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프롤로그가 끝나고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이런 그림이(책에는 흑백으로) 실려있다.



이 그림 밑에는 이런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Dan Jones|Cable Street Anniversary. 1936년 영국 파시스트들이 유대인 지역을 관통하여 행진하려는 것을 50만 민중이 막아 낸 일을 기념하는 축제.



나는 이 축제가 뭔지 궁금한 마음에 검색창을 열고 검색해 보았지만 결과를 찾아낼 수 없었다. 유래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내가 검색 병신이라서 못찾는 것 같긴 한데...어쨌든 저 짧은 설명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50만 민중이 막아냈다는 것이. 그들이 연대하여 막아냈다는 사실이.


사실 끝까지 다 읽고나면 이 책의 저자인 류은숙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대단한 인권운동가인지 알 수 있지만(덧붙여진 유해정의 글로 알 수있다), 정작 류은숙 본인은 자신이 인권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었고 서툴렀는지를 고백한다. 좀 더 나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그녀가 고민해왔던 순간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는데, 그건 우리 모두가 의심을 품고 생각을 해보았던 고민이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를테면, 프롤로그의 공포영화에 관한 부분은 공포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의심을 가져보지 않았을까.



나는 겁이 많아서 공포영화를 못 본다. 아찔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붙잡고 고개를 처박을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을 때만 간혹 곁눈질로 몇 편을 봤을 뿐이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 안 가는 공통적인 장면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정말 무서운 상황인데 등장인물들이 꼭 "난 이리 가 볼 테니 너는 저쪽으로 가 봐." 라고 하고는 흩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무서울 때는 서로 꼭 붙어 있는 게 정상이지, 왜 째지는 거야? 당장 괴물이나 괴한이 나타날 상황인데 저건 말도 안 돼!' 이러는 것은 내 생각을 뿐이다. 그렇게 흩어놔야 피 흘리는 희생양이 생기는 것이 잔혹공포영화의 여전한 규칙이다. 이와 반대로, 사소하지만 무섭기 때문에 살고 싶어서 꼭 붙어 있는 것이 연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pp.14-15)



세상이 공포영화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 안의 등장인물들이고.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난폭하고 잔인한지 잘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와 너를 분리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이 부분에 이르러서야 들었다. 연대의 중요성을 가장 잘 설명한 글이 바로 이 글이 아닐까. 


이 글을 읽으며 여러 군데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바로 내 생각이 그러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저 막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부분들이다.



상상의 요구만으로도 지레 겁먹은 친구들이나 나 자신도 방어 본능에 따르고 쿨한 그런 관계보다는 당연히 더 깊고 따뜻한 관계를 원한다. 사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고 살면서는 늘 허전하다. 적당한 거리라는 것은 상상의 위치이지 현실의 위치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이런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상사가 좀 많은가. (pp.21-22)




1996년, 나는 런던 앰네스티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날 펴 본 신문 1면에 활짝 웃는 여성 네 명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평화의 여성들, 무죄 선고 받다."라는 제목에, 관심을 확 잡아끄는 내용이었다. 그녀들은 그해 1월 영국의 방위 산업체인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의 호크 전투기에 침입해 주요 조종 장치를 망치로 때려 부쉈다. 그 전투기가 인도네시아에 수출돼 당시 인도네시아의 식민지였던 동티모르의 민간인 살해에 이용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02년에 비로소 독립국이 된 동티모르의 당시 인권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나는 눈물 속에서 태어났고 눈물 속에서 자랐고 눈물 속에서 죽을 것입니다."가 당시 동티모르 인권 보고서의 제목이었다. 30년 가까운 식민 치하 속에서 제목 그대로 대량 학살 등 갖은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다. 호크 전투기의 조종 장치를 부순 여성들은 조종석에 동티모르의 학살 희생자 사진을 붙이고 자신들이 한 일을 언론에 전화로 알렸다. 이들은 재판에서 동티모르의 민간인 대량 학살에 사용될 호크전투기를 무장 해제시킨 자신들의 행동은 유엔의 '집단살해방지협약'에 비추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영국 정부가 그런 학살 행위를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온갖 평화적 노력을 다 기울였고, 그 뒤에야 전투기를 무장 해제하는 직접행동에 나서게 됐음을 증언했다. 그 결과 법원은 "더 큰 악을 방지했다."는 이유를 들어 다수결로 무죄를 선고했다. (pp.43-44)




