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론테 1남 5녀 중 막내 앤 브론테의 유일한 소설 [아그네스 그레이].

 

2009년 9월에 낭독녹음 시작해 두어달 걸려 녹음 완성한 작품이다.

하루종일 집에서 8시간에 걸쳐, 녹음해뒀던 씨디를 들었다. 그땐 1차 편집을 녹음봉사자가 하지 않고

편집봉사자가 하던 때라 내가 특별히(외부 배포는 저작권법 위반) 씨디에 따로 담아주기를 부탁했었다.

자체 모니터링 차원에서.

오늘 이걸 듣고 싶었던 건, 수수하고 솔직하고 고결한 감정을 지닌 아그네스의 이야기가 다시 듣고 싶었던 거다.

 

당시, (기독교 신자) 어느 회원의 신청도서로 녹음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 부끄럽게도 앤 브론테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언니, 샬롯과 에밀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앤의 작품은  "작가가 울지 않으면 독자도 울지 않는다"라는

명구절을 남긴 당시 대단한 작가 조지 무어의 호평(1924년)에 힘입어 사후 70년 정도의 오랜 세월이 지나 입소문을 타게 된다.

전혀 수사나 은유나 문학적 장치 같은 것 없이, "모슬린 드레스 처럼 수수하고 깨끗한" 이 소설은

(새삼 다시 들어보니) 내 목소리와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대사도 많은데, 남자 목소리 부분은 좀 덜 굵었지만

20대 초반 가늘고 수줍은 듯한 젊은 여자 목소리는 그런대로 좋았고 전체적으로 나긋나긋 속도도 적절한 것 같다.

물론 마이크 앞에서 가다듬어 1인칭 화자(아그네스)가 이끄는 소설의 분위기에 맞게 설정한 목소리이긴 하다.ㅎㅎ

역자후기와 앤 브론테 연보까지 8시간 동안 단숨에 들으며 (중간에 잠시 졸기도 했지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어제 하루종일 나를 볶아댄 모종의 폭풍이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어떠한 내면의 역경이나 격정 -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 이란 것도 해를 가리고 있는 먹구름,

당장 시원한 빗줄기 퍼부을 것 같은 먹구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문장은 "모든 참된 역사에는 교훈이 담겨 있다." 로 시작해서 웨스턴 목사의 진중한 청혼에 화답하는

아그네스의 간결한 말로 맺는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십니까? " - "네."

 

성경 구절을 자주 인용하고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을 내면화하려는 이 자전적 소설 속 후반에서

3년간 두 번의 가정교사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그네스는 외로움과 고난이 찾아올 때면 시를 찾는다고 말한다.

훌륭한 시를 읽는 것도 좋지만 시를 직접 쓰는 것으로. 그러면서 짧은 시를 한 편 쓰기도 한다.

실제로 앤 브론테는 언니들과 함께 필명으로 시집 [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을 냈는데

단 2부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앤의 시는 찾아볼 수 없던데 에밀리 브론테의 시는 알려진 것들이 있다.

저 시집에도 에밀리는 21편의 시를 실었고 [폭풍의 언덕]은 그녀의 유일한 소설이다.

 

[아그네스 그레이]는 <제인 에어>처럼 가정교사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세 부류의 여성 계급을 보여준다.

당시 가정교사는 중류에 해당하는 정도. 담담하면서도 재치있게 세태를 드러내며 위선적인 사람들과 위선적인

결혼에 대해 낮게 성토한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장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교구목사의

냉소와 위선을 꼬집기도 한다.  

 

서른살에 폐결핵으로 죽은 앤보다 앞서 에밀리는 한 번도 밖을 나가보지 않은 집의 소파에서 죽어가는데

언니 샬롯은 그녀 곁에 언덕에 핀 보라색 헤더꽃을 꺾어다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은 좋은 약도 있고 예방주사도 있지만 옛날에는 폐결핵으로 죽은 경우가 많으니(특히 작가들), 

이 병에 걸렸었던 나는 또 잠시 애상에 젖는다. 아직도 그림처럼 생생한 기억이지만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실제로 샬롯은 셋째, 에밀리는 넷째 자녀다. 그 위로 언니 둘은 일찍 죽었고 유일한 아들은 앤이 죽기 전 해인가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앤이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남은 남매들의 가난한 삶과 영혼이 어떠했을까.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은 여러 차례 영화화 되었는데 <아그네스 그레이>도 영화로 나온다면 괜찮을 것 같다.

작년에 본 영화 '제인에어'와 얼마 전 본 '폭풍의언덕'처럼 신선한 배우가 맡으면 좋을 듯.

아그네스의 말로는 자신이 예쁘지도 않고 남들이 보기엔 무뚝뚝하고 차갑고 여성스럽지 못하고, 뭐 그렇다고 하지만

허영과 욕심에 찬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아그네스에게 마음을 사로잡힌 웨스턴 목사는 그녀에게 말한다.

좋은 배필을 고르는 건 쉽지 않고, 자신은 배필을 고를 때 무척 까다롭다고...

웨스턴도 외모로는 별로로 묘사되는데 아그네스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로잘리에게  

"저렇게 생긴 타입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목도 나온다.

천생연분인 거지. 내면의 진가를 보는 것이다, 두 사람.

 

 

 

 

화가, 앤의 오빠가 그린 초상. 자신의 모습은 그렸다가 지웠다고 한다.

이승의 삶을 스스로 지운 것처럼, 화폭 안, 지워진 자리가 선연하다.

