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일반판
이누도 잇신 감독, 우에노 주리 외 출연 / 디에스미디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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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고도 친구로 남는 경우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이제 다신 조제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겨울이었다.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난 시점은. 발에 물집이 잡힐 만큼 걷고, 또 걸으며 그녀에 대한 생각들을 꾹꾹 밟았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덜 밟으면 끈질기게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처럼, 정성들여 으깼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거의 성공했을런지도 모른다. 산에 무턱대고 올라가다가 길을 잃어버렸던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는.


산에서 겨울밤을 보낼 뻔 한 이후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무작정 다시 연락을 해서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나는 너를 보고 싶다' 로 요약되는 말을 했고.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말쑥하게 보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정장까지 입고, 그녀를 만나러 기차를 탔다. 올라가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그저 뜨문뜨문 기억날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 분명 그때의 나는 절박했었던 것 같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발로 밟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어지고도 친구로 남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역시, 그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거다.


-

당직을 서면서 추천영화 목록을 하릴없이 보고 있다가, 우연찮게 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일하는 도중이라 뛰엄뛰엄 볼 수 밖에 없었지만, 어느 순간 집중해서 볼 수 밖에 없었고, 로맨스 영화라면 질색을 하는 아내를 설득하는 중이다. 여보, 나 영화를 보는데 아무래도 이런 영화는 당신이랑 꼭 껴안고 봐야 되는 것 같아. 이러니 저러니해도 난 배드앤딩은 싫다. 우는 것은 더 싫다.


그간 있었던 일들이 어찌 한두마디 말로, 글줄로 다 털어놓을 수 있을까? 인생에는 항상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아무리 바뀌고 변화하는 듯 싶어도, 그리고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잠깐 딴 생각하다가 주위를 돌아보면 다시 그 자리에 서 있게 된다. 나는 몇 번이고 근무처는 바뀌긴 했으나 병원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고, 책은 조금도 보지 않으며, 영화도 거의 보지 않는다. 쉬는 날이면 그저 집에서 아내랑 심해 바닥을 굴러다니는 한 쌍의 조개처럼 데굴거리며 굴러다닐 뿐이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헤어지고도 친구로 남을 수 없으니까


가끔은 정말로 궁금한 듯, 나에게 묻는다. 그때 왜 나를 잡았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저 웅얼거린다. 사실은 당신이 어떤 사람일지 나는 전혀 몰랐다. 내가 정말 힘들어서 진창에 빠져 있을때 내 손을 부여잡고 '당신, 계속 타지생활하느라 부모님 제대로 못뵈었잖아. 내가 당신을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을 드릴께' 하며 고향으로 같이 내려가주리라는 것을 당신을 잡을 때는 미처 몰랐다. 그런 것들은 하나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웅얼거리다가 난 당신을 잡을 때 알고 있었노라고, 당신이 똑부러지는 똑순이라는 것을, 하고 얘기하면 삐죽이면서 재활용이라도 좀 버리고 오라고 투덜거리지만, 이윽고 배시시 웃으면서 나도, 당신이 나를 잡아줘서 정말 고맙다고 생각한다고, 아니 왜 자신을 더 빨리 잡지 않았냐고 떼를 쓰는 모습에 다시 웃는다.


삶이란, 몇 번의 변주끝에 결국에는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조제는 누군가 밀어주는 수레가 아닌 전동휠체어도 타고, 혼자서 생선을 구워먹는다. 조금은 다르지만 그래도 비슷비슷한 생활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그 생활이 살아지는 것은 아무리 비슷할지라도 그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리라. 깊고 깊은 심해에서 굴러다니는 조개는, 어두컴컴한 동굴 깊은 곳에서 그 어떠한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던 야수는, 몇 십광년 너머에 홀로 반짝거리며 차가운 우주를 유영하는 항성은, 얕은 바다로 올라오고, 따뜻한 모닥불 근처에서 머물고, 쌍성을 찾은 뒤에는 다시는 원래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아니, 그래서 상관없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 살아지는 것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제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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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의 과학
킵 손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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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 손은 우리가 발을 딛는 이 우주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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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5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뇌와 그 환원에 대하여.


 

 

- 그래서 완전한 의미로서의 환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미래에 기술이 극도로 발전한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시청각 등의 감각 자체는 받아들이는 수용체에서나 다를 뿐 실제로 뇌의 내부에서는 전기 신호에 지나지 않으니깐요.

 

= 확실히 그 부분에 있어서는 동의합니다. 실제로 뇌 내부에서 전달되는 전기신호의 흐름으로 환원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비주의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환원을 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고, 그 부분 또한 우리의 직관, 그리고 그 직관을 쌓게 해주는 경험이라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단순한 전기 신호로서 환원이 가능한 것들이 아니라.