 몇 해 전 한국의 나이지리아 대사관 앞에서는 당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환경운동가 켄 사로-위와 Ken Saro-Wiwa의 구명을 위한 집회가 있었다. 초국적 기업 셀과 그 기업과 결탁한 군부의 석유 채취와 인권 탄압을 고발한 것이 켄의 죄명이었고, 전 세계적인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켄의 사형은 집행됐다. (p.128)




자기 사유를 실천하는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런 만남의 끈 가운데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가족과의 집단 상담으로 연대란 무엇인가를 보여 준 정신과 의사 정혜신 씨도 있다. 정혜신 씨와 고문의 경험을 나눴던 강용주 씨와 고문 피해자들은 쌍용자동차의 상처와 자기들의 상처가 서로 통하는 것이라며 고문 피해에 대한 국가배상금을 지원금으로 썬뜻 내놓았다. 그런 연대를 통해 싸용자동차 노동자들과 만나 세상에 자기 상처를 내보이고 함게 어루만지는 일이 생긴 것이다. 또, 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평택에서부터 물집이 터져 가며 걸어서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서울에 차려진 쌍용자동차 관련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지키러 올라왔다. (p.157)





나는 주인이니 주체니 하는 단어보다 '자기'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스럽게 부르는 말로 느껴져서이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없는 연대는 있을수 없다. 기껏해야 머릿수를 채우고 세를 과시하려는 동원일 것이다. 내가 고유한 자기를 느끼지 못하고, 자기를 초라하고 보잘것없다고 학대할 때 그렇지 않다고 야단 떠는 이들이 있기에 다시 웃게 된다. 나에 대한 모욕에 같이 싸워 주는 다른 자기들이 없으면 나를 지킬 자신이 없다. 그런 자기들이 만나서 서로의 낯을 세워 주는 것이 연대하는 개인주의일 것이다. 어쩌면 시인 정희승의 <숲>이라는 시가 그 어떤 기나긴 설명보다 이를 잘 드러내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pp.160-161)




사실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그리고 이 책의 저자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처럼 인권을 위해 운동을 할 자신은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은 분명 들지만, 내가 그 운동에 뛰어들 자신은 없다. 나는 아직은 그런 사람인가보다. 사람답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고 그들이 살만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이기보다는, 내 자신 하나를 위해 더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 척 보기에도 힘들어보이는 길을 갈 생각이 좀처럼 없는걸 보면,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가진 게 많은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서투른 연민을 가진 자일지도 모르고, 동정은 하되 공감은 하지 못하는 자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눈물 몇 번 흘린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닌데. 입맛이 쓰고 마음이 편치 못하지만 다시 슬쩍, 고개를 돌리게 된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내 주변과 이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과 태도가 조금쯤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아씨..머릿속이 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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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0-2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진정 '철'이 드는 순간은 내가 아닌 남을 자신을 봤던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 라고 생각해요.

다락방 2013-10-24 16:55   좋아요 0 | URL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가도 계속해서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되곤 해요. 사람은 죽을때까지 배워야 할 게 엄청 많은 것 같아요. 완벽하게 철이 들 순 없을것 같아요.

감은빛 2013-10-2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able Street Anniversary'로 검색하면 영어 페이지가 몇 개 나오네요.

http://www.mirror.co.uk/news/uk-news/75th-anniversary-of-battle-of-cable-street-83081
http://www.demotix.com/news/855376/battle-cable-street-75th-anniversary#media-855343
http://www.qmul.ac.uk/media/news/items/56775.html

짧은 영어실력으로 살펴본 바를 간단히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독일 나치의 영향으로 영국에서도 오스왈드 모슬리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반 유대주의를 바탕으로 힘을 모으고 있었다.

1936년 10월 4일 모슬리는 7천명의 파시스트들과 런던의 이스트 엔드 거리를 가로질러 행진을 할 예정이었고, 4천명의 기마경관과 1만명의 경찰관이 이를 호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30만명 이상의 민중이 길을 막았고, 경찰은 길을 뚫으려고 애썼으나 쉽게 뚫지 못했다. 이때 경찰청장 필립 게임 경이 모슬리에게 돌아가던가 살육을 감수하던가 해야겠다고 말했다. 결국 파시스트들은 치욕적으로 돌아섰다.