왼쪽부터 앤, 에밀리, 샬롯. 입매가 꽤 고집스러워 보인다.

대상의 영혼을 담아내는 초상, 그 안에는 대상을 그리는 이의 연민과 고뇌가 함께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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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2-07-1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슬린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작은 아씨들'이 갑자기 생각나요. 거기서 메그가 모슬린 드레스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수수하고 깨끗하다'니 어떤 원단일까요?

라로 2012-07-10 23:08   좋아요 0 | URL
모슬린은 광목보다는 부드럽고 얇은 면직물이에요. 평직으로 짠 무명이라면,,,^^;;아주 평범한 직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모슬린으로 샘플 옷을 많이 만들기도 했어요.

프레이야 2012-07-11 19:58   좋아요 0 | URL
브리니님, 당시 모슬린은 평민들의 옷감이었으니까요. 평직으로 짠 면직물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요즘 패션계에 모슬린 바람이 다시 인다고 나오네요.^^
'모슬린 드레스처럼 수수하고 깨끗한'은 저의 평이 아니라 인용한 것이에요.^^

역시! 뤼야님은 모슬린을 잘 알고 계시네요. 평민들의 옷감이었으니 상대적으로 저렴한 옷감이었겠지요.
검색해보니 이라크 모술 시에서 처음 나왔대요. 그래서 이름이... muslin
섬세하고 부드러운 직물이라고 하니 '아그네스 그레이'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라로 2012-07-1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샬롯은 입이 튀어나온 얼굴이 아닐까요???ㅎㅎㅎㅎ

그나저나 그럼 씨디가 있으신거에요???? 그럼 파일좀 보내줘요. 아이폰에 저장하고 듣고 싶어요.^^

프레이야 2012-07-11 20:00   좋아요 0 | URL
입이 튀어나온 얼굴! ㅎㅎㅎㅎㅎ 자세히 보니 세 자매 모두 살짝 그런 것 같은걸요.ㅋ
임의로 복제 배포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반된다고 녹음 서두에 제 입으로 말해서 녹음하는 걸요.ㅠ
글로 이 핑계로 저도 부끄러움을 면할 수도 있고요^^

라로 2012-07-11 23:21   좋아요 0 | URL
그런데 본인의 녹음이니 괜찮지 않을까용???
저작권법 님이 가지고 있는거나 마찬가지 아닌가????ㅎㅎㅎㅎ
끝까지 집요,,ㅎㅎㅎㅎㅎ

프레이야 2012-07-11 23:31   좋아요 0 | URL
떼쓰는 뤼야님 ㅎㅎ
본 시디는 시각장애인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임의로 복제 배포할경우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ᆢ
이렇게 제 입으로 녹음해요. 녹음제작처도 그 앞에 명시하구요. 전 단지 즐거운 봉사자일뿐!^^
저작권은 없다우^^

blanca 2012-07-10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어보고 싶어져요. 여덟 시간을 장장 들으신 거예요? 프레이야님 목소리가 궁금해집니다. 들어보고 싶어요. 저 오빠 얘기를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나요.

프레이야 2012-07-11 20:04   좋아요 0 | URL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요.ㅎㅎ
앤 바로 위의 오빠라는데 무슨 이유로 자살을 했을까 생각하다가
왠지 폭풍의 언덕 그 장면이 떠올라요. 그런 고립되고 황폐한 '폭풍'의 '언덕'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기 쉽지 않을까 싶어요. 에밀리도 요크셔 집을 떠나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캐서린은 에밀리의 내면이 환생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전 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뜨겁고, 더러운 걸 좋아하고,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 같은.
몸이 유독 약했던 에밀리, 세 자매 모두 재능에 비해 참 아까워요.

moonnight 2012-07-1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프레이야님 목소리 궁금해요. 들어보고 싶어요. >.<
일단 책부터 읽어야겠네요. 프레이야님 글 참 좋아요. ^^

프레이야 2012-07-11 20:07   좋아요 0 | URL
달밤님, 들으시면 실망하실 거에요.^^ 그냥 상상만으로.. 헤헤~~
이 책은 정말 수수해요. 기대 너무 하지 마시고 읽어야 실망하지 않으실 거에요.
하지만 저도 읽어내려가면서 느낀 게, 점점 그 수수함에 빠져들더라구요.
내면의 절제미, 단아함, 결코 격정이나 화려함 없이 수수하게 퍼지는 꽃향기 같은.^^
기독교 신자라면 더 호감을 느낄 수 있어요. 성경구절도 인용되는 부분이 많답니다.

hnine 2012-07-1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슬린! 저 중학교때 교복중에서 하복 상의가 모슬린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나 모르겠네요.
브론테 자매는 정말 유전자 검사 대상이예요. 어쩌면 자매가 다 이렇게 문학적으로 뛰어날 수 있나요. 저도 앤 브론테는 오늘 프레이야님 덕분에 처음 알았네요.

