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에 알라딘에 책을 쓰고 있다고 쓴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개월 가까이 흘러서 10월의 중반이 넘어가려고 한다. 

그동안 학교에 복학을 했고, 책의 원고 수정을 했으며, 여전히 회사에 다니며 아이를 돌보고 있다. 


그리고 책이 나왔다. 실제로 책을 보니, 왜이리 울컥하던지. 

부끄럽고 민망하고, 내가 이렇게 부족한 글을 세상에 내놓아도 되는건가, 고민스럽고.

암튼 여러가지 이유로 복잡스럽다. 


그래도 책이 나오면 알라딘 독자님께 제일 먼저 알리겠다는 약속 지키고 싶다.

학교에 다니면서, 학교를 쉬어야 하나 고민스러울 때, 투정섞인 글에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셨다. 

많은 분들의 응원과 호응으로 다시 일어나곤 했다. 없던 힘도 나곤 했다. 

이런 말이 상투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쓰게 되니 정말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정말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책이 나왔습니다. 

지난 3년간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 썼던 글들을 모았구요. 

페미니즘 책을 통해 나의 삶을 해석하고 싶었습니다.  

페미니즘 공부를 하고 싶은데 너무 많은 책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저의 지도를 건네주는 책이 되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막판에 정희진 쌤과 임경선 작가님이 추천사까지 써주셔서, 완전 감동 ㅠㅠ

(게다가 정희진 쌤은 국내서 첫 추천사라고 하시네요. 가보로 간직할 거예요 ㅠㅠ)

바로 이 책이어요~
















마지막에 들어간, 에필로그를 붙여넣으면서 인사를 대신합니다. 

모두들 같이 책을 읽어요^^

제 책도 읽으시면 좋구요~^^;;;;; 


---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페미니즘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많은 저녁식사 시간을 망쳐버렸는지 모른다. ‘자연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것, ‘전통’이라는 것, ‘원래 그렇다’는 것의 토대부터 흔들기 위해 노력할수록 저녁식사 분위기는 싸늘해지고, 사람들은 나와 대화하기를 꺼리며 결국 소중한 사람들과 멀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나는 나의 신념에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런 주제가 나오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버릴까 고민하게 된다.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깨는 사람, 눈치 없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 친구나 가족의 행복을 방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라 아메드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라는 책을 통해 페미니즘의 역사를 이렇게 규정한다.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아라’라는 순응과 행복의 의무에 불만을 토로하며 때로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를 벗어난 여성들이 일으킨 ‘소란의 역사’라고. 나는 여기서 ‘행복’이라는 감정을 다시 생각해본다. 행복해야 하지 않겠냐,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라, 평범한 게 가장 행복한 거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조언(그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때 더욱 그렇다)은 우리의 선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행복해질 거라는 지침과 약속은 개개인의 인생 경로 설정부터 국가 차원의 규율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행복이 문화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누군가는 그 ‘행복’이라는 것을 규율과 통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 있다면 과연 개인적인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행복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규범을 전달하고 수행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젠더 차별적인 가부장제 지배 이데올로

기와 강제적 이성애가 평범함과 등치되고, 이 모든 것이 행복의 규율이자 담보가 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게 된다. 


가까운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들을 겨냥해 수많은 비난을 쏟아낼 때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사라 아메드는 페미니

스트들의 취약함을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취약함을 제거할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을 명분으로 삼지 말고 기꺼이 불행을 초래하는 삶. 모욕을 유발하는 농담에 동조하지 말고, 끝나지 않은 역사를 잊고 넘어가지 않는 삶. 부당하고 폭력적이고 불평등한 제도라면 소속되기를 기꺼이 거부하는 삶 말이다. 


여기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멈칫하게 된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기꺼이 웃지 않음으로써 분위기가 싸해지는 상황을 참을 수 있는가. 사랑하는 이들과 얼굴 붉히며 논쟁하고 싶은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결국 이것조차 나의 취약함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평생 이것을 극복하거나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도 인정한다. 그렇게 나는 나의 취약함을 다루는 방식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페미니스트에게도 몇 가지의 생존 키트가 필요하다. 아메드는 그 자리에 몇 권의 책들을 넣어두었다. 나는 그 책들을 읽는다. 내가 읽은 책의 레퍼런스로 내가 지을 집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페미니스트를 페미니즘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읽는다면 함께 집을 지을 수 있다. 함께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불행 속에서라도 웃을 수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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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0-24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책이 나왔군요, 미네님!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읽어보겠습니다. 훗.

