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한 지 한 달 보름, 그러니까 6주가 지났다. 만우절에 집으로 돌아와 보름도 훌쩍 지났다. 창밖으로 밝은 햇살 마주하며 사사로운 페이퍼를 쓴다. 기억을 정리해두고 싶다.
오늘부터 앞쪽을 살짝 디뎌보라고 하셨는데 해보니 무리다. 겁도 나고. 아직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하는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수술 후 첫 드레싱 할 때 본 흉한 몰골에 비하면 완전 사람 됐다. ㅎㅎ그보다 수술하기 전 붓기를 빼야 해서 붕대를 감은 채 진통제에 의지해 누워 있던 사흘의 고통에 비하면 살 것 같고 나아질 일만 남았다. 물리치료사에게 운전은 언제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오른쪽이라 운전은 아직이고 제대로 걷기까지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릴 테니 조급해 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렇겠거니 한다. 이만하면 됐고 이만하면 복도 많지.
외상진료센터로 들어가 거의 한 달을 병원에 있는 동안 의외로 견딜 만했고 담담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으니 기대지 말자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들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나한테 벌어진 일이 무슨 의미를 띠는지 곰곰 되짚어 보았다. 몸이 살려고 그러는지 밥과 반찬도 맛있게 먹혀 삼시세끼 싹싹 다 비웠고 한번도 우울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와 있는 요즘 심장이 조이고 불쑥불쑥 눈물이 난다. 살 만하니 또 생각이 많아지나 보다. 30여 년 전, 나보다 조금더 이른 나이에 비슷한 상해사고로 같은 쪽 다리 수술을 했던 엄마. 그때 철없던 나는 엄마를 많이 도와드리지 못했던 게 이제야 생각났다. 나는 집에서도 좋은 도구의 도움을 받아 움직이지만 당시 엄마는 깁스한 다리로 앉은뱅이처럼 집 안을 움직였다. 딱히 아빠가 도와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도움의 손을 내밀지 않고 가사를 어쨌거나 혼자 해결하려 했던 것 같다. 나는 계절도 좋은 때이지만 엄마는 한여름이어서 샤워도 자주 해야 했는데... 퇴원 후 아빠가 엄마와 함께 두 번 다녀가셨다. 다행히 다시 회복하신 아빠. 올해 초에만 해도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봄이 되면 나들이 가게 어서 일어나도록 하자고 했는데 동생 차로 나를 보러 오셨다. 두 분 모두 노령이지만 내 다리로 찾아갈 수 있을 때까지라도 건강하시길... (엄빠집이 4층 계단을 올라가야 해서 지금의 나로선 ㅠ)
실밥을 뽑고 퇴원준비를 하는 날 아침, 옆지기가 확진을 받았다. 단둘이라 옆지기 케어를 받아야 하는 형편인데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난감 황당, 급히 다른 곳을 알아보았다. 몇 가지 옵션이 있는데 모두 사정이 맞지 않았다. 복도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가끔 인사를 나누던 다른 병실의 남자분이 지나가다가 보고 자기도 내일 퇴원인데 집으로 안 가고 다른 병원으로 바로 가 더 가료할 거라며 병원을 권유했다. 그런 방법이 있구나.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얻고 바로 그 병원을 알아보았다. 동생네가 퇴원을 도우러 와서 짐꾸러미와 나를 싣고 그 병원으로 바로 갔다.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음성 확인 후, 입원실로 갔다. 지금 생각해도 이건 신의 한수였다. 바로 집으로 왔다면 옆지기도 나도 서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그다음날 이 병원에 와서 양성으로 검사결과가 나와 정작 입원하지 못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사람일 참 알 수 없다.
