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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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소설 중 가장 강렬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미국의 목가>. 이완 맥그리거 감독,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인간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과 그 인간을 둘러싼 더 큰 배경을 교차시켜 엮어내는 힘이 가히 대가의 솜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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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 2025-05-02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둘째 녀석의 작은 일탈이 있어, 과연 부모의 교육과 영향력은 자식에게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보니 나는 이 <미국의 목가>를 철저히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으로 인해 고통받는 ‘스위드‘에 이입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끙.

관찰자 2025-05-02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책꽂이에 있는 책을 재독하고 있는데, 필립 로스의 책이 이렇게 많은 줄 내 미쳐 몰랐네. 심지어 <미국의 목가>는 읽지도 않은 새것으로 그대로 꽂혀 있었다. 흠...... 어쩔꺼야.... 어쨌든. 이제 읽었으니 되었다.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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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에브리맨>


최근 노화와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시아버지는 76세에 접어들었지만 매일 새벽 5시반에 기상하여,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산을 오른다. 두시간쯤 되는 시간을 산에서 보내고, 간단한 샤워를 마친 후 다시 집을 나선다.

일명 '콜라텍'으로 불리는(내가 어린 시절에 있었던 콜라텍이 아니라 어르신들을 위한 전용 카바레 같은 곳) 무도회장에 가서 춤을 추신다. 실제로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매점 비슷한 곳에서 음식과 술을 팔기도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기 보다는 주로 또래의 여성들과 함께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는 공간이라고 하셨다. 자율에 맡긴 춤이 아니라 정해진 스텝이 있고, 파트너와 함께 해야 하기때문에 때론 레슨을 받기도 한다고 하셨다.


지하철이 무료이기 때문에 서울 청량리 같은 곳으로 원정을 가시거나 거꾸로 천안같은 곳으로 나가는 일도 있다고 하셨다. 주로 역 근처에는 이런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렴한 음식점이 많기 때문에 근처에서 국밥을 드시거나 짜장면 등을 드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신다.


다시 저녁에는 여자친구 분 댁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하시고는 9시쯤 일찍 잠자리에 드신다.


골프를 즐겨 하시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어번은 골프 약속도 잡으신다. 


배우자의 죽음 뒤, 은퇴 이후의 삶을 저토록 홀로 잘 즐길 수 있다면 비교적 훌륭한 노년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아버님이 최근 부쩍 전화를 자주하셔서는 "다리에 힘이없다" "왜인지 입맛이 없다" "조금만 걸어도 피곤해져서 산에 가기가 힘들다"고 하신다.


물론 병원에서는 병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일련의 노화의 과정인 것이다.


늘 쌩쌩하기만 했던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부쩍 짜증이 많아지셨다. 그리고 자꾸 왜그런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반복하신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니요. 그냥 늙어가는 과정이에요 아버님.



필립로스의 <에브리맨>은 한 남자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시종일관 병에 걸리는 것에 대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을 넘어 버리는 것에 대해 걱정하던 그는 정작 한번뿐인 자기의 삶 속에서는 진지하지 못하다.

아니, 이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너무나 자신의 현재의 삶이 소중하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약속을 지키고, 의무를 다한 삶이 버거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로부터 도망쳤고, 도망칠 수 있었다.


훗날 버려진(확실히 버려진 것이다) 두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두 아들은 결연히 용서하지 않는다. 물론 이 에피소드가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멈춰섰다.

일방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부모가 자식에게 가한 폭력을 성인이 된 자식이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가? 본인은 본인의 삶을 후련하게 잘 살고 나서 청하는 화해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늙어가는 것에 대해,

육체가 노화되는 것에 대해,

그러므로 죽는다는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주인공의 두려움을 전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어차피 죽음은 다가오는 것이기에

현재의 삶을 더 단단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혹, 그렇지 않은 삶을 산 채 죽음을 맞이 한다면 할 수 없이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오래전에 한번 읽고,

마흔이 넘어 다시 읽는 <에브리맨>은 뭔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주인공의 이기심과 무책임함으로 버려진 이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몇 줄의 언급 만으로 지나간 그들의 그간의 인생이 불쌍했다.


본인이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졌기에 부릴 수 있는 그들의 이기심에 진저리가 났다.


죽음은,

다가오면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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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이라가 주장하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2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이승수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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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이라는 나라는 특히, 리스본이라는 도시는 나에게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이름과 함께 기억된다.

또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한번도 가본 적 없고, 아마 앞으로도 가 볼 일이 없겠지만 도시의 구석구석, 음식 냄새, 눈이 오고 비가 온 뒤의 도시의 분위기까지 막연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소설이 주는 어떤 힘 때문일 것이다.


