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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공곶이 이야기

- 그곳에 길이 있고 꽃이 있네

 

 

 

 

 

 

 

 

 

 

 

 

 

 

 

 

 

   

공곶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라면 몇 가지가 될까.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에는 봄이면 노란 얼굴을 내미는 수선화가 계단식 밭을 메우는 공곶이가 있다. 영화 <종려나무 숲> 촬영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계절 따라 동백나무, 종려나무, 조팝나무 등 50여 종의 나무와 꽃이 손님을 맞이한다. 19세기 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의 피난처였기도 하다. 천주교신자들의 묘지도 있는 공곶이에 꽃밭이 조성된 건 노부부의 신념과 수고가 이뤄낸 공(悾)이다. 공곶이는 2007년 거제의 추천명소 8경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을 만큼 매력적인 풍광을 품고 있다.

 

 

 

 

 

험한 언덕을 오르려면 처음에는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그리 험하지는 않지만 공곶이 언덕을 오르기에도 이 말은 유효하다. 천천히 올라가다보면 어느새 눈앞이 툭 트이는 언덕 꼭대기에 이른다. 조붓한 산길을 걷다가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가면 검은 몽돌로 이루어진 해변이 넓게 펼쳐진다. 흰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파도와 그 비명소리를 가슴으로 마주서면 바닷길은 멀리 한려수도로 이어진다. 몽돌 사이 널브러진 바다새의 주검이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명랑한 아베크족들과 대조된다. 극명한 생과 사의 풍경에 크게 놀라진 말자. 한숨을 돌리고 오른쪽 숲으로 연결된 데크계단을 올라가 새소리 호젓한 숲길을 걸어 내려가면 한 바퀴 걷기에 딱 좋은 힐링코스가 된다. 방향을 바꾸어 걸어도 괜찮은 길이 되겠다.

 

툭 트인 바다도 좋지만 아담한 포구는 마음을 한껏 당긴다. 와현해수욕장을 지나 공곶이길로 들어서서 공곶이 언덕으로 좌회전하지 말고 조금 더 가면 작은 포구, 예구가 나온다. 고양이낮잠처럼 나른하게 시간이  멈춘 예구에 서면 잔잔한 바다도 눈부신 하늘도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마음속에 들어온다. 신기하게도 비좁은 마음자리에 너른 길 하나 내어주게 된다.

 

그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공곶이를 지키는 부부가 있다. 공곶이를 좋아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다.

 

 

 

 

이곳에서 뜻밖의 하얀 성모입상을 처음 본 건 오래 전이다. 공곶이 언덕으로 오르는 초입 오른쪽으로 사람이 사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층집 마당에 성모상은 서 있었다. 저 멀리 잔잔한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비 그친 마당엔 사람이 다녀간 흔적마저 희미했다. 호기심에 젖은 흙마당까지 걸어 들어가 집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주인도 없는 집에 별 다른 게 없었다. 그로부터 몇 해 후, 이곳이 공곶이언덕 펜션으로 리모델링되어 탄생하였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이 건물의 주인장이 개인사정으로 한동안 펜션일을 미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목공 손재주가 예사롭지 않은 주인장이 손수 꾸민 펜션을 더욱 빛나게 하는 건 안주인의 세심하고 깔끔한 손맵시다. 공곶이 언덕을 오르거나 내려오는 길에 들러도 좋고, 편안한 컨트리풍 펜션에서 하루이틀 묵으며 브런치나 티타임을 가지기에 더없이 좋은 카페가 있다. 올해 3월 노란 수선화가 한창일 때 부부는 공곶이 이야기라는 이름의 카페를 펜션 한모퉁이에 마련했다. 물론 주인장이 일일이 자재와 소품을 구하여 하나하나 만들고 다듬고 꾸민 공간이다.

 

 

 

 

여름휴가철 정점에 친구들과공곶이 이야기를 찾아갔다. 우드 코티지 풍의 카페 문을 열자, 일본의 젊은 스님 류노스케가 쓴 <생각버리기 연습>을 읽고 있던 주인장이 책장을 덮으며 반색을 한다. 구석구석 주인장의 손길로 만들어진 공간에 밝은 분위기의 앙증맞은 소품과 부담 없이 읽을 만한 도서들 그리고 구석에 세워져 있는 낡은 통기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주방은 오픈되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 안에서 주문 음료와 간단한 음식을 만드는 안주인의 맑은 미소만큼이나 정갈하다.

