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의 지도 - 흑사병에서 코로나바이러스까지 지도로 보는 유행병과 전염병의 모든 것
산드라 헴펠 지음, 김아림 옮김, 한태희 감수 / 사람의무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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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인류의 생명을 살린 한 장의 지도가 있다. 그 지도는 콜레라 희생자가 늘어나던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존 스노(John Snow)라는 의사는 콜레라의 발병 원인과 경로 전염을 파악하기 위해 죽음의 거리가 된 런던 소호 가를 직접 돌아다녔다. 당시 사람들은 공기 중에 있는 독소가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하지만 스노는 상수도의 오염된 물이 콜레라 대유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집집이 돌아다니며 콜레라로 사망한 주민이 살았던 집을 조사해서 지도에 표시했다. 자신이 직접 만든 지도를 살펴본 스노는 콜레라 환자와 사망자들의 집이 특정 우물 펌프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스노가 의심한 우물 펌프가 콜레라 감염을 일으키는 진원지였다. 지도는 의사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다. 한 장의 지도가 공기를 타면서 거리를 떠도는 저승사자와 같았던 콜레라의 실체를 밝혀주었을 뿐 아니라 죽음의 행렬을 멈출 해법을 보여주었다.


지도에는 넓고 거대한 세상이 축약되어 있다. 그렇지만 스노가 만든 콜레라 지도처럼 질병의 전염 경로도 담겨 있다. 역학 조사를 위해 만들어진 지도는 병균에 맞서 싸우는 의학자들이 반드시 챙기는 전투 장비다. 질병의 지도는 아주 작고 치명적인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질병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려주면서 질병을 대하는 당대 사람들의 인식까지 들려준다. 과거 사람들은 실체와 감염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 사람들의 일상은 죽음과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었다. 보이지 않은 적의 공격을 받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어가는 주변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 전염병 대유행 시대의 흔한 풍경이었다. 전염병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온몸을 죄어오는 고통을 최대한 덜어주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치료법을 찾기 위해 계속 시도했다. 그러나 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고안한 치료법은 한계가 있다. 비과학적인 치료법은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저자는 여러 가지 전염병에 내리 패배하는 인류의 처절한 모습도 보여준다.


질병에 굴복당한 사람들을 살리고, 질병에 언제 포위당할지 모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인류의 도전들은 헛수고로 끝났다. 지금 보면 다시 거론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과거 사람들의 이야기를 왜 알아야만 하는가. 여러번 전 세계를 휩쓴 전염병 대유행 시대를 피부로 느낀 인류의 헛수고는 단순히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전보다 더 강력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염병 대유행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가 다시 봐야 할 역사. 이 역사는 무지한 그들을 비웃을 수 있는 흑역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살 수만 있다면 허무맹랑한 치료법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과거 사람들을 비웃을 처지가 아니다. 우리도 과거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전염병 대유행 시대가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심리는 불안해진다. 전염병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은 사실과 거짓을 차분하게 판단하게 해주는 이성을 닳게 만든다. 이때 전염병과 관련된 가짜 정보들이 여기저기 나타나 이리저리 떠돌게 되고, 이성에 구멍이 숭숭 뚫린 사람들을 찾아 파고든다. 이 사람들이 백신 부작용까지 두려워하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에 현혹되기 쉽다. 저자는 2017년 루마니아에 홍역 환자 수가 전년보다 급증한 사례를 들면서 백신을 거부하는 태도가 전염병 대유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질병의 지도에 소개된 발진티푸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걸린 전염병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난한 발진티푸스 환자들은 사회로부터 강제로 격리되거나 멸시받았다. 질병의 지도는 전염병 대유행 시대의 환자들이 차별받는 현실에도 주목한다. 나병(한센병)과 에이즈 환자들은 살아 있어도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환자들을 위험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전염병 감염 경로를 밝혀내는 작업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환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발진티푸스의 위력을 확인한 어느 의학자는 발진티푸스의 역사는 인류 고난의 역사와 같다고 말했다. 2019년 11월 중순에 시작된 전염병 대유행에 지친 사람들은 의학자의 말에 들어 있는 발진티푸스를 코로나19’로 바꾸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이 생각보다 많다. 게다가 현행 치료법과 백신도 소용없는 변이 병원균이 나타나고 있다. 전염병의 역사는 인류 고난의 역사다. 하지만 전염병 대유행에 인간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살기 위해서 전염병을 전파하는 동물을 찾아내 도살했다. 심지어 전염병을 전파할 가능성이 있는 동물마저 도살 대상이 되었다. 모든 인간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으로 인간을 지구의 유일한 주인이라고 볼 수 없다. 전염병의 역사는 동물 고난의 역사이기도 하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42

 




특별한 치료은 없지만 → 특별한 치료법은 없지만



 

 


* 82




 

 특히 젊은 시절의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1]동백 아가씨(The Lady of the Camellias에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에서 이 질병에 영감을 받았다.