페레이라는 살리자르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친정부 성향의 신문 <리스보아>의 문화면을 담당하는 기자이다.

날마다 사별한 아내의 사진 앞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하고, 정치와는 무관하게 프랑스 문학을 번역하여 신문에 실으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크게 좋을 것도, 그렇다고 크게 나쁠 것도 없는 인생이다.

어쩌면 이미 흘러가버렸기에,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에 더 편안하고 안정적인 과거와 함께 계속 살았다면 페레이라의 삶은 더 안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이 그렇듯이,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의 앞에 몬테이루 로시가 나타난다.

아니다. 어쩌면 그가 몬테이루 로시를 발견해낸 것이다.

잡지에서 그가 쓴 죽음에 관한 글이 마음에 들어 그를 작가들의 사망기사를 미리 써줄 수습 기자를 채용한 것인데, 사실 그 글은 그가 쓴 것이 아니라 베껴 쓴 것임을 알고 난 후에도 그를 자르지 못한 것을 보면, 로시라는 청년은 페레이라의 앞에 그저 나타난 것이 아니라 페레이라가 스스로 발견해 낸 것이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 바다에 돌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로시를 만난 후 페레이라는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가지 못한다.

페레이라는 점차 로시가 하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문학만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일 뿐, 나 하나의 생각이나 말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점차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게다가 지난 날의 삶에 작별을 고하고, 현재를 살고 미래와 교제하도록 노력하라고 말하는 의사의 조언도 점차 들리기 시작한다.


페레이라는 달라졌다.

로시를 만나 달라진 페레이라는 다시는 어제의 페레이라로 돌아가지 못한다.


스페인 인민정부를 위해 활동하다 경찰에 쫓기게 된 로시를 숨겨주고, 

로시를 뒤쫓던 무법자들이 로시를 끝내 고문끝에 숨지게 하자

페레이라는 로시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고발하는 폭로기사를 내고 

해외로 도피한다.


아마 페레이라의 남은 생은,

용기있게 진실을 밝히고,

또 그로인해 밝혀진 진실이 세상을 바꾸는 

그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세상이 하 수선하여 자꾸만 소설 속으로 도피하고 싶은 요즘이다.

문학만이 위로가 되고, 문학만이 중심을 잡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꾸만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으로 부터 멀어지고만 싶을 때, 다시 한번 만난 <페레이라가 주장하다>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현재를 살과 미래와 조우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워도 현실을 직시하는 눈과 진실을 밝히는 입들이 많아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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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너도나도 지브리 풍 일러스트 만들기 열풍이다.



라고 시작되는 기사도 이미 너무 많이 읽었다. 끙.ㅡ.ㅡ


본래 신문물에 대한 관심보다 의심이 앞서는 타입이라 '챗GPT? 흥 그게 뭔데!' 하며 무시했지만,

너도나도 지브리 프사를 올려대는 통해 나도 그만...... 

접속해보았다.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흑백의 글씨와 대화창 하나가 덜렁 등장한다.


이건 약간, 문화적 차이인가?

로고 하나도 어떻게든 아기자기 하게 꾸며야 직성이 풀리고, '무슨무슨 날'을 기념해서 계속 새롭게 바뀌는 네이버 홈페이지와 비교해보면 너무 간단한 것 아닌가 싶다. 



하긴..


검색할 것이 있어 네이버에 접속했다가 딴 길로 빠지는 바람에 허비된 시간과

알고 싶지 않은 일이 자꾸만 메인 화면에 기사로 뜨는 바람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알고 싶고, 찾아야 할 내용을 직접 입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저런 디자인이

오히려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생각해보니 구글도 그런 디자인이구만.

흠. 그래. 이쪽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아무튼,

내가 '챗GPT'에게 


'지브리풍과 슬램덩크풍으로 그려줘'라는 명령어를 넣고 그림을 부탁한 결과

지브리에서도 슬램덩크에서도 나는 주인공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브리에서는 

주인공 여자아이가 고민이 생겼을 때, 

옆에서 깨방정 떨며 조언해주는 이모나 옆집 아줌마 같고




슬램덩크에서는

뭔가... 흠... 적절한 비유가 잘 생각나지 않지만

뭔가. 브로커나 탐정...스파이... 뭐 그런거. 역시 주연은 아닌. 실마리를 주고 일찍 죽는..




같은 사진을 넣었는데,

화풍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구요? >.<


암튼.


한번은 해보니 재미있었는데,

이렇게 올려진 내 원본 사진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를 생각하니

갑자기 우울해질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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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물이다 - 어느 뜻깊은 행사에서 전한 깨어 있는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생각들, 개정판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재희 옮김 / 나무생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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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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