수술한 병원에서 17일, 재활의학과병원에서 12일, 이렇게 병원에서 29일간 지내며 여러 사람을 보았다. 적지 않은 걸 알게 되었고 느꼈으며 봄 날씨처럼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독였다. 돌이켜보면 꿈만 같은데, 나름 나쁘지 않았다. 대체로 절망하지 않았고 새로운 환경에 호기심도 생겼고 단순하고 규칙적인 하루하루가 나쁘지 않았다. 제왕절개 수술 이후로 이렇게 환자로 병원에 있어 본 적이 없었기에 이 시간을 최대한 아깝지 않게 보내자 생각했다. 다리를 올리고 오래 앉아 있기 불편해 노트북은 갖다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미루고 있던 책을 갖다달라는 주문을 식구에게 자주 했다. 마음에 당기는 책 제목과 위치한 자리를 좌표 찍듯 정확히 알려주면 옆지기가 드립한 따끈한 커피와 모 빵집의 갓 구운 베이글과 함께 배달해 주었다. 보호자 출입이 금지되었기에 1층 안내데스크에 맡기면 간호사가 전달해 주었다.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책과 영화가 없었다면 그 지리멸렬한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겠다. 북플과 플친도 위안이 되었다. 단지 나만의 방이 없이 개방된 공간에서 비자발적으로 오픈된 채 살아야 하는 건 생각보다 불편하고 심난했다.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가 쳐다보고 있고 수시로 간호사와 보호사가 들락거리고 화장실문이 바로 앞에 보이고 무엇이든 손에 바로 닿도록 내 몸 주위로 이것저것 어지러이 널려 있고 세수도 하지 않고 머리도 못 감고 붕대 감은 다리도 올리고 있어야 하는데, 커튼을 치면 궁시렁거리는 말이 들렸다. 왜지? (특히 코로나 확진자 급증하던 때라 공지문도 붙어있듯이) 커튼을 치는 게 원칙이고 배려인 것 같은데, 생각이 다르구나! 대통령선거일 전후론 듣기에 너무나 거슬리는 말들을 듣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아,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
슬며시 책을 들고 휠체어를 굴리고 나가면 뒤에서 새댁이는(헉!) 커튼 치면 안 답답한가, 나는 아들이 책 갖다드릴까요 묻는 걸 마 필요없다 놔둬라 했다는 둥 말소리가 들렸다. 60세 이상의 여성들은 한 공간에서 커튼으로 단절되는 느낌을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엄마가 자주 입원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시야가 갑갑하다고 생각한단다. 그렇구나. 종일토록 그렇게 열려 있는 공간에서 눈 뜨면 먹는 이야기, 자식자랑 손주자랑을 비롯해 하나마나한(이건 내 생각) 이야기를 반복하며 티비 소리 등 온갖 소리가 다 들려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공감되거나 인생의 팁이 되는 이야기도 들려 가끔 맞장구를 쳐 주었고 묻는 말엔 고분고분 대답해 드렸고 과일도 여러번 나누어 먹었다. 그러면서 조금 느긋하게, 무심하게, 다른 건 신경쓰지 말고 지금은 내 몸과 마음과 정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만 하자고 마음먹었다.
수시로 커튼을 쳐서 나만의 작은 방(나름 아늑했다)을 만들었다. 삼시세끼 먹고나면 낮에는 옥상정원으로 저녁이면 복도끝으로 휠체어를 타고 가 창문을 조금 열고 바람을 쐬며 밝은 조명 아래서 책을 읽었다. 병실의 인생선배들은 저녁식사를 끝내면 일찍 불을 껐고 영화는 이때부터 보기 좋았다. 이어폰을 꽂고 영화를 보며 통증도 불편함도 잊으려 했다. 재활의학과병원에서는 창가 침상이어서 햇살이 밝아 낮에 책 보기 좋았다. 창문 열고 바깥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았고.