미네 2019-10-25 06: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님. 좋은 소식 전해드리게 되어서 기뻐요 ㅎㅎ
다락방님의 따뜻한 응원이 큰 힘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당^^!!

책읽는나무 2019-10-24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미네 2019-10-25 07:00   좋아요 0 | URL
책읽는나무 님, 감사합니다^^ 좀 부끄럽지만 축하받으니 기쁘네요 ㅎㅎ

단발머리 2019-10-24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축하드려요, 미네님. 알라딘에 글이 안 올라와서 책 준비하시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얼른 사서 읽어보고 싶어요!!!

미네 2019-10-25 07:00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너무 감사드려요~ 제가 공부하는 거 힘들어서 징징대고 있을 때 항상 용기가 되어 주셨어요. 감사해요 ㅎㅎ 단발머리님의 멋진 글도 잘 읽고 있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scott 2019-10-2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출간 축하합니다 표지가 예쁘네요

미네 2019-10-25 07:01   좋아요 0 | URL
스콧님, 감사합니다. 표지도 예쁘고 분홍색이라서 더 좋더라구요 ㅎㅎ

hnine 2019-10-24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미네 2019-10-25 07:0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hnine님, 서재에 놀러가서 눈팅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뻐요 ㅎㅎ

막시무스 2019-10-2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을 축하드립니다!ㅎ

미네 2019-10-25 07: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막시무스 님.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조금 부끄럽고 설레고 그렇네요 ㅎㅎ

2019-10-24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출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미네 2019-10-25 07:03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설해목님.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끄럽지만 축하받으니 기쁩니다 ㅎㅎ

숲노래 2019-10-2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즐겁게 배우면서
그 배움길에 새로 누리며 맞아들이는
꽃살림 드리우면 좋겠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지금은책장정리중 2019-10-2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올해 3월에 학교를 휴학하기로 결심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이렇게나 바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유롭게 몸과 정신을 위한 충전시간을 갖기로 결심했건만, 

생각보다 바쁘게 지냈고, 그럼에도 몸과 정신상태는 아~~주 많이 양호해졌다. 

한의원에 일주일에 한번씩 가서 침을 맞고, 한약도 챙겨 먹고, 이제는 운동도 한다. 

무엇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면서 잠도 충분히 자게 되었다. 

술도 많이 안 먹다보니 수면의 질도 좋아졌고, 결국 몸상태는 거의 작년 이맘때의 컨디션으로 회복되었다. 


그런데 뭐가 바쁘다고 알라딘에는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왜냐하면 책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ㅋㅋㅋㅋㅋ

학교를 휴학하면서 근 3년간 썼던 글들을 모아 몇 군데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 

그중 연락이 온 곳이 몇 곳 있어서 미팅을 하고, 책을 출간하기로 했다. 


이후 원고쓰기에 올인. 회사나가고 아이 보면서 원고를 쓰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ㅎㅎㅎ

그리고 오늘 드디어 책의 원고를 넘겼다. 야호. 

나는 이제 자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은 아마도 가을이 지나야 출간될 것 같습니다. 

책이 만들어지면 알라딘 이웃님들께 가장 먼저 알릴께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있을때 주셨던 용기와 위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드려요. (너무 감사한 마음에 갑자기 시상식 모드가 되네요;;; 민망ㅜㅜ)


암튼 오늘은 6월의 정리를 쓰려고 하니 6월에 읽은 책중에 좋았던 책들 몇 권만 뽑자면, 



이 책 완전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단히 화가 나있는데, 마치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생생하다. 논리적이고 똑똑해서 읽을 맛이 난다. 책을 다 읽자마자 저자의 다른 책을 구입했는데 (남근 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 아직 이 책은 읽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라는 부제 때문에 보게 되었다. 알고보니 팟캐스트 방송을 푼 책이었고, 그래서 확실히 대중적으로  쉽고 재미있다. 게다가 항상 접하는 대중문화 속에서 왠지 모르게 불편하고 짜증나는데 무엇이 기분 나쁜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 답답했던 마음이 좀 풀리는 듯한 책! 










학교를 가지 않는 동안 그동안 너무 부족했던 현대철학에 대해 공부하겠다고 집어든 책. 한 권으로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각 챕터의 난이도까지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나서 데리다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그에 관련한 책들을 좀 봐볼까 생각중이다. 