프레이야 2012-07-11 20:11   좋아요 0 | URL
우와~ 나인님 중학교 하복이요? 전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뻣뻣한 면직물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얇고 부드럽고 수수한 멋이 있었겠어요. ^^
브론테 자매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명작이 더 나왔을텐데 싶기도 하고요.
어쩜 그리 모두 단명하였던지... 19세기 중반에 모두.
단지 남겨진 작품으로 작가를 상상해볼 수밖에 없는데, 제인에어의 샬롯, 폭풍의언덕의 에밀리,
아그네스 그레이의 앤, 세 사람이 비슷하면서도 각자 다른 성격과 개성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댈러웨이 2012-07-1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의 오빠가 알코올 중독자였던가요? 가뭇가뭇... (이거 아니면 엉뚱한 사람 막 알코올 중독자로 만드는건데... ( "))
저희 어머님 형제분들, 1남 4녀 중 아들만 빠지고 찍은 딸들의 사진, 초상화같은 그 사진이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고요.
'모슬린처럼 수수하고 깨끗한'은 프레이야님에 대한 제가 멋대로하는 상상의 모습.
그런데 목소리는 정말 상상을 못하겠어요. 듣고 싶으다. ^^

프레이야 2012-07-11 22:50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히히 시르다...ㅋㅋ. 울작은딸 말 따라했어요.
그냥 상상만 해주세요. 아웅☆♬

오남매시군요. 전 삼남매에요. 어릴적 아빠랑 넷이서 찍은 유일한 사진이 있는데..

라로 2012-07-11 23:20   좋아요 0 | URL
시르다!!ㅎㅎㅎㅎㅎ
학원에서 중딩녀석들에게 질릴 정도로 듣던 단어를 프야님 둘째 공주님도 하는군요!!
전국적인 유행어였던 겁니까!!!ㅎㅎㅎㅎㅎㅎ

아버님과 찍은 사진 올려줘요~~~~~. 보고싶다!!^^

2012-07-12 22:02   좋아요 0 | URL
흐흐 뤼야님. (어떻게 부를지 고민돼요. 여태까진 나비님으로 쭉 밀고 있었는데 말임다..ㅎ)
시르다, 조으다는 tvn에서 하는 <코미디 빅리그>에 나오는 유행어라고 하더군요. 그게 전국 유행으로.. -이 프로를 한 번도 안 봤는데, 예전예전에 10아시아 기사에서 봤어요.

icaru 2012-07-1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론테 가의 여자들. 하면 바람부는 들판을 지나 황량한 언덕에 낡은 저택이 딱 떠올라요. 짧은 기간 기숙학교를 시절을 중도하차하고 아버지로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니, 짧은 생애 동안 좁은 집과 들판을 벗어나지 못했다니, 그저 우울하게만 들리는데,,, 그들은 상상을 했고, 책을 읽었으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한계를 밖의 세상을 그려냈다는 게..

그녀들의 작품 낭송과 잘 어울리는 음색을 가지신 프레이야 님,,, 자꾸 상상하게 되네요~ 목소리 듣고, 끊는 전화라도 걸어봐야 호기심이 풀릴지 ㅋㅋㅋㅋ)


프레이야 2012-07-12 19:20   좋아요 0 | URL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공간을 영화에서 본 것과 책에서 읽은 걸로만 상상해 봐도
영국의 그 지방은 어떤 곳이었을까, 정말이지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에요.

이카루님, 궁금하시면 뜬금없이 전화주시면 받을게요.ㅎㅎ
실망은 책임 못져요.ㅠㅠ
호호할머니 될 때까지~~ 라는 말씀 참 좋아요!!!
기쁘게 받아주셔서 제가 더더 고맙지요. 치열하게 사시는 님에게도 멀리서 응원합니다.
동네 이름처럼 행운 가득한 나날이시길 빌어요.^^

2012-07-12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론테 자매이야기. 숨은 명작. 9시간의 낭독. 그리고 9시간의 녹음 감상. 모두 소설같은 이야기예요.
물론 브론테 자매 이야기는 안타깝고 슬프구요.

프레이야 2012-07-13 19:26   좋아요 0 | URL
앤 브론테는 정말 모르시는 분들 좀 계실 것 같아요.
아그네스 그레이도요. 브론테 자매는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게, 그 시절엔 여성 예술가들이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였으니 더 그래요.
 

 

 

 

 

 

 

 

 

 

 

2012년 6월 26일 녹음 시작

현재 6시간 소요 124쪽까지 진행. (총 311쪽)

 

 

 

 

열 개의 단편이 모인 윤성희의 소설집 <웃는 동안>은 귀신들의 이야기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그래서 이 소설집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목에서도 눈치 챘지만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은 생의 가볍지만은 않은 고통을 가볍게 날려주려 한다.

죽은 자들이 바라보는 산 자들의 모습, 죽은 자들끼리의 이야기, 죽은 자들의 시간과 산 자들의 시간이

수시로 넘나들기도 하면서 기억과 회상, 아픈 추억과 멍든 가슴 한 구석,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 되어지는 바람에 가슴이 더 시린 이야기들이다. 그런 시간과 기억의 연속성을 대변하듯 아주 긴 한 문단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문단 구분이 없이 귀신들의 상념과 대화와 떠들썩한 수다들이 이어진다.

 

'사소한 우연이 전해주는 아주 잠깐 동안의 기적 같은 선물!'

띠지에 적힌 부제다. '우연'이라는 말은 자주 듣고 쓰는 단어이지만 특히 잘 들린다.

읽고 있는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에서도 '우연'이 언급되어서 그렇다.

<웃는 동안>의 네번째 이야기 '공기 없는 밤'에서 '우연'은, 우연에 의한 생의 그림은 이렇게 묘사된다.

