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서두에서, 메리 셸리가 그토록 무시무시한 생각을 어디서 받아들였는지 생각해 보다가 수수께끼 같은 여성 문인인 히스클리프의 창조자에게서 닮은꼴을 찾았다는 문장은 의아하다. (번역 오류일 수 있으니 원서 가지고 있는 분이 밝혀 주시길 바라며^^) 1847년 <폭풍의 언덕>보다 1818년 초판 <프랑켄슈타인>이 먼저 발간되었으니 동시대를 살았다 해도 연도상으로는 맞지 않다. 그렇다면 일종의 예상 표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할까. 수사적이고 은유적 기술이 많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내용을 감안하고, 여성주의 관점으로 따라 들어간다.
일단 셸리의 작품은 형이상학적 공포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환상 소설이라면 브론테의 작품은 형이상학적 정열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로맨스로 규정한다. 유사점을 든다면 “복잡한 존재론적인 심오함, 정교한 비유의 구조, 모호하지만 강렬한 도덕적 야망을 숨기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문자화된 증거 즉 편지와 일기를 이용한 ‘증거적 서사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 다 처음엔 익명이나 필명으로 출간했고 어머니가 없는 문학적 고아라는 상황에서 ‘기원’의 문제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실낙원으로 대변되는 밀턴의 신화에 대한 두 작가의 태도는 다르다. 문학적 의도를 강화하려고 작품에 밀턴적 구조를 도입한 셸리와 달리 브론테의 적품에는 밀턴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재 자체가 현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밀턴이 상상했던 사람들과 장소에 “고통스러우리만치” 천착한다. <폭풍의 언덕>을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 타락의 이야기로 보는 견해다. 캐서린 스스로 자신을 쫓겨난 추방자이자 망명자로 묘사하며 “왜 나의 피는 몇 마디 말에 격정의 지옥 속으로 달려가는 걸까” 라고 탄식한다. 하지만 추락의 방향이 밀턴과 다르다. 죽음으로 사랑의 합일을 실현한 양성적 사나운 욕망은 이런 역추락의 과정과 결과로 과연 현실에서 이루어졌을까. ‘추락’이라는 말에서 눈치챘듯 현실이 용납하지 않기에 겉으론 추락이나 안으론 진정한 자신되기의 의지와 열망으로 비상한다.
- 브론테는 이 추락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추락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지옥으로부터 천국으로 추락하는 것이며 (종교적 의미에서) 은총으로부터 추락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의미에서) 은총으로 추락한 것이다. 더욱이 추락하는 여자 주인공에게 순수에서 경험으로 고통스러운 이행을 알려 주는 것은 신의 상실이라기보다 사탄의 상실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468)
반대방향으로의 추락을 신의 상실이 아니라 사탄의 상실로 본 것은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혐오스러운 생명이 우정과 이해를 바랐던 점,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고 고독하여 사나워졌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공감된다. 죽음은 선택지가 없는 땅에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선택과 결정의 자유가 없는 자에게는 도덕성도 물을 수 없다. 그렇게 천국과 지옥으로 불리는 세상의 모든 경계를 허물며 에밀리는 그 사이를 “반항적으로” 넘나들었다. 겨울을 지나 봄에 피는 히스꽃 핀 언덕과 동의어인 히스클리프(셸리의 괴물과는 달리 이름이 있긴 하다)가 없다면 자신은 없는 것이라 생각한 캐서린. 울부짖는 그 사나운 유령이 떠돌았을 언덕을 제대로 느껴보려면 바람 부는 겨울에 가야할 듯. 봄은 겨울이 지나야 온다.