재활의학과병원으로 옮기고는 일단 환경을 좀 바꾸니 처음 몇 날은 날아갈 듯 살 것 같았다. 뭔가 에너지가 정화, 순환되는 느낌이랄까. 옥상정원에는 작은 꽃밭이 있었다. 튤립과 히야신스가 몽오리를 올리고 있어서 매일 오전 오후 눈맞추었다. 마주 보이는 황령산 꼭대기와 내려다보이는 수영 일대 동네 위로 매일 변주하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맞는 주사가 엉덩이를 돌덩이로 만들어 문제이긴 했지만 다 좋다 해도, 종일 옆침상의 60대 여성분이 벽에 기대어 돌아앉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주보았고 하루종일 입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길림에서 귀화한 조선족 60대 여성분은 하루종일 유튜브로 가짜뉴스를 보고 생중계했다. 브로치가 어떻고 옷이 어떻고 청와대에 폭파물이 어쩌고... 그걸 믿냐고 물으니 자긴 믿는다고, 거기서 당선인이 회담하면 큰일인데 걱정된다고ㅠ...휴ㅠ (사람은 또 좋아서 괜찮다고 하는데도 식판을 매번 내다주고 뭐 그랬다. 게다가 개인적인 가족사를 들어보니 놀라웠다. 슬픈 과거사를 이야기하기 싫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나는 화제를 전환시켰다. 마오쩌둥 문화대혁명기에 유년을 보낸 분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소상히 하고 있었다.) 아무튼 눈 뜨면 반복되는 갇힌 공간에서의 이런저런 환경, 더는 못 있겠다 싶은 한계가 오는 날, 퇴원을 좀 앞당기기로 결심했다.
퇴원을 며칠 앞두고 몇 군데 전화해서 처리할 것들 하고 시감상과 낭송 수업도 유월초로 미루어 두었다. 그리고 대장님에게 전화드렸다. 4월에 예정되어 있던 낭송을 못하게 되었으니 조치하시라며 근황을 말했더니 놀라며 몇십 년 전 사고 기억을 들려주셨다. 교통사고였는데 다리를 심하게 다쳐 8개월간 병원생활을 했다고, 그때 모든 일을 병실에서 다했다고, 우리같은 사람에게 신이 몸에서 딱 한 군데만 내놓으라고 한다면 어디일까, 다리가 아닐까, 한다고. 공감되었고 힘이 되었다. 그동안 바빴으니 좀 쉬라고, 팔도 괜찮고 의식도 괜찮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는 말씀이다. 그러잖아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서로 깔깔 웃었다. 퇴원하고 집에서 휠체어로 책상 앞에 앉아 작업하는데 능률이 이전과 다르다. 몸은 연결되어 있는 통합시스템이라는 걸 절감한다. 그동안 세 군데 청탁원고를 보내고, 수필집 편집본을 교정교열 완결해 출판사에 보냈다.(노령 문우의 수필집을 도와주라는 임무를 주셨는데 이 또한 대장님의 배려임을 안다.)
퇴원하는 날 아침, (두 발로 걸어서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만우절 기념 거짓말로 한 번 써먹고 웃었다ㅎㅎ) 옥상에 올라가 보니 연노랑 연분홍이 섞인 튤립이 제법 활짝 피었다. 보랏빛 히야신스도 만개했다. 반찬이랑 맛난 간식 사다준 이들,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웃게 해준 친구들, 힐링음악과 봄꽃 소식을 자주 보내준 글벗, 한결같이 도와주는 무던한 여동생과 나름 애쓰는 옆지기에게 고맙다. 어젠 좀 마뜩잖아 투닥거렸지만 이 또한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에 있는 딸들에겐 알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말을 못하겠다. 큰딸이 내일 다니러 올건데 놀라겠지. 친구는 이런 나더러 특이하다고 놀린다. 나, 특이한 인간이야?
그리고 자주 안부를 물어준 알라디너벗들과 위로의 편지와 책선물을 보내준 님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병원에서 본 책과 영화를 역순으로 간단히 정리해둔다. 100자평이나 리뷰는 다음에 또 되는대로...
1.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옌렌커
동명의 우리 영화가 왜 그렇게 코미디처럼 느껴졌는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공간적 배경과 인물을 한정한 간결한 혁명 서사에 두 인간의 욕망과 생존욕이 대비를 이루어 그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마찰이 슬픈 웃음을 낳는다. 의도된 희화화이지만 그보다 옌렌커는 웃음 뒤에서 혁명의 역사에 반문하여 인민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근원을 묻는다. 1944년 중국공산당 전사, 장쓰더가 탄광에서 압사하는 사고가 일어난 사흘 후 마오쩌둥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이는 혁명언어의 경전이 되었고 이 소설은 이 경전을 류롄과 우다왕이 본능과 사랑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쓴다. 왜곡된 인간 존재가 가혹한 현실에서도 존엄과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과정이 후반부로 갈수록 따뜻하고 눈물겹다. 간결한 문장에 서정적인 묘사, 의미 있는 구절도 좋고 재미나게 읽었다.