 

"아침에 손톱을 깎을지 저녁에 손톱을 깎을지 차이야."(p109)

"명심해. 어느 아침에 손톱이 깎고 싶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p111)

 

그런데 우리 삶에 이 놈의 우연이란 것도 모종의 마음작용에 의한 가면의 운명이 아닌지,

나는 그런 의심이 살짝 드는 것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2012년 2월 1일 녹음시작

총 19시간 소요 녹음 완료.  6월 26일 1차편집 시작 현재 84쪽까지.

 

 

 

초겨울에 남풍이 불어서 흑산행 돛배는 출항하지 못했다.

 

<흑산>의 첫 문장이다. 김훈은 대개 첫 문장에서 압도한다.

이 문장에서도 '흑산행 돛배는' 에서 '는' 과 '가' 사이에서 얼마나 고민했을까, 혼자 생각이 든다.

 

일전에 순교자 박물관에서 황사영의 백서를 보았다.

유리 전시장 안 너머로 그걸 마주했을 때 나는 갑자기 얼어붙 듯 멈췄다.

김훈의 <흑산>을 읽으며 내가 가장 인상 깊었고 안타까웠던 인물이 황사영이었고 그가 올린 '백서'였기에.

박물관 유리장 너머로 보이는 백서의 내용을 내가 읽은 순 없었지만 자잘한 세로 글씨로 빽빽하게 써내려간

글자의 나열만으로도 그 내용의 간절함이 전해오는 느낌이었다.

 

육지의 시간을 끄는 마노리나 바다의 시간을 너머 다니는 문풍세 같은 가상의 인물도 몫이 크지만

맏형 정약현의 사위, 열 여섯에 장원급제한 맑은 청년 황사영에 대한 묘사에서부터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황사영이 임금앞에 나아가 첫 만남을 한 후 잡혔던 손을 비단싸개로 하고 지내는데

정약현은 이를 보고 어수를 모신 손이구먼, 이라는 약간의 조롱과 함께 감추어 가리려고 하는 게

오히려 드러나고 있다고 일침을 놓는다. 그리곤 소년등고로구먼, 이라고 혼잣말을 한다.

황사영은 그걸 벗어버리고 그 전말을 정약현에게 글월로 올리고 정약현은 어린 사위의 총명함에 웃음 짓는다.

오늘 이 대목을 다시 읽으며 김훈은 참 대화체도 특별한 어감을 준다는 느낌을 새삼 받았다.

 

- 소년등고少年登高로구먼.

사윗감을 물가 마을로 불러들인 자리에서 정약현은 그렇게 말했다.

어린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과 재주가 좋아서 문장을 잘 짓는 일이 인간의 큰 불행이라는 '소학'의 글귀가

황사영의 머리에 스쳤다. 주희가 '소학'을 엮으면서 정이천의 말을 옮겨놓은 문장이었다.  (p65)

 

 

김훈이 정약용을 보는 대목도 재미있다. 정약용이 조카사위 황사영을 보는 눈에 실려서 빚어낸다.

 

셋째 처숙부 정약용은 경전이나 인륜으로 채울 수 없는 아득하고 넓은 땅이 그 소년의 마음에 날것으로 펼쳐져

있음을 알았지만, 정약용의 눈길은 늘 세상의 굴곡에 닿아 있어서 날것이 날개 치는 그 멀고 드넓은 땅이 깊이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p69)

 

 

 

1801년 순조1년 11월에 황사영이 배론에서 체포되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 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하는

내용의 '백서'도 압수된다. 그리고 정약전과 약용이 불려 올라와 심문을 받고, 12월에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된다. 황사영의 부인 정명련은 제주 대정현의 관비로 가는 뱃길 중, 두 살 난 아들 경한을 살리기 위해

추자도에 내려놓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책 뒤쪽 참고문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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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9 0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9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9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9 0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06-29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웃는 동안>은 '어쩌면'이었나 '어쩌다'이었나, 를 읽다가 만 기억이 나요. 하지만 겨우 세 장 정도 읽었음에도 그녀의 글은 아주 특이하기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네요. 문단을 나누지 않잖아요, 윤성희는. 이 책만 이런가, 하고 여러 문학상 수상집을 뒤적거려 보니 다 그렇더라구요. 신기했다구요. ㅎㅎㅎㅎ
하여튼, 오늘부터 시험 공부 들어갑니다. 한 동안 뜸할지도. 전혀 안 그럴지도.

프레이야 2012-06-29 19:34   좋아요 0 | URL
윤성희의 '감기'도 집에 두고만 있는데 봐야겠네요. 원래 문단을 안 나누는군요, 그분.
첫 장 '어쩌면'이요.ㅎㅎ 그 장 후반에서 '우리를 날게 하는 말들'이 좋더라구요.
어떤 말을 생각하면 나는 기분이 들까요. ^^
소이진님, 오늘부터 시험공부 열심히 하구요, 머리 식힐 때 가끔 들르기에요.^^
 

 

 

 

 

 

 2012년 5월 21 녹음 시작, 총 24시간 30분 정도 소요 녹음 완료.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두고두고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처음 장 '약국'에서 시작하여 징글징글한 생의 파란만장을 다 겪고,

마지막 편 '강'에서 마무리 하며 일흔 넘은 올리브 키터리지의 사랑에 눈물 겨웠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건 그 사람의 숭숭 구멍 난 지난 삶까지 끌어안는 걸 뜻할까.

 

하지만 지금 둘은 이렇게 만났다.

올리브는 꼭 눌러 붙여놓은 스위스 치즈 두 조각을, 이 결합이 지닌 숭숭 난 구멍들을 그려 보았다.