[원문, 원서 82]

 

 notably Alexandre Dumas, the younger, in his novel The Lady of the Camellias and Giuseppe Verdi in his opera La Traviata.

 

 

[1] 《몬테크리스토 백작삼총사를 쓴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동백 아가씨의 작가 뒤마(1824~1895)는 동명이인이다. 두 사람은 이름이 같은 부자(父子) 관계다. 그래서 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아버지를 뒤마 페레(père)’, 아들을 뒤마 피스(fils)’라고 부르기도 한다. ‘père’‘fils’는 각각 아버지와 아들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원서(The Atlas of Disease)‘the younger’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영미권 남성의 이름 뒤에 붙이는 ‘junior(Jr.)’와 같은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알렉상드르 뒤마동백 아가씨의 작가를 아버지 뒤마로 잘못 알고 있는 역자의 오역이다.





* 110




 

 기원전 5세기 히포크라테스의 글에서도 장티푸스처럼 보이는 병에 대한 묘사가 발견된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2]가 열병을 치료하고자 냉수욕했다는 보고에서 그가 앓았던 병이 장티푸스일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원문, 원서 110]

 

 A description of what appears to be typhoid is found in the writings of the fifthcentury BC Greek physician Hippocrates, and a report of Emperor Caesar Augustus of Rome taking cold baths in order to treat a fever is thought to refer to the illness, but it is impossible to be sure.

 

 

[2] ‘Caesar Augustus’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의 칭호이다. 그는 카이사르의 양자 및 정치적 후계자로 지명받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원로원은 초대 황제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존칭을 주었다.

 





* 150





특별한 치료이 없으며 특별한 치료법이 없으며

 


 



* 182




 

검증된 치료은 없음 검증된 치료법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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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01 07: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오랜만에 글 보니 너무 반갑네요~!! 여전하신 날카로운 독서를 하시는군요. 요즘 시기에 적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염병의 역사는 동물고난의 역사라니~!

얄라알라북사랑 2021-12-01 11:18   좋아요 4 | URL
날카롭고 지적인 독서! 새파랑님의 말씀에 하나 더 얹었습니다. cyrus님 반갑습니다!!!

cyrus 2021-12-02 22:20   좋아요 4 | URL
사스가 유행했을 때 사향고양이, 오소리와 너구리가 도살당했어요. 이유는 사향고양이에서 사스 바이러스와 유사한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는 것인데 인간 때문에 오소리와 너구리는 억울하게 떼죽음을 당했어요. 이런 사실을 책을 통해 처음 알았어요. 사람들은 전염병 대유행 시기를 겪으면 사망자 수에 주목해요. 그래서 전염병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도살당한 동물이 있는지, 또 얼마나 되는지 모를 수밖에 없어요.

이하라 2021-12-01 07: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이시네요. 요즘은 리뷰보다는 독서모임에 더 주력하시나 봅니다. 시기적절한 리뷰 반갑게 보았습니다. 리뷰로라도 종종 뵐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cyrus 2021-12-02 22:22   좋아요 3 | URL
독서 모임 활동에 주력하고 싶은데 오미크론 변이 때문에 또 당분간 불가능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

프레이야 2021-12-01 08:0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여전한 대처와 태도, 여전한 차별. 인간과 동물의 고난의 역사.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퍼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특히 뒤마 피스를 잘못 옮긴 건 치명적이네요. 예리하고 정확하신 지적 🙌 최고예요.

cyrus 2021-12-02 22:27   좋아요 2 | URL
프레이야님이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

미미 2021-12-01 08: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에궁 사이러스님!! 오랜만입니다😊

cyrus 2021-12-02 22:28   좋아요 2 | URL
오랜만입니다, 미미님.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

레삭매냐 2021-12-01 09: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얼굴 보기 힘듭니다. 속히 캄온!

stella.K 2021-12-01 13:27   좋아요 3 | URL
여기선 다들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농담입니다.ㅋㅋ

cyrus 2021-12-02 22:29   좋아요 3 | URL
레샥매냐님이 달궁에 컴백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달궁인들이 많습니다. 달궁 온라인 모임할 때마다 달궁인들이 레삭매냐님 얼굴 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ㅎㅎㅎㅎ

페넬로페 2021-12-01 09:5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cyrus님!
여전히 미주알 고주알에 감탄합니다.
전염병으로 온 세계가 꽁꽁 얼어붙은 이 시기에 정말 이때까지의 노력이 허무할 정도입니다^^

cyrus 2021-12-02 22:32   좋아요 3 | URL
안녕하세요. 페넬로페님. 잘 지내고 계시죠? 독서모임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번 연말 독서 모임이 무산될까봐 걱정입니다.. ^^;;

stella.K 2021-12-01 13: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야. 살아 있네. 이제 영영 안 나타날 건가 했지.ㅋ
뒤마가 부자였구나. 20대 초반에 아들을 낳으셨구만.
우리가 주로 기억하는 건 아버지 아닌감?