곰곰이 헤아려보면 인생은 솥과 그릇이 바가지와 국자가 되고 음차(중국 전통극에서의 흉악한 인물)가 양착(음차에 반대되는 배역, '음차양착'은 운명의 불길함을 말함)이 되는 변화의 연속이었다. 이것 말고 새로운 물건이나 장치는 없었다. 음차양착은 중국 전통 가극의 정수이자 이 사랑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256쪽)
2. 글쓰는 여자의 공간 / 타니아 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여성 작가들의 빛나는 순간과 문장들!" 너무 좋았다. 우선 노란 액센트와 보기 좋게 편집된 풍부한 사진들. 여성작가 35인의 자연스러운 실물 사진과 글쓰는 공간, 특별한 포트레이트 같은 것들이 마음을 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들을 알게 되어 읽고 싶은 책 리스트가 더해진 것도 덤!
작가들의 꼿꼿한 생각과 충만한 자신감이 담긴 말도 경구처럼 머리를 때리고 심장을 두근대게 한다.
마지막, 니콜 크라우스(Nicole Krauss)의 '괴물같은 거대한 책상'은 장편소설 <위대한 집>에 영감을 주었다. 사는 집의 전 주인에게 물려받은 책상인데 벽에 견고하게 붙어 있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책상이 담긴 사진은 없다고 한다. 크라우스는 그 책상에서 멋진 소설을 썼고 환상의 비밀 서랍 안에서 작품 속 인물들이 나왔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쓰려고 했다.
글로써 서술되지 않은 세계에 사는 것은 너무나 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 니콜 크라우스
책에는 니콜 크라우스의 <위대한 집>에 나오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방 건너편의 나무 책상을 바라보았지요. 나는 저 책상에서 소설 일곱 권을 썼고, 당시엔 여덟번째 장편소설이 될 원고와 메모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어요. 서랍 하나가 살짝 열려 있었어요. 책상에 달린 열아홉 개의 서랍 중 하나였죠. 크고 작은 서랍들이 짝도 안 맞고 배열도 아주 이상했지요. 그런데 막상 저 책상이 내 곁을 떠날 거란 생갈을 하니, 짝도 안 맞는 서랍 숫자와 이 이상한 배열이 제 삶을 이끌어준 어떤 질서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하략). " - <위대한 집> 중에서
(글쓰는 여자의 공간 314쪽)
3.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명징한 사고와 사려 깊은 통찰에서 나온 정확한 언어는 언제나 가장 큰 힘이 된다. 우리가 무언가에 끄달려 헤메인다 싶으면 이런 책이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의 미출간 원고까지 모은 이 책은 삶을 좀더 삶답게 살 수 있는 현명한 충고들이 담겼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 가,라는 물음은 결국 '나'라는 개인에게 귀결하는 물음이다. 삶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삶에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살아 있는 것에 끌리는 마음'이란 살아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장을 향한 적극적 관심을 담고 생명력 넘치는 모든 것을 향한 사랑, 열정적 욕망'이라 표현되는 것이다. 뭐든 자기 편의대로 오해하여 왜곡하면 곤란하다. 겉보기에 아무렇지 않지만 뭔가 야릇한 느낌을 주는 인간 행위의 이면에는 진정한 자기애의 결핍이 낳은,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적개심이 깔려 있는 경우가 있다. 의식을 깨우는 좋은 대목이 너무 많지만 예를 들어 '소비하는 인간의 공허함'이라는 장에서는 이런 문장이 있다.
