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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4년 2월
평점 :
이 책은 지금까지 읽은 박지리의 책들 중 좀 특별하다. <합체>, <맨홀>,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그 내용이 밝든 어둡든 주로 십대 소년들이 주인공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양춘단’이라는 65세의 시골 할머니다. 순박하고 어리숙하지만 당차고 정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푸근한 할머니. 석공 양호익의 범상치 않은 태몽을 받고 태어난 양춘단은 ‘꼭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가시내라는 것과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에 못 배운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서울 아들네에 갔다가 받은 건강검진에서 남편 영일이 양성종양진단을 받는 바람에 정든 송정리를 떠나 서울 아들네로 오게 된다. 영일을 병간호 하던 중에 만나게 된 양정례의 소개로 천지대학교 청소 일을 하게 된 춘단은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는 게 그렇게 신 나고 좋을 수가 없다. 명문 천지대학교를 다니게 된 양춘단은 하숙생 서성환(장대열), 시간강사 한도진, 동료 미화원들과 소장을 만나고 겪으면서 세상의 모순과 가식, 부조리와 맞닥뜨린다. 마치 만담처럼 경쾌하게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운 건 아니다. 이야기의 전개방식도 과거와 현재를 건너다니고,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사건과 맞물리고, 현실의 아픔이 춘단의 부모 앙호익과 정순규를 향한 한탄으로 이어지기도 해서 처음엔 다소 산만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 하고 감탄하게 되는 지점들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관계와 오염에 대해 생각했다. 이 사회가, 춘단이 일하는 천지대학교 교수와 학생들, 소장, 남평구 교회의 목사 등이 맺고 있는 관계의 방식과 관점은 양춘단과 미화원들이 타인을 대하는 방식과 사뭇 다르다. 미화원들은 임금삭감과 소장의 무례한 언동에 대해 대학 측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학은 ‘본 대학은 미화 용역업체인 더클린과 미화원들의 계약 관계에 하등의 관련이 없음’을 표명하며 미화원들을 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에 미화원들은 분개한다.
“우리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 우리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데? 우리가 뭐 소장을 위해 일하나. 우리가 걸레질해주는 복도로 걸어다니고, 비질해주는 강의실에서 공부하고, 우리가 쓰레기 버리고 변기통까지 닦아주는 화장실에서 오줌똥 누면서, 뭐? 이제 와서 우리랑 자기네가 아무 상관이 없어?”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관점이 극명하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책임의 소재와 권력의 방향과 힘의 역학, 이해득실과 유불리를 판단하는 것이 현대 도시 사회의 복잡한 관계 맺기의 방식이라면, 양춘단과 미화원들은 인정과 애련함으로 관계를 파악한다. 어느 틈엔가 우리는 ‘갑’과 ‘을’, 고용인과 피고용인, 업무적 관계를 인간관계로 인지하게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분명한 계약이 없다면, 혹은 함께 나눌 업무적 책임감이 없다면 난 너에 대해 기대할 것이 없는 관계다. 언제부터인지 나도 사람을 ‘일’ 때문에 만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함께 일을 하면서 끈끈한 동지애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동지애라는 것이 ‘함께 일을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라 일이 끝나 마무리가 되면 그 동지애라는 것도 흐리고 옅어지고, 어쩌다 만나더라도 형식적인 안부나 주고받는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고 만다. ‘일’이 없이는 전화 한 통 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들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나 또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이 현대 도시인들의 ‘인맥’이다. 인맥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 사회적 지위와 영역을 확보하는 데 유리한 것, 혹은 성취감 같은 것들이다. 참 메마른 관계다. 메마르고 병든 관계는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을 벼랑 끝에 세운다. 시간강사 한도진이 그랬고, 양춘단의 첫째아들 종철이가 그랬고, 춘단의 손주 삼수생 준영이가 그랬다. 시급 오백원 삭감에 생사의 위협을 느끼고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던 미화원들은 툭, 툭 밥줄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일자리에서 쫓겨났다. 힘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여기는 세상은 잔혹하다.
얼마 전 김사인 시인의 <봄밤>이라는 시에 가슴이 녹아내리며 울컥했던 것도 그 시 속에서 나의 결핍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불콰한 낯빛을 하고 돈 따위 없어도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부비는 모습에 나도 그 싱싱하고 풍요로운 관계의 망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울고 웃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서.
책의 결말에서 양춘단은 천지대학교의 상징인 코끼리 위에 몰래 올라가 겨우내 망치질을 한다. 남평구에서 양춘단의 아버지 석공 양호익은 온세상 근심을 홀로 떠안은 고통의 모습으로 서 있는 거대한 예수상을 무너뜨렸다. 자신이 만든 것이었고, 그 지역의 명물로 인정받는 예수상이었다.
‘추수감사절 날, 마을 신도들은 가져온 오곡백과를 예수상 앞에 쌓아놓고 하루 종일 통성기도를 올렸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농사꾼의 삶에서부터 기대한 만큼은 영특하지 못한 자식들, 병원에서도 답을 내주지 않는 병, 두 개로 갈린 나라까지, 온갖 고통을 토로하며 울부짖던 사람들의 기도가 극에 달하자 그곳은 억장이 무너지는 비명과 혼절도 보기 좋은 예절로 통용되는 상갓집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만든 상 앞에서 벌어지는 가을 잔치를 구경하기 위해 교회에 간 양호익은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즐겨 부르던 남평구 사람들의 얼굴이 사는 기쁨은 하나도 없이 고통으로만 일그러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345쪽)
그것은 양호익이 보기에 오염이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고 건강하고 순박한 정으로 살아가던 오랜 이웃들이 자신이 만든 고통의 예수상 앞에서 고통으로 오염되어 있었던 거다. 그래서 양호익은 예수상을 무너뜨린다.
