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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 최재천의 동물과 인간 이야기
최재천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Prologue  ‘알면 사랑한다.’

 

이 말은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아낌없이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은 오히려 동물들에게 한 수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동물과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를 읽다 보면 ‘이성적인 동물’이라 일컫는 인간세계의 허위의식이 드러난다. 인간이 내세우는 어쭙잖은 명분과 잇속이 얼마만큼 공허한지 자책감마저 들게 만든다. 자식을 더욱 강하게 키우기 위해 냉혹한 백로들, 부상을 당한 동료를 혼자 등에 업고 그가 충분히 기력을 찾을 때까지 떠받쳐주는 고래들의 따뜻한 동료애, 갈매기 부부의 사랑 이야기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진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삶을 조용히 꾸짖는 듯하다.

 


 Scene #1  잔인한, 그러나 아낌없는 사랑   

 

또한 백로들은 같은 어미가 낳은 친형제들끼리 서로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거나,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먹지 못하게 하여 끝내 죽게 만든다. 둥지를 떠나 살아남지 못할 자식은 일찌감치 사라지는 것이 어미에게도 훨씬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냉혹한 동물세계처럼 비춰지긴 하지만 경쟁이 두려워 미리 자기가 기를 수 있을 만큼의 새끼만을 낳는 비겁한 일은 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낭비가 아니라, 둥지 안의 경쟁을 통해 보다 강인한 자식들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이다. 술수를 부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살아가는 백로의 세계는 치열한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열린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인간의 생존법칙을 가르쳐준다.

 

이렇듯 강한 모성애는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말벌의 경우 자식 사랑이 너무나 지나쳐 어느 면으론 잔인하기조차 하다.

 

말벌의 암컷은 송충이나 메뚜기를 잡아 땅굴 속에 묻어두고 그것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그러면 말벌 애벌레들은 알에서 깨어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송충이나 메뚜기 살을 먹고 자란단다. 이때 송충이나 메뚜기가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몸이라는 데 주목할 만하다.
 
말벌은 자신들의 새끼에게 신선한 먹이를 제공해 주기 위해 송충이나 메뚜기의 신경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죽인다는 점이다. 아무리 곤충이라고 하지만 살아있는 신경을 이종(異種)에게 갉아 먹히는 모습은 상상만 하여도 끔찍하다. 이것으로 보아  말벌의 새끼 사랑은 인간과 별반 다른 점이 없는 듯하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음식과 좋은 것들을 자식에게 마냥 해주고 싶은 마음이 곧 어머니의 마음 아니던가.

 

비록 미물일지언정 신선한 먹이를 자신의 새끼에게 먹이고자 벌레들의 일부 신경만 마비시키는 말벌의 잔혹한 행위에서 진정 숭고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 과정은 좀 잔인하지만. 그래도 사랑만큼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Scene #2  사랑은 갈매기 부부처럼

 

5월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부부의 날이 들어있는 관계로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 간의 사랑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되새길 때가 많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는 가정 해체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가족 해체로 가정을 등지고 있는 이들에게 무슨 ‘가정의 달’이 있겠는가? 가정이 무너진 곳에서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모두가 비탄의 눈물만 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교육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가정의 건강성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재화가 아니라, 부부간의 깊은 사랑일 것이다.

 

류시화 시인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라는 시에 나오는 외눈박이 물고기, 즉 비목어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서 암수 한 쌍이 평생을 한 몸이 되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그들의 사랑은 이 세상 그 무엇도 갈라놓을 수가 없는 운명을 안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이다.

 

저자의 동물 이야기에 실제 동물의 세계에서도 부부간의 끔찍한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갈매기 부부의 사랑은 유별나다.

 

갈매기 부부는 거의 완벽하게 열두 시간씩 번갈아 둥지에 앉아 서로 알을 품고, 그리고 나머지 열두시간은 교대로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는다고 한다. 완벽한 남녀평등의 완전한 사랑을 나누는 사회인 셈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비번식기인 겨울에 잠시 떨어져 있다가, 봄이 오면 지난여름 함께 지낸 짝을 찾아서 다시 신방을 꾸민다는 점이다.

 

겨우내 먼 바다로의 긴 여행과정에서 둘 중 누구 하나라도 불행한 사고를 당하여 돌아오지 못할 경우가 생기면, 며칠 씩 짝을 찾아 구슬프게 울어 댈 정도로 금슬이 좋다는 것이다.