이 책도 현대철학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서 집어든 책. 페미니즘 철학자가 많이 나오고 글도 깔끔하게 잘 써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런데 왜 책이 양끝정렬이 되어 있지 않은걸까? 나만 이게 걸리는 걸까? 이거 빼곤 모두 괜찮았던 책. 나는 특히 스피박과 해러웨이, 버틀러가 예전보다 더 좋아졌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마케팅과 퀴어 이론이다.(너무 안 어울리나?;;;)

방학 동안에는 이 두가지에 집중해서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운동과 휴식. 나를 깨닫는 시간! 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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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6-30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축하드려요, 미네님! 책 나오면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덧붙여,
마리 루티는 제가 정말이지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똑똑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어요. 똑똑한 여자들이 분노로 쓴 글들을 읽는 건 저의 큰 기쁨입니다. 반가워요!

미네 2019-07-02 06:39   좋아요 0 | URL
ㅎㅎ 다락방님, 축하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마리 루티는 책 제목과 정희진 쌤의 추천사만 보고 산 책이었는데 최근 읽은 책중에 가장 좋았어요. 불타오르는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 같은 ㅋㅋㅋ 다락방님도 팬이었군요! 반갑습니당~^^

다락방 2019-07-02 07:05   좋아요 0 | URL
저는 마리 루티의 하버드 사랑학 강의를 처음 읽고 좋아했어요. 그리고 언급하신 책에서 빡침과 똑똑함이 극에 달하죠. 너무 좋아요! >.<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는 저자가 빨래를 하지 않는 남편에게 화가 나서 빨래를 날려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빨래를 날려버린 적은 없지만 설거지와 청소 요리 육아를 둘러싼 시시콜콜하고 애매모호한 일상의 일들 사이에서 소리지를까 화낼까 그냥 내가 할까 고민하기 일쑤였다. 그런 것들에 관해 불만을 말할라치면 남편은 말없이 그냥 듣고만 있는 거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고 하면, 남편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성들은 해결해주기보다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더 원한다며?” 


왜 우리는 원하는 걸 직접 물어보기보다 이런 주워들은 이데올로기를 더 믿을가? 여성은 이럴 것이다, 남성은 이럴 것이다라는 납작한 관념에 의존하는 걸까?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그 이론들은 정말 과학적인가? 과학적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이야기들은 지금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볼 수 있다. 이 책들의 원류는 아마도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정도가 아닐가? 가장 흔한 이야기로는, 여성은 관계맺기를 원하고 남성은 해결하기를 원한다는 것. 그래서 여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원하고 남성은 헤결해준다는 것이다. 남자는 씨를 많이 퍼트리는 것이 진화론적으로 이득이기 때문에 바람둥이로 진화했고, 여성은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진화론적으로 이득이 되었다는 것들이다. 심리학자나 자기계발 전문가, 생물학자 등 이른바 과학자들이 이 책을 인용하며 남녀가 심리적, 감정적, 성적으로 엄청나게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며, 남녀 관계 문제들은 서로의 성 특이적인 욕구, 강점, 속성, 혼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는 신념을 고수해왔다. 그것들은 모두 유전적으로 진화한 산물이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며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 개인이 태어나서 유년기를 지나 성인이 될 때까지 겪는 경험과 성장의 역사 등은 진화심리학자들에게 철저히 배제되고, 이때 남성과 남성간의 차이, 여성과 여성 간의 차이는 남성과 여성간의 차이보다 훨씬 더 멀어진다. 말하고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언어를 쓰면서 삶을 영위해나가는 인간종이 암컷은 침팬지나 보노보의 암컷과 더 비슷할까? 인간종인 남성과 더 비슷할까? 그런데도 진화생물학은 언제나 침팬지나 보노보를 예로 들며 동물학적 생식이론에 여성에 삶을 가두고 보편과 객관이라는 허울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이 책에서는 남녀 관계에 관한 진화심리학이 성 고정관념을 과학적 타당성이 있다 주장하며 대중에게 납득시키려 한다는 점을 폭로하며 이 모든 것이 젠더프로파일링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한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단지 생기를 앗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독자들이 이 책에서 얻어 가기를 바라는 것을 딱 하나만 고른다면, 그것은 젠더 프로파일링이 관계를 다루는 폭력적인 방식임을 아는 것이다. 우선 무엇이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만드는가에 시선을 고정할수록, 우리는 사랑한다고 고백한 상대방을 포함한 타인들의 특이성을 볼 수 없게 된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타인들이 품고 있는 특이한 의심, 욕망, 고난, 불안, 불안정, 혼란, 갈망을 덮어버리고, 그럼으로써 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어렵게 만든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남성과 여성을 파넹 박힌 틀에 끼워 맞추기 때문에, 우리는 좁은 시야를 통해 사람들을 판단하려는 유혹에 빠지고, 그 결과 어떤 한 사람이 남성 또는 여성 외의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 천 가지 이상의 방식을 놓치게 된다.” (p.283-284)



