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할 책을 고르던 중 점자도서관 책꽂이에서 손을 기다리고 있는 책들에는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아 내 것에서 고르던 중 2009년 6월 8일 읽었던 이 책에 다시 손이 갔다.
점자도서관에 대기 중인 책은 모두 기증도서로 채워지는데 나는 이 부분이 좀 거슬리긴 하다.
신간 위주로 녹음을 하는 게 좋다면서도 왜 점자도서관 측의 지원은 없는지, 몇 번인가 팀장에게
물어봤지만 개운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꽂혀 있는 책이 제법 모두 녹음되고 나가야 다른 책이
온다는 말도 납득되기 어렵고.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내가 갖고 있거나 내가 새로 구매한
책을 녹음도서로 하는 일이 자주 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좋다. 듣는 분들에게 유익하면 좋은 일.
이 책, 저자도 제목을 두고 고심했다고 고백했지만 결국 김종삼 시인의 싯구를 딴 제목.
'기적'이라는 단어에 쏠렸고 '살아온'과 '살아갈'에 새삼 사로잡혔다.
표지의 꿈꾸듯 사랑스러운 분위기에 끌렸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동시대를 살다가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의 글이 다시 읽고 싶어져서였다.
그리고 내 목소리를 들을 분들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편안하면서 진솔하고 꾸밈없이, 생에 대한 애정이 물씬, 발랄한 저자의 글을 읽으며
그녀가 환하게 웃던 생전의 얼굴이 떠올랐다. 삶에 대한 열망과 희망으로 반짝였던 그 얼굴이.
2012년 7월 18일 녹음 시작, 벌써 38페이지 정도만 남았다.
매미 소리 울울창창 애절한 아침, 이영배 역도선수의 웃음 띈 얼굴을 티비에서 봤다. 4년 전 은메달을 따고 너무나
시원스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던 장면과 함께 짧은 인터뷰가 나왔는데 아주 기분 좋은 웃음과 말이었다.
자신의 목표는 금메달이 아니었고 단지 메달이었다고. 그래서 더없이 행복해 웃음이 났다고.
3일 앞으로 다가온 런던올림픽에서는 더 부담없이 경기에 임할 수 있겠다고, 무언가의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은,
우리가 열정이라고도 부르는 어떠한 욕망에 초연한 태도가 내겐 오늘따라 더 감동적이었다.
열심히 해서 꼭 금메달을 따겠다는 말보다 백배는 더 훌륭하게 들렸다.
건강, 특히 암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극대화되어 있는 요즘, 삶의 열정이 지나친 것도 스트레스로 작용한다는 말을 늘
염두에 두는 편이다. 치열하게 살고 있지않은 내 삶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겠고 다 태우지 못하는 숨겨진 열정에 대한
자위의 말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스트레스를 일종의 '허기' 또는 '공복감'으로 본다.
그 허기의 종류는 무수하고 그 갈래 또한 섬세하다. 스트레스는 같은 상황에서도 받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걸로 보아 상대적인 것이지만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있다고 본다. 굳이 암이나 어떤 몹쓸 병을 생각한다면
깨끗한 먹을 거리로 잘 먹고 양질의 잠을 잘 자고 편안한 마음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전적인 요인도 있을 것이다.
단지, 열정이란 말은 흥겨운 꽃노래만으로 볼 수 없다. 지나친 성과욕, 현시욕, 지나치게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의 태도,
이런 것들이 하나의 스트레스가 된다고 한다. 우리 몸과 영혼은 열정에 의해 타들어가고 억압 받고 불편해진다.
몸과 영혼이 그걸 느끼는 순간 그것에 대적해 싸우려하는 태도가 동시에 발동하고 몇날을 몇달을 싸워야할지도 모른다.
그게 몇날 몇달이 아니라 좀더 지속적으로 오랜 세월의 태도로 굳어진다면, 우리 몸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열병이나 다름없는 사랑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수긍하자.
장애를 평생 안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더 치열하고 열심으로 살았던 장영희 교수의 글을 읽으며
사람이 한 세상 살다 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좀더 느긋해지자. 의도적으로라도.
오늘은 방학을 한 작은딸을 데리고 오후에 가서 녹음 마치고 올 예정이다. 지금은 신명나게 사물놀이 연습하러 갔다.
그런데, 매미! 저렇게 한 계절 열정적으로 울어대다니... 그러니 단명하는 건가,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어 우습다.
아이는 윗층 일반 도서관에서 책 읽고 있겠다네. 생각해보면, 딸아이랑 이런 시간 가질 기회도 점점 적어질 테니
먼저 그렇게 말하며 따라가겠다고 하는 아이가 고맙다.^^
영작문을 가르칠 때 나는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인 E.B. White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글을 잘 쓰는 비결에 대해 '인류나 인간(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man)에 대해 쓰는 것'
이라고 했다.
즉 거창하고 추상적인 이론이나 일반론은 설득력이 없고, 각 개인이 삶에서 겪는 드라마나 애환에 대해 쓸 때에만
독자들의 동감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화이트의 말을 인용하는 데는 다른 의도도 있다. 영문과가 아닌 학생들에게 글쓰기의 이론을 가르치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학생들 숙제를 읽을 때 지루함을 덜기 위해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추상적인
글보다는 좀 재미있는 일화 위주의 글을 읽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행복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잊지 못할 사람' 또는 '잊지 못할 그날'에 대해서 쓰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p156)
장영희 교수나 화이트의 말은 경험한 것만 쓰겠다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과도 같은 말이다.
The writer must write what he has to say, not speak it. - Ernest Hemingway
덧) 장영희 교수의 책 중 갖고 있는 세 권과 안 갖고 있는 세 권. 표지가 모두 예쁘다.(우선은 표지에 늘 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