 

하찮은 갈매기도 부부간의 정이 이렇게 돈독한 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 인간들이 걸핏하면 이혼을 한다. 부부간의 지극한 사랑만 있다면, 물질적인 궁핍이나 가난은 얼마든지 극복해 낼 수 있다. 또 자녀교육도 얼마든지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라는 단순한 이치를 우리가 너무 쉽게 망각하고 있다.

 


 Scene #3  사랑은 고래를 움직이게 한다

 

고래의 모성애와 우정을 소개한 글은 언제나 읽어도 감동과 여운이 감돈다. 고래는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지닌 포유동물이다. 고래들의 동료애는 다친 고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다친 동료를 여러 고래들이 둘러싸고 거의 들어나르 듯하는 모습이 학자들에게 관찰되었다. 그물에 걸린 새끼나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그물을 물어뜯는가 하면 다친 동료를 위해 고기잡이배를 몸으로 맞서 사냥을 방해하기도 한다.

 

고래는 물속에서 허파로 숨을 쉴 수 있는 젖먹이 동물이다. 그래서 부상을 당해 움직이지 못한 동료 고래가 있으면 물 위로 올라와 숨을 쉬게 해줘야 한다. 이때 친구를 등에 업고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 떠받혀 주는 고래의 모습은 숙연한 감동을 준다. 또한 부상으로 괴로워하는 친구 곁에 그냥 오랫동안 있어 주기도 한다.

 

우리는 고래의 새끼가 그물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할 때 그물을 물어뜯으며 몸부림치는 고래의 감성으로 자각하며 살아야 한다. 눈물을 흘리며 새끼를 구하고자 하는 어미 고래의 처절한 몸부림에서 사랑을 얻는 심성을 배워야 한다.

 


 Epilogue  인간이 동물에게 배워야하는 이유

 

때론 인간과 동물의 직접 비교가 거북살스럽기도 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지 13년이 된 지금, 옛날에 비해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성(性) 보수주의자라면 동물세계에서 동성애가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저자의 지적에 발끈할 법하다. 그는 반문한다. ‘자식이 신부나 수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받는 충격과 동성애자라고 밝혔을 때의 충격이 왜 달라야 할까? 아이를 낳지 않겠는 다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렇다고 저자가 동물의 관점에서 인간을 훈계하거나, 동물이 인간사의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떨 때는 위선적인 인간이 동물만도 못해 울화가 치민다.'고 서슴없이 고백한다. 후기에서 이 책을 ‘인류를 대표해 자연에게 써 올린 반성문’이라고 적은 것도 그런 뜻에서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삶에 조금은 지쳤거나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동물들의 생존방식은 때로는 위안이 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삶의 질을 따지게 되는 시대에 자신의 안위만을 묻고 조급해하기 보다 동물들이 사는 모습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와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서양속담이 있지만 앎을 위한 열정이라면 누가 인간을 당하겠는가. 그런 일을 해야만 했는지를 알고 나면 사랑하게 되는 게 인간의 심성이다. 그러다 보면 생명도 소중한 의미로 우리 곁에 남아 우리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믿음으로 다가온다.

 

각질처럼 딱딱해져 가는 무딘 마음에 한낱 실오라기 희망을 품어본다. 서로를 ‘알려고 노력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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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제국의 발견 - 소설보다 재미있는 개미사회 이야기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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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Scene #1 지구의 진짜 주인은 개미

 

“그들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사람을 건드리면 모두가 그 손길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 퐁텐블로 숲 땅속에 몇 달째 갇혔다가 개미의 도움으로 살아난 사람들을 보고 구조대원들이 나누는 얘기다. 햇볕도, 먹을 것도 없는 땅 속에 갇힌 사람들이 살 길은 개미처럼 되는 것뿐이었다. 전체의 생존 속에서 개인의 생존을 보장받는 개미사회의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

 

소설 속 꾸며낸 이야기일 뿐일까. 개미는 인간사회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개미사회의 철저한 분업과 협업이 보여주는 효율성은 놀랍기만 하다. 조직을 구하기 위해 자폭하는 개미, 여왕개미를 겨냥해 역적모의를 하는 개미, 식물을 보호해주고 대가를 받는 개미 등등. 개미와 인간은 지구의 2대 지배자이지만 개미는 1억 년 이상을 살아왔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이 배워야할 게 더 많을지도 모른다. 지구의 진짜 주인은 개미라고 해도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자랑하는 인간다운 특징들을 동물이, 그것도 기어 다니는 아주 작은 동물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할 사람도 있을 듯하다. 개미가 우화 한 편의 주인공 역할을 맡는 정도라면 봐줄 만하지만, 그 이상 기어오르면 왠지 주제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뤄진 수많은 연구 결과는 개미 사회를 인간 사회의 모형으로 삼을 만하다고 말한다. 개미들은 인간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개미 연구로 알려진 에드워드 윌슨은 더 나아가서 인류학자들이 인간 사회의 특징이라고 열거하는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윤리적 요소들이 사실은 고도의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좁쌀만한 뇌를 지닌 개미에게서 인간과 유사한 것들을 발견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자랑할 것이라고는 심심찮게 자기 파괴 성향을 드러내는 고도 지능과 애매한 의사 전달로 불화를 일으키곤 하는 언어만 남은 꼴이 아닌가.