전염병은 지가 있을만큼 있다 사라질 건가 봐.
백신도 좀 무력하다 싶어.ㅠ

cyrus 2021-12-02 22:50   좋아요 4 | URL
누님, 잘 지내고 계시죠? 무릎은 좀 어때요? 서재 전체 글이 비공개되거나 서재 자체가 사라져버렸다면, 제가 알라딘을 완전히 떠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ㅎㅎㅎ

미미 2021-12-02 22:45   좋아요 2 | URL
헉..사이러스님 지난 글들도 찾아 읽는데 서재 사라지는 일 부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mini74 2021-12-01 22: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방가방가 넘 오랜만입니다. 잘 계시지요. 글이야 당연히 여전히 좋아요. 날씨가 많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고 자주 봬요 *^^*

cyrus 2021-12-02 22:37   좋아요 3 | URL
오랜만입니다. 미니님, 잘 지내시죠? 어제는 진짜 겨울이 왔다는 걸 실감하는 날이었어요. 미니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
 
과학의 여러 얼굴 - 과학자, 가치, 사회 입문
레슬리 스티븐슨.헨리 바이얼리 지음, 이상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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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탈레스(Thales)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보았다. 물은 생명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 안 되는 물질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 안 되는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돈이다. 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탈레스는 다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의 높이를 쟀을 정도로 수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었고, 천체 관측을 해서 일식이 나타나는 시기를 예언했다. 철학자 또는 과학자는 물질적 욕심이 없거나 돈 벌 줄 모르는 서생이라는 선입견을 깬 사람이 탈레스다주변 사람들이 철학을 먹고 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학문이라면서 비아냥거리자, 기후를 관측할 수 있었던 탈레스는 올리브 농사가 잘되는 해를 예상했다. 그런 다음 올리브기름 압착기 소유주에게 찾아가 기계를 빌릴 수 있는 권리를 헐값으로 샀다(여러 개의 압착기를 사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그의 예상대로 올리브 풍년이 들었고, 농부들은 엄청난 양의 올리브 열매로 기름을 짜기 위해 압착기를 구해 나섰다. 결국 모든 압착기의 사용권을 가진 탈레스는 큰돈을 벌었다탈레스는 학문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주는 상황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에 따르면 탈레스는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하려면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러한 탈레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과학자도 경제적 수완이 있으면 돈을 벌 수 있고, 국가를 위해서라면 사회 참여적 발언을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과학자의 모습에서 꼭 빠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와 그녀들이 입고 다니는 하얀 실험실용 가운이다. 틀에 박힌 이미지 때문인지 실험실 소장이 아닌 경영인 또는 회사 CEO가 된 과학자는 상상하기 힘들다과학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윤리와 양심을 무시한 채 실험을 강행하는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같은 나쁜 과학자를 떠올릴 것이다실험실에 상주하는 과학자 이미지가 각인된 대중은 경영인이 된 과학자의 등장을 우려한다. 실험실용 가운이 아닌 정장 차림을 한 과학자들이 낯설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그와 그녀들이 사리사욕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그렇게 되면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과학자와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과학자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와 그녀들이 국가나 공공기관으로부터 받은 지원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일 것이다


이처럼 대중이 생각하는 과학자의 유형은 매우 단순하다. 실험실 안에서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 우리는 어렸을 때 이런 과학자가 되기를 원했고, 과학자라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영화의 악당으로 자주 묘사되는 나쁜 과학자가 현실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다행히 세계를 정복하려는 과학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법인 회사를 차리거나 대기업 간부로 일하면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과학자들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좋고 싫음으로 판단하면 과학자를 이해할 수 없다. 과학자는 여러 가지 얼굴을 동시에 가진, 매우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인간이다.


과학의 여러 얼굴은 하나의 빛에 가까운 과학과 과학자의 유형을 폭넓은 스펙트럼처럼 만들어주는 프리즘과 같은 책이다. 어떤 이는 과학을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 학문으로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은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이 초래하는 각종 부작용(연구 윤리를 무시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 등)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가치중립성부작용에만 초점을 맞춘 채 과학을 바라보면 과학이 우리 일상에 미치는 이로운 점과 부작용을 철저히 구분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 가치중립적 과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과학은 과학자가 과학을 연구하는 동기, 정치, 이념, 경제성 등에 영향을 받기 쉽다이러한 외부적 요인들이 한데 섞인 과학이 형성되거나 과학자가 등장할 수 있다.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과학자가 있는가 하면 국익을 위해 국가가 주관한 연구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학자가 있다.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정치인이나 경영인에 접근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그와 그녀들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연구 성과를 정책으로 전환하기 위해 로비를 펼친다.


