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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쓴 편지 ㅣ 반올림 10
장 프랑수아 샤바스 지음, 정혜용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바람의아이들에서 나온 반올림시리즈는 청소년을 읽기대상으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청소년이 읽기를 기대하고 쓴 작품이란 점을 감안할 때 작가는 어떤 소재와 어떤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담아야할까. 작가로서 내부검열에 대한 강도를 높여 소재나 표현의 강도를 순화해야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기 쉽다. 하지만 제목부터 호기심을 끄는 ‘감옥에서 쓴 편지’는 그런 점에서 틀을 다소 깨고 있어 마음에 들었다. 1967년 프랑스 출생의 이 작가는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감옥의 특수상황이나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이력을 사실적으로 서술하는 대목에서 간접체험을 포함한 작가의 다양한 체험이 엿보인다.
이 책을 읽으며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데드맨 워킹’이 떠올랐다. 제한된 시공간이 그렇고 남자죄수와 여자상담자 사이에 흐르는 인간애가 그렇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13년의 복역기간을 잘 견뎌온 오렐리엥 앞에 놓인 출소 전 1년이란 시간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감옥이라는 폐쇄공간 안에서 살아온 13년이란 시간과 그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막다른 곳에 와 있는 그에게 기적과도 같이 놀라운 경험을 영혼에 선사한 사람은 자원봉사자 안느. 그녀는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아름다운 녹색눈동자를 가진 화가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이토록 가슴 아플 줄이야. 무뚝뚝함을 가장하여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드문드문 내비치는 솔직한 감정과 잔잔하게 일렁이는 마음의 물결이 느껴져 인간적이다. 그녀를 향한 오렐리엥의 마음 뒷자락에는 늘 친할아버지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매달려있다. 그가 오래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일주일에 한 번 눈앞에 나타나는 안느를 동일한 감정선에 올려두고 그리워하는 대목이 아련한 슬픔을 전한다.
형식은 내용을 담고 내용을 돋보인다. <감옥에서 쓴 편지>이 취한 ‘편지일기’ 형식은 적절하다. 일기의 미덕에 더하여 편지라는 형식은 좀 더 친밀하고 사려 깊은 내용을 담을 수 있으며 수신인을 두고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나는 편지일기를 십대 적에 한동안 쓴 적이 있다. 당시 내 편지일기의 수신인 혹은 그리움의 대상은 달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발상이지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누구도 이해해주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마음의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싶은 기대도 있었거니와, 그것들을 토로할 수 있는 대상을 찾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렵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니 마음을 당기는 대상이 불현듯 떠오르면 그것에 애착을 가지기란 또 얼마나 어리석고도 집요한 일인지.
오를레앙이라는 근육질의 강인한 남자가 부치지도, 보이지도 못할 편지를 쓰는 절절한 마음이 눈물겹다. 그의 편지일기를 읽어가다 보면 한 인간이 어떻게 순수에서 증오로 물들어가며 파멸할 수 있는지, 두렵고 놀라운 일들을 만나게 된다. 경이로운 점은 생의 모든 비극적인 장면들을 스스로 대면하고, 성찰하며, 폭력과 분노로 일그러지기 이전의 순정한 초상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향한 순수한 열망이 사람을 얼마나 순연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작가는 조심스럽게 풀어가고 있다. 나를 비롯해 독자가 감동을 얻는 순간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이 책에서 대조적인 키워드는 ‘아름다움’과 ‘폭력’('추함'의 대표명사로)이다. 그것은 세상에 널려있는 두 가지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실재이기도 하며 은유이기도 한 이 두 가지 낱말은 공존하지만 공생하기란 어렵다. 아름다움을 통해 폭력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극복해 나가려는 주인공의 성찰이 주는 감동이 뜻밖이었다. '아름다움'은 할아버지가 오를레앙에게 열두 살이 되기까지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자연이 주는 사소한 아름다움을 비롯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미덕(예를 들어 slow hand라 이름하고 싶을 정도로 온몸으로 뿜어내는 존경심)까지, 그는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의 대자연 같은 넉넉함으로 아름다움이라는 축복의 선물을 받았다. 오래도록 그 축복에서 멀어져 살았던 그에게 이제 다시 아름다움을 전하는 '천사'로 나타난 자가 안느다. 천사가 아름다운 이유는 사람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생의 위기는 어느 날 갑작스레 그를 덮치고 계부와 엄마의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불행은 예고되어 있지 않았다. 폭력(온갖 추함)은 증오를 낳았고 그것은 ‘두꺼비’로 상징된다. 폭력으로 생기는 증오심은 입안으로 두꺼비 한 마리를 꾸역꾸역 밀어 넣어 속에서 기르게하는 것이란 대목은 섬뜩하다. (다른 대목에서도, 에두르지 않고 속살대지도 않으며 직선적으로 이야기하는 문장들이 오를리엥의 어조로 적절하면서 작가의 문장으로도 마음에 든다.) 그 두꺼비는 용수철처럼 튀어나올 날을 기다리며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았고, 세상에는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그저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과 폭력에 길들여져 그것에서 뛰쳐나오려는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또한 오를리엥은 자신이 저지른 극단의 폭력, 살인으로 가슴이 무너지는 자들은 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피해자의 가족들, 친구들, 연인 등 희생자가 이어진다. 나쁜일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빠져나오기에는 두려운 것들이 더욱 많을 때, 사람을 향한 증오심은 세상을 향한 증오심으로 탈바꿈하여 한 인간의 정신을 나락으로 빠뜨린다. 이렇게 작가는 오를리엥으로 하여금 폭력의 대물림, 증오의 대물림을 대면하게 하고 독자에게도 진실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것은 치유를 위한 전단계다.