저도 이 책을 읽고 모자라는 글 하나 썼던 기억이 나네요.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법이지만,
그게 다락방님이어서 더욱 반갑습니다.

감은빛 2013-10-2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은 포석(보도블럭)과 낡은 침대(매트리스)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의자 다리와 썩은 야채로 무장했다."
라는 기사 부제가 무척 인상적이네요.
다락방님 덕분에 흥미로운 사건을 하나 알게 되어 좋습니다.
(왜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이 사건 혹은 이 그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요?)

다락방 2013-10-24 16:58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고 감은빛님이 쓰신 글을 안그래도 읽었던 참입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고 어떻게 같은 것을 기억하겠습니까. 서로 관심사가 다른데요. 저도 다른분들의 독서 후기를 읽을 때마다 오, 이 책에 이런 부분이 있었던가..하고 생소한걸요. 하하핫.

찾아서 옮겨주신 부분은 무척 흥미로운데 제가 영어가 안되는게 안타깝네요. 안그래도 검색하니 죄다 영어라 어머? 이러고 휭- 돌아서 나왔거든요. ㅠㅠ
 
내가 행복해도 될까요?
페르 닐손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11년 11월
품절


밖으로 보이는 모습과 똑같이 내면도 그렇게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 그런 사람이 정말 있을까?-346쪽

"그래도 될까?" 닐스가 혼자 중얼거린다. "내가 행복해도 될까? 이런 세상에서, 이런 시대에. 이렇게 온갖 악이 존재하는데. 온갖 위험과 온갖 불의가 존재하는데. 맞서 싸워야 할 온갖 일들이 있는데도 말이야. 그런데도 행복해도 될까?"-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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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고숨 2013-10-2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에 진열된 것 보고 보관함에 몰래 담았는데, 아앗 벌써입니까. 본격리뷰 개봉박두-

다락방 2013-10-22 11:01   좋아요 0 | URL
아 어쩌죠 에르고숨님, 저 이 책은 리뷰쓸 게 없는데...이 책 읽고 싶으시면 제가 보내드릴게요, 에르고숨님!! 주소3종셋트만 적어주시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2013-10-22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르고숨 2013-10-22 23:05   좋아요 0 | URL
예, 점심 저녁 다 잘 먹고 다녔습니다. 오늘 하루 마이클 더글라스가 마이클 더글라스 아닌 척 ‘변장’하고 나온 얘기 생각날 때마다 웃음이 터져서 혼났지 뭡니까;; 지금도 웃겨요ㅋㅋㅋ. 아이 참, 다락방 님은 정말!

다락방 2013-10-23 09:13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면 무엇하나요, 에르고숨님. 어휘력이 밥통인데 ㅠㅠ
하아-
그렇지만 에르고숨님께 큰 웃음 드렸으니 만족합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는 오늘 아침에 호박전과 계란말이 오징어채볶음과 김치를 반찬으로 먹고 왔는데요 밥과 반찬이 너무 맛있어서(지금 생각해도 침나오네요) 식탁에서 일어나기 싫었어요. 식탁에서 일어나 출근을 해야하다니, 지옥같이 느껴졌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자작나무 2013-10-22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식 들었어요. 꼭 구입할게요:)

다락방 2013-10-22 15:50   좋아요 0 | URL
오, 오랜만에 오셨네요!

Jeanne_Hebuterne 2013-10-2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의 안팎이 완벽히 똑같다면 그만큼이나 재미없는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슬쩍 해봅니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요? 오랜만이에요, 다락방님. 잘 지내셨지요? 점심 맛있게 드시고 커피 한 잔 하시고 오늘도 재미있는 오후 보내시길 바라요 :)

다락방 2013-10-24 17:00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다락방님, 하는 쟌 님의 댓글이 무척 따뜻하게 느껴져요. 제가 아는 그 쟌님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지 뭡니까. 곧 저녁 식사 시간이에요. 쟌님은 저녁으로 무얼 드실까요. 안되겠다. 문자 한 통 넣어볼게요. 쟌님이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 시오리코 씨와 기묘한 손님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1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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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소품같은 아기자기한 작품. 추리를 지나치게 잘해내는 게 좀 못마땅하고(좀 심한것 같은;;), 서점 주인의 아이큐가 이백은 넘는 것 같아 질투나지만, 다음 시리즈들을 계속 읽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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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영화쿠폰 안쓰시는 분 저 좀 주세요.