삶이 어떤 조각들을 가져갔는지를. (p484)

 

올리브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가슴아픈, 생의 빛나는 비밀이 생을 그럭저럭 잘 살아냈다는 훈장처럼

매달려 있는 그들의 이야기에는 늘 덩치 크고 성질 사납고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그러면서도 사람과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감출 수 없는 올리브가 이어져 있다.

 

찬란한 은유로 가득찬 이 책을 두번째로 읽으며, 생은 어쩌면 거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을 은유로 산다면 생각보다 훨씬 견딜만하고, 파란만장도 거대한 하나의 은유 속에서

일상의 원관념들이 너그럽고 위트 있는 (어떨 땐 찌질하다 해도) 보조관념들로 윙크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1차 편집을 하면서 세번째 읽게 되면 내겐 더 좋겠지. ^^

 

 

 

 

 

 

2012. 6. 22 1차 편집 완료

 

 

다시 읽어도 감동적인 실화다. 세상은 험하다지만 조병국 의사를 비롯해

이렇게 선하고 아름다운 천사들로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 부를 수 있겠다.

세상을 뜨는 것보다는 그래도 앞으로 올 생의 선물을 모르는 채, 하루하루 뜻밖의 선물을 받으며 사는 게 나은 거지.

 

이런 기도문 비슷한 것이 간지에 있어서 옮긴다.

 

이런 아이로 키우게 하소서.  가진 것에 감사하되 덜 가진 사람과 나누게 하고

밝은 자리에 있되 어두운 자리를 보살피게 하고, 높은 곳을 보되 낮은 곳도 돌아보게 하고,

어디서든 사랑받되 타인에게 돌려주게 하소서.

그러기 위해 먼저 이 아이의 여린 생명을 지켜주소서.

 

 

모성애란 낳는 행위에서 나온다기 보다 기르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 그 지극함에서 나오는 것!

낳는 건 본능이지만 기르는 건 지극함이 빚어내는 인내와 사랑과 책임의 소산이지 싶다.

모성애는 본능보다 우월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글도 있다.

 

여자가 엄마가 되는 데 꼭 임신이나 출산의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눈을 맞추고 똥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모성애는 시작된다.

이게 바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입양아를 위해 엄마가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이유다.

 

 

 

 

 

 

 

 

이홍섭 시집 [터미널] / 문학동네

2012년 6월 22일 시작, 2시간 30분 소요 오늘 완료.

 

 

65년생 강릉 태생 이홍섭 시인은 생의 구비구비 나아가는 길을 세발짝 나가다 한발짝 물러나고,

그걸 반복하며 나아가는 거라고 믿는다.  이 시집 속 시들, 하나 하나 다 좋다.

가령 이런 詩는?

 

 

멀미 / 이홍섭

 

 

어머니와 함께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 넘어 친척 집으로 가는 길

 

휘청거리는 버스 안에서

젊은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자꾸 말을 시키셨다

 

말 좀 해볼래

말 좀 해볼래

 

그러다보면

어느덧 버스는 대관령을 넘고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잠이 드시곤 했다

 

일흔 넘으시며 어디 한 군데 몸 성한 곳 없는

늙으신 어머니

 

삶은 굽이굽이 멀미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인데

 

말 좀 해볼래

말 좀 해볼래

조르던 어머니께서는

이제 말이 없으시다.

 

오늘 점자도서관에 들어서는데, "냉장고에 얼음 있어요. 냉커피 타드세요"

야무지고 예쁜 팀장님이 그런다. 난 여름에도 냉커피 잘 안 마신다니까 자기도 사실 그렇다며 웃는다.

가뭄이 심한 곳도 있고 제주는 장맛비가 시작했다는데 이곳은 오늘 아주 화창했다.

편집이 좀 밀렸다. 아무래도 녹음이 앞서가다보니.

다음으로 편집할 책은 김훈의 [흑산], 다음 주에 보자구.^^

 

다음번 녹음할 책으론 윤성희 소설집 [웃는 동안]을 추천해 볼 생각이다. 

올해 초 사두고는 안 읽은 책. 이변이 없는 한 가능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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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2-06-22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 저도 다 읽고 정말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더라고요. 저는 아주 가벼운 책인줄 알았는데 정말 삶의, 여자의 모든 것을 담고 있더라고요. 이 페이퍼를 읽으니 오늘 저녁에는 얼음을 얼려서 내일 냉커피를 마셔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책을 편집하고 누군가를 위해 읽어주는 행위는 그냥 나 혼자 소리없이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보람과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2-06-24 09:32   좋아요 0 | URL
네, 블랑카님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읽을까, 이런 생각 들어요.
성인이 되어 후천적으로 시력을 읽은 분들은 점자를 배우기 힘들다고 하니 읽고싶은 열망이
더 강하겠지요. 다양한 장르로 읽으려고 하는데, 점자도서관에 기증되는 책이 다양하지 못해 보여서
간혹 이렇게 제가 갖고 있는 책을 가져가서 허락 얻고 녹음하곤 해요.
'올리브 키터리지'는 꼭 소리 내어 읽고싶었어요. 일석이조에요^^

hnine 2012-06-22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뚝뚝한 아들이 이제 말을 풀어놓았군요. 아마 울먹였겠지요?
삶은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건네야 하는 것. 다른 사람이 건네는 말에도 잘 귀 기울여야겠어요.