- 또 다른 면에서 <폭풍의 언덕>은 <리어왕>의 구현된 형이상학적 폭풍과 존재론적인 자연/문화의 갈등을 산문으로 다시 썼다고 할 수 있다. (474)
프랑켄슈타인이 세상에 나오고 저자가 누군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으나 셸리의 존재가 나중 알려지자 병적인 여자의 상상이라고 비난받았다.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도 처음엔 주목받지 못했다. 유일한 소설을 내고 이듬해 세상을 뜬 브론테의 소설적 신화 쓰기는 가부장의 집에 갇혀 사실적인 상상력과 “실용적이고 일상적이며 익살스러운 얼굴”이 동시에 작동한다. 그는 일기에 드러나듯 감자를 깎고 다림질을 하고 글을 쓰는 여성이었다. 브론테에게 환상이 현실과 별개가 아니듯 천국과 지옥도 분리된 거대 공간이 아니라 합일될 수 있는 두 세계로 여겨진다. 그리고 정열적으로 바랐다. 캐서린은 스스로 자신을 히스클리프라고 말했고 “그것됨(it-ness)”과 하나되길 원했다. 괴물로 인식된 여성성과 야생성을 대변하는 히스클리프는 자연이 아닌 문화와 교육의 땅에서 살 수밖에 없는 캐서린의 땅속 뿌리이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가부장의 권위 안에서 조용히 살아내는 자신 아래 깊고 넓게 자리한 “영원한 바위”이다. 캐서린의 가장 본래적인 존재가 히스클리프이므로.
- 그는 나보다 더 나야. 내가 이 세상에서 겪은 지독한 고통들은 모두 히스클리프의 고통들이었어. 모든 것이 죽어 없어져도 그가 남아 있다면 나는 계속 존재하는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것 은 남아 있되, 그가 없어진다면 우주는 아주 낯선 곳이 되고 말 겠지. 린튼에 대한 나의 사랑은 숲 속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되면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리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그 아 래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 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있어. 바로 나 자신으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중
1847년은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가 발간된 해이다. 두 작품과는 달리 폭풍의 언덕에는 샬롯마저도 세간의 혹평에 더해 지독한 말을 얹었고, 그대로 묻혀버렸다. 1846년에는 세 자매가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을 자비로 출판했다. 이 때 에밀리 나이 28세. 에밀리는 가부장의 집에서 잃어버린 근본적 잠재력을 자신의 시에서 강렬한 불길로 태우고 병들어 세상을 등지기 전에 자기 생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
어떤 천국의 약속도, 이 사나운 욕망들
모두를 혹은 반만이라도 충족시킬 수 없으리,
어떤 지옥의 협박도, 끌 수 없는 불길로
이 억누를 수 없는 의지를 진압하지 못하리! (551)
(Enough of thought, Philosopher/ Emily Bronte)
— 블레이크는 ‘욕망을 억누르는 자는 그의 욕망이 억제당할 만큼 약하기 때문에 억누르는 것‘이라고 경멸한다. 반면 좀 더 세속적이고 상식적인 리비스적 공격(‘성숙‘은 자신의 케이크를 먹지않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검열관다운 생각)은 마크 킨키드 윅스가 ‘그레인지 집안의 관점‘이라고 부른 것을 대변한다. 그러나 캐서린의 타락과 관련해서 (그리고 특히 자기 기만적으로 내린 에드거와의 결혼 결정과 관련해서)도덕성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도덕성이란 유효한 선택의 기회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캐서린에게 유의미한 선택의 기회란 없다. (503)
에밀리는 매일 애견을 데리고 히스 황야를 배회하는 비쩍 마른 처녀의 모습으로 이웃에게 보였다. 가족 중 가장 키가 크고 창백하고 과묵하고 정력적이며 단호하고 열광적이며 피아노 칠 때를 제외하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에밀리. 동생을 생각하며 샬롯 브론테는 <셜리>를 썼다. <폭풍의 언덕>이 나왔으나 외면당하여 창조물의 문학적 죽음과 함께 창조주가 죽음을 맞이하고 난 후다.
— 그녀는 「설리」에서 페미니즘적인 신비주의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폭풍의 언덕」의 서문 일부에서 그녀가 보여준 전략적인 아이러니를 통해서도 에밀리 브론테의 의도를 드러낸다. <셜리>에서 최초의 여자, 진정한 이브는 자연이다. 그녀는 고상하지만, 셜리-에밀리 같은 몇 명의 특권을 지닌 탄원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상실했다. 셜리-에밀리는 캐럴라인에게 (교회에 가자는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어머니 이브와 (요즘에는 자연이라 불리지만) 여기 있겠어. 나는 어머니를 사랑해. 죽지 않는 위대한 존재!! 어머니가 낙원에 떨어진다면 천국도 어머니의 이마에서 사라졌을 거야. 지상에서 영광스러운 모든 것이 그곳에서도 여전히 빛나지. (550)
- 8장 반대로 보기: 에밀리 브론테의 지옥의 바이블
사진은 영국 하워스 브론테박물관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