과학 이론이 정책으로 전환되는 데 성공하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업적이 되는 동시에 과학자의 평판이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국익을 위해 연구하는 과학자나 정치인과 경영인의 지원을 받는 과학자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인물로 단정해서 안 된다. 좋은 과학자나쁜 과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목록을 만들 필요 없다. 과학자를 딱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과학과 과학자에 대한 이원론적 인식은 흡사 로마 신화의 수호신 야누스(Janus)와 같다. 야누스는 두 가지 얼굴(네 가지 얼굴로 묘사하기도 한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학문이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과학(자)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기도 한다. 과학의 여러 얼굴은 과학과 과학자의 유형을 협소하게 만드는 이원론적 인식을 비판하고, 이것을 분산 시켜 일반 대중이 제대로 보지 못했던 다양한 얼굴의 과학과 과학자들을 보여준다유럽 및 백인 남성 중심의 과학 또한 과학의 여러 얼굴을 보기 위해서 반드시 해제되어야 할 학문이다. 이 책은 비유럽 출신의 과학자와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을 소개한다.


과학의 여러 얼굴은 과학이 인간을 이롭게 해준다는 낙관론과 과학의 부작용에 지나치게 걱정하는 비관론 모두를 비판한다. 다만 낙관론과 비관론 둘 다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려면 대중이 과학이 실생활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점검하고, 과학의 부작용을 비판해야 한다. 과학자는 대중의 관심에 응답해야 한다. 자신의 연구 성과에 대한 비판적 의견에 경청해서 문제점을 수용한다면 이를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과학자들도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실험실에 틀어박혀 연구한다고 해서 돈은 생기지 않는다. 탈레스처럼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야 하든가 아니면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처럼 부업을 해야 한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고,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외국인들에게 군사학과 건축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생계유지와 진리 발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은 과학자들은 정부와 기업의 원조를 외면하지 못한다. 정부와 기업과 손잡은 과학, 즉 경제성이 있는 사업이나 다름없는 거대과학(big science)은 가치중립성과 거리가 멀다이 책은 가치중립성이 없는 거대과학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다라는 명제를 현실에 맞지 않는 통념으로 본다. 그러나 정부나 특정 집단의 권력 확장을 위해 봉사하는 거대과학의 등장을 우려한다. 권력과 완전히 밀착된 거대과학은 통제가 불가능한 집합적 프랑켄슈타인(373)’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거대과학이 위대한 과학을 파괴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독일 나치 정권을 지지한 과학자들은 아리아인 순혈주의에 열광한 나머지 아인슈타인(Einstein)을 포함한 유대인 과학자들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했다. 스탈린(Stalin) 정권의 비호를 받은 소련의 학자 리센코(Lysenko)는 소비에트 체제에 맞지 않는 멘델(Mendel)의 유전법칙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지한 소련 과학자들을 숙청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여러 얼굴을 가진 과학은 진리 탐구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정적이고 순수한 학문이 아니다. 정적인 과학은 상아탑 속에 있다. 과학 또는 과학자가 온실 같은 상아탑에 오래 있으면 사회 현실에 무감각해지며 대중의 비판적 목소리를 감당하는 힘이 부족해진다. 역동적인 과학은 사회와 끊임없이 연결하고,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발전한다. 과학의 정의가 더욱 풍성해지고, 이와 관련한 논의의 범위가 확장되면 누구나 과학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과학일수록 튼튼하고 오래 간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52





영국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시 마녀(Lamia)[주1]



[주1] 라미아(Lamia)는 마녀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괴물 이름이다. 여성의 상반신과 뱀의 하반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 60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용감한 신세계(Brave New World)[주2]



[주2] brave’용감한을 뜻하는 현대 영어가 아니라 중세 영어다. 중세 영어의 ‘brave’멋진을 뜻한다





* 98





                [주3] 아이슈타인 → 아인슈타인




 

* 366





[주4] 매듀 아늘드


[2021년 9월 23일 업데이트] 

아놀드의 원 발음이 아늘드

이 책에 나온 외국어는 외래어표기법에 따르지 않고 원음에 가깝게 표기되어 있다(‘일러두기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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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9-22 2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과학의 영역에까지 넘나 들다니
대단하시네요 정말.

전 소설책만 줄창 읽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사회과학
책들도.

cyrus 2021-09-23 20:25   좋아요 1 | URL
저는 소설을 잘 안 읽게 되네요. 달궁 모임에 참석해야 소설을 읽어요. ^^;;

hillbilly 2021-09-23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자세히 보셨네요.

라미아는 영국에서 보통 마녀라고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멋진 신세계라고 많이 번역하나, 헉슬리는 과학과 기술의 과감한 도입과 과학과 기술로 만들어낸 마약(LSD 등등)의 사용으로 얻는 새로운 감각과 사고를 중시하므로, 그런 것을 채용하는 신세계는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오타 맞습니다.

아놀드가 아니고 아늘드가 원 발음에 가깝습니다.(이 책은 외래어 표기법보다 원 발음에 가깝게 적고 있습니다.)

cyrus 2021-09-23 20: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아놀드’의 원 발음이 ‘아늘드’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과학의 일곱 기둥 - 편견과 차별에 맞서 진리탐구를 위해 투쟁한 아웃사이더들
황진명.김유항 지음 / 사과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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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점  ★★  C






현재 이 책에 한 개의 100자 평이 등록되어 있다. 100자 평 작성자는 목차만 봐도 읽고 싶다라고 썼고, 별점 다섯 개를 줬다. 목차를 훑어보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지는 몇 개의 제목이 눈에 띈다. 불운한 발명가, 열역학 창시자들은 왜 자살을 선택했나?, ‘독가스의 아버지의 부인, ‘양파 마돈나라는 별명을 가진 물리학자, 현대 여성운동의 시조인 스파르타 여성, 피임약의 역사.