그러면 진화생물학자들은 왜 젠더에 관련한 사항만 나오면 이렇게 덜떨어진 과학자가 되어 한심한 소리만 늘어놓는걸까? 그건 그들이 그런 세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으 마지막장이 특히 재미있었는데. 그 장에서는 젠더파일링이 이성애 기반의 정상가족 성역할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충실하게 복무하는지 보여준다. 그것이 결국 남성우월주의의 가부장제 사회를 지지하며, 이를 곤고히 하기 위한 학문적 수사임을 밝혀낸다. 여성이 반복해서 당하는 성차별은 그들의 이론이 과학이라는 미명을 등에 업은 채 큰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우리 시대의 많은 이들이 더 평등한 삶을 원할수록 성에 대한 불평등적인 시각을 장려한다. 저자는 진화심리학이 빠르게 변하는 젠더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을 부채질하며 남성과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모호한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답을 제공한다.” (p.137)라고 말한다. 인간 삶의 다채로운 모습은 생물학으로 환원되고 우리가 노력하고 공부해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진화생물학이라는 이름으로 대화불가능성에 막혀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진화생물학을 현대의 성서처럼 받아들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화성남-금성녀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은 관계 문제에 대한 즉효약을 제공한다. 남녀 차이가 관계 문제를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할 때, 관계 맺기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긴장과 관련한 온갖 종류의 다른 원인들을 무시할 수 수 잇다. 남녀가 다른 것이 문제라고 추정하느 것은, 관계 맺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복잡한 일임을 인정하는 것보다 쉽다



즉 사회가 다변화되고 커뮤니케이션이 복잡해지고, 이전과 다른 삶의 양식들이 많이 나타날수록 진화심리학이라는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사회적 클리셰를 팔고 있는상황이 빈번해지는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운동이 점점 늘어나는 시기에 진화생물학 모델에 대한 과학적 집착이 심해진 때가 시기적으로 맞물려 잇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젠더 프로파일링에서, 깊이 뿌리박힌 관계 패턴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적합한 조건들을 결정하는 집단적인 문화규범들과 섞여 들어간다. 이러한 사회적 길들이기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권장된다. 우리 사회의 그 누구도 행복이 인간의 존재 목표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행복이라 불리는 이데올로기의 초상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이 사회에서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결혼이다. 사라 아메드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행복의 각본은 천편일률적으로 이성애적 욕망의 정점인 결혼을 지향하느 젠더화된 각본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의 베이스캠프는 진화심리학자이다. 진화심리학이 여성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 자식의 아버지가 되어줄 좋은 남자를 만나 조신하게 평생 살면서 그가 바람을 피는 것을 남성의 본성이라고 이해하며 살라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은 우리가 정말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이 말하는 행복한 관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족이 정말 행복한 것인지,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관계에서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개인의 좋은 삶에 대한 상상력을 더 없애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관계를 더 얄팍하게 만든다.

 


앤서니 기든스는 <성 사랑 에로시티즘>에서 섹슈얼리티를 서구 사회에서의 현대성(modernity)’의 전개와 /(public/private) 영역분리라는 구조적 변동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현대 사회에서 성은 더 이상 단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결정하고 선택하는 문제로 변해가고 있다며, 인간관계 역시 관습이나 전통이 아닌, 각각의 개인이 그 관계에 부여하는 의미와 관계의 내재적 속성에 따라 그 형태와 존속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또한 현대사회는 합리적 이성에 따라 조직됨으로써 감정의 문제를 사적영역으로 추방하였다. 기든스는 오늘날 개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불거지는 여러 가지 갈등들이 공적 영역과 대비되는- 이제껏 베일에 가려있던 친밀성의 영역- 이른바 사적영역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사 분리에 의해 친밀성 영역의 전문가가 되어버린 여성들이 이 혁명의 담당자로 부상하고 있다.

