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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인간의 시계로부터 벗어난 무한한 시공간으로의 여행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보희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1년 5월
평점 :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 평소보다 즐겁거나 몰입했거나 다급할 때, 상대적으로 시간은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없어요" -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
"시간이 필요할 거에요" -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일정량의 시간이 흘러가야 하는 것을 말한다.
"시간은 금이다." - 인간이 가진 그 어떤 재화와 기술과 권력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의 가치를 말한다.
"세월 (시간의 흐름) 앞에 장사 없다" - 이 세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시간을 거스를 수 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노화되고 낡아지는 것을 전한다.
우리는 '지금'이라는 기점으로 '전'과 '후'를 나누고, 그 나눈 것을 '시간'이라고 명하고, '전', '지금', '후'를 '과거', '현재', '미래'라고도한다. 그리고 그 '지금'이라는 기점이 흘러가는 것을 '시간이 간다', '시간이 흐른다'로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의 이론물리학자들이 언제부턴가 시간과 공간을 결부 시켜 '시공간'을 연구하더니 뉴턴과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파인만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 등을 거치더니 "시간은 엔트로피의 증가' 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공간은 구획되거나 구획되지 않은 비어있는 그 공간이 아니고 루프들이 엉켜 있는 집합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관계적인 개념이 된다. 시간은 사물들의 다양한 상태 사이의 관계를 나타낼 뿐이다." p152
"결국 '시간'은 그저 '엔트로피화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 엔트로피의 증가가 관찰되는 방향을 시간이라고 부를 뿐이다." p170
장난감으로 방이 어지럽혀지듯이, 물체가 분자가 원자가 전자가 움직여서 무질서해지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시간이라고 하고, 그 움직임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온 세상의 시간은 동일하게 흘러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한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p144
"세슘 원자가 1초라는 시간이 지나면 91억 번 (정확히는 9,192,631,770번) 진동한다"가 아니라 "세슘 원자가 91억 번 진동하는 것을 1초라고 한다" 라는 의미이다. (ref: Wikipedia - Caesium standard, 위키백과 - 초 (시간))
시간이 모든 만물의 변화 기준이라는 자리에서 만물의 변화를 표현하는 단위로 전락했다.
물론, 그 냉철하고 예리한 과학 덕분에 지구에서의 시간과 우주 공간 속 인공위성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차이를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어 GPS가 올바르게 동작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하다. 길치인 내가 어디든 갈 수 있게 인도해주어서.
(ref: 사이언스올 - 상대성이론의 등장, 철도에서 GPS까지)
하지만, 이 과학이 규명한 '시간'의 전락으로 인해, 우리는 더이상 선조들처럼 크로노스의 흐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크로노스의 흐름 속에서 카이로스도 찾을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우리에게는 흘러가는 시간도 없고, 그 흘러가는 시간 속의 기회도 없다.
(ref: 위키피디아 - 크로노스 (시간의 신), 위키피디아 - 카이로스)
하지만, 그들 과학자는 플랑크 길이(Planck length,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공간)를 광자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플랑크 시간(Planck time)"을 떳떳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플랑크 시간은 5.391 06 × 10−44 s 라고 하고 빅뱅의 순간을 측정할 때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0과 점 바로 다음에 0이 43개나 있다. 물론, '시간이 없다'로 이야기하자면 광자가 플랑크 길이를 이동했을 때를 플랑크 시간으로 표현한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ref: Cosmos - Planck Time, 위키 백과 - 플랑크 시간, 위키 백과 - 플랑크 길이)
손목 위에 애플 워치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도, 세슘 원자의 진동 주기로 표현되는 시간도, 시간이 없다고 하는 시간도, 플랑크 시간도 각자의 우리가 정의하고 명명하고 사용하는 시간이다. 그 상황에 그 세계에 맞게 쓰고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론 물리학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또 해체해서 환원주의(reductionism)로 정의한 시간의 시계를 우리 세상에 가져와서 손목에 차는 것은 맞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카를로 로벨리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서 말한다. 자신들의 이론들이 아직은 사변적이고 명확하고 명징하게 증거되지 못했고, 실용화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이 온 세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있는지도 몰라서
"우리는 틀릴 수 있다" p196
라고 말한다.
빅뱅 이후, 무수한 양자들의 운동으로 우리는 지금 여기까지 와 있지만, "지금 몇 시입니까?"를 누구도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아직 2021년 8월 25일 12시 23분 (AM)보다 나은 대답은 없는 것 같다.
환원된 시간(시간이 없다의 시간)은 나이를 먹은 누군가의 물리적인 묘사는 할 수 있지만, 그가 걸어왔고 그 길에서 함께한 사람들 그 사람들과 겪었던 일들을 제대로 서사할 길은 없다. 대관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