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체성 ㅣ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나이를 먹으면서, 횟수가 줄어드는 것 중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포함되지 않을까?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은 샹탈의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p29로 시작해서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p183로 맺음 한다. 샹탈이 반은 재미 삼아 말한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에 연인 장마르크가 그녀의 '자존감'을 살려주기 위해 시작한 자작극 장난 편지가 두 연인을 파국으로 몰아갈 뻔했다. 후반부에 어디서부터 꿈이었고 어디가 현실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결국 둘은 재회하고 서로가 자신의 상대에 대한 '존재'를 확인하고 '본다'.
"눈, 영혼의 창, 아름다운 얼굴의 중심. 한 개인의 정체성이 집결되는 점. 그러나 동시에 일정량의 소금기가 있는 특수 세제로 끊임없이 닦고 적시어 유지 보수해야 하는 시각 도구." p72
결국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유지 보수해야 하는 10초 내지 20초마다 눈꺼풀의 깜빡임을 배경으로 지운 채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마치 한 몸에 붙은 두 사람이 마주 보며 그제야 서로와 자신을 확인한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를 언제 질문하고 질문받을까? 변화가 생겼을 때일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때일까? 전자는 나를 둘러싼 주변에 의해 나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을 때이다. 질문 자체가 풍기는 것처럼 '비교' 정확히는 '대조'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해 자문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 경우에는 "나는 누구인가"는 "나는 왜 이 모양이지"로 전락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경우 던져지는 "나는 누구인가"는 저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영원회귀의 부조리나 카뮈의 부조리에서 나오는 "나는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담"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는 "회한"에 가까운 자책성 질문인 것 같다.
그 회한의 "나는 누구인가"가 아름답게 결말지어질 때, 우리는 "극복", "개선", "혁신"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좀 더 근사하게는 회고(retrospect)라고 명하기도 한다 한다.
<정체성>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는 샹탈의 늙어감에 따른 조바심 섞인 질문이다. 연하의 남자 장마르크가 시누이가 말하는 '괜찮은 남자'에서 자신의 늙음으로 인해 나의 노쇠로 떠나가 버릴 것 같은 전전긍긍의 불안한 남자가 되면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샹탈은 5살 아이를 잃었다. 그 아픔을 계기로 샹탈은 인내하며 고분고분하게 살아왔던 삶과 작별을 고하고 이혼을 하고 선생님이 아닌 돈을 더 많이 버는 직업을 선택해 독립한다. 어쩌면 아이를 잃은 것이 '부조리'를 깨는 계기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소 무능한 장마르크는 분에 넘치는 일을 꾸며본다. 샹탈의 무너지는 자존감 - 더 이상 남자들이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 을 회복하기 위해 샹탈을 연모하는 누군가가 익명의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일을 꾸민다.
샹탈은 외부 - 남자들 - 로부터 자각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했고, 샹탈의 연인 장마르크는 그것을 익명의 누군가로 가장해 지지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각자의 정체성으로 회귀한다. 해피엔딩인가?
민음사의 밀란 쿤데라 전집 09의 <정체성>은 해설이 없다. 아쉽기보다는 막막하다. 가브리엘 G. 마르케스 (가브리엘 호세 데 라 콘코르디아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쿤데라의 꿈으로 더한 것 같은 이 짧은 작품에 해석이 없어 막막하다.
최근에 친한 친구 두 명의 아버님이 거의 한 달 간격으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다. 왕래가 없던 대학교 친구들을 보니 뒷모습만 보니 이름을 부르기 망설여질 정도로 알아보기 힘들었고, 정면을 볼 때는 "왜 이렇게 늙었어"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그들의 낡음에 무척 놀랐다.
30분이 흘렀을까? 세월이 흘러도 덜 변하는 목소리와 제스쳐 덕분에 대학 시절 학교 앞 어느 삼겹살집에 모여 앉은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10초 내지 20초마다 깜빡이는 눈꺼풀의 운동을 하는 우리들의 눈은 지금의 우리들 모습을 대학 시절로 돌려놓았다. 그것은 회상은 아니었다.
장마르크는 절친이었지만 자신을 비난한 자리에서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은 친구 F와의 우정을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기억의 소환 도구로 치부하지만, 그 식장에서의 우정은 나의 정체성의 시간 여행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을 나에게 던진지가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받아들인 것일까? 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며 상황이며 사람들을 받아들인 것일까? 나이 먹음에 나는 죄다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그 질문에 억지 부림은 샹탈과 장마르크처럼 돌아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알아서 수긍한 것일까?
그래도 나는 아직 질문한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덧붙임, 2021.08.22]
'붕붕툐툐'님의 댓글을 보며 덧붙인다.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쿤데라는 <정체성>에서 "관계'로 풀었다. 나의 정체성을 상대로부터 확인하고 확립하는 과정을 서사한 것이다.
'정체성'의 사전적 의미는 존재의 본질을 다루지만,
정체성: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네이버 사전)
Identify: the fact of being who or what a person or thing is. (Oxford Dictionary by Google)
'관계'로 인지되고 정의되는 '정체성'을 사회 과학(Social Science)에서는 여러 측면에서 깊게 다룬다.
Identity is the qualities, beliefs, personality, looks and/or expressions that make a person (self-identity as emphasized in psychology[1]) or group (collective identity as pre-eminent in sociology).[citation needed][2] One can regard the awareness and the categorizing of identity as positive[3] or as destructive.
( Identity (social science) )
위 위키피디아 페이지 중, 사회 심리학(In social psychology)에서 Kenneth Gergen가 관계적 자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는데, 그룹이나 사회 안에서 의미를 가지는 정체성을 말한다.
관계적 자아(relational self) 관계적 자아는 모든 배타적 자아를 버리고 타인과의 사회적 참여라는 관점에서 모든 정체성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the relational self is a perspective by which persons abandon all sense of exclusive self, and view all sense of identity in terms of social engagement with others.
또한, 동일 페이지의 철학 부분에서는 헤겔의 Master-Slave 변증법을 소개하는데, 마음은 다른 마음을 만날 때에 비로소 인지된다는 것이다.
In his famous Master-Slave Dialectic Hegel attempts to show that the mind (Geist) only become conscious when it encounters another mind.
잠자냥님이 알려주신 것처럼,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에 해설이나 번역 후기를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독자에게는 곤욕스러운 짐을 떠넘기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열린 마음과 호기심으로 더 많이 사유하고 공부(research) 하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같다.
툐툐님과 새파랑님, 잠자냥님의 댓글을 보고, 정체성에 대해 찾아보다 갑자기 광할한 대양과 마주한 것 같다.
툐툐님과 새파랑님, 잠자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