 


진화심리학은 이 친밀성영역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교과서와 같은 것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행히 젠더와 성에 대한 전통적이 이상들이 너무나 지루하고 전제적이라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고, 관계가의 다양성을 인정할수록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계가 더욱 쉬워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통이라는 안전망 없이 관계의 매개 변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가? 진화생물학처럼 원래 그런 존재하면서 덮어놓고 치워버려? 전통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항상 제로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이는 그만큼 우리가 관계를 맺어가기 어려운 존재임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 어자피 우리는 타인을 다 알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 알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즉 알 수 없는 타인을 알아감으로서 고통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어떤 과학적 이론이나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배운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인정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사랑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 ‘성숙한사랑은 연애에서 환상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냉철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현실을 겨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것은 관계 맺기라는 양가성의 땅으로 용기 있게 들어가는 문제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상대방을 다 알지 못하고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변화의 여지가 생긴다.“(p.291)

 

기든스는 생활정치를 이야기한다. 섹슈얼리티 역시 기본적으로 나와 타자의 관계, 곧 인간관계의 문제이고, 이제껏 당연시해왔던 전통과 관습이 아닌 그 관계가 갖는 의미와 지속여부에 따른 지속적 선택으로 관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과 관습에 관계를 의지해오던 이들에게는 충분히 힘들고 괴로운 과정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추세의 확장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대세이고 이런 '일상생활의 민주화'로 인해 현대의 삶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모든 관계의 최소한의 윤리성은 여기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라고 말하는 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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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 책에는 남자다움이라는 맨박스가 어떻게 평범하고 선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드는지 실라라는 지체장애여성을 향한 강간모의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브롱크스의 할렘 지역에 살던 저자는 동네 건달형인 조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할래?“ 책에는 그가 이 질문을 듣고 고민했던 것들을 생생하게 적어놓았다. ”지금 조니가 들은 할래?”라는 질문은 내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었다. 까딱 잘못 대답했다가는 의젓한 남성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나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답을 맞혀야 했다. 내가 아직 성경험이 없고 지금 당장 경험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명백한 오답이었다.“ 그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답변은 하나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 할래!“


하지만 그는 정신지체나 발달장애가 있던 실라를 강간하지 않았다. 바지춤을 엉거주춤 추켜올리며 시간이 지나 방에서 나왔을 뿐. 그날 거실에서 자기 순번을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 그에게 물었다. ”어땠냐?“. 그는 바지 지퍼를 추어올리며 좋았어라고 말한다. 그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적어도 나쁜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4년 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남자아이들이 방문앞에 줄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실라의 강간을 떠올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실라가 눈이 풀린채 누워있다. 이제 18살이 되어 몸집도 크고 힘도 세져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그는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에게 이게 뭐하는 거냐고 비난의 욕설을 퍼붓고 그곳에서 떠난다. 그때도 그는 자신이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는 그녀를 두번이나 버려뒀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그는 실라를 데리고 나올 수도 있었고, 친구들을 설득할수 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아무도 그에게 실라를 구하지 않은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는 남성성 집단의 사회화 교육에 충실한 착한 남성일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착한 남성이 남성연대를 공고화시키는데 한축을 담당하는 메커니즘이다. 그렇게 선한 남성들은 알게 모르게 맨박스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벌어지는 대학의 단톡방 성희롱, 단체성매매, 룸싸롱문화 같은 것들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악이 한명의 괴물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 남성성이 어떻게 공모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의 인식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는 실라는 그런데 이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이렇게 남성지식인 누군가의 성찰의 계기가 된 것으로 그녀의 할일은 끝난 것일까? 그녀는 지체장애나 발달장애가 있었고, 아주 어린 나이부터 동네에서 집단강간을 당했고, 책에 나오는 예가 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누구에게도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을테고, 이후로 임신이든 성병이든 뭐 그런 것으로 고생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를 강간한 동네의 남성(어린 아이들부터 할아버지까지, 몇 명인지도 모르겠는)이들은 누구도 그녀를 강간했다는 이유로 어떠한 벌도 받지 않았을거다.


법적 용어로 강간은 폭행 및 협박과 같은 위협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만든 성교를 갖는 행위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위의 실라는 폭행이나 협박과 같은 위협적인 방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있었는지 알 수 없기에 강간이 아닌가? 실라는 품행이 단정치 못하고 헤프고 섹스를 밝히는 여자인 건가? 법에서는 위의 정의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여기서 폭행이나 협박은 실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암시적인 형태도 해당된다.”