 

주인장이 손수 만들어 판매도 하는 우드 트레이와 우드 쟁반들이 눈길을 끈다. 목재질의 강도와 특성에 따라 트레이의 두께를 조절하고, 손잡이도 만들어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게 했다. 창가 한구석에 세워둔 트레이가 눈에 들어와 물어보니 느티나무로 만들었다며 나뭇결이 정말 멋지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마을의 수호수, 아낌없이 주는 정령, 수령 높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주인장의 애정이 담긴 우드 트레이 하나로 연상되었다.

 

 

 

 

테라스도 좋지만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실내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섬과 바다와 구름이 그려내는 한폭의 수채화가 테라스에 내려앉은 늦은 오후의 그림자와 함께 그야말로 그림이다. 진한 카페라떼에는 하얀 하트가, 블루베리 스무디에는 깜찍한 꽃이 얹혀 나왔다. 꽃은 먹으라는 말과 함께. 연보라색 스무디 위에 앉은 하얗고 빨간 작은 꽃이 깜찍하다. 나로선 처음 보는 꽃이다. 주인장이 얼른 나가더니 그 꽃을 뜯어서 들고 들어온다.

   

체리세이지! 그가 해보라는 대로 작은 잎을 손으로 만져 코끝에 갖다 댔다. 싱그러운 초록향기가 퍼진다. 허브 종류인 체리세이지는 일조량과 공기의 온도에 따라 꽃잎의 색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주인장의 설명은 좀 다르다. 원래의 체리세이지는 빨간색이고 변종 체리세이지가 그렇게 하얀 색이 섞이도록 변한다는 것이다. 앙큼하지만 어쩌면 지혜로운 본성이 아닐까.

 

꽃잎의 변색이야 아무렴 어떠냐 싶지만, 고 작은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에 생명을 애지중지하는 따스한 심성이 엿보인다. 집 잃은 개 몇 마리와 오래 동거하는 걸 보아도 섬기고 보살피는 은사를 베풀고 사는 마음이 순하게 전해진다. 알고 봤더니 눈빛 맑은 안주인이 천주교 신자이다. 성모상이 괜히 있었던 게 아니다. 주인장은 어떤가. 한때는 주말이면 미친듯이 전국의 산을 찾아다녔지만 아킬레스건을 다친 이후로 반(半)자발적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 자유는 물리적인 것보다 심리적인 요인이 크지 않을까. 이런 곳에서 친구같은 평생의 동반자와 함께라면 자유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지 모른다.

 

 

 

 

 

몇 시간 수다를 나누고 밖으로 나오니, 저 아래 바다 위로 놀이 지고 있다. 붉은 꽃잎이 수평선 위에 엎드린 듯 황홀하게도 수굿해지는 시간이다. 풀도 눕고 태양도 그 기세를 꺾는다. "해거름이면 나는 집으로 가고 싶어져요."  놀이 붉게 타는 신선대부두 고가도로를 차로 달리다 울컥해져서 해거름이면 저는 마음이 막 이상해져요, 라는 내 말에 노문우가 단칼에 뱉은 대사가 환청처럼 들린다. 놀을 배경으로 선 안주인과 카페 간판이 역광으로 빛난다.

     

우리도 집으로 가야할 시간이다. 카페 입구 길섶에 낮달맞이꽃이 연분홍 고운 자태로 낮게 피어 있다. 체리세이지 꽃잎이 온도를 따르듯 열정에도 따라야 할 온도가 있다. 누구의 어떠한 삶이든 삶이 아름답다면 이야기가 있어서일 것이다. 이야기의 온도가 있어서일 것이다. 느긋하고 선한 두 사람이 말없이 전하는 공곶이 이야기를 나와  '바람의 언덕'으로 희미한 어둠을 뚫고 달려가는 차 안에서 길과 꽃, 그 열정의 방향성을 새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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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8-08-11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월초 고등동창들과 큰마음 먹고 1박2일의 여행을 계획중이에요.
아이들 키우느라 늘 친구들과의 여행을 뒤로 미루다 보니 거의 20년만에 떠나게 된 것같습니다.
그 첫장소를 사람들이 덜 붐비면서 풍경좋은 장소로 거제를 선택했죠.
팬션을 잡아야 하는데~~라며 고민중이었는데 마침 프레야님의 ‘공곶이 이야기‘는 눈이 번쩍 뜨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해요^^
친구들에게 한 번 의견을 내보야겠습니다.
공곶이 이야기^^

2018-08-11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1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1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장충전복

- 전복(全鰒)으로 무더위도 전복(顚覆)해 볼까

   

    

 

휴가철 도심은 태풍의 눈이 된다. 더위를 피해 인파로 들끓는 산과 바다를 비웃듯 조용한 휴처를 내어주는 곳이 휴가철 도심이다. 도심 바캉스를 즐기는 방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좋은 음식으로 재충전하기.