와, 24시간 녹음이라니...그래도 좋은 일, 즐거이 하시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프레이야 2012-06-24 09:34   좋아요 0 | URL
이 시 참 좋지요.
삶의 구비구비, 멀미 날 때마다 옆에서 말을 걸어주는 대상이,
나도 그런 대상이 되어주면 좋겠지요. 서로서로^^

야클 2012-06-2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도 좋지만 프레이야님 어쩜 이렇게 페이퍼를 깔끔하고 보기 좋게 편집하시죠? 아마 학교 다니실때 리포트 정말 예쁘게 쓰셨을듯.

프레이야 2012-06-24 09:37   좋아요 0 | URL
호호~ 그런가요? 야클님^^
그러고보니 초등학생때부터도 노트 필기 같은 것도 좀 그랬어요. 교내 전시도 될 정도로 ㅎㅎ
(전혀 겸손하지 않은 태도^^)

순오기 2012-06-2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좋다!!

프레이야 2012-06-24 09:37   좋아요 0 | URL
와~~~~~ 언니 ㅎㅎ

비로그인 2012-06-23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새벽에 읽기에 참 좋은 글이네요.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읽고 싶어요. 이번에는 저도 소리내어 읽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가네요 ^^;;

프레이야 2012-06-24 09:38   좋아요 0 | URL
밀물, 이야기 하시던 거 생각나요. ^^
한 편 한 편 어찌나 가슴을 치고 들어오던지요.
모르긴 해도 번역도 참 잘 한 것 같더라구요.

2012-06-23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올리브 안 읽은 저는 미래의 즐거움 하나를 예약해 둔 셈이죠. ㅎㅎ 그나저나 프야님 목소리 굉장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왠지 드네요.

프레이야 2012-06-24 09:39   좋아요 0 | URL
미래의 즐거움 예약, 저도 그래요, 섬님.
어찌나 읽어야할 책과 영화가 많은지요.ㅎㅎ
목소리는 그냥 그저그렇답니다. 히히~

2012-06-23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4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2-06-2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안녕^*^
저도 규환이에게 '학교 이야기좀 해줄래' 하면서 말 시키는데..... 간단명료하게 끝내더라구요.
언제쯤 프레이야님의 녹음 CD를 들을수 있을까?? ㅎ

프레이야 2012-06-24 09:49   좋아요 0 | URL
세실님 안녕^**^
사람은 누구든 말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거꾸로
말하고 싶은데 말을 안 걸어줘 불만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규환이는 남자아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꼭 남녀 차이가 아니라 성격차이 같더라구요.
우리집 작은 딸은 말 걸어주면 자불자불 잘 해요. 큰딸은 좀 다르구요.
씨디는 아마 못 들으실 거에요. 일반인에게는 배포되지 않는 거라서요. ㅠㅠ
(다행이지 뭐에요, 헤헤)

이진 2012-06-2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진 경험은 처음이예요.
야영 다녀오는 차에서 읽으면서 울컥했다지요.
올리브...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미래의 즐거움 하나 예약 ㅎㅎㅎ

프레이야 2012-06-24 09:50   좋아요 0 | URL
감성 풍부한 소이진님, 울컥하셨군요.
같은 시를 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또 그저그런 것이겠지요.
여기도 미래의 즐거움 예약 ㅎㅎ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6-2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날 더운데 건강하시지요?^^
오늘 여기도 무척이나 덥네요.
평소에 시를 잘 읽지 않는데, 가끔은 그런 내가 문제가 있나 싶을 때도...^^
이렇게 와서 읽고 가니 그래도 괜찮은거지요?

프레이야 2012-06-24 09:52   좋아요 0 | URL
그곳은 벌써 많이 덥나요?
여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바다 가까이라서 그런가..ㅎㅎ
시는 가끔만 읽어도 되지요, 현맘님~~~~ 건강한 여름 나자구요^^
 

 

 

 

 

 

 

 

 

 

 

 

 

 

오늘부터 1차 편집 시작, 1/3 정도 했다.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원장의 50년 의료일기라는 부제가 있는데 생생한 실화들이라 다시 읽으며 감동이 망울망울 맺혔다.

꾸밈없이, 어떤 미문도 과장도 없이 깨끗하고 담담하고 진솔하게 써내려간 글이 잔잔한 울림을 준다.

 

할머니의사는 어떤 이유에서든 자식과 동반자살을 하는 어른을 이해할 수 없다고 쓴소리를 한다.

자식은 소유물이 아닌데, 그 아이의 삶이 어떤 희망과 축복을 가져올지 알 수 없는 것인데

부모라는 이름으로 차단할 수 없는 것이다.

이혼 후, 어린 딸을 안고 철로에 뛰어든 여교수가 있었다. 자신은 즉사, 두 살 난 딸은

죽은 어미 옆에서 목숨이 붙었지만 두 다리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그 아이는 의족이 평생 필요하게 되었고 당시 국내에서는 성장에 맞춰 매년 두 번 정도 의족을 갈아줘야할 만큼의

경제력이 될 입양부모가 나서기 어려웠다. 그 아이는 미국의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현재 서른 살쯤이 되었단다.

미국은 장애아에 대한 국가적 보조가 뛰어났고 그 당시에만 해도 18세가 될 때까지 지원금이 나왔고 성인이 되면

갚아나갈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그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지원금이 나온다고 한다.

그렇지만 턱없이 부족한 액수라고 하니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복지정책이 안타깝다.