 

여성학공부를 시작하며 많은 책을 읽었다. 그중 가장 읽으면서 화가 났던 책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라는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이다. 이 책에서는 가장 초기의 남성연대는 인류 초기 사냥감을 쫓던 남성들이 한 여자를 윤간하는 형태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두려움을 일으키는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은 불의 사용과 돌도끼의 발명과 함께 선사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아야만 한다.”(P.25)고 비꼰다.



강간은 당사자의 의지에 반하여 신체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여성에 대한 강간은 언제나 일어났고 심지어 국가에 의해 장려되기도 했다. 강간을 둘러싼 모든 것, 즉 강간이 일상적이던 인류 초기 시대, 십계명에는 간통하지 말라와 함께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지만 어디에도 강간하지 말라는 말은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부녀자에 대한 강간만 인정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성은 성적주체성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남성의 재산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즉 여성의 성적주체성을 뺏은 것에 대한 벌이 아니라 남성의 재산권을 침해한 것에 대한 벌인 것이다.



영국에서 13세기가 되어서야 처녀뿐 아니라 모든 종류(특히 어린이에 대한) 강간을 중죄로 보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인류는 오랜 시간동안 강간사건을 대할 때 피해자가 만 따졌다. 그렇지만 강간을 대하는 시선에는 여전히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과연 피해자로 적합했는지를 논의에 중심에 두었다. 순결한가 순결하지 않은가, 결혼을 했는가 안 했는가피해자는 격렬히 저항했는가? 평소 행실이 바른가? 꽃뱀은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강간이 죄가 된 것은 이제 25년이 막 넘었다. 1994년 성폭력 범죄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그 이유 또한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다던 김부남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강간신고는 전체 강간의 10%도 되지 않는다고 추정되고, 그나마 소숫점 이하의 비율만이 재판을 받고, 재판 결과 유죄판결을 받는 사람은 그보다 더 적다. 결혼한 기혼여성은 여기서도 사각지대에 있었다. 기혼여성이 다른 남성과 한 간통에 대해서는 인류 초기부터 엄하게 다스려졌지만(돌에 맞아 죽었다) 흉기로 아내를 위협하고 구타하고 강간을 하는 것이 죄가 된 것은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전세계적으로 아내 강간을 인정한 것은 2011, 우리나라는 2013년에서야 비로소 죄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강간이야말로 가부장제의 역사와 젠더치별적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는 징표이자 여성인권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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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일어나는 개인적 사건이나 한낱 정욕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연대가 뒤에서 받쳐주고 국가가 앞에서 끌어주고 장려하면서 전인류사에서 통틀어서 발견되는 현상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그것을 가장 쉽게 확인해볼 수 있는 형태는 바로 전쟁터이다. 인류 이래로 전시 강간은 멈춘 적이 없었고, 현대에도 계속 지속중이다. 모르는 이에 대한 약탈과 방화, 공격과 학살, 고문과 살육으로 피가 튀기고 비명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강간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되고 이에 대해 남성들은 부도덕한 일이지만 불가피하다”(52p)고 말하고 국가는 여성의 몸은 전쟁의 보상이라고 침묵으로서 방조한다. 그렇다면 강간은 국가의 방조와 암묵적 동의하에 이루어진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이루어진 범죄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 여성 개인에 대한 정복 행위가 아니다. 대문자 여성을 향한 권력의 발현이고, 그 몸을 모욕하고 그 인간성을 무시하고 싶은 욕망의 추구인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강간은 전쟁이 초래한 증상이거나 전시의 극단적인 폭력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전시 강간은 평시에도 익숙한 이유를 구실로 삼는 익숙한 행위다.”(54p)

 


그가 인류의 전 시대별, 주제별로 강간을 나누고 강간에 대한 모든 자료를 샅샅이 뒤지면서 강간을 이렇게 정의한다.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 묶어두려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 과정이 바로 강간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을 괴롭히는 것은 강간이라는 사건 하나뿐만이 아니다. 그것을 해석하고 범죄로 인정받고 법적인 처벌을 내리는 모든 과정이 다 해석 투쟁의 대상이 된다. 전쟁터라는 극한 상황속에서 일어나는 절대적 피해자로서의 강간조차도 인정받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후 강간당한 여성의 배우자는 그 여성을 집안의 수치로 여겼고, 동네 사람들은 마을에서 그녀를 몰아내기 일쑤였다.