 

과학의 일곱 기둥2014년에 과학과 인문학의 탱고를 펴낸 적이 있는 부부 과학도의 두 번째 책이다. 책 제목의 일곱 기둥은 구약성서의 잠언에 나온 구절인 지혜의 일곱 기둥에서 따온 것이다. 과학의 일곱 기둥은 과학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의미한다. 이 책을 쓴 공동 저자가 생각한 일곱 가지 덕목은 다음과 같다. 호기심(curiosity), 창의성(creativity), 열린 마음(open mindedness), 끈기(perseverance), 도전(challenge), 인류애(care for humanity), 진실성(integrity)이다과학의 일곱 기둥은 일곱 가지 덕목을 실천한 과학자들의 삶과 업적을 소개한 책이다. 그 외에 책의 주제와 상관 없는 과학사의 뒷이야기가 나온다


머리말에서 저자들은 첫 번째 책 과학과 인문학의 탱고2015년 세종도서 학술 부문 도서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언급(자랑)했다. 필자는 올해 3월 말에 과학과 인문학의 탱고서평을 썼다. 필자는 이 서평에서 책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따졌다. 저자들은 종이로 된 책이 아닌 인터넷 자료를 참고해서 글을 썼다. 저자들이 자료를 수집하면서 사실 검증을 제대로 안 했는지 책 속에 잘못 알려진 내용이 있었다. 문제는 이런 내용이 한두 개가 아니다이 정도면 저자들은 과학 전도사가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이 부족하다. 그 덕목이란 지식이 정확한지 검증하는 자세이다. 내용이 부실한 과학과 인문학의 탱고》는 세종도서 학술 부문 도서로서의 자격 미달이다. 저자들의 허술한 글쓰기는 책의 질을 떨어뜨린다. 이러한 문제점이 과학의 일곱 기둥에도 나온다.


이 책의 네 번째 글 시대를 앞서 산 진리의 순교자는 고대 이집트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히파티아(Hypatia)에 관한 글이다저자들은 히파티아를 기독교 광신도들의 손에 죽어간 마지막 이교도 수학자로 소개했다. 이처럼 여전히 대다수 학자와 저자는 히파티아가 살해당하면서 찬란했던 과학의 숨통이 완전히 끓어졌고, 종교의 권위가 더욱 막강해져서 학문의 자유가 쇠퇴해진 중세 시대가 들어섰다고 평가한다하지만 히파티아의 죽음 이후에도 중세에 고대 그리스 학풍을 이어받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활동했다. 실제로 히파티아는 기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녀를 따르던 제자나 고위 관료 중 절반은 기독교인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기독교 내 두 분파 간의 정치적 대립에 얽히는 바람에 살해당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급사하는 바람에 대주교의 조카 키릴로스(Kyrillos)와 부주교가 차기 대주교 자리를 놓고 대립한다. 사흘간의 유혈 사태 끝에 키릴로스가 대주교 자리에 오른다. 키릴로스는 부주교를 지지한 세력에게 보복을 가했고, 심지어 부주교를 지지했던 유대인들까지 추방하려고 했다. 키릴로스의 폭압적인 행보에 불만을 표출한 이집트 총독 오레스테스(Orestes)는 기독교인이었다. 총독은 히파티아에게 조언을 구할 정도로 그녀와 친분이 있었다. 히파티아는 대주교와 총독의 갈등에 직접 나서지 않았고, 자신과 친한 총독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레스테스파에 향한 분노를 삭이지 않은 키릴로스파는 총독과 친한 히파티아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결국 그녀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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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21-09-08 07: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억하기로 사이러스님의 최저점은 별 3개 정도였던 것 같은데(잘못 기억했다면 송구스럽습니다 ㅠ) 별 두 개라니 ㅎㅎ 어쩐지 매우 읽고 싶습니다. “세종도서 학술 부문 도서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언급(자랑)했다”란 문장부터 쎄한 느낌이 드네요. <코스모스>에서 고대 그리스 과학의 몰락 중 하나로 노예제를 언급했던 기억이 나는데 확실치 않는 고로 글을 한 번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히파티야의 존재를 처음 알았었어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21-09-20 21:30   좋아요 2 | URL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도 중세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나옵니다. 히파티아가 살해되면서 암흑기가 천 년 동안 지속되었고, 과학 발전이 더디게 되었다고 말이죠. ^^;;