 

- 글쎄요, 빅데이터 등의 요소를 활용하여 각 개인이 어떻든 산출되는 결과자체의 범위는 충분히 객관화시킬 수 있는 자료로 추출할 수 있을 텐데요.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향기를 맡을 때, 우리의 후각 수용체가 평균 몇 퍼센트 정도로 활성화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데이터로 환원할 수 없는 부분이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이 있겠습니까? 분명 제가 느끼는 이 향기는 당신이 당신의 의식에서 느끼는 그 향기와는 다른 것일 겁니다. 하지만 외부의 눈에서 볼 때에는 '나나 당신이 어떻게 느끼더라도' 똑같이 수용체의 활성도로 표시할 수 있는 지표라는 겁니다.

 

= 그 부분은 분명 감각질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감각질의 문제는 사실 자의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라마찬드란의 저서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물리주의자에, 유물론자, 그리고 환원론적 방법론을 중시하는 제가 계속 환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의식이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보며 이에 감각질이라는 것도 사실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그쪽의 의견에 동의하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의 전기적 화학적 작용으로 환원을 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그것은 믿음아닙니까?

 

= 확실히 믿음, 신념, 혹은 철학의 문제처럼 보여지겠지요. 하지만 저는 여기서 좀 더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복잡계를 모델링을 할때, 어느 정도로 가지를 쳐야 모델링이 가능할까요? 어느 시점에서는 복잡계를 모델링한 모델 1이 복잡계만큼이나 복잡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 모델1을 다시 근사한 모델 2 또한 만만치않게 복잡할 수 도 있을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나간다면 모델 z는 모델 1과도, 아니 원본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방금전에 우리 뇌의 신호를 모두 전기신호로 환원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그 전기신호로 환원한 모델1은 우리 몸이 아닙니다. 컴퓨터에는 몸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포로 되어있지도 않고, 뇌 또한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분일뿐, 전부가 아닙니다.

 

- 뇌가 곧 우리 자신은 아니다, 라는 것을 주장하시고 싶으신것인가요? 뇌가 아니라면 우리가 스스로를 느끼고 여기는 그 의식이 어디에 머문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고대인들처럼 심장에라도 머문다고 생각하십니까.

 

= 저는 수반명제를 따르는데, 수반명제라는 것은 거칠게 말해서 같은 뇌에는 같은 정신이 깃든다, 라는 겁니다. 문제는 같은 '뇌'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나라에는 생각보다 많이 알려지지 않지만, 우리의 육체에는 제2의 뇌가 있습니다. 소화기신경계(Gastric nervous system)이 바로 그것입니다. 뇌에 버금갈만큼 수많은 신경전달물질이 단순히 소화만 관장하는 줄 알았던 이곳에 머물러있습니다. 또한 뇌에 버금갈만큼의 역할을 우리 몸내부에서 관장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뇌는 이 제2의 뇌도 포함해야합니까? 제2의 뇌를 포함한다면, 이 제2의 뇌가 활성화되도록 도와주는 그외의 기작은? 그 외의 기작을 돕게 만드는 다른 요소들은? 이런 요소들을 다 포함한다면 이미 그것은 뇌'만의' 문제는 아니게되는겁니다. 말이 길어졌는데, 통 속의 뇌, 사고실험에서 저는 처음부터 통 속의 뇌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뇌와 같은 의식을 가질 수 없다고 봅니다. 외부의 환경과 기작, 그 모든 것을 전기신호와 화학신호로 환원시켰다고 보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지는 생명으로서의 기본적인 원리, 후쿠오카 신이치의 말을 빌리자면 동적평형, 이라는 그런 요소를 결여했기 때문이지요.

 

- 말씀이 약간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을 옹호하는 듯한 것 처럼 들립니다.

 