 

전국이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는 날, 서울에서도 어린 시절의 헙수룩한 골목 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동네를 찾아갔다. 장충동이 그곳이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 내려 추억의 빵집태극당을 지나 조금 더 가서 왼편으로 골목을 찾아들어가도 되지만 퇴계로로 들어선 택시는 웬 좁다란 골목이 보이는 입구에 부산사람을 내려주었다. “저기 저 위에 흰 간판 보이네요.”

 

정감 가는 낡은 골목 중간쯤, 흰색 바탕에 검정 파랑 캘리그래프로 장충전복이 보이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將充 : 장을 충전하다> 라는 부제가 눈에 띈다. 을미사변 때 구국 군인들의 충성심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진 제단, 장충(將忠)단에서 동음이의를 이용해 중의적으로 쓴 이 문구는 영리한 주인장의 아이디어겠지, 짐작하며 문을 열었다.

 

 점심시간이 좀 지난 때라 손님은 나 하나. 태풍의 눈 중의 눈이다. 20석 정도 좌석이 깨끗하게 배치되어 있고 주방도 오픈되어 있는 아담한 공간에서 주인장이자 주방장이 어제 만난 듯 인사를 한다. 곧바로 내어온 주요리 전복삼계탕은 한눈에 봐도 구미가 확 당긴다. 개업한 지 몇 달밖에 안 되었지만 주변 직장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 점심시간이면 전복삼계탕을 찾는 식도락가들로 좌석이 꽉 찬다고.

 

 

 

 

다양한 종류의 전복요리 전문점 장충전복, 이곳 전복삼계탕은 특별하다. 전복내장을 갈아 넣어 진한 녹두색을 띄는 국물을 보고 녹두삼계탕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먹어보면 전혀 맛이 다르다. 윤기 나는 국물이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다. 이것저것 부재료를 많이 넣지 않고 전복 하나와 마르지 않은 알밤 반 톨이 담긴 모양새가 주인내외의 성품을 닮아 자랑을 삼가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우선 국물부터 담백하고 고소하다.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전복내장의 깊은 맛이 잘 우러나 아끼지 않고 재료를 풍성하게 넣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닭고기의 육질 또한 부드럽기 이를 데 없다. 전혀 잡내가 나지 않고 어린아이 살을 만지는 듯 연하다. 밑반찬으로 나온 김치가 맛있다고 하니 친정어머니가 좋은 배추로 직접 담근 것이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국내산 배추라고 써 붙여 놓으라고 하니 의아해하며 안 써놓으면 당연히 국내산이고 중국산이면 써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전복은 매일 새벽 노량진수산시장에서 공수해 오고 싱싱한 것으로 하루에 다 요리하고 남는 것은 아무래도 부부가 먹다보니 건강도 더 좋아진 것 같다고. 하루를 같이 시작하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또 각자의 시간도 틈틈이 가지는 이들의 등을 다시 돌아보았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길어져 인생 이모작, 삼모작을 준비해야 한다고들 한다. 오십대 고개를 넘는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과욕 부리지 않고 여유와 건강을 누리며 소박하고 조촐한 품위를 잃지 않기란 쉽지 않다.

 

이열치열로 전복삼계탕 그릇이 다 비어갈 즈음, 전복회 세트가 나온다. 먹기도 좋게 보기도 좋게 칼질한 전복살과 내장이 통째로 혀와 코를 감치고 돌아 남도의 푸른 바다를 불러준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건 살맛이라더니 일상에 지칠 때 한 끼 정갈한 음식으로 살맛나는 게 이런 기분일까. 조만간 또 찾게 될 걸 예감하고 서둘러 식당을 나왔다. 동공이 타들어갈 정도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데 속은 든든하고 머리는 시원하다.