얄라알라북사랑 2021-09-11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종도서˝학술˝부문에 올랐던 [과학과 인문학의 탱고]바로 찾아보러 갑니다. cyrus 꾸준히 글 올려주시고 계셨는데 조금 뒷북 인사드리네요

cyrus 2021-09-20 21:31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많은 책이지만, 읽어 볼만합니다. 저는 이런 책을 사는 대신에 도서관에 빌려서 읽습니다.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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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점   ★★★★   A-






오랫동안 알려져온 진화에 관한 세 가지 오해가 있다. 우리는 세 가지 오해를 진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진화는 인류를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종으로 만드는 진보를 동반한다.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최적의 진화를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둘째, 인류의 조상은 원숭이다. 아주 먼 옛날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였고, 진화를 거듭하면서 지금의 인류가 되었다. 셋째, 진화는 적자생존의 원칙 그 자체다. 자연에 적응한 강한 종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해지고, 그렇지 못한 종의 유전자는 도태되면서 끝내 절멸된다그래서 자연은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규칙이 지배하는 전쟁터 같은 곳이다.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르면 오래 살아남는 종이 강하다. 생육과 번식, 창조를 거듭하며 참으로 많은 것을 발명하고 문명을 세운 인류는 살벌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강자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 속에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이며 인류는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침팬지는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생명체다. 하지만 인류의 삼림 수탈과 지구 온난화로 침팬지의 터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인류에게 포획된 침팬지는 실험용 동물이 되어 희생된다적자생존을 세상 불변의 진리로 보는 세계관은 자연을 마음껏 착취할 수 있다는 인간 중심적 탐욕으로 확장된다. 이로 인해 침팬지는 멸종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이 모든 문제는 진화에 관한 세 가지 오해에서 비롯된다문제는 진화론을 좀 안다는 사람들도 이런 오해를 한다. 따라서 진화와 관련된 막연한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오해를 너무 오랫동안 외면하거나 방치하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심각한 오류로 남는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진화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뿐만 아니라 오로지 적자생존밖에 모르는 얼뜨기 진화론자도 하기 쉬운 오해를 바로잡는 책이다이 책을 쓴 두 명의 저자는 제한된 자원을 독점하기 위해 경쟁을 지향하는 진화 전략보다는 타인과 협력하는 진화 전략에 주목한다이 인류의 생존 전략의 중심에 연대와 공존을 강화하는 다정함과 친밀감이라는 정서가 있다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경쟁에서 이길 정도로 똑똑하고 강해서가 아니라 타인과 소통하고 협력했기 때문이다강한 자만 살아남았는 게 아니라 다정한 자도 살아남았다.


인류는 어떻게 혈연이 아닌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면서 진화했을까? 저자들은 다정함과 친밀감이 진화의 근원임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 가축화(self-domestication) 가설을 제시한다자기 가축화란 말 그대로 야생의 개체가 스스로 인간과 함께 사는 가축이 되는 현상을 뜻한다가장 대표적인 자기 가축화 동물이 바로 개다. 개의 조상인 야생 늑대는 인간을 경계하고, 공격성이 강하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인간이 버린 음식 쓰레기를 먹으면서 살아갔고, 인간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인간의 터전 주변을 맴도는 늑대들은 인간에 대한 경계심보다 친밀감이 강했다늑대가 점점 가축으로 진화하자 공격성이 줄어들었고, 날카로운 이빨의 크기는 작아졌다. 이렇게 성격과 외형까지 완전히 달라진 늑대는 인류의 반려동물인 개가 되었다.


자기 가축화 현상은 인간에게도 나타난다. 우리는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타인을 만나면 친밀감을 느낀다. 또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거나 가치관을 공유하는 타인을 가족 같은 친구로 여긴다. 이러한 관계에서 싹트기 시작한 다정함과 친밀감은 타인을 향한 적대감을 줄어들게 만들었고, 타인과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했다어쩌면 평화주의자는 인간의 자기 가축화 현상을 내세워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평화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기 가축화 현상은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폭력성을 완전히 줄이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같은 무리끼리 어울리고 싶은 친밀감과 결속력이 더 높아질수록 타인과 외집단과의 협력을 꺼린다. 심지어 타인을 차별하고, 공격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인종주의와 우생학은 인류의 진화에 적용된 자기 가축화 현상의 어두운 이면이 낳은 이데올로기다인종주의에 사로잡힌 서구인들은 자신보다 열등한 민족을 분류하여 이들을 원숭이와 같은 미개한 존재로 바라봤다. 우생학은 적자생존의 원칙을 사회에 적용하려는 진화론자들이 열광한 학문이었다. 우생학자와 사회진화론자들은 뛰어난 유전자와 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인류를 선호했다. 그들이 바라본 장애인은 뛰어난 인류에 적합하지 않는 배제의 대상이었다.