 

 

 Scene #2 인간과 개미는 '똑같다'라고 말할 수 없다

 

개미 사회의 문화를 우리네 사는 모습과 비교하기도 하고 개미 기업의 경영을 인간의 경제활동에 비춰보기도 한다. 개미 사회는 워낙 복잡하고 조직적이라 문화 경제 심지어는 정치까지 인간 사회와 비교해 분석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개미의 유사성은 겉으로만 닮은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사려 깊은 행동과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개미의 행동이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노예 제도다.

 

 

 

 

 

노예를 구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남의 개미집을 습격해 애벌레를 강탈해온 뒤 노예로 삼는 종도 있고, 아예 남의 개미집에 들어가서 여왕을 죽이고 대신 여왕 행세를 하는 종도 있다.

 

아마존개미는 스스로 생계를 꾸릴 능력을 완전히 잃고 노예 노동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노예들이 돌보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이다. 노예들은 꿀과 죽은 곤충 같은 먹이를 구해오고, 여왕과 새끼를 돌보며, 집을 청소하고 수선하는 등 생명유지를 위한 모든 활동을 도맡는다. 그래서 아마존개미는 정기적으로 근처의 불개미 집을 습격해 여왕과 일개미들을 내쫓고 번데기들을 강탈해온다.

 

그렇다면 개미의 노예제는 인간의 노예제와 얼마나 비슷할까? 차이점이 있다면 개미 사회에서 노예들은 원래 자유생활을 하는 다른 종이며, 인간 사회는 더 이상 노예를 부리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노예 개미는 사실 가축에 가깝다. 노예에게 번식이 허용되지 않고, 노예의 사회조직이 주인의 것과 대등하거나 우월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말이다. 개미의 노예제는 그들의 사회성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 진화의 산물인지 여전히 그 비밀이 풀리지 않았지만 이러한 특징은 개미 사회가 보여주는 수많은 측면 중 하나이며, 개미 사회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한 요인이다.

 

 

 

 

 

 

'개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근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개미는 근면함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로 세뇌를 받으며 자랐다. 솔로몬왕은 잠언에서 우리더러 개미의 근면함을 배우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개미는 우리 인간만큼 부지런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베짱이만큼 열심히 일하는 것도 아니다. 일개미는 하루에 평균 5시간 정도밖에 일하지 않으며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하면서 에너지를 비축한다. 부지런하지 않은 일개미가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빈둥거리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일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도 일하지 않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앞을 내다보며 좀 더 큰일을 위해서 활동을 멈추는 것이다. 쉬는 일개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출동 명령을 기다리는 이른바 대기조라고 보면 된다.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외부 개미와 맞설 수 있고, 개미집에 있는 여왕개미와 알을 보호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고도의 효율성을 이끌어낸 일하지 않는 일개미의 현상을 통해, 고도로 조율된 조직 원리를 읽을 수 있다.

 

 

 Scene #3 일개미와 관료의 차이점

 

요즘 우리 사회는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인적 재난으로 인해 절뚝거릴 때가 많다. 최근에 발생한 세월 호 침몰 사건은 재난 사고에 대한 정부의 부실한 사후조치를 보여줬다. 그동안 수차례 인명 피해의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안전관리 매뉴얼을 정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매번 최악의 결과만 되풀이되고 있다. 정부는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책임자 엄벌과 철저한 재발 방지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효성 없는 사후약방문에 그쳤다. 과연 꼼꼼하게 매뉴얼을 다시 점검하고 책임자를 문책한다고 해서 제2의 세월 호 침몰 사건이 발생할 때 시민의 안전을 보호 할 수 있을까.

