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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 연휴에 꽤 많은 책을 읽었는데 차례대로 <불안 세대><부서지는 아이들> <편안함의 습격> <경험의 멸종><도둑맞은 집중력>. 이 책들은 작년과 올해를 휩쓴 인문교양서들인데 신기하게도 모두 같은 세계관 위에서 쓰여졌 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그리고 심리학의 일상화와 과잉 정서 진단,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에 회오리처럼 빨려들어간 우리의 진짜 모습,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들 말이다.



이 책들은 묻는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고. 그렇게 편리하고 재미있게 가짜 결핍 속에 사는 동안 우리의 우울증과 불안증은 높아졌고, 아이들은 자신을 깨지기 쉬운 존재처럼 여기고, 불편함과 지루함을 못 견디게 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잊어버리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 가장 큰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의 삶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지금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이 책들을 읽으며 줄을 죽죽 그으며 그래, 맞아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편안함의 습격>을 읽는 내내 내가 이러고 있는 거다. 도대체 순록은 언제 잡는다는 말이야?!



<편안함의 습격>은 주제면에서는 위에서 나열한 책들과 비슷하지만 글쓰는 방식에서는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과 비슷했다. 빌 브라이슨이 지금 시대에 알래스카 오지 순록 사냥을 떠난다면 바로 이런 책을 쓰지 않을까? 빌 브라이슨만큼 정신없으면서도 본인의 알콜 중독 이야기부터 시작해 우울증, 불안, 자살, 비만, 번아웃, 지루함, 운반본능까지 다양한 이야기거리들을 맛깔나게 풀어내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작 나는 ‘그래서 순록은 언제 잡는거야?’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책을 다 읽고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이 편안함의 습격에서 이야기하는, 편안함과 효율과 멸균에 푹 파묻혀 기다림과 지루함을 미친 듯이 못 견뎌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다못해 책에서 순록을 잡으러 떠났으면 순록을 잡아야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불과 10~20년 전 빌 브라이슨의 다양한 기행기를 보면서 킥킥댔던 내가 말이다. 세월은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는단 말인가. 아님 내 안에 있는 통제강박과 극강의 효율추구가 시대와 더불어 더 강화되고 빛나게 발현된 것일지도.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몇 십년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이 모든 책들에서 결국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경험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자신을 깨어지기 쉬운 존재로 여긴다면 인간의 고통은 왜 필요한가? 우리의 상처와 번뇌와 깊은 슬픔이 그저 정신과의 하나의 병명일 뿐이라면 그 심연을 지나온 후의 성숙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손해보기 싫어하는 세상에서 기꺼이 사랑하고 상처받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저 호구인 것일까? 터치 몇 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한 듯 느껴지는 지금 우리에게 진짜 경험이라는 것이, 진짜 몸으로 경험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왜 요즘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에 빠져있는지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원시적 감각, 그냥 몸뚱이 하나로 지면을 박차면서 느껴지는 터질듯한 심장박동, 후둑 떨어지는 땀, 손끝의 저릿함, 그 원시적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관계도 사라지고, 경험도 사라지고, 불편함과 지루함도 사라지는 이 시대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 몸의 경험. 그 자체가 아닐까.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몰입의 시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까 싶다. 나도 달리기나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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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18살인 우리 아들은 아이폰의 탄생과 함께 태어났다. 나는 아들이 1살 때부터 아이폰을 사용했는데 내 핸드폰을 가져가려는 아들에게 못 이기는 척 뺏긴 적이 많았다. 식당에서는 적극적으로 핸드폰을 보여준 적도 많고, 나아가 놀이공원 같이 꽤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때는 아이의 시선을 일부러 핸드폰에 가둬두려고 노력한 적도 많았다


아이가 3살 정도 되어 tv 화면에 다가가 두 손으로 확대하려고 시도하거나 손글씨를 쓰는데 꽤 오랫동안 애를 먹은것도 어찌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이 아이들이 십대가 되었고, 이 아이들은 기존의 현실 세계의 상호 작용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에서 성장한 셈이 되었다. 조너선 하이트는 이 새로운 십대의 출현을 화성에서 성장하는 첫 세대가 된 것과 비슷한 세대의 출현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이 바로 불안사회를 만든 아동기 대재편이다.