특정 민족을 인간이 아닌 원숭이 같은 동물로 취급하던 사람 중 일부는 진화론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하고 특별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확신(착각)했기 때문에 동물을 인간의 조상으로 보는 견해에 분개했다. 하지만 그들은 진화론을 잘못 알았다.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원숭이, 즉 영장류는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친척임을 알지 못했다인간과 영장류는 유인원에 가까운 오래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와 진화했다. 진화는 원숭이가 점점 인간으로 변하는 단선적인 현상이 아니다


네발로 기어가는 원숭이가 두 발로 걷는 인간으로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인류 진화도는 진화의 두 번째 오해를 낳게 만든 주범이다. 저자들은 여전히 생물학 교과서에 실린 인류 진화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188~189쪽)그리고 침팬지와 보노보가 영장류 가운데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87).

 

두 저자는 협력하고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발현시킨 인류의 진화 전략을 찬양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다정함과 친밀감을 지나치게 긍정하는 진화론을 주장했다면, 인류가 영원히 발전할 거라고 믿는 진보사관에 가까운 견해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저자들은 진화의 첫 번째 오해가 파놓은 함정을 피했다.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그 함정에 빠지기 쉽다. 저자들은 인간을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라고 말한다(32쪽). 저자들이 생각한 인간의 정의는 낙관적인 진보의 달콤한 환상이 섞인 진화론에 부합한 인간상과 거리가 멀다.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인류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으면 진화를 진보로 착각할 수 있다. 결국 진보사관으로 둔갑한 진화론은 인간중심주의의 한계에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가장 다정하면서도 무자비할 정도로 잔인해질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철학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진화론을 제대로 안다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대답할 수 있다.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31쪽, 옮긴이 주

 

 야생종이 사람에게 길드는 과정에서 외모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간에게도 사회화 과정에서 공격성 같은 동물적 본성이 억제되고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자기가축화 과정이 나타난다(랭엄 피터슨[주1], 악마 같은 남성, 이명희 옮김, 사이언스북스, 1998 참조).



[1] 악마 같은 남성(Demonic Males)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데일 피터슨(Dale Peterson)이 함께 쓴 책이다. 공저자의 이름을 알아보기 쉽게 랭엄, 피터슨이라고 표기해야 한다.







* 135, 옮긴이 주

 

 괴테의 동명 시 <발라드(Der Zauberlehrling)>[2]를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한 디즈니 장편 3부작 <판타지아>의 마지막 편으로 1940년에 개봉, 2000년에 개봉했다.

 


[2] 135쪽 두 번째 역주는 <마법사의 제자>(The Sorcerer’s Apprentice)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시 제목이 잘못 적혀 있다. 괴테의 시 제목은 발라드(ballade)가 아니라 <마법사의 제자>(Der Zauberlehrling). 발라드는 시 형식을 지칭하는 단어다.





* 267~268


러시아 대통령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yov)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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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8-03 23:3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미주알 고주알 볼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꼼꼼하게 읽으실 수 있는지 입이 쩍 벌어집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철학 진화론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새파랑 2021-08-04 11:44   좋아요 5 | URL
저도 사이러스 님 글 보면 깜놀깜놀 합니다 ^^

cyrus 2021-08-04 22:03   좋아요 1 | URL
인간의 정의는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학문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겠죠? ^^

2021-08-04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04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카넷_디플롯 2021-08-04 13: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섬세한 탐독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 입니다.
‘미주알 고주알‘ 부분은 담당편집자에게 바로 전달했습니다.
저희 책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

- 아카넷(디플롯) 드림 -

붕붕툐툐 2021-08-04 20:56   좋아요 3 | URL
엄훠~ 출판사님(?) 등장!ㅎㅎ

cyrus 2021-08-04 22:09   좋아요 2 | URL
구입한 책인데 책값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stella.K 2021-08-04 2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단 진화론에 대한 좀 반가운 책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적자생존에 너무 많이 쩔어 있었는데 이런 새로운 이론도 나오니 말야.

요즘엔 짬이 나는가 보다. 간간히 너의 글을 볼 수도 있으니.
휴가는 썼나 모르겠다. 요즘엔 어딜 통 못 다니겠으니 다녀왔냐는 물음이 어색하지?ㅋ

cyrus 2021-08-04 22:12   좋아요 3 | URL
야근을 안 하니까 저녁에 책 읽고 글 쓸 시간이 생겼어요. 물론 예전에 비하면 많다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독서와 글쓰기에 집중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휴가는 백신 접종 날짜에 맞춰서 하려고요. ^^
 





통계 역학을 믿으려면 분자를 믿어야 한다.

 

(윌리엄 크로퍼, 위대한 물리학자 3에서, 105)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릴 것이다.” 이 말을 남긴 프랑스의 화가 쿠르베(Courbet)는 대상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회화의 중요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 또는 성서에 묘사된 성인과 천사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눈에 비친 현실을 그렸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원자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명했다. 원자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다. 마흐는 어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하게 해주는 관찰과 실험을 중요하게 여겼다. 원자론자들은 마흐의 견해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원자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세등등한 마흐는 원자론자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으리라. “내게 원자를 보여 달라. 그러면 원자론을 믿을 것이다.”





