 

훨씬 더 엄중한 책임이 공직 조직에 있다. 해양경찰과 해양수산부 공무원들은 두 달 전 세월 호에 대한 특별 안전점검에서 선내 침수방지 장치 등 5개 문제점을 적발했지만, "조치했다"는 선사 측의 말만 믿고 재점검을 실시하지 않았다. 사후 대응조치도 무능하고 혼란스러웠다. 일을 대충하려는 관료주의의 병폐는 '일을 하되 일을 하지 않는' 일개미와 무척 비교가 된다. 우리나라 관료는 일을 하되 일을 제대로 하지 않다. 일개미는 미래의 일을 위해서 휴식을 취한다면, 관료는 업무 연관성도 없는 상황에서 그냥 시간을 보낸다.

 

 

 

 

나는 이 시점에서 개미의 위기관리체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미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고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엄청난 노동력을 대기상태에 묶어두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 전체로 볼 때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개미 사회는 전체 노동력의 무려 4분의 3을 위기관리에 할당하고 나머지 4분의 1로만 사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엄청난 양의 관료의 노동력을 비축할 수는 없지만 효율적으로 현장에 적절하게 투입되고 이에 맞춰 대응할 수 있는 관료가 필요하다. 혼자서 죽어라고 일하는 것과 남들 일하는데 혼자서 빈둥거리는 것은 개미의 덕목이 아니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개미사회에서 보는 뛰어난 협업과 분업의 효율성이다. 그러면 사회 안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심각한 사태에 대비하여 언제든지 어떤 일이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며 인간 이외의 동물을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 간주한다. 특히 ‘벌레 보듯이’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 동물 중에서도 곤충을 더욱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개미를 관찰하는 저자의 시선은 다분히 인간 중심적 관점이기도 한데, 그 때문에 결국 개미의 생태는 우리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게 된다. 개미가 인간보다 먼저 농사를 지은 지구 최초의 농사꾼임을 아는 순간 자신을 최초의 경작자로 꼽는 인간의 오만이 떠오른다. 또 인간에 필적할 정도로 자원을 끌어 모아 사용하기는 하기만 과시적으로 소모하지 않는 개미의 습성은 악착같이 희소한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탐욕과 대조된다. 특히 개미가 베짱이보다 부지런하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일을 하는 사실을 알고 나면 보이는 그대로 믿었던 무지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개미가 작다고 얕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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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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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Scene #1  호기심에서 시작된 책의 탄생

 

과학은 어느 시대라도 대중이 손쉽게,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과 과학 이론의 괴리는 갈수록 커지고, 지금은 과학자들끼리도 역사적 발견과 그럴 듯한 사기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게 됐으니 참 딱한 일이다.

 

빌 브라이슨은 영국에서 여행 전문기자를 오래 했고 썩 재미있고 이름난 여행책을 여러 권 썼다. 그는 양성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쿼크와 퀘이사도 구분할 줄 모르는 ‘과학의 문외한’이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500쪽이 넘는 과학서에 도전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오르면서 이 거대한 산맥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호주 평야에 텐트를 치고 누워 ‘저 수많은 별들은 어디서 만들어져 저렇게 밤하늘에 박히게 되었을까’ 하면서 호기심 어린 밤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누구나 한번쯤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우주는 얼마나 큰 세계이며 그 끝은 어디인가.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지구의 생명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는 이 긴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정말 궁금한 것들, 여러 가지 근원적인 호기심들에 대해 과학자들이 내놓은 답들을 정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이 한 권의 책이 탄생하게 됐다.

 

 

 

 Scene #2  호기심 많은 독자를 위한 과학 안내서     

     

저자의 호기심이 너무나도 많은 탓일까. 아니면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여행자의 기질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것일까. 쿼크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지구 이야기로 돌아오는 등 내용의 구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방향타를 잃고 헤매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을 위해서 빌 브라이슨은 과학 도서들을 탐독하고 자료를 수집할 정도로 많은 준비를 했지만 과학이라는 광범위한 지대를 안내하기에는 ‘과학 여행가이드’로서는 아직 서툰 면이 있다. 브라이슨이 인용하고 참고한 책들은 당장 서점에 가면 구할 수 있는,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과학 저술가가 쓴 것들이다. 좀 더 깊이있는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브라이슨이 인용한 참고도서를 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도표나 사진 한 점도 없으니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끝까지 읽어나가는 내내 머리가 아프게 느껴질지도. 여행을 위한 안내문 혹은 지도라고 할 수 있는 도표와 사진이 없으니 여행가이드 브라이슨의 문장을 잘 쫓아갈 수밖에.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청소년 독자를 위해서 쉽게 쓴 『그림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래서 긴 문장 곳곳에 저자의 유머와 재치가 살아 있다. 원자, 상대성 이론, 유전자, 생명의 진화 과정과 그 과학적 발견은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양성자는 알파벳 i의 점에 해당하는 공간에 5,000억 개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그런 양성자를 10억 분의 1 정도의 부피로 축소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작고 작은 공간에 어떻게 해서든지 대략 30㎚ 정도의 물질을 채워 넣는다고 상상해 보자. 이제 우주를 만들 준비가 된 셈이다.’ ‘지구 45억 년 역사에서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최근에 등장한 것인가를 더 잘 이해하려면 두 팔을 완전히 펴고 그것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책은 크게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의 생성과 구성, 원자의 발견과 운동, 생명의 탄생과 진화, 유인원과 현생 인류의 등장까지 책 이름 그대로 일반인들이 과학과 관련해 궁금해 할만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는 첫 장에서는 대폭발(빅뱅) 이론과 팽창 이론이 등장하고, 이어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열역학, 양자론, 상대성이론, 소립자와 초끈 이론이 나온다.