  

다른 곳에서 점심을 먹고 간 탓에 다 못 먹고 남긴 전복내장이 눈에 아른거린다. 전복 앞에서는 못 말리는 식탐이다. 서울로 도심바캉스를 가실 분들은 꼭 들러보시길.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을 것이다. 중복도 지나고 말복으로 가면서 기승을 부릴 무더위도 이제 꼬리를 감출 일만 남았다. 우리 생의 무더위도 생각을 전복(顚覆)하면 제법 즐길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사진은 장충동이 아니라 현재 시각 부산입니다.
무더위에도 건강히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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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7-3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이 멋집니다.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8-08-01 12:47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더운 데서 일하는 분들은 힘들겠지만 하늘은 멋지네요. 장충동이랑 멀지 않으면 저곳 식당 추천 드려요^^

stella.K 2018-07-31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더워 죽을 것 같긴한데 하늘은 꽤 멋있더라구요.
적당히 구름도 낀게.
이런 하늘을 언제까지 좋아할 수 있을런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아침 저녁으로 선선하기만 해도 살 것 같을텐데...
건강 조심하시길.^^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8-08-01 12:45   좋아요 0 | URL
오늘 부산은 좀 낫습니다. 아무래도 바다쪽이라 그렇겠지요. 서울은 찜통이라고 들었어요. 저곳 장충동 장충전복 한 번 가보세요. 든든하게 ㅎㅎ 기사 클릭되나요

서니데이 2018-07-3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날씨가 무척 더운데 잘 지내고 계신가요.
사진속의 부산은 파란 하늘이 예뻐요.
그렇지만 요즘 이런 날에는 더 더워서 그런지 아아 덥겠다, 그 생각이 먼저 듭니다.
더위 조심하시고,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8-08-01 12:46   좋아요 1 | URL
요즘도 열공하느라 힘드시겠어요. 지치지 않게 시원하게 해놓고 하세요. 하늘에 구름이 없다면 덜 멋지겠죠. ^^
 
24개의 눈동자
피터팬픽쳐스 / 200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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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도시마에 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 24개의 눈동자 영화마을을 추억하며.
쇼도시마는 일본 시코쿠, 다카마쓰 현에 속한 섬이다.
다카마쓰 여객터미널에서 나오시마와 쇼도시마로 가는 배를 각각 탈 수 있다.
봄날 설레며 찾아갔던 때묻지 않은 섬, 쇼도시마!

 

 

순수함이 주는 눈물어린 위로

 

스물네 개의 눈동자  / 기노시타 게이스케 / 1954

 

   

 

 일본 남쪽바다 세토내해에 있는 서른 개의 섬들 중 두 번째로 큰 섬 쇼도시마. 유월 어느 좋은 날, 다카마쓰 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그 길은 설렘이었다. 미풍이 밀어 준 배는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도노쇼 항에 도착했다. 느리고 깨끗하고 조용한 쇼도시마는 그 소박한 풍경만으로 무한한 위로가 되는 순수한 영혼이나 다름없었다.

 

서정성이 돋보이는 감독 기노시타 게이스케가 이 섬에 세트장을 마련하고 촬영에 들어간 영화 <스물네 개의 눈동자>1954년에 탄생해 여태껏 일본의 국민영화로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섬처럼 순연한 흑백의 필름이 어린 열두 명의 영혼과 온기 넘치는 오이시 선생의 수십 년 세월을 담담하고 투명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19284, 섬에 갓 부임한 여선생 오이시가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섬마을 어른들은 신여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지만 5킬로미터를 자전거로 달려 분교로 출근한 예쁜 선생님을 초등학교 1학년 스물네 개의 눈동자들은 반기고 따른다. 오이시 선생님은 짓궂은 아이들의 장난으로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게 되어도 자신을 걱정해 먼 길을 걸어서 집까지 찾아온 아이들을 따뜻이 맞이해 먹이고 놀아준다. 영화는 이들이 맺는 소중한 인연을 따라 몇 십 년을 이어간다. 가난과 전쟁으로 상실의 고통을 딛고 신산한 삶을 사는 이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흑백의 필름 위에 맑은 눈물로 어룽거린다. 군국주의와 전쟁에 대해 표독한 말을 드러내진 않지만 영화는 힘없고 순수한 사람들의 상처를 통해 오히려 강하게 말하고 있다.