* 데이비드 린들리, 이덕환 옮김 볼츠만의 원자: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논쟁(승산, 2003)


* [절판] 윌리엄 크로퍼 위대한 물리학자 3: 패러데이의 전자기학과 볼츠만의 통계 역학》 (사이언스북스, 2007)



 


마흐를 필두로 한 실증주의자들의 공세에 원자론자들은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마흐와 같은 출신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은 원자론을 부정하는 학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들과의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수학자들의 전유물이었던 통계와 확률을 이용해서 운동하는 원자의 이동 방향과 상태를 알아내려고 했다. 볼츠만의 견해에 따르면 기체는 다수의 분자로 이루어졌다. 그는 통계적인 방식을 이용해 기체 속 분자의 성질을 설명하는 기체운동론을 주장했다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맥스웰(Maxwell)을 포함한 선대의 과학자들이 기체운동론을 논의한 적이 있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볼츠만이었다기체운동론은 통계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의 등장을 알리는 중요한 이론이 되었다물론 통계의 중요성을 주목한 볼츠만의 획기적인 발상 역시 원자와 분자의 세계를 믿지 못한 동료 과학자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마흐도 그렇고, 당시 과학자들은 관찰과 실험을 거쳐 원자론이 명백한 이론인지 아닌지 검증하고 싶어 했다.


볼츠만은 실증주의자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원자론과 기체운동론과 관련된 연구에 매진했다. 하지만 진전이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를 괴롭히던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우울증을 견디지 못한 볼츠만은 1906년에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다가 호텔 방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볼츠만이 자살하기 일 년 전인 1905년에 스위스 특허청 직원이 총 다섯 편의 논문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 논문 중에 물 위에 떠 있는 꽃가루가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현상에서 나나타는 브라운 운동(Brownian Motion)’을 다룬 것이 있었다. 브라운 운동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스위스 특허청 직원은 분자의 움직임을 실험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문은 볼츠만의 원자론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문헌이었다. 안타깝게도 볼츠만은 이 논문을 알지 못했다. 


재미있는 점은 스위스 특허청 직원이 좋아한 철학자가 마흐였다. 그 직원의 이름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다. 아인슈타인은 191512월에 논리실증주의의 발전을 주도한 독일의 철학자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이 공부한 데이비드 흄(David Hume)과 마흐의 인식론이 특수상대성이론의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 김현철 강력의 탄생: 하늘에서 찾은 입자로 원자핵의 비밀을 풀다(계단, 2021)




원자핵 속에 있는 입자들을 결합시키는 힘인 강력이 발견되기까지 나온 과학자들의 업적을 보여준 강력의 탄생에 볼츠만이 잠깐 나온다.



 볼츠만은 시대를 한참이나 앞선 과학자였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않던 원자론을 주장했다. 그 이듬해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던 에른스트 마흐가 빈 대학에 왔다. 볼츠만의 원자론을 따르는 사람들과 마흐를 추종하는 실증주의자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23)



나는 강력의 탄생서평에서 볼츠만을 시대를 앞선 과학자로 평가한 저자의 견해를 비판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자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볼츠만은 시대를 앞선 과학자였다. 물론 볼츠만이 원자론을 주장했다고 해서 시대를 앞선 과학자로 평가하는 건 아니다. 볼츠만이 위대한 과학자인 이유는 통계와 확률을 동원해 미시적인 원자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미시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 수학을 이용한 볼츠만의 발상은 당대 물리학자들이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희한한 것이었다(《볼츠만의 원자》 80쪽).


볼츠만의 원자위대한 물리학자 3: 패러데이의 전자기학과 볼츠만의 통계 역학은 볼츠만의 삶과 업적, 그리고 통계 역학을 소개한 책이다. 그런데 볼츠만의 원자에 오자가 있다. 정오표를 남긴다.



* 27쪽: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케인스


[] 케임브리지 대학생 시절에 케인스(Keynes)는 철학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다. 케인스 전기(두 권으로 된 번역본이 있는데, 이 책의 부제는 경제학자 · 철학자 · 정치가)를 집필한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철학자로서의 케인스의 면모를 주목했다. 케인스는 마르크스(Marx)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한 1883년에 태어났고, 1902년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는 20세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 53쪽: 부루크너 브루크너(Anton Bruckner)


* 100쪽: 호이겐스 하위헌스(Huygens)


* 114헨리 캐빈디쉬 헨리 캐번디쉬(Henry Cavendish)


* 134내장암 대장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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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21-08-03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빅뱅 이후 38만 년, 자유전자와 원자핵이 만나 원자들이 형성되는 장면을 읽고 있는데 볼츠만의 이야기를 읽으니 마음이 편치가 않네요. 영면하셨기를. 언제나처럼 리뷰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21-08-03 21:36   좋아요 1 | URL
볼츠만이 우울증으로 고생하지 않았으면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을 거고, 지금쯤 누구나 기억하는 과학자로 알려졌을 겁니다.

새파랑 2021-09-10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9월 당선 축하드립니다~!!

mini74 2021-09-10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09-10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서니데이 2021-09-10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조그만 메모수첩 2021-09-10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이하라 2021-09-10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초딩 2021-09-11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