 

에세이스트가 쓴 글답게 책에는 인간적인 냄새가 묻어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과학에 앞서 사람 얘기다. 과학자는 근엄한 공식과 이론을 만드는 전형적 인물이 아니라, 경쟁자의 성공에 배 아파하고 자기 연구결과에 우쭐대며 종종 괴벽을 가진 인물들로 묘사된다. 원자나 태양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그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때론 집착했던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먼저 발견하고도 영어권 저널에 발표하지 않아 인정받지 못한 과학자들에 대한 연민도 잊지 않았다. 그의 과학사에는 승자만이 살아남는 공식 역사에 가려진 약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배어있다.

 

저자는 다윈과 헉슬리의 동상을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외진 커피숍으로 밀어내고 중앙 홀 계단에 서 있는 리처드 오언의 동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공룡’이란 말을 만든 오언이 얼마나 속 좁고 악랄한 화석연구자였는지를 그는 사료를 뒤져 낱낱이 드러낸다. 판 구조론의 원형인 대륙이동설을 주장한 알프레드 베게너가 지질학이 아닌 기상학자인데다 독일인이란 이유로 그의 탁월한 발상을 반세기 동안이나 애써 묵살한 동시대 지질학자들을 마음껏 야유한다.

 

또 과학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대체 과학자들은 그런 사실들을 어떻게 알았을까’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특장은 지구의 내부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현대인들은 교과서에 실린 지구 내부 그림이 외워야 할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실제로는 아직 지구 내부에 대해 많이 알려져 있지 못하다. 지표면에 직접 구멍을 뚫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지구 밀도를 계산하고 지진이나 지자기 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론해낸 결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자는 밝힌다.

 

 

 

 Scene #3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 그 무엇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누군가 내게 태양계에 관해 물으면, 툭 튀어나온 대답이 늘 그랬다. 항성(태양)을 중심에 둔 행성의 공전, 자전, 태양 빛을 받는 행성과 위성 간 그림자가 빚는 현상 등 여러 이야기가 대답에 내재됐으되 기계적으로 ‘학창시절에 외웠던 것’을 꺼냈다.

 

과학 선생님께서 외우기 쉬운 방법이라며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직접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험에도 나올 거다”는 각인 작업과 함께였다. 명왕성이 행성 자격을 잃었으니 지금은 ‘수금지화목토천해’겠다.

 

뇌리에 ‘그림 한 장’이 떠오른다. 태양을 중심에 둔 채 태양으로부터 떨어진 거리 순서대로 행성을 늘어놓은 그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본 우주 그림은 속임수다. 종이 한 장에 모든 것(태양계)을 그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속임수.

 

충격이었다. “실제로 상대적인 크기까지 고려해서 태양계를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저자의 서술이 부른 충격이라기보다 늘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되뇐 나의 입버릇에 깜짝 놀랐다. 타성, 오랫동안 새로움을 꾀하지 않아 나태하게 굳어진 습성에 놀란 거다. 처음 놀랐을 때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라고 마음을 다독거리려 했다. 쪽을 넘길수록 ‘존재, 그 무엇’은 너무 무거워 가슴 깊숙이 가라앉았다. 과학의 방대한 역사 속에서 깨달은 것은 인간은 다만 우주와 자연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엄청난 행운을 얻은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소박한 진실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자들은 자연의 신비 대부분을 밝혀냈다는 만족감에 젖었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 오늘도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인간의 끈질긴 연구와 탐사를 기다리고 있다. 작은 만족과 순간의 좌절에 머무르지 말고 줄기차게 앞으로 나아갈 일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라는 시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본다 /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고 노래한다. 이렇게 한 알의 모래와 한 송이의 꽃을 관찰하고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 과학은 시작되었고 그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간 과학자들은 자연과 우주의 신비에 감탄한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질문과 상상력을 통해 발전해 왔으며 과학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지한 인간에게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차츰 그것은 극복해야 할 삶의 조건으로 바뀌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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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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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환자의 결함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능력을 거의 간과했다. (339쪽)

 

 

 


 Scene #1  눈은 멀쩡한데 아내가 모자로 보인다면... 