‘감옥에서 쓴 편지’는 한 남자의 아름다운 고백이며 자기 성찰의 경이로운 과정이다. 산(혹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위무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라든가, 폐쇄공간에서의 고독이 인간의 정신을 얼마나 좀먹는지를 이야기하는 ‘고독예찬’에 대한 헛말이든지, 새해 아침이면 나누는 덕담과 기원들 속에 담긴 허망한 낙천주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예리한 시각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 산은 인간의 고통, 기쁨, 우연히 일어난 자잘한 사건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산은 만인에게 자신의 법칙을 적용합니다. 난 할아버지의 시체 옆에서 얼어 죽게 되겠지(75쪽) 그러면서도 다소 냉소적이던 눈을 돌리고 작가는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쪽을 택했다. 이는 오를리엥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기적과도 같은 변화다. 작가가 '아름다움'을 위해 택한 것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가장 먼저 나온 보티첼리의 성모상을 위시해서 화가인 안느를 의식한 그림집, 존 스타인 백의 책, 모델이자 사진작가였던 리 말러의 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을 통해 삭막한 가슴으로 쓸쓸한 생을 살아온 오를리엥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전하려한다. (나는 이런 글귀들에서 삽화가 들어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물론 감옥에서 편지를 쓰는 오를리엥의 입장에서는 당치 않는 것이지만 독자들의 눈을 위해.) 물론 인간의 창작품인 예술작품보다 앞서 있는 것이 신의 창작품인 자연이다.
작가가 정작 위로하려고 하는 대상은 오를리엥이 감옥에서 쓴 편지를 읽는 우리들이다. 감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거칠고 추한 사건들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감옥 밖의 우리들 공간이라고 크게 다를 게 없다. 영화나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감옥은 미화되어 있다고 오를리엥도 썼듯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감옥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난폭하고 야비한 일들이 난무하는 곳이다. 굳이 눈을 감고 아름다움 쪽으로 눈을 돌리려고 하는 게 비겁한 일이라 해도 살아가는 일이 조야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어디서 위로 받고 힘을 얻을지. 어떤 예술작품보다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손길은 한 사람이 뿜어내는 진정어린 호감이다. 한 사람에 대한 신뢰와 무한한 애정은 세상의 어떤 폭력보다 힘이 세다.
오를리엥의 편지를 읽다보면 한 사람이 떠오른다.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순수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열 살 소년과 두려움에 치를 떠는 어린 짐승의 눈을 한 열두 살부터 열다섯까지의 사춘기 소년, 제법 건장해진 체격과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한 열여섯의 아직은 어른이 아닌 어른 체격의 청소년, 집을 나와 이곳저곳 전전하며 자신의 생을 홀로 꾸려가고 강인한 남자가 되기 위해 체력을 단련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근육질의 청년, 도장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스물 셋의 청년 그리고 아이리스 꽃 한 다발을 들고 오랜 세월 떠나있었던 집을 찾아가는 듬직한 청년. 아, 그때 코가 비뚤어져있고 이마에 멍이 들어있는 어머니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에 대한 맺힌 마음을 풀지 못하는 오를리엥이 못내 안타깝다. 이유 없이 가해지는 폭력과 그 앞에서 겁먹는 소심함에 대항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강인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한 남자가 이제 일 년 동안 쓴 편지를 담은 두 권의 공책을 챙기고 있다. 그동안 자신의 일들을 회상하며 간간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듯한 표정과 분노가 되살아나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려고 한 숨 쉬며 호흡을 고르고 있는 것 같은 모습들이 편지일기의 행간에 생생하게 반영된다.
아쉬운 오기 : 이 편지는 2001년 1월21일에서 시작하여 일 년 간의 기록인데 이듬해 첫날에 쓴 편지의 날짜가 2001년 1월1일로 되어있다. ‘2002년 1월1일’이어야 하는데 오기 같다. 2001년 1월 18일자가 마지막 편지인데 이것도 ‘2002년 1월18일’일 것이다.
그래서 별 하나를 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