 

아동기 대재편의 배경은 이렇다. 첫째, 아동의 일상과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술, 즉 스마트폰의 발전이 있었다. 두 번재 아이를 과잉보고하고 현실에세계에서 아이의 자율성을 제약하려는 추세(이것은 어제 내가 읽은 <부서지는 아이들>에 나오는 바로 그 추세이다.) 기존의 아동기가 놀이 기반이었다면 이제 스마트폰 기반으로 명백하게 달라진 것이다


이 명백하게 달라진 아동기의 결과는 이와 같다. 십대 우울증이 2.5배 증가했고 여자 청소년 자살율이 167% 증가했으며, 이제 아이들은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에서 살며 사회적으로 박탈되었고, 수면 박탈로 인한 건강 악화와 주의력 분산, 그리고 중독 문제가 심해졌다, 아이들은 현실 세계에 발 딪지 못하고 화면에 빠져 살면서 점점 불안과 우울 속에 허우적대며 취약해지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변화인가?

 

어제 읽은 <부서지는 아이들>과 이 책을 보며 정말 이제 우리 아이들은 다른 세대가 되었구나 실감했다. 전에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엄청나게 히트하면서 mz세대의 등장을 알렸는데 이제 내추럴 본 디지털로 무장한 불안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건강하거나 행복해보이질 않는다. 내가 좀더 간편하기 위해 아이 손에 쥐어주었던 스마트폰, 잠깐의 만족을 위해 무신경하게 보냈던 날들이 후회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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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몇 달전 나에게 ADHD검사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자기가 너무 산만하고 정신 없고 무언가를 자주 까먹는 것 

같다고. 그럼 산만하고 정신없고 자주 까먹는 행동을 바꾸기 위한 무언가의 행동을 해본적이 있냐고 물어보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 행동을 바꿔보자고 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주변 친구들은 다 하나씩 문제가 있는데...” 


다 하나씩 문제가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트라우마가 없는 친구가 없다고 했다. 한 명은 은따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증, 한명은 전학 트라우마로 인한 우울증, 한 명은 선생님에게 정서적 학대를 당했고, 자기는 수줍음이 많고 사회성이 많은 사회불안장애인데, 거기에 내향적 ADHD인 것 같다고 한다.

우리 딸은 중2이다. 딸은 사춘기 특유의 아이답게 다 하나씩 문제가 있는 아이들 틈에서 자신의 문제거리를 찾고 있었다. 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따를 당한 적이 있으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할 거다. 전학을 가면 적응하기 전에 좀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수줍음이 많은 것은 장애가 아니며, 산만하고 정신없고 무언가를 자주 까먹는 것은 네가 덤벙거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지 ADHD라는 병명과 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딸은 무언가 서운한(?) 눈치였는데, 오늘 <부서지는 아이들> 책을 보면서 딸과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이것이 그냥 우리 딸만의 중2병스러운 대사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책은 심리상담이 일반화되고, 다정한 양육이 대세가 되면서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불안이 증폭되고, 정신 건강 산업이 블루 오션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네 기분에 집중해볼까?”“너의 최종 목표는 행복이야”“네가 불편하다면 없애줄게.” 이런 말들이 우리 아이를 부서지기 쉽고 안전한 상자 속에 가둬있어야 하는 약한 아이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다정한 양육이 일반화되면서 아이들은 의지할 수 있는 부모를 잃었고, 부모들은 권위를 잃었다. 더불어 양육의 기쁨까지. 아이들은 아이라는 이유로 권리 의식에 빠졌고 부모의 권위와 책임은 외주화되었다. 부모들은 더 이상 아이들을 훈육하지 않고 온갖 상담치료실과 소아정신과를 돌면서 병명을 모으고 약을 먹이고 아이들을 더 약한 존재로 키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 책에서는 허용적인 부모도, 권위적인 부모도 아닌, 권위있는 부모가 될 것을 주문한다. 권위있는 부모는 사랑과 규칙을 양육의 토대로 삼는다. 합리적 방식으로 자녀의 활동을 지도하고 대화를 통해 자녀와 의견을 교환하지만 ”부모와 자녀의 의견이 크게 다를 때는 확실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부모다.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고 규칙을 가르침으로써 말이다.