=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오해입니다. 절대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다만 컴퓨터가 인간을 그대로 모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논증입니다. 그렇기에 서둘러 말을 잇자면 인간을 모사하려면 진화의 과정을 똑같이 밟은 생명체가 그 모델이 되어야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굳이 용어를 쓰자면 생체컴퓨터와 같은 용어를 붙이겠지만 상상하기 쉽지는 않지요, 그러나 만에 하나 우리가, 그리고 최초의 복제자가 광물에서부터 시작했다면, 그리고 우리가 덮어쓰고 있는 외피가 컴퓨터와 같은 쇠와 세라믹이라면 어쩌면 우리의 의식을 가상세계에 구현하기가 훨씬 쉬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하지만 몸이 광물이든, 몸이 생체든 결국 끝에는 전기신호와 화학신호로 환원되는 것 아닙니까? 내부의 신호든 외부의 신호든 저 두가지가 끝에 없는 기작은 없지 않습니까. 그걸 다 맞춰준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다시마로 MSG를 우려내든 조미료로 뿌리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 옳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듯, '뇌의 전기신호'만으로는 환원안되는 것들이 있으며,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피부의 전기신호', '소화기 신경계의 전기신호' 등으로 구획을 나누어져 분석하지 않는 한 전체 나를 모사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물론 이는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에 지나지 않으며) 이렇게 말씀드리더라도 결국 신호의 최종 목적지는 시상이 아니냐고 말씀하실 수 있겠지만, 그 부분은 그른 말씀입니다. 모든 감각신호가 시상에 들르는 것은 아니며, 시상에 들르지 않고서도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사reflex같은 것을 보시면 아실겁니다. 사실 여기서부터는 가설의 영역이라 말을 아낄 수 밖에 없을 듯합니다. 다만 통속의 뇌에게 모든 신호를 완전히 맞춰주더라도 저 뇌의 의식은 통에 갇힌 답답한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꼭 주지드리고 싶은 것은 편의상 의식이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 설명하기에 편하기에 일부러 이렇게 의식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앞서도 설명드렸지만 저는 의식이라는 것이 착각이고, 망상에 지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같은 뇌에는 같은 정신이 깃든다, 라는 명제를 확장하여 같은 육체여야만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느끼고 지금 대화하는 이 나라는 존재가 분명 있는 것 같아보이지만, 사실은 이 나는 없는 것이며, 어쩌면 극렬 물리주의자와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나는 이 육체인 것입니다. 컴퓨터가 아니라. 따라서 이 육체를 모사하려면 생명체가 필요합니다.

 

 

 

도덕과 윤리에 대하여

 

 

 

-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자가 빈자에게 베풀어야 한다, 등의 명제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도덕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그저 사람들의 합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익숙한 명제를 낯설게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에 있어서는 이 또한 진화심리학적으로 어떤 기작이 이미 정해져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고 봅니다. 그걸 도덕과 윤리로 이름 붙인 것은 우리지만요.

 

- 그러나 어떤어떤 일을 해야한다, 가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언명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는 경우는 정말 드물지 않습니까? 이는 수학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 그러니 진화적인 관점이 여기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샘 해리스의 말을 빌리고 싶습니다. 그는 도덕적 지평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각자가 그리는 도덕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낸 일종의 도표와 같은 것인데, 어떤 사람은 그 도덕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릴 수 있는 까닭은 첫 번째, 우리가 의식이 있는 존재, 두 번째, 이 의식있는 존재는 행복을 추구할 것이라는 동어반복적 명제 때문입니다.

 

- 동어반복적 명제..

 

= 네, 의식이 있는 존재가 어려움을 피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동어반복적입니다. 그렇지 않은 의식이 있는 존재가 있습니까? 이는 당연한 겁니다. 진화론의 가장 기초가 되는 명제는 가장 안정한 것이 적합자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동어반복적입니다. 틀릴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도덕이 출발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제가 도덕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과의 한 일부분이 되기에는 미약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업을 할 때, 도덕적으로는 하면 안되지만 실제 경제논리상으로는 더 나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럴때 도덕으로 안돼, 라고 막는 것은 충분한 강제성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한 겁니다.

 

= 이미 말씀하신 '실제 경제논리상으로는 더 나은 방법' 이라는 용어 자체에서 도덕이 불필요하다고 상정하신겁니다. 그 부분이 위험한 생각이구요. 경제논리상으로 더 나은 방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니, 도덕이 필요하다면 도덕을 생각해야만 하고, 경제논리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면 경제논리상으로 옳은 길을 가야만합니다. 여기서는 중간은 없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1 ->2 ->3

1 -> 3

 

위의 두 경로가 있습니다. 2는 도덕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경로입니다. 1 ->3의 경로를 들면서 보라 이렇게 가까운 길이 있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렇다면 더 가까운 길을 택하지 않습니까? 도덕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도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배중률에 의하여) 왜 처음 경로를 택하지 않습니까?

 

- 하지만 도덕이 꼭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바로 이 부분에서 진화론이 뒷받침될 수 있을 겁니다. 굳이 도덕이라는 이름이 아니라도 좋습니다만 우리가 도덕이라고 이름붙이는 이 심리적 기전이 진화적으로 발달하였으며, 이는 많은 심리학적 실험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네요

 

- 진화론이 전가의 보도같군요

 

= 그 말에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마지막 변론을 하자면, 왜 본인은 더 빠른 길을 따르지 않습니까? 남들의 시선때문에? 아니죠. 막상 그 길을 가려면 마음이 콱막히고 무언가 가슴이 무거우니깐 못가는 겁니다. 그걸 세간에서는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칸트는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이라고 이야기했구요. 그게 진화적으로 발달한 기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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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nthropod 2016-01-24 19:20   좋아요 0 | URL
그 환원불가능한 의식적 무언가가 어떠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소중한 날의 꿈 : 일반판
안재훈 외 감독, 오연서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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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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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Europa Report (유로파 리포트) (한글무자막)(Blu-ray) (2013)
Magnolia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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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다 좋았는데, 외계생물체의 디자인은 정말 이게 최선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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