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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원소 이야기 - 주기율표의 마지막 빈칸을 둘러싼 인간의 과학사
에릭 셰리 지음, 김명남 옮김 / 궁리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현대 화학의 발전은 주기율표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소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오래전부터 계속됐지만, 화학의 지식이 폭발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은 바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제작이었다. 지금의 주기율표를 완성하는 데 기여한 사람이 멘델레예프다. 주기율표는 ‘화학의 지도’이다. 이 믿음직한 지도를 가지고 있어야 화학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 주기율표는 원소를 성질의 대칭성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그렇게 성질에 맞도록 배열하다 보면 빈칸이 생기고, 여기에 들어갈 원소를 과학자들이 찾아낸다. 멘델레예프는 주기율표를 만들면서 빈칸을 그냥 두었다.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그는 빈칸에 다른 원소를 억지로 채워 넣지 않았다. 대신에 빈칸에 채워지게 될 원소의 이름과 성질을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주기율표는 이과 계열 학생들에게 암기의 고통을 안긴다. 그러나 주기율표 때문에 고통받는 과학자들도 있다. 《일곱 원소 이야기》 (궁리, 2018)는 주기율표의 빈 칸을 채우려고 했던 과학자들의 노력과 시련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일곱 원소는 프로트악티늄(Pa), 하프늄(Hf), 레늄(Re), 테크네튬(Tc), 프랑슘(Fr), 아스타틴(At), 프로메튬(Pm)이다. 이 일곱 원소는 멘델레예프가 남긴 빈칸을 차지하고 있다. ‘멘델레예프의 숙제’에 도전한 수많은 과학자들은 빈칸에 채워질 원소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옥신각신했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발견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과학을 갖고 놀았다. 그렇지만 일곱 원소를 발견하기 위해 뛰어든 과학자들은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멘델레예프의 숙제는 ‘발견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상, 즉 ‘명예’를 건 숙명의 과제였다.
프로트악티늄은 발견되기 전까진 ‘우라늄에 든 미지의 물질 Urx’로 알려졌다. 독일의 화학자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한, 프리슈 슈트라스만 이 세 사람은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함으로써 원자폭탄 제조의 가능성을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오토 한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독가스 연구에 차출되었다. 실험실에 남게 된 마이트너는 혼자서 연구를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했다. 이 물질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녀는 엄청 고생했다. 마이트너는 한에게 보내는 편지에 연구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악티늄 실험에 쓸 백금 용기들을 주문했으니 며칠 안에는 받을 테고, 받자마자 시작할 겁니다. (…‥) 역청 실험이 지연된다는 데 화내지 마세요. 정말로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요. 나 혼자서는 우리 셋이 함께 실험하던 때만큼 많은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어제는 고무관 3미터를 무려 22마르크나 주고 샀지 뭡니까! 청구서를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죠. (141쪽)
마이트너는 두 사람이 해야 할 연구까지 혼자서 진행했다. 그러나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섰고, 유대인이었던 마이트너는 교수직을 박탈당한 채 스웨덴으로 도피했다. 마이트너와 한은 서로 떨어져 지내면서도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핵분열 연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마이트너는 자신의 업적이 오토 한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한은 핵분열 발견의 공로로 1944년엔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마이트너가 세상을 떠난 후 1992년에 109번 원소가 발견되었고, 새로운 원소는 그녀의 이름을 따 ‘마이트너륨(Mt)’으로 명명되었다. 사후에 그녀의 업적이 재조명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한 공로는 오토 한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프로트악티늄의 정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마이트너의 외로운 노력을 부각한다.
하프늄을 먼저 발견한 공로를 차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과학자들은 ‘총성 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프늄을 발견한 디르코 코스터와 죄르지 헤베시는 독일의 화학자 닐스 보어가 소장으로 몸담은 덴마크 코펜하겐 연구소 소속 학자였다. 하프늄은 72번 원소인데 코스터와 헤베시가 하프늄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프랑스 학자 팀이 72번 원소는 ‘셀튬’이라고 발표했다. 코스터와 헤베시는 프랑스 학자 팀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였다. 총성은 멈췄으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유럽 국가 간의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연합국을 형성하여 독일과 맞붙었다. 연합국의 과학자들은 전쟁 중립국인 덴마크를 독일과 같은 편으로 여겼고, 코스터와 헤베시의 논문을 재반박했다. 이 ‘진흙탕 싸움’에 그 당시 물리학과 화학을 대표하는 러더퍼드와 보어까지 휘말렸다.
새 원소를 둘러싼 끔찍한 진흙탕 싸움이 싫습니다. 죄 없는 우리까지 말려들고 말았지요. (보어가 러더퍼드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71쪽)
하프늄이 정식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영국의 <런던 타임스>는 자기 나라 출신 과학자가 72번 원소를 발견했다면서 자화자찬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국수주의에 취한 영국은 웃지 못할 ‘흑역사’를 남겼다.
《일곱 원소 이야기》는 원소를 둘러싼 과학자들의 치열한 경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학, 아니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과학 업적에 대한 관심이 뜨거우면 과학자들은 국수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정치적 접근은 오히려 과학 연구의 진전과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다. 과학자로서의 국수주의적 시각은 연구 자료를 오독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프늄의 발견 사례처럼 ‘국가 싸움에 학자 머리 터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일곱 원소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주기율표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주기율표를 외워야 하는 학생? 아니면 주기율표의 빈칸만 보면 참을 수 없는 과학자들? 지금도 주기율표는 학생과 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화학의 지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당분간 학생과 학자들은 주기율표를 만나면 학을 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