다정한 양육을 하고자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말을 예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육아서를 읽고 낮에는 화내고 밤에는 울면서 반성하면서 어떻게든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던 1인으로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들이 송두리째 아이를 약하게 만들었나 생각도 들면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 아무리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이건 아닌데,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가 지금 처참하게 부서지는 아이들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우리 시대는 권위적인 부모 아래에서 울고 싶어도 화내고 싶어도 할 말을 꾹 삼키고 함구하며 살았다. 어쩌면 나는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을 아이를 키우면서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방법을 잘 몰랐던 것일지도, 우리 부모 또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방법을 잘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정과 반을 지나 이제 합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양육은 어때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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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파잔'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야생에서 잡은 아기 코끼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뒤 저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날을 굶기고 구타한다. 절반의 코끼리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지만 강인한 코끼리는 살아남아 관광객을 등에 태우고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그들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고 본능의 심연에서 어려풋하게 냉혹한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유를 향한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하는 것. 




저자는 이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다고.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가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이미 파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라고. 



책의 제일 앞 프롤로그의 이 첫부분을 읽은 순간부터 나는 이 책을 사랑할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 역시 어떤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는데, 그리고 이미 영혼이 파괴되고 껍질만 남은 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음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는데. 



지대넓얕 시리즈는 모두 훌륭하지만 개인적으로는 0권은 정말이지 훌륭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우주, 인류, 베다, 도가, 불교, 철학, 기독교 등 다루는 주제와 시간 범위부터 장난이 아닌데 채사장 특유의 명확하고 깔끔한 정리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꿰어간다. 본문은 세계의 근본구조는 무엇입니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이런 답을 제시한다. 


"나-세계"



이것은 본질적으로 이원론의 세계관이고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명제일 것이다. 이 세계관을 가지고 전개되는데 1,2장이 세계를 시간적 구성으로 나눈다면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공간적 구성으로 나눈 3~7장. 그 중 동양적 세계관은 3~5장, 서양적 세계관은 6~7장이다. 그리고 책을  한걸음한걸음 따라가다보면 세계와 나와의 관계, 일원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이 세계의 근본구조는 무엇입니까? 라고 할 때 "세계와 나는 하나다."가 이 책의 결론이다. 즉, 이 책은 한마디로 '세계와 나는 나뉘어져 있다'라는 이원론에서 시작해  과학과 역사, 철학과 종교를 거쳐가면서  '세계와 나는 하나다'라는 고대 성인들의 사상을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알기 쉽게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재미있고 흥미롭다. 이 책을 읽고 채사장, 정말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게다가 문장은 어찌나 간결하고 깔끔하고 재미있는지, 정말이지 내가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게 만든 몇 명의 사람 중에 채사장도 포함이다.



#1. 준비운동-세계를 투명하게 보기 


이 책의 전체가 모두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나 프롤로그, 그리고 준비운동이다. 그는 준비운동으로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구조화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판단중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세계관을 판단중지 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구조화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준비운동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다"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것을 모든 지혜의 출발점으로 여긴다. 주역에도 '관'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부터 시작해 칸트의 인식론도 마찬가지다. 나의 고정관념과 판단, 생각, 확신, 신념 등을 모두 내려놓고 세계를 투명하게 보기. 그렇기 위해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이는 개인적 차원의 일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우주적 차원의 일이기도 하다. 



"자기반성은 스스로와 대면하는 사유과정을 말한다. 마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유의 출발점이자, 최소 조건이 된다. 당신이 사유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개관적 대상으로 마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6)


그리고 강한 인간원리에 의하면 우주 또한 이러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 우주는 그 안에서 관찰자의 탄생을 허용해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찰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바로 강한 인간 원리와 참여 인간 원리다. 이것이 바로 우주에 인간이 탄생한 이유라는 것이다. 