 

우리의 일상에서 시각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 오죽하면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까지 생겼겠는가. 이처럼 중요한 ‘보는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리의 신체 기관은 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눈이 멀었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눈과 더불어 뇌가 있기 때문이다. 눈이 하는 일은 바깥세상의 이미지를 카메라처럼 찍는 것뿐이고 그 이미지를 뇌로 보내서 해석하는 과정이 진행되지 않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어느 날 뜻밖의 사고로 뇌를 다쳤다고 가정해 보라. 손상된 부분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인지 기능에 이상이 온다. 사물에 대해 인식이 안 되거나 보이는 사물에 대해 시각적으로는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의학에서 가장 낙후한 분야가 뇌와 관련된 각종 질병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인간의 뇌는 거대한 우주와도 같지만 뇌신경에 관한 한 달 착륙 수준에 도달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뇌신경은 머리와 마음이라는 분리할 수 없는 두 영역이 교차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첫 사례로 소개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시각인식 불능증 환자다. 환자의 직업은 음악교사.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기억력, 유머 감각의 소유자다. 시력은 바닥에 떨어진 바늘도 쉽게 찾아낼 만큼 좋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고 사물의 구체적인 형태를 변별하는 능력도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검사를 마친 그는 손을 뻗어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신의 머리에 쓰려고 했다.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뇌에서 시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역에 부분적인 손상을 입은 까닭에 자신의 아내와 모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당혹스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 눈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므로 사물의 부분적인 특성, 예컨대 뾰족하다거나 둥글다거나 길쭉하다거나 노란색이라거나 하는 것들은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전체적으로 사람의 얼굴인지 아니면 모자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옷을 갈아입는지 그의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늘 두는 장소에 남편의 옷을 갖다놓지요. 하지만 뭔가 방해를 받아 맥이 끊기면 완전히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해요. 그이는 입으려던 옷을 뭔지 잊어버려요. 자기 몸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답니다. 하지만 노래를 흥얼거릴 때 만큼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갈아입지요.”

 

이 환자의 경우, 음악이 시각을 대신하고 있었다. 처방은 의외로 간단했다. “더욱 적극적으로 음악에 기대어 사는 것이 권고됨.”

 

 

 

 Scene #2  과잉과 결핍에서 오는 새로운 삶의 활력

 

비정상은 두 가지의 모습을 가진다. 하나는 결핍이고, 또 하나는 과잉이다. 생리학과 병리학은 이를 모두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정의한다. 장애는 대부분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예컨대 나에겐 걷거나 뛸 수 있는 운동 신경과 감각이 결핍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적인 결핍뿐만 아니라 호르몬과 에너지의 과잉 상태로 인한 장애도 있다. 대표적으로 틱 장애로 알려진 튜렛 증후군이 이에 해당되는데, 정신 의학은 이를 “시상, 시상하부, 변연계 그리고 편도에 일어난 임상학적, 병리학적 장애”로 설명한다.

 

틱 장애를 가진 환자 레이는, 틱 장애로 인해 거칠고 돌발적이며 신경질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레이는 이 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파민 수치를 낮추는 할돌(Haldol)을 처방받는데, 이후 틱 장애는 완화되었지만 정상적인 성격을 가진 자신의 모습이 진정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는 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틱 증상이 치료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라며 낙담한다.

 

일반 의사라면 이쯤에서 치료가 끝났을 터. 하지만 저자는 외적 질환을 고쳤어도 레이가 마음의 병을 얻었음을 알아봤다. 사실 병은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지만 장점도 있었다.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려는 의사들은 이들이 경험하는 과잉 상태가 건강한 상태에서 발현되는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기에 약물 등을 통해 정상 상태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질병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며, 병의 산물로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이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 환자는 병리 상태를 행복한 상태로 경험하며, 병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다.