‘얼마 뒤, 새벽 기도를 다녀오던 길에 문득 예수상이 사라진 자리 뒤에서 오만 가지 색으로 빛나는 위대한 자연과 그 속에서 영원히 이어질 삶의 회귀성, 이번 생에서 자신이 무심코 저지른 업을 발견한 어떤 이는 잠시나마 속세에 흔들렸던 방종을 뉘우치며 개종을 철회하고 본래의 믿음으로 돌아갔다. 이불을 둘러쓰고 돌아가며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추위를 나는 남평구 사람들은 겨우내 예수상에 대한 갖가지 소설을 만들어냈지만 어느덧 더 아래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눈을 녹이고 씨를 뿌릴 계절이 왔음을 알리자 몸이 시키는 대로 냄새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기지개를 켜며 밭으로 나갔다.’ (346쪽)
그때 춘단은 보았다. 가을밤 내내 아버지 양호익이 사다리와 망치를 들고 몰래 오솔길로 걸어가는 것을. 그래서일 거다. 춘단은 한도진의 자살을 계기로 그 잘났다는 천지대학교가, 이 사회가 허위와 위선, 부조리와 부패, 비겁함으로 오염돼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버지 양호익이 예수상을 부수어 오염을 몰아내고 마을에 건강함을 불러왔듯이 춘단도 거대한 코끼리 상을 무너뜨림으로 모든 것을 바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은 가슴 아프고 그러면서 따뜻하다. 영일과 수탉 닭터의 이야기, 영일과 춘단이 서울에 올라와 터미널에서 본, 구경나온 사람이 백인데 아무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인질극에 대한 뉴스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생명력 가득한 자연과 누구도 알 수 없는 요지경 세상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의 재능이 너무 아깝다.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며 재미있고 따뜻하고 그러면서 가슴 아프고 생각할 것들을 뒤에 많이 남기는 이야기들을 더 써주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나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쓸모와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흔들리던 때였다. 진짜 나를 가리고 있는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코끼리 상을 무너뜨려도 좋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이 책 덕분에 알게 되었다. 하늘에 있는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 그란디 엄메여, 만약에 그 교수 선생 말이 옳다고 치면, 엄메도 큰오빠랑 작은오빠랑 나랑 춘애랑 준수한테 착취당한 거요? 엄메도 엄메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한테 옷이랑 신발이랑 다 빼앗기고 벌거숭이가 된 거요? 그라믄 나도 도둑이고 강도인 거요? 아이고, 나는 모르것네.참말로 복잡하구만. .....근디 엄메요, 그냥 나는 미안허네. 착취고 뭐고를 떠나서 엄메한테 그냥 미안허네. 오늘은 말이 길어졌지라. 그냥 하는 말이오. 120~121쪽
소장의 무례한 언동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다른데서 청소일하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니 아예 이름 대신 개, 소, 돼지, 말이라고 부르며 때리는 소장도 있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이 사람은 아직까지 욕은 하 하지 않는가. 때리지만 않는다면 욕을 듣는대도 한 귀로 넘기면 될 일이지. 험한 말 좀 듣는다고 뭐가 닳는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궁지에 내몰라 자신의 처지에 어떻게든 위로하기 위해 11퍼센트가 삭감된 임금을 이해해보고, 버릇없는 소장을 이해해보고, 자신이 개 소 돼지라고 욕을 듣는 상황까지 이해해보려던 미화원들은 어느덧 얼마 남지 않은 인격까지 다 버리고 진창인 밑바닥을 향해 스스로 몸을 던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208쪽
학교에서 미화원들이란 보이지 않을수록 좋은 존재였다. 무난한 소장, 까다로운 소장, 김종래 같은 소장, 어떤 소장이 오든 미화원들이 지켜야 할 기본강령은 깨끗한 시설 유지와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것이었다. 236쪽
춘단은 물어보고 싶었다. 어제까지 저 그림자 속에 놓여 있던 그 많은 팻말은 어디로 갔는지, 천명의 서명을 받는다던 공책은 누가 가져갔는지, 이곳을 떠나선 갈 데가 없다고 외치던 사람들은 어디로 떠났는지, 그러나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70쪽
사람의 운명이란 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하룻밤만의 생각으로 내리는 결정일까. 아니면 먼훗날, 소중한 무언가를 지킬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면, 부모도 모르게, 형제도 모르게, 친구도 모르게 자신의 발목을 자르고 스스로 뛰어내리겠다고 신에게만 조용히 고백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오래된 결심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삶에 미련을 가지도록 달콤한 말들로 꾀어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얼굴이 상해 보인다, 무슨 고민이 있느냐, 다 괜찮아질 것이다, 정도의 서툰 걱정이 무슨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그 깊고 차가운 물 앞에 섰을 때는 이미 이 밤이 나의 마지막 밤이라고 결정지어놓은 것일 텐데. 284~285쪽
그러나 소장은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진실을 눈앞에 펼쳐놓고 보여줘도 똑바로 볼 의지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고집 센 무지 앞에서는 황금 들녘이 황무지로 둔갑하고 찢어진 모자를 쓴 허수아비가 경찰관 노릇을 하는 것 아닌가.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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