 

사람은 스스로 어떤 이유로도 목숨을 버리거나 그래서도 안 되지만

이렇게나 불우한 삶의 굴레를 타고난 듯 보이는 아이들이 또 다른 인생을 맞아 

사랑을 나누고 기쁨으로 살고 있는 사례들을 보며, 세상 누구의 삶도 쉽게 갈라서 생각하거나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구나, 다시 느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보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게 다일 수도 없다.

작디 작은 먼지에 불과할지도 모를, 너도 나도 우물 안 개구리, 수족관 안의 물고기에 불과할지도 모를 존재다. 

가엾다 너나 나나. 소중하다 너나 나나. 그리고 인생이 나에게 또 너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인생을 너무 집요하게 들여다보면 비관적인 사람,

관조하면 냉소적인 사람이 된다.

인생을 보는 적당한 거리를 아는 것,

그게 바로 현명함이 아닐까.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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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6-12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을 보는 적당한 거리를 아는 것!
그래서 인생이 나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도 모를 일!
내식대로 해석해서 읽게 되지만..가슴에 와 닿아요
선물 받고 싶네요.^^
님의 목소리도 한 번 듣고 싶구요.ㅋ

프레이야 2012-06-12 08:47   좋아요 0 | URL
책읽는나무님,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도서관 안 가시나요?
제 목소리는 그저 그렇지만 님의 목소리는 듣고 싶네요.
인생을 보는 적당한 거리는, 사람을 보는 적당한 거리와도 통하는 게 아닐까 해요.
마음의 완급이랄까. 아무튼 멀리서 보면 희극, 자잘한 '비극'은 패스하는 현명함이 필요할 것 같아요^^

댈러웨이 2012-06-12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보이는 게 다일 수가 없는데'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아, 갑자기 우울해지려고 한다. ㅠ.ㅠ

프레이야 2012-06-12 19:09   좋아요 0 | URL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만, 어떨 땐 보이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잘 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보이는 건 간과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안달할 필요까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간혹 들어요.^^
댈러웨이님 우울해지지 마시라구요.^^

2012-06-12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6-13 00:23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 읽으며 몇 번이나 뭉클뭉클 목울대에서 뭔가 치고 올라왔어요.
세상엔 험한 일도 험한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아름답고 선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그래서 세상이 굴러간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주 좋은 책이에요.
사람의 생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지도에 의한 것이란 생각도 들고..
탈없이 낳아서 길러준 부모님께 그나마 감사한 마음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2012-06-13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4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4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5월 11일 녹음시작, 오늘까지 총 9시간 걸려 완성한 황경신의 생각노트 <생각이 나서>의 마지막 글귀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릴케의 말을 믿는다.

'끝이 나면 쓸 수 있다'보다 '씀으로써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로 나는 그 말을 이해한다.

슬픔 자체는 끝이 없지만 '어떤' 슬픔에는 끝이 있다.

사랑은 영원하지만 '어떤' 사랑은 끝이 난다.

그리하여 나는 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말을 나는 잘 모르겠다.

릴케는 어떤 의미로 저런 멋진 말을 한 걸까. 백혈병으로 51세의 나이에 사망한 릴케는

14세 연상이 루 살로메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루는 그 전에 이미 니체에게도 청혼 받은

적이 있는 여인. 따뜻한 모성을 느끼지 못하고 유년을 보낸 섬약한 릴케에게 살로메는 여인

이상의 동반자가 아니었다싶다.

 

그의 묘비에 적힐 시를 스스로 남기는데, 제목은 '비명'.

        

         장미꽃이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누군가가 내 인생의 키워드가 뭘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나는 '글쓰기'라고 내심 대답했다. 또 누군가는 자신도 3살 때부터 글을 썼다며 우스개를 했다.

그렇구나. 난 만 24개월부터 글(글자^^)을 쓰고 읽고 했다고 엄마는 자랑이다. ㅎㅎ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오래도록 일기를 써왔고 크고 작은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도 했다.

재능이 열망을 좇아가지 못하면 번뇌가 오는 법. 다행인지 나는 욕심이 없나 보다.

어느 순간 열망을 조율하는 시점이 오고 (조금은 비겁하게) 내려놓고 물러서 있다. 

글은 마음 깊은 곳에서 분수처럼 치솟아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어야 울림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읽는 이가 알기 전에 양심이 먼저 안다. 진정성,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나는

그럴수록 글을 쓰는 일이 두려워 조심스러워진다. 스스로 당위성을 부여할 수 없으면 한 발도 뗄 수 없는 거다.

진정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다 생각하며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 그 너머의 너머일 거라고 조용히 말해 본다.

 

 

 

 

2012. 5. 21 녹음시작, 43쪽까지.  드디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세번째 장편 <올리브 키터리지>는 2009년 퓰리쳐상 수상작이다. 

오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작가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글을 써온 스트라우트는

이런 유의미한 조언을 한다.

 

"작가가 되겠다면 포기하지 말며, 포기할 수 있다면 포기하되, 그럴 수 없다면 계속 글을

쓰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며 습작을 게을리하지 말라"

 

그녀는 존 치버와 존 업다이크를 좋아하며 육필원고를 고집한다고.

작가 신경숙도 필사하며 공부한다고 하던데, 나는 필사 대신 녹음하면서

한 번 더 읽는 것으로 쉽게 대신하려고.^^ 편집하면서도 한 번 더 읽을 거니까 세 번이 되네.

 

 

 

 

스트라우트의 문장은 섬세하면서도 강하고 생의 위트와 연민이 공존한다.