#2. 자아, 세계, 그리고 관계



저자는 세상에는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재론과 관념론. 우선 실재론은 세계가 자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 반면 관념론은 자아가 세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이 차이로 두 세계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실재론은 결국 세계와 자아의 분리라는 이원론으로 향하고, 관념론은 세계와 자아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일원론으로 향한다. 이것을 아는 것은 책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 현대인의 사고를 지배하는 세계관은 대부분 이원론인데 이것은 반쪽짜리 세계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앎'의 영역은 2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안다는 것을 아는 영역'과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영역', 그렇지만 사실 앎의 대부분의 영역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영역이다.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인정하기보다 그것이 없다고 가정한다. 그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어쩌면 더 큰 세계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원론'이다. 



일원론은 간단하다.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지옥이라면 이것은 흔적으로 남아 당신의 다음 삶을 결정할 것이고, 당신의 마음이 천국이라면 당신의 다음 삶도 그렇게 결정될 것이다. 붓다가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왜 팔정도를 강조했느니, 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등 도덕 선생님 같은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을 심판하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에서다. (378)



"마음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다. 결론적으로 유식 사상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사실은 우리 마음에 그려진 이미지이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잇는 것은 오직 의식뿐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의식의 심연까지 깊게 파고 들어감으로써 의식을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까지 더듬는다. 즉 최종 종착지에 이르러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아와 세계를 일으키게 하는 근원적인 능력이었던 것이다. 만약 인류라는 존재가 자아가 무엇인지, 세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탐색하고자 하는 운명에 처해진 존재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러한 능력, 자아와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의 탐색에 있을 것이다. (380)


"이것은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우파니샤트>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의 관계, 유학의 <태극도설>, 그리고 서양 철학의 핵심이 되는 관념론, 중세 기독교의 신비주의와 이어지는 것이다. 세계가 내 마음의 반여잉고, 그러므로 세계와 자아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설명은 세계를 진지하게 통찰하고자 하는 모든 이가 결국에 도달하게 되는 최종 결론이다.(380) 


초기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은 이러한 결론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다. 바로 '일체유심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는 자기계발적 메시지로 해석되기에는 너무도 묵직한 개념이다. 일체유심조는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꿰뚫는다. 우리가 언젠가 이 말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 아마도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내 앞에 드러난 현상 세계가 내 마음이 지어낸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로써 자유로워질 테니 말이다. (381)


그동안 내가 뇌과학책과 심리학, 자기계발서, 촐학, 물리학, 불교 관련 책을 읽으면서 조각조각 메꿔오던 퍼즐이 이제야 맞춰지는 것 같았다. 범아일여, 일체유심조, 관념론, 모두 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 한마디를 찾으러 20년 가까이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무거움에 대한 사유는 지금부터 그 무게에 맞게끔 고민해나가야겠지.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 바깥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이 아름다운 눈앞의 세계는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 능력이 만들어낸 내 의식 안의 세계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는 내가 눈뜬 것과 동시에 생성되어 내가 눈 감는 동시에 소멸한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을 보는 자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 불교의 일체유심조, 칸트의 관념론,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궁극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470)



덧붙여,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 최근 <내면소통>을 읽는데 이 책에서 말하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뇌과학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이 책을 다 읽고 한발짝 더 나아간 책을 읽고 싶은 갈증에 헤매이고 있다면 <내면소통>을 추천한다. 










#3. 나와 세계의 관계를 알았다면 이제 침참해야 할 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주제와 결론은 명확하다고 말한다. 주제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이고 결론은 세계와 자아의 합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오래된 고대의 지혜를 들춰보아야만 하고 일원론의 세계관을 알아야 하는가? 



영리한 작가답게 이에 대한 답 또한 써져있다. 실용적인 이유로는 우리가 고전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고, 실제 이유는 우리가 반쪽의 세계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원론이라는 비좁은 섬 안에 머물고 있기에 자기 내면의 가려진 영억으로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두번째는 존재론적 이유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 세계관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하라. 

둘째, 외부의 떠들썩한 목소리를 가라앉힐 당신만의 시간을 만들어라. 

셋째, 남는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져라. 

넷째,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깊은 정적 속에서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안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하라. 

다섯째, 이제는 현실로 나아가라. 책과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져야 한다.

여섯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어느 날에,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이 다하게 될 날을 에아려보고 남은 삶 전체의 거시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고대의 인도인처럼, 삶의 시간 중 언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언제 내면을 향한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팽개쳐두었던 나의 살을 다시 펼치고 먼지를 떨어내고 다림질해야 한다. 