 

쇼도시마로 무작정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무엇보다 ‘24개의 눈동자 영화촌을 가고 싶어서였다. 시간이 정지한 듯 나른한 마루켄 간장마을을 지나 당도한 그곳에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둔덕에 커다란 솥이 두 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저쪽으로 영화에서 본 교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나무바닥이 삐걱대는 복도에 신발을 벗고 올라 교실에 들어서니, 두 명씩 앉는 나무책상들이 낮게 배열되어 있고 출입문 쪽에는 풍금이 놓여 있었다. 햇살 따스한 교실의 격자창문 밖으로 잔잔하기 이를 데 없는 바다가 빛나고 있었다. 우리 마음에도 그처럼 고요한 정경이 늘 유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옆 교실에는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사진과 당시의 촬영기계들, 영화 포스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교무실 안에 오이시 선생님이 타고 다녔던 자전거 뒤에 자잘한 꽃무늬 수건에 싸인 도시락이 묶여 있었다. 안쪽으로는 선생님이 앉았을 소박한 나무책상 위, 나무 책꽂이에 분홍색 공책이 한 권 있고, 그 책상에 앉아 고개를 들면 보이는 벽에 괘종시계가 12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딱 그 때로 멈추어 있는 것 같았다.

 

교실을 나와 입구 쪽으로 나오니 영화 상영관이 있고 그 옆으로 <스물네 개의 눈동자> 원작을 쓴 소설가 쓰보이 사카에 문학관이 보였다. 사카에는 1952년 이 책을 내고 부엌에서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나온 작가라는 평을 들으며 높은 호응을 얻었다. 아담하고 정갈한 건물 안에 후박한 얼굴에 동그란 테 안경을 쓰고 웃고 있는 작가의 사진과 여러 가지 표지로 출판을 거듭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쓰보이 사카에는 전쟁은 불행만을 안겨준다고 생각했고 오이시 선생의 입을 빌어 말했다. 오이시는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을 겪으며 명예로운 야스쿠니가 되겠다는 다섯 명의 남자 제자들을 막지 못하는 슬픔을 겪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명예로운 전사 따위 필요 없어. 꼭 살아 돌아와야 해.” 18년이 지나 전쟁의 상흔과 가족의 상실을 겪은 선생님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그때 그 제자들의 아들딸들을 가르친다. 나이 마흔이 되어서도 여전히 눈물 많고 여린 선생님이지만 더없이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다


   기노시타 감독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낙관을 잃지 않았고 사람들간의 아름답고 단순하고 순수한 관계를 존중한다고 말했다.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관통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도 이들은 그저 무심하고 담담하고 분노할 줄 모른다. 쇼도시마의 깨끗하고 조용한 풍경이 아픔을 감내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의 슬픔을 더욱 진하게 전해준다.

 

마음속에 흐르는 눈물을 어찌 다 닦을 수 있으랴. 꾸미지 않고 뽐내지 않고 부풀리지 않는 순한 마음과 그 마음이 전해지는 말과 눈빛은 언제나 수굿한 포옹이다. 그렇게 순연한 위안이 필요할 때면 이 영화를 다시 꺼내어 본다.

 

 

- 배혜경의 농밀한 영화읽기 51 <고마워 영화> 중,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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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01-12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이 책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었는데.. 영화가 있었군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8-01-12 16:59   좋아요 0 | URL
네, 비연 님 원작을 먼저 보셨군요. 오래된 흑백영화에 순수함을 담아냈어요.
일본 국민영화라고 하더군요.

비연 2018-01-12 21:31   좋아요 0 | URL
심지어 일어원서도 있답니다 ㅠ 못 읽고 한켠에 쳐박..ㅠ 영화가 네이버다운로더 이런 데 없어서 DVD를 사야하나 그러고 있슴다~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8-01-12 23:0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디비디를 구입해 보았어요.
일어 원서까지 갖고 겨시군요. 쓰보이 사카에 문학관에 여러가지 표지가 있었어요.