 

튜렛 증상 충동으로 두들기던 드럼은 수준급의 재즈 연주로 발전해 인기를 모았다. 남들보다 매서운 반사신경은 탁구에서 빛을 발했다. 하지만 약물 투여 뒤 레이는 평범해졌다. 무엇보다 병을 앓는 동안 형성됐던 그의 유머와 사나이다움, 강한 정신력이 무뎌졌다. 그렇다고 회사마다 해고당하는 원인이 된 질병을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 저자와 환자의 결론은 ‘주중엔 약물 투여, 주말엔 중지’였다. 레이는 이후 평일엔 ‘진지하고 차분한 시민’으로, 휴일엔 ‘경박하고 열광적이고 영감에 가득 찬 인물’로 이중생활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장애는 결핍 상태이기에 이를 행복한 상태로 경험하기도 힘들며, 장애를 긍정적으로 이용하기도 힘들다. 결핍으로 인한 장애는 다양한 물리적인 고통을 수반할 뿐 아니라, 사회적, 제도적 제약으로 인해 불쾌한 상태를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의 경험틀 내에서 장애는 실존적으로 개개인마다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장애는 고통과 불쾌함을 가져다주지만, 다른 측면에서 장애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다양한 경험들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Scene #3  뇌에 대한 경이로운 시선

 

저자는 단지 필력만 뛰어난 과학자가 아니다. 환자를 인간으로 대하는 훌륭한 의사이다. 그는 환자를 볼 때 질병에만 관심 갖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 받고 병과 맞서 싸우는 주체’를 보려 한다. 병의 치료보다 인간을 돕는 것이 의사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신경 장애 환자들이 묘사하는 세계는 불가사의하다. 그들의 인생에는 탁월한 소설적 요소가 숨어 있다. 어떤 고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의 원형으로 이 책에 언급된 환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엄청난 재앙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적응하거나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때로는 괜찮았을 때보다 더 완전해진 삶을 살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로 끝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강인한 극복의지다.

 

올리버 색스는 정신세계의 모호한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두뇌의 세계에 대한 성찰을 꾀한다. 그런 다양한 타자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많은 것들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신체와 정신,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해주고 있는 신체기관인 뇌에 대해서 경이로운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독자는 삶 자체에 대한 경외로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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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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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하늘에서 우주의 과거를 보다

 

태양은 하루 종일 서쪽을 향해 조용한 항해를 계속하면서도 가슴속 깊이 묻어놓은 용광로에 풀무질을 한다. 힘겨운 풀무질로 녹여낸 이글거리는 황금색 쇳물을 응축시켜 아무도 모르게 내면 깊숙이 숨겨둔다. 이윽고 서편 하늘에 도착하면 아련한 청산들이 겹겹으로 웅크려 잠들어 있는 곳에 허공과 청산의 계곡마다 쇳물을 흩뿌린다. 눈물겨운 석양을 하늘 가득히 채워 놓고는 황혼이 그 검은 장막을 내리기 전에 서둘러 서산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진다.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순간에 서쪽 하늘에 뜨는 낭만적 노을은 지상에서 인간의 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일종의 우주 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반복되는 이 노을 현상은 태양이라는 거대한 항성의 인력에 종속돼 지구가 궤도를 이루고 주기적으로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는 날까지 이루어 질 것이다.

 

천문학적인 개념으로 볼 때 애초의 태양은 태양계와 비교적 가까운 오리온좌에서 태어났다. 은하계 안에서는 가장 큰 우주의 가스와 먼지들이 복잡하게 압축된 오리온성운 속에서 형제들과 떼를 지어 함께 탄생한 것이다. 오리온성운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면 지금도 어둡고 침침해 보이는 구름의 내면 깊숙이 새로 태어나고 있는 거대한 항성들,즉 태양의 동생들이 찬란한 빛으로 눈부시게 발광하고 있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 항성들은 오리온성운을 뛰쳐나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길을 떠난다.

 

이렇듯 하늘을 보는 일은 우주의 과거를 보는 셈이다. 낮에 우리에게 밝은 빛을 주는 태양은 이미 8분전에 태양을 떠난 것이다. 지금 보는 북극성은 800년 전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은하 안드로메다는 220만 년 전의 모습이다.

 

 

 

 Scene #2  우리는 별의 자녀

 

인류는 명백히 우주의 산물이다. 먼저 인간과 생명체를 이루는 원소들이 모두 별의 폭발에서 만들어졌다. 초기 우주는 수소와 헬륨뿐이었지만 별이 핵융합을 하다 신성(또는 초신성) 폭발로 생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반복함에 따라 탄소 산소 질소 마그네슘 황 등 무거운 원소가 생긴다. 칼 세이건은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 성분인 철 등 원자 하나하나가 모두 별에서 합성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라고 말한다.