농후한 생의 이력과 소화력이 엿보이는 문장들, 군더더기 없는 전개, 강인하면서도  시적 서정성이 엿보이는

아름다운 문장들로 가득한 이 소설은 13가지 단편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데, 서사가 독특한 구성 안에서 흐른다.

많은 등장인물이 있지만 그 중심에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인, 올리브 키터리지가 있다.

강인하고 괴팍하고 불같은 성미를 지녔지만 따뜻함을 숨길 수 없는 이 여인과 남편 헨리, 외아들 크리스토퍼.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오랜 세월을 거친 이야기가 거대한 직조물처럼 서로 엮여 수채화를 그려낸다.

드러내어야만 치유 받을 수도 있는 생의 미려한 상처들에 온기어린 시선과 응원을 보내는 이 소설을 작가는

'삶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이야기꾼인 어머니에게' 헌사한다.

 

오늘은 첫번째 이야기 '약국'의 43쪽까지 녹음했다.

첫 문장은 이렇다. -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봄이 왔다. 낮이 길어지고 남은 눈이 녹아 도로가 질척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 쌀쌀한 공기에 노란 구름을 보태고, 진달래가 세상에 진홍빛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데니즈의 눈을 통해 그려보았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이 폭력이리라 생각했다.(43쪽)

 

 

이 글귀를 보며, 나는 입하가 벌써 2주 전이었었던 걸 떠올렸다.

요새는 봄, 가을이 없이 여름이 오고 겨울로 넘어가는 것 같다고 엄살인데, 전적으로 동감되지는 않는다.

봄과 가을은 나름의 빛과 향으로 우리에게 머물다 갔고 우리는 호들갑스레 봄을 노래하고 가을을 누렸으면서, 망각한다.

좋았던 것은 잊어버리고 그건 그저 없었던 듯 아무 것도 아니었던 듯, 여름이 너무 빨리 온다고 법석이다.

입하! 그리고 성하!  나는 입춘보다 이 말을 더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봄을 잊고 싶진 않다.

봄은 늘, 여름 속에도 가을 속에도 그리고 겨울 속에는 더 속속들이 녹아있는 것.

생은 내내 봄날을 어깨곁고 가는 걸. 아, 올리브 키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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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22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특이한 인물이나 특별한 사건 없이도 아름다운 책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가끔씩 꺼내어 아무 문장이고 펼쳐 읽곤 한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존 치버와 존 업다이크를 좋아하는군요. 의외에요. 저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좋아하지만, 존 치버와 존 업다이크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거든요. '약국'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제게는 이미 조용함과 고요함을 줘요. 데니즈가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구요.

프레이야 2012-05-22 09:4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그죠그죠^^ 너무 좋아요 이런 책. 아무 문장이나 펼쳐 읽어도 정말 좋아요.
존 치버와 존 업다이크 필사는 책날개에 적혀있던걸요. 다른 이의 작품을 보지 않는 게 낫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꼭 맞는 말은 아닌 것 같구요.
약국.. 어제 전 헨리가 예고대로 불행을 안은 데니즈에게 본격적으로 흔들리는 내면묘사 부분과
그녀를 위해 드디어 고양이 한 마리를 얻어다 건네는 데에서 멈췄어요.
"발이 얼마나 하얀지 휘핑크림 그릇 속을 지나온 것 같은 작고 검은 아기 고양이"라니요.
군더더기 없는 전개, 묘사력도 심리묘사도 훌륭. 번역의 힘도 기여한 걸까요.

하늘바람 2012-05-2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음하시는 프레이야 언니 모습
참 곱고 멋지게 상상이 되어요
녹음하게될 작품을 느끼고 즐겁게 동참하시는 것 같아 부럽습니다
"작가가 되겠다면 포기하지 말며, 포기할 수 있다면 포기하되, 그럴 수 없다면 계속 글을

쓰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며 습작을 게을리하지 말라"


이 말은 제게 참 와닿네요

프레이야 2012-05-22 18:24   좋아요 0 | URL
가장 행복한 순간이랍니다.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서요^^
하늘바람님의 소원대로 이루시길 바래요^^
태은이랑 태어날 태은이 동생 키우며 얻는 소재로도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있겠네요.

댈러웨이 2012-05-22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많네요. 깔끔하게 써 주셔서 감사한 페이퍼입니다.

1.저는 (쓰는 와중에 정리가 되기도 하지만) 스스로 일단은 정리가 되야 뭘 끄적거릴 수 있기에 '끝이 나면 쓸 수 있다'로 받아들이고 이 문구 제가 좀 가져가겠습니다. ^^
2.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뭔가가 저도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제 속의 산투르니는 도통 울어주질 않는다는.
3.<올리브 키터리지>는 하도 데면데면하게 읽은 책이라, 리뷰들을 보면서 더 좋아하게 된 책이라고 해야할까요...( ") 아,,, 저 바보일까요? 저기 다락방님이 째려보시겠다...

녹음 작업을 하시는 프레이야님의 목소리가 궁금하군요. ^^

프레이야 2012-05-22 18:30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끝이 나면 쓸 수 있다, 이 말도 결국 통하는 말이네요.^^
올리브가 헨리에게 마구 신경질 부리는 장면 읽으며 빙의된 듯 그랬어요.ㅎㅎ
소설은 인물의 대사를 조금은 실감나게 읽어야되니 저로선 쉽지 않아요. 그래도 재미납니다.
어떤 대사에는 거침없는 욕설도 나오는데 이건 뭐 대리만족도 되구요.

2012-05-27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8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