2013-10-21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1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1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삭줍기」의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허공을 바라본 채 그녀는 유려하게 그 구절을 낭송했다.

"'나는 가능하다면 빨리 나이를 먹고 싶다. 허리가 조금 구부정해진들 별수 있나. 어쩌면 그때쯤에는 병아리르르 키워 입에 풀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늙은이란 존재가 반드시 세상을 원망하라는 법은 없다.'"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분명히 시다가 그 노부인에게 했던 말과 일치했다. 뜬금없이 병아리 운운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하지만 내가 놀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을 모두 외우고 있습니까?"

그렇게 묻자 시노카와 씨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요. 아니에요. 전부라니, 그 책에서 좋았던 부분을 몇 페이지쯤 외우는 정도인데‥‥‥."

"네? 그게 대단하다는 거죠. 그런 사람 처음 봤습니다."(p.123)
















시노카와는 고서점의 주인이다. 고서점의 주인이란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을 좋아한다. 아주, 매우 많이 좋아한다. 책만 살펴보면 이 책이 몇 년도에 초판이 나왔는지 그 출판사는 어떤 출판사인지 몇 부가 인쇄됐는지도 술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심지어 책을 읽다 좋아하는 부분을 '몇 페이지쯤' 이나 외운단다. 대박. 그..그..그게 가능한건가?


이 부분을 읽다가 뭔가 열듬감에 휩싸여 나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그 책들 중 어떤 부분도 외우지 못하고 있었다. 한 페이지는 고사하고 몇 줄도 외우지 못한다. 지금 딱 외운다고 생각나는 부분은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이 문장이다.



뭐 입고 자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게 내가 외우는 전부다. 그런데 몇 페이지씩이나 외우다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정말 페이지를 몽땅 외우기도 할까? 그러고보니 누군가가 블로그에 책 본문을 외웠었다고 썼던걸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외울만큼 책을 좋아하지 않는걸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게 아니라 이건 아이큐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난 안돼. 못외워. 외우는 시도 한 편도 없어. 하물며 소설의 몇 페이지를 어떻게 외워. 안돼. 그러고보니 나는 악보도 못외우는 사람인데. 뭘 이렇게 외우는 걸 못해. 아니, 근데 내가 정상인 거 아니야? 책의 몇 페이지를 외운다니, 그게 천재인 거 아니냐고. 아놔.. 난 역시 서점 주인이 되면 안되겠구나. 걍 독자로 머물러야겠어.. 쩝..







극한의 사랑이 극한의 절망을 가져온다는 건 명백한 진리다. 이 영화에서 리와 스콧은 서로에게 친구이며 애인이 되어주고 가족이 되어준다. 서로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 이 되어주지만, 그 관계가 늘 그 감정 그대로 영원히 지속될 순 없다. 조금씩 마찰이 생기게 되고 서로에게 지치게 된다. 어느 순간, 다정한 리의 모습에 '이렇게 다정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며 스콧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 때는 서로에게 서로뿐이었는데. 


리는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스콧은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든다. 리는 자신의 집에서 스콧을 쫓아내려하고, 스콧은 집 안의 모든 물건을 부수고 던지고 소리지르고 몸부림친다. 그가 리를 그토록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특별하거나 유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의 분노와 절망은 오지 않았을 터. 저 극한의 절망은 극한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았다는 건, 위에서 말했듯이 서로의 모든 순간을 공유했단 뜻이다. 그러니 지저분하게 등을 돌렸다한들, 죽음의 순간에 생각나는 건 그 사람일 수밖에 없다. 리가, 죽음의 순간에 스콧에게 자기를 보러 와달라고 말했을 때, 그의 앞에서 '너랑 함께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어쩌면 사랑에 대한 내 태도를 좀 달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늘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는 나이지만, 그렇게 물러서만 있다가는 죽음의 순간에 어느 얼굴도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인생 혼자 가는 거라 해도, 마지막 순간에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상대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토요일부터 조카가 와있다. 세상에 태어나 해를 보고 달을 보고 구름을 보고 꽃을 본 지 고작 39개월밖에 안 된 아이가, 어제는 하늘을 보더니 나한테 이런다.