일곱째,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당신이 계획한 깨달음을 향해 열린 길을 따라 항해해야 한다.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지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552~553)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는데 뭉클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할 수 있는 거 말고, 정말 내 삶이 다하게 될 날을 헤아려 보면서 어떤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마침 오늘은 몸도 마음도 편안한 날이니 계획을 한번 세워볼까나..


나는 올해 48살이 되었다. 내 삶은 아마도 길게는 30년 정도가 남지 않았을까. 부계 유전으로 고혈압과 혈관질환, 당뇨를 가지고 있고, 나도 고위험군이다. 아버지 친척들을 보아도 80이 넘기신 분은 한분도 계시지 않으니 아마도 이 정도로 생각하는게 합리적이겠지. 그리고 아무리 건강하게 관리한다고 해도 75세 정도부터는 건강이 급속도로 하락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건강하게 몸과 마음을 영위하며 생활할 시간은 25년 내외로 남아있는 셈이다. 그리 길지 않은 거다. 



나는 50까지는 30대부터 고민해오던 돈과 경제적 자유에 대한 불안에서 자유롭고 싶다. 대출을 모두 갚고 싶다. 대출을 모두 갚게 되면 1년 정도 안식년을 갖고 싶다. 따뜻한 나라에서 요가와 명상을 하면서 내가 요즘 빠져있는 자기계발 프로그램의 이론적 내용을 정리하고 싶다. 그전에 페미니즘에 대한 책도 한 권 내고 싶고,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닌 개인의 만족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 50대의 내 인생은 몸과 마음의 합일을 위해 더 노력하고 싶다. 요가와 명상을 직업으로 삼고 싶고, 다른 이들의 건강과 성장을 위해 기여하고 공헌하고 싶다. 그리고 이 일을 70이 될 때까지 하고 싶다. 70이 넘으면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루하루 정진하고 싶다. 



25년이 짧다고 생각했는데 미리 그려보려고 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그리고 거시적이고 우주적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 당장의 대출과 이자에 대한 걱정부터 건강과 진로(?)에 대한 고민부터 드는 게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나의 의식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지향해나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좀더 천천히 불안과 걱정과 염려와 이유를 내려놓고 사유를 시작할 때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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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막내아들 이미지

<재벌집 막내아들>을 재미있게 봤었다. 극중 송중기(진도준 역)는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다. 그는 칼기 폭파사건을 예상해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값으로 논만 휑한 분당땅을 받고, 그것은 10 몇 년 후 그가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든든한 씨드머니가 되어준다. 



타이타닉에 투자하고, IMF를 예상하며 Y2K를 알고 바이코리아를 이끈다.이 모든 것은 그가 미래의 모습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안다면' 현재가 달라질까?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아느냐고? 우리가 점쟁이도 아니고, 미래를 아는 사람은 '신'밖에 없는데, 신은 인간이 아니니 결국 미래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신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화된 신은 아닐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범신론적 신을 믿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어쨌든 그렇게 미래와 현재를 따로 떼어놓고 보지만 사실, 세상을 바꾼 1%의 사람들은 미래를 아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미래를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하게 미래를 아는 법일 것이다. 



"전념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술이다. 우리가 지금 무엇에 전념하고 있는지는 말이 아니라 결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결과가 전념의 증거다." (p.41)



그러니까 지금 현재의 나는 과거의 전념의 결과다.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소름끼치는지 모른다. 



예전에 우치다 타츠루의 책을 보다가 완전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바로 "무지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기회와 사건을 통해 나의 무지를 확인하는 일을 만난다. 그때마다 우리는 무지를 타파하겠다거나 나를 알아보겠다는 생각을 철저히 무시한 결과가 바로 무지라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자연스레 생긴 자연체같은 것이 아니라 목적과 의지를 가진 철저한 실행의 결과가 '무지'라는 말에 얼마나 충격적이던지. 여기서 '무지'라는 말에 '미래'를 넣으면 결과는 똑같다. 미래는 현재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불가항력의 무엇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철저한 목적과 의지와 실행의 결과가 미래다. 그러니 우리의 전념이 적극적 전념이건 소극적 전념이건 그 결과는 미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거겠지. 