피가 튀기는 전쟁터, 어두컴컴한 밤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낯선 사람,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모르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적 행위만 강간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강간사건은 대부분 아는 사람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라는 책은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전가지 그 누구도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을 강간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성정모험이거나 하룻밤 실수, 불장난 같은 것이었다. 이 책에서는 여성 4명 중 1명 꼴로 강간 혹은 강간 미수를 경험해본 적이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 연구 결과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더욱 놀랍다. “이는 많은 여성이 정식 데이트 상대뿐아니라 친구나 동료로부터, 혹은 직장이나 파티, 술집, 종교 행사, 동네에서 만난 사람 등 주변의 다양한 아는남성들로부터 성폭력당하고 있음을 사실로 밝혀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도 크게 목소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강간피해자임을 밝히는 순간부터 자신의 결백함을 더욱더 크게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통념은 가해자의 행위보다 피해자의 행실을 더욱 문제삼는다. 강간을 당하는 여성이 상대 남성의 집에 갔거나, 차에 탔거나, 술을 많이 마셨거나, 키스를 허락했다면 그건 성관계를 허락했다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저녁 식사나 술을 샀다면 여성은 이에 성관계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언제든 거래할 수 있는 물적 요소로 치부한다. 여성은 강간을 당했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특히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그를 괴롭히기 위해 강간당했다고 말하는 이른바 꽃뱀 신화는 강간을 전적으로 피해자탓으로 돌리고 무화시키는 수단 중 하나이다. ’모든 여성은 강간당하기를 원한다.‘ ’그녀가 원했다는 강간신화는 그 자체로 또다른 강간이다.



우리는 아무도 차에 치인 사람에게 길거리를 돌아다니니까 차에 치일만 하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협박당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내준 은행직원에게 왜 돈을 내주었냐고 탓하지 않는다. 범죄는 단지 가해자가 범죄를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간은 왜 아닌가? 그 결과는 다음가 같은 통계로 이어진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된 미즈 프로젝트 통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강간 피해자의 42퍼센트는 누구에게도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5%만이 경찰에 신고했으며, 5%만이 성폭력상담소에 도움을 요청했다. 강간 범죄와 관련된 수많은 현장에서 강간과 성폭력을 둘러싼 모든 제도와 담론이 철저히 남성 중심적으로 편향되어 있음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남성은 강간을 저지르는 걸까? 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로 묶어두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 것이 즐거울 것 같지도 않고, 그렇게 가하는 성관계에서 희열을 느끼는 건 더 이상하다. 강간은 남성에게 호모소셜한 남성연대에서 남성성과 거친 기질의 과시인 걸까. 억압적 어머니에게서 성장해 무의식적 분노가 폭할한 것인가. 프로이트의 설명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지닌 발기 불능의 동성애자여서 그런 것인가. 그 폭력의 무의식과 방조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독서모임을 할 때마다 왜 남성들은 강간을 하는 것인지 묻는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결론은, 이유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유였다. 권력이 그런 것 아닌가? 아무런 이유 없이 다른 성의 인간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 묶어둘 수 있는 것. 아무 이유없이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한 처벌과 사회적 낙인은 피해자가 감수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권력이라는 거다. 권력이 없는 자들만이 왜 그들이 그렇게 하는지 이유를 궁금해하고 세심하게 관찰하고 마음을 졸이며 이유를 제거하려고 한다. 자신의 몸매무새를 따지고 행실을 바로 하고,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뿐이다.



거기에는 권력을 가진 다른 자들과의 연대가 있다. 이것이 강간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남성연대이다. 남성연대란 무엇인가? 단톡방에서 성관계동영상을 돌려보고, 우루루 성매매업소에 같이 가고, 주변의 여성들을 성적대상으로 여겨 품평을 늘어놓는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강간과 성폭행을 연애와 사랑의 일반적이고 평범한 과정인양 소비하고, 강간을 각종 선전과 선동에 활용하는 미디어와 언론에서 이들을 정상적으로 보이게 한다. 여성의 신체를 쾌락거리로 소비하며 그것이 자유시민의 권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포르노가 실질적인 성교육교재가 되며, 피해자를 검증하고 낙인찍는다



강간이 법제화된 역사부터 어떤 것이 강간인지에 대한 정의, 삽입성교와 같은 강간으로 인정되는 범위에 대한 문제, 어떤 것이 위력이고 위력이 아닌가를 둘러싼 강간을 둘러싼 관계에 대한 모든 것, 강간과 폭력의 관계는 모두 피해자와 가해자를 둘러싼 해석과 인정투쟁으로 연결된다. 실라의 문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강간을 둘러싼 모든 문제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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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서 4월이 열흘 가까이 지났는데 이제야 3월의 정리를 한다. 