 

태양도 주변 초신성 폭발 후 탄생했을 것이며 태양으로부터 자외선이 닿아 지구 최초의 유기물이 생겨났을 것이다. 공룡이 사라진 덕분에 포유류가 번성하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하게 된 것도 우주적 환경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실 우주를 들여다볼수록 인간의 존재는 경이다. 거꾸로, 인간의 눈으로 우주를 바라보기에 경이롭게 보이는 측면도 없지 않다. 예컨대 인간은 기적적으로 낙원 같은 지구를 만난 것이 아니라 지구 환경에 적응한 결과물이다. 지구에 산소가 풍부해진 것은 인간에게는 행운이지만 산소 없이 살던 미생물들에게 재앙이었다.

 

화성인 논란은 또 어떤가. 로웰 천문대를 세운 퍼시벌 로웰은 화성 표면을 가로지르는 선들이 거대한 운하라고 생각했고, 행성 규모의 토목공사를 벌이는 고등한 지적존재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물론 순전히 그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우주를 탐사하고 관측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화성에 이끼 같은 생물을 살게 하고, 덕분에 지표가 어두워져 더 많은 태양빛을 흡수하고, 얼음이 녹고, 얼어붙었던 대기가 풀려나 언젠가 인류가 화성에 거주하게 되리라는 상상은, 사람의 지적 능력이 아니라 꿈꾸는 능력에서 나온다. 화성인이 침공하는 공상과학과, 화성인이 산다는 로웰의 생각이 없었다면 과연 화성탐사선 프로젝트가 현실이 됐을까.

 

언젠가 화성의 극관(極冠, 화성의 극에서 얼음으로 덮여 하얗게 빛나 보이는 부분)에서 녹아내린 물을 적도 지대에서 받아쓰도록 거대한 운하를 건설할 날이 올지 모른다. 그 날이 오면 우리가 바로 ‘로웰의 화성인’이라고 세이건은 말하고 있다.

 

 

 

 Scene #3  만약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무한의 공간’인 우주를 탐험하는 지적 존재는 과연 인류뿐일까? 인간만이 고등한 기술을 갖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까? 외계인과의 만남은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환상’이다. 그러나 소수지만 어른이 돼서도 이 꿈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이건은 조바심치며 외계인과 조우를 고대하는 아이와도 같다.

 

전파는 외계의 존재를 확인하는 수단인 동시에 인간의 존재를 외계에 알린다. 지구에서 유래한 전파신호는 빛의 속도로 전 우주로 퍼져나간다. 세이건은 언젠가 외계 문명이 해독할지도 모를 인간의 TV 전파를 우려하기도 한다. 인류라는 존재는 고작 아무 생각 없는 광고, 끊임없는 국제 분쟁, 지지고 볶는 가정사에 얽매여 산다니. 도대체 외계 문명인이 인류를 뭘로 보겠는가.

 

외계 생명체의 모습이 지구인과 닮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러 유기체에 분산 존재하는 지적 개체’ 같은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인간처럼 상온에서 전기신호를 주고받는 뉴런이 아니라 저온에서 작동하는 초전도 소자 뉴런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그들은 1,000만배나 빠른 속도로 생각을 하고, 동떨어진 뉴런끼리도 전파를 주고받을 것이다. 그래서 분신들이 여러 행성에 흩어져 존재하면서 하나의 총체적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우주의 주인이 인간만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우주적 시야에 걸맞은 윤리를 따라야 한다. 예를 들면 고래와 같은 지구의 지적 생물을 저잣거리에서 파는 물건으로 취급할 게 아니라 이해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고래와 돌고래는 사람만큼이나 다채로운 언어를 구사한다. 긴수염고래는 20㎐의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이처럼 낮은 주파수는 바다에서 거의 흡수되지 않아 지구 정반대편의 고래와도 대화할 수 있을 정도다.

 

보이저 호는 이 광막한 우주에서 얼마나 오래 날아가야 생명체를 만날 수 있을까. 아마 못 만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레코드판에 수록된 정보의 수명은 10억 년은 된다고 하니, 그 사이에 새로운 우주 생명체가 탄생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후손은 외계 지적생명체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우주의 저쪽 그 먼 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실제 풍경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현란한 광경이다. 현대의 최첨단 망원경으로서도 감지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로서만 상상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의 우주의 풍경들을 점토를 빚어 형상화하는 것이 천문학자의 역할이다.

 

세이건은 우리에게 우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당당한 우주의 일원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 '모험'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인간은 이제 겨우 달에 두 발을 디뎠을 뿐이다. 화성까지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것도 아직은 힘겨워 보인다. 하지만 우주로의 모험이 시작된 이상 인간 종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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