한때, 미래만 보고 산 적이 있다. 내일의 나를 어때야 해. 3년 후, 5년 후의 나는 어때야해. 나는 그렇게 미래를 사는 사람이었다. 그것만을 보고 살았다. 그런데 그것때문에 나는 현재를 산 적이 없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아파도 괴로워도 그저 참았다. 미래를 위해. 그리고 나는 지금 거울을 바라본다. 나는 무엇을 이루었나? 내가 원하던 미래가 에고로 가득찬 그저 그런 삶이었던가.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앞으로 3년 후를 위해서. 3년 후에 지금처럼 똑같이 힘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3년 후, 5년 후, 10년 후의 미래를 보며 이 책을 읽는다. 



"행동이 바뀌는 이유는 정체성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자신이 가장 전념하는 모습이다. 정체성의 바탕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전이 있다. 따라서 전념하는 비전이 다라질 때 정체성은 즉시 달라진다. 그러면 생각과 행동도 바로 달라진다. 맞다, 미래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p.41) 



나는 이게 모든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정체성이 바뀌지 않는 한, 그리고 가끔 그 정체성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정체성이 과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이다. 정체성은 미래에서 온다. 



우리가 다음날 중요한 약속이 있으면 오늘 술자리를 자제하듯이, 1달 후 발표할 일이 있으면 지금부터 틈틈이 준비하듯이, 3년후 미래를 위해 오늘 투자하듯이.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말하듯 시간차를 뛰어넘는 말이 평범한 말을 신의 계시처럼 들리게 만든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의 평범한 미래를 상상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거라는 '믿음'은 아닐까. 





































그게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이고 긍정확언의 본질이며, 네 안의 잠든 거인을 깨우고, 생각하면 부자가 되고, 잠재의식의 힘이고, 부의 시크릿이고 야망의 힘이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던 그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거머쥔다. 



그리고 90%의 사람들이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그릴 때, 그 사람들은 미래를 먼저 그린다. 완성된 집의 형태를 먼저 보고 그것의 설계도를 그려나간다. 그리고 그 집을 짓기 위해 현재에 무엇을 할지 역산한다. 성공은 그렇게 비합리적으로 온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관심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기꺼이 희생한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 나중에 미래의 내가 더 많은 돈을 쓸 수 잇또록 지금은 소비의 즐거움을 희생할 것이다. 일시적인 만족을 희생하고 교육과 건강, 인간관계에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이다. 미래의 나를 좋아하다가 그 감정이 커져 사랑하게 되면 현재의 보상을 희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나를 위해 투자하게 된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 나는 그 일 혹은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투자한다." (p.83)



나는 미래의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가? 미래의 내가 진심으로 성공하기 원하는가? 이 책은 결국 그것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망설이지 말고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기꺼이 투자하기. 내가 아이한테 하듯이, 우리 회사에 하듯이.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미래의 나를 위해 기꺼이 투자하고 헌신해야겠다.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먼저 다른 사람이 목표를 이룰 수 잇게 도와라. 거기서 출발해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변혁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점으로 갈 수 있다. 변혁적 관계를 탄탄하게 구축하면, 미래의 당신은 상상 이상으로 훌륭하고 탁월해질 것이다. 거래적 관계로는 지금 이 지점까지만 올 수 있었다. 거래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미래의 나는 더 멀리 갈 수 없다. - P80

누군가에게 진정한 관심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기꺼이 희생한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 나중에 미래의 내가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도록 지금은 소비의 즐거움을 희생할 것이다. 일시적인 만족을 희생하고 교육과 건강, 인간관계에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이다.
미래의 나를 좋아하다가 그 감정이 커져 사랑하게 되면 현재의 보상을 희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나를 위해 투자하게 된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 나는 그 일 혹은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투자한다. - P83

두려움이 용기가 되면 용기와 비전이 동기가 되는 것보다 낮은 수준의 의식 상태에 머물게 된다. 두려움을 초월해 수용과 용기. 사랑을 행동의 이유로 삼으려면 더 높은 수준의 정서가 발달해야 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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