이제까지 나는 너무 바빠서 한달의 정리도 못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별로 바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미루고 있던 걸 보면, 나는 원래 게으른 인간이었을뿐...


새학기가 시작되었지만...학교를 휴학했다. 그래도 일상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도 키우고 집안일도 하고, 회사일도 한다. 학교 하나 가지 않았을 뿐인데 시간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운동도 하고 병원도 다닌다. 더불어서 책도 읽지 않는다. 삶이 평화로워졌다. ㅋㅋ 내가 이토록 지쳐있었나보나. 매일 일과 육아, 눈앞에 보여지는 과제에만 집중한다. 그게 너무 좋다. 


학교에 가지 않는 동안 제대로 읽지 못했던 여성학고전을 읽으리라 다짐도 했었건만. 언제적 다짐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요즘에는 여기저기 손가는 책들을 읽고 있다. 그래서 분야도 내용도 제각각이다. 


베스트셀러라서 읽어보았다. 굉장히 잘 빠진 세련된 베스트셀러를 읽는 기분이었다. 역시 잘 팔리는 책은 무언가 다르구나. 제목도 훌륭하고 표지도 훌륭하고 특히 서문이 훌륭하다. 무엇에 관한 질문에 답을 하다보면 재미없는 답이 나오기 쉽다. '어떻게'에 대해 집중해보자. 그리고 그 대답을 위한 프로세스에 관심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철학은 삶의 무기가 될 수 있다.


나도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페미니즘이 삶의 무기가 되는 순간은, 뭐가 남녀차별이네 아니네. 이것이 역차별이네 아니네. 누가 더 피해자이네 아니네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젠더와 계급이 어떻게 교차되는지, 그리고 젠더는 어떻게 권력과 결탁되어 체계와 구조가 되는지. 그 '프로세스'를 꿰뚫어보는 순간, 세상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을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내가 수많은 성차별적 구조에 상처입고 나의 문제인양 괴로워했던 감정들이 치유되는 것은 덤이다. 덧붙여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맥락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학문이고,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이런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ㅎㅎ


새로운 젊은 세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서 읽어본 책이다. 뭐 여러가지 생각이 들긴 했는데, 아직 정리가 되진 않는다. 책을 읽으며 90년생들의 '정직'에 대한 집착이 새롭게 다가왔다. 스카이캐슬에서 보여지듯 학창시절부터 시작된 도를 넘은 경쟁체계와 '학종'으로 대표되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감없으밍 아마도 '정직'에 대한 집착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표출하는 대상이 과연 어디인가? 생각하면 과연 그것이 정직이 맞긴 한가 라는 생각도 드는거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직을 강변하기 위해 피해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은 90년생이나 X세대라는 70년생이나, 386세대라는 60년대생이 다 비슷한 것 같으니, 이건 90년생의 특징인가, 신자유주의에 개별화된 인간의 특징일까? 






학교에 가지 않는 시기에 문학을 읽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다. 흠, 그런데 역시나 오래된 책이라 그런지 문학을 너무 오랫만에 읽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셋 중에서 <마틸다>가 가장 마음에 남았다.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말이다. 이 책을 읽고나니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싶은 마음도 나더라. 











이것도 문학을 읽고 싶어서 찾아 읽은 책. 재미있었고, 새로운 캐릭터가 신선했다. 

'전성기'라는 말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어딘지 씁쓸하고 찬란한 단어같다. 











다시 무언가를 열심히 써보고 싶어 <쓰기의 말들>을 읽었다. 은유 작가가 뽑은 문장중에 좋은 문장이 많아서 가슴이 막 뛰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들은 이런 거다. "마르크스는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를 읽으면 스스로의 문제를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우치다 타츠루)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은유 작가의 글 중에서 가장 좋은 말은 이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에 품위를 부여해 주는 일이네요."



이 책을 읽으며 나를 쓰게 만들었던 말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말 "세상에 완벽한 문장은 없다. 완벽한 소설이 존재하지 않듯이"라는 문장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손을>에 나오는 "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 라는 글을 읽고 계속 읽고 쓰는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청춘의 문장들>에 나오는,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읽으며 직면하는 글쓰기를 하겠다고 결심했었다.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나오는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를 보며 정확하게 쓰고 싶어졌다. 


나도 나 나름의 쓰기의 말들을 만들고 싶다. 나 나름의 '무기가 되는 페미니즘'을 만들어보고 싶다. 

이제 슬슬 글을 쓰고 싶은 때가 되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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