

 

 

공자《논어》 술이(述而) 편에서 자기 자신을 평한 말이다. 학문이란 배우고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옛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사색을 많이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간절하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할 가능성도 높고 훨씬 즐겁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흥미와 열정을 쏟지 않는다면 좋은 글이 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흥미를 갖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 그 무언가에 이끌려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빌 헤이스 올리버 색스가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함께 했던 동성 연인이다(색스는 동성애자다). 빌 헤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글쓰기에 집중한 연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2015년 8월, 어쩌면 그는 곧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올리버는 갑자기 원기를 회복했다. 책상에 앉아 마지막 저서가 될 책의 목차를 불러줬다. 그 일은 ‘죽어간다는 것’의 ‘끔찍한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반가운 기분전환거리였기 때문이리라. 올리버에게 지루함이란 그가 그동안 견뎌온 불편함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2]

 

 

죽는 순간에 유난히 고운 소리로 운다는 백조. 색스의 마지막 책 《의식의 강》(알마, 2018)은 바로 그 아름다운 백조의 노래를 닮았다. 이 책은 색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언론에 발표한 열 편의 에세이를 선별하여 묶은 것이다. 색스는 자신에게 남겨진 길지 않은 삶을 가장 즐겁게 살기 위해 글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글쓰기는 흥미와 열정을 동반한 행위이다. 세상과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 시간에는 약간의 재미를 위한 시간도 있을 것이다.

 

색스의 글은 과학 에세이면서도 독자들에게 각별한 감동을 준다. 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바탕으로 어려운 과학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풀어낸다. 《의식의 강》에서는 인간과 과학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자연과 생명에 경외와 찬미를 바친 색스의 생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진화, 시간, 의식, 인간의 한계 등 심오한 주제를 응시하는 저자의 고독한 성찰은 ‘딱딱한 과학’을 ‘부드러운 문학’으로 바꾸어놓았다(그런데 이 책의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한다. 간혹 매끄럽게 읽혀지지 않은 문장들이 보인다).

 

『의식의 강』은 ‘인간’을 만든 ‘의식’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간만이 시간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현재에 몰두하기보다는 보통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에 연연한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며 언젠가 닥쳐올 죽음 앞에서 불안해한다. 따라서 인간은 현재의 순간순간이 제공하는 삶의 풍요를 그냥 놓치고 만다. 색스가 『의식의 강』 도입부에 언급한 보르헤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간 의식’이라는 강에 몸을 맡기면서 살아가는 ‘시간적 존재’이다. 고독을 느끼는 외로운 인간이나 죽음 앞에 한없이 무력감을 느끼는 인간은 혼자, 따로, 분절되어 살면서 ‘잉여롭게’ 의식을 흘려보내면서 산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의 의식을 주체적으로 활용하여 사상, 믿음, 관습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진다.

 

죽은 영혼은 ‘망각의 강’ 레테(Lethe)의 물을 마시며 이전 삶을 잊어버리게 된다. 망각은 죽음과 연결되며, 기억은 삶과 동의어인 셈이다. 사실 인간은 기억함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축적하고, 시행착오를 줄이고, 해야 할 일을 해낸다. 색스는 인간이란 ‘뇌 마음대로’가 아닌 ‘내 마음대로’ 기억하는 오류투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억을 때로 망각의 강에 흘러 보내는 것도 창의적인 기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기억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취약하며 불완전하지만, 굉장히 유연하고 창의적이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읽고 들은 것’과 ‘타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쓰고 그린 것’을 통합하여, 마치 1차기억인 것처럼 강렬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고,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예술, 과학, 종교가 포함된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3]

 

 

유머는 단순한 웃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웃음의 대상에게 보내는 연민과 동정이 함께 들어 있다. 삶에 대한 애착과 반복되는 자기기만, 한 순간의 짧은 성찰 등이 뒤섞여 불안하고 부조리한 것이 인간의 천성이다. 그러나 건강한 유머에는 그것마저 여유롭게 관조하는 힘이 있다. 《의식의 강》 곳곳에는 건강한 유머가 배어 있다. 특히 『잘못 듣기』라는 글 후반부에 자신의 잘못 듣는 행위를 즐기는 색스의 긍정적인 태도가 눈길을 끈다. 저자의 낙관적인 모습은 좀 더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 바로 그 유머 때문에 《의식의 강》은 독자에게도 낙관의 힘을 보태주고 있다.

 

 

 

 

 

[1] 김원중 역, 180쪽, 《논어》(휴머니스트, 2017)

[2] 《의식의 강》 뒤표지

[3]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억』, 13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