이모, 구름이 예뻐서 나가도 좋겠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뭐 이런 애가 다있어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얘 왜이렇게 감정이 풍부해. 어쩌면 이렇게 감정 표현을 잘해. 넌 대체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까?




갈비..먹고 싶은 날이다.

집에 가서 조카 데리고 갈비나 먹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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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1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3-10-22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우기는 커녕 읽었던 내용이 전혀 생각도 안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저 같은 사람도 있는걸요.
ㅠ..ㅠ 이럴땐 진짜 책 뭐하러 읽나 싶고 뭐.....흠...흠...

구름이 이뻐서 나가도 좋겠다고 말하는 39개월짜리 조카라...
얼마나 예쁠지 상상도 안되요^^

다락방 2013-10-22 08:57   좋아요 0 | URL
읽었던 내용이 전혀 생각 안나는 경우가 대부분인건 저도 그래요. 심지어 과거 페이퍼를 보다가 어, 내가 이런 책도 읽었나? 할 때도 있어요. 책 표지 자체가 생소한 것들...하하하하하하. ㅠㅠ

무해한모리군 2013-10-23 15:30   좋아요 0 | URL
저는 읽고 있는 책 제목도 잘못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 =.=
나는 안나 카네리나 ㅠ.ㅠ

레와 2013-10-22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아아아앙 타미야.........................♡


다락방 2013-10-22 10:13   좋아요 0 | URL
내 조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ephistopheles 2013-10-22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더글러스는 참 대단한 배우 같아요. 젋어서는 아버지(커크 더글러스)의 후광의 스트레스에. 중년엔 섹스중독증을 극복하고 노년엔 구강암 말기를 이겨내고...미녀 아내(캐서린 제타 존스)맞이하고...(하지만 이혼한다네요..)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라고나 할까요.

다락방 2013-10-22 10:18   좋아요 0 | URL
마이클 더글라스라는 걸 알지 못했다면 마이클 더글라스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 같아요. 모습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아마도 변장을 엄청 잘한듯. 제가 본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영화중에 가장 인상적인 영화였어요. 가장 마이클 더글라스가 빛난 영화였고요.

에르고숨 2013-10-22 10:50   좋아요 0 | URL
변장ㅋㅋㅋ! 이럴 땐 '분장'이라는 말이 있지 싶은데효.

다락방 2013-10-22 10:5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에르고숨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변장'이라고 써놓고 아..이 단어가 아닌것 같은데 뭐지, 뭐지, 이러면서 분장이란 단어는 절대 안떠오르고 '변신?' 이러면서 아 변신은 더 아닌데.......이러고 있었네요.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연 2013-10-22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블리아 고서당ㅎㅎㅎ 저도 이거 보고 싶어서 계속 장바구니에 짱박아놓았는데 우선순위가 자꾸 밀리네요. 조금 훑어본 정도입니다만.. 자꾸 이 책은 언젠가 봐야지, 하는 그런 책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이 책이 저한테 좀 그런 느낌이랄까

다락방 2013-10-22 13:14   좋아요 0 | URL
저도 여러분들의 감상을 보고서 흐음, 그렇다면 읽어볼까 하고 1권만 주문해서 읽었거든요.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나름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서 2,3권도 읽어야겠어요. ㅎㅎ
우선순위는 항상 '이번에 주문'하는게 우선순위인데, 그 책들을 다 읽기도 전에 또 주문을 하게 되니까 또 이번에 주문이 우선순위가 되고 또 주문하니까....이런 일의 순환이라 책 주문을 멈춰야 사 둔 책 다 읽을 수 있을것 같아요. ㅠㅠ
 
린다 브렌트 이야기 - 어느 흑인 노예 소녀의 자서전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2
해리엇 제이콥스 지음, 이재희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2월
품절


할머니의 주인이 죽자, 상속인들이 재산을 나눠가지게 되었다. 과부가 된 안주인은 자기 몫으로 호텔을 상속받아 계속운연했다. 할머니는 안주인의 노예로 남았지만 할머니의 자식들은 주인의 자식들에게 분배되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다섯 자녀 중 막내인 벤자민 삼촌은 상속자들끼리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갖기 위해 다른 집으로 팔려 갔다.-14쪽

"용기 내라, 린다." 피터 아저씨가 말했다. "나한테 단검이 있어. 내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널 건드리지 못하게 할거야."-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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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1 18: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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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1 1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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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1 1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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