雨香 2018-01-13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근대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겠군요. <24개의 눈동자> 를 보러 쇼도시마에 갔다는 블로그를 몇 편 봤습니다. 쇼도시마 정말 볼 것이 많은 곳이군요.^^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8-01-13 18:07   좋아요 1 | URL
네, 가보시면 아주 좋아하실거에요. 느리고 조용하고 깨끗해요

雨香 2018-01-14 10:57   좋아요 0 | URL
네.. 느리고, 조용하고,,, 제가 일본 시골, 소도시에 관심이 가는데, 딱 좋을 것 같네요. ^^
 

김지안 작가의 <네 멋대로 읽어라>에서 ‘인류를 구원할 기록’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안정희 저자의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라는 책이 언급된다. 인간만이 기억하고 추억하고 기록하고 그래서 호모아키비스트라고 한다. 저자는 개인의 기록물을 더 중히 여겨 민간 아카이브를 지향한다고 한다. 6하 원칙을 바탕으로 스토리가 담겨 있어야 하고 공유하는 성질을 띠거나 공공성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두는데, ‘개별적인 인간은 소멸하되 기록하는 인류는 미래를 꿈꾼다’고 저자의 말을 인용한다.

알라딘 서재도 나름의 민간 아카이브로 톡톡히 구실하는데 한 이삼 년간 기록을 게을리했다. 언제나 고향처럼 든든히 나를 기다려주는 곳이고 내 기쁨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2017년을 간단히 정리해보니, 다니기도 많이 다녔더라.

그중 3월에 간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특히 잊지 못한다. 가보고 싶었던 페트라와 와디럼, 사해는 물론이고. 페트라는 꼭대기 그 옛날 수도원 자리로 추정되는 곳까지 올라갔고 와디럼 사막은 짚을 타고 여섯 시간을 달리며 해 질 녘까지 있다가 나왔다. 낯선 이들이 함께한 여행이었는데 무리 없이 잘 다니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에너지가 어디서 그리 신나게 나오던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날씨도 다니기에 최적이었다. 같이 다니되 혼자인 게 좋다. 여행지에선 혼자여야 하는, 혼자이고 싶은 순간이 잦다. 동행자가 있을 땐 때로 부담스럽다. 감정을 살피고 돌봐야하는 데에 에너지를 좀 빼앗기니까. 오히려 나를 모르는 그래서 더 편한 좋은사람들 덕분에 유익하고도 건강히 잘 다녀왔고 후에 동영상도 이메일로 받아서 추억의 아카이브를 공짜로 받았다. 묵묵히 재미났던 인생선배들에게 감사하다.
이제라도 간단하게나마 조금씩 기록을 남길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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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6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8-01-06 08:46   좋아요 2 | URL
유별남, 사진작가 맞구요. 근데 본명일까요 유별나게 ㅎㅎ 페트라가 있는 왕국으로 걸어들어가는 길부터 두근두근했어요.

서니데이 2018-01-06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디아나존스에서 보았던 그 곳이네요.
아래 두 사진은 파노라마로 찍으신 것 같아요. 사진이 선명해서 정말 예뻐요.^^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8-01-06 08:44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
성배를 찾던 곳인가 그렇지요. 아이폰 파노라마도 맞구요. 지금은 사라지고 유적지가 된 붉은사암으로 만든 나바티안들의 나라, 신비로웠어요.

2018-01-06 08: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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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6 08: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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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100배 즐기기 - '16 ~ '17 최신판 100배 즐기기
정은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키나와 본섬의 남부에 위치한
평화기념공원에 도착했을 때에도 비는 계속 내립니다.
사람들은 거의 없고 순회차를 모는 아저씨가 타겠냐고
해서 100엔 주고 탔어요. 그냥 한국인위령탑 앞에
내리고 보냈습니다. 위령탑과 마주한 평화기념관 바깥
으로는 평화의 비와 수많은 영령들의 이름 그리고 바다.
호젓한 길을 걸어 돌면 평화의 언덕 조형물이
상징적으로 서 있어요.

2016.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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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09-11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엊그제 집으로 배달된 어느 커피회사 월간지에서 프레이야님을 뵙고 혼자 반가와 벙글벙글했답니다!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6-09-11 17:11   좋아요 0 | URL
으아. 전 아직 보지도 못했어요. 부끄럽게요. 어떻게 나왔는지. 어색한 포즈로. 안부 고마워요. 잘 지내시죠 나인님^^

2016-09-12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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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2 17: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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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6-09-2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오키나와에 가보고 싶어요.
오키나와 100배 즐기기~ 좋네요.^^

2016-09-22 1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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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2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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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2 2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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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0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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