딴말이지만 소외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 곳이 구약의 예언서라는 사실을 상기해주고 싶다. 예언서는 말한다. 우상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상은 생명 없는 물건이며 인간의 손에서 나온 작품이지만 인간은 자신의 작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인간은 나무 한 조각을 집어 들어 일부는 불을 지펴 케이크를 굽고 남은 일부는 우상을 만들어 숭배한다. 예언서보다 더 심도 있게 소외 개념을 설명한 것은 아마 어디에도 없으리라. (234쪽)
4.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 / 바버라 J. 킹
어찌 보면 동물은 식물보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지 못했다. 식물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고 정화, 자생하는 능력이 있지만 동물은 좀 다르다.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기대어야 하고 밖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며 감정을 나누지 못하면 마음이 죽는다. 슬픔은 동물을 감정 중 가장 숭고하다고 생각한다. 슬픔은 사랑이 있어야 나오는 감정이다. 사랑은 기쁨을 낳지만 그 이면에는 고독한 슬픔이 자리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 무척 공감되었다. 많은 동물을 챕터별로 나누어 사려 깊게 들여다보고 관련 자료와 저서들을 근거로 제시하며 설득하는데, 감상에 매몰되거나 주장을 전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읽는이가 생각하여 판단하게 이끄는 점이 마음에 든다.
후반부에서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즉, '슬픔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좀더 성숙한 애도의 자세와 방법을 제시한다. 문자화한 언어로 슬픔을 헤아려 본다는 것. 그것은 종을 넘어 동물은 모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의 상실에서 오는 슬픔을 표현하는 자기들만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만든다.
"옐로스톤의 죽은 들소와 동물 부고"라는 장에서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민들레 와인>의 문장을 인용하며 이렇게 쓴다.
나는 이 문장에 심장이 사로잡혔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진짜로 죽는 게 아니거든." 죽으면 부고가 나는 사람이든 부고가 나지 않는 동물이든 이 말은 누구에게나 아울린다. 사람들은 동물이 죽으면 함께 모여 상징적인 추도 의식을 갖기도 한다. 10장에 나온 독일의 북극곰 크누트 사례처럼 국가 규모의 행사를 열든, 고양이 팅키 사례처럼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한 가운데 작은 행사를 치르든. 우리는 이 특별한 동물들에 대한 기억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 기억을 우리 세대의 다른 사람들과 다음 세대에 전한다. (281쪽)
5. 에세이스트의 책상 / 배수아
굿즈에 눈 잘 안 돌리는데 간혹 마음을 끄는 게 있으면 지른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양철 북케이스가 굿즈인데다 읽으려고 미루고 있던 문단의 이단아 배수아, 2003년 나온 소설이지만 옷 바꿔 입은 표지가 퍽이나 마음에 든다. 만듦새도 마음에 쏘옥. 나는 가끔 예쁜 책에 혹한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이지만 내겐 괜찮았다. 문장을 줄곧 따라가며 시공간을 떠나 어딘지도 모를 곳에 가 있는 느낌으로 묘한 매력이 있다.
번역을 많이 하는 분인데, 단지 이런 문장은 번역문이라 해도 별로이고 우리말인데 이러니 난감하다.
# 알프레드는 북유럽 출신의 대학생 사촌을 가지고 있었고 대개는 파티에서 그런 부류들과 어울렸다.(65쪽) ---> 알프레드는 북유럽 출신 대학생 사촌이 있어 파티에서 대개는 그런 부류와 어울렸다. (이게 매끄러울 듯)
혹은 내가 그해 겨울 어느 장소에서 이 글의 일부분을 쓰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M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M에게 무엇인가 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내 책상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가 되었다. 동시에 나는 이미 나와 M 아시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을 글을 쓰고 있을 때는 마치 전혀 모르는 듯이 행동했기 때문에, 그곳은 망각을 망각함으로써 위안을 얻는 장소이기도 했다. 나는 슬픔을 잊기 위해서, 더이상 슬프지 않다는 그 사실을 잊었다.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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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케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207쪽)
6. 불타버린 지도 / 아베 코보
아베 코보의 실종 삼부작 중 마지막 1967년 작품. <모래의 여자>(1962)를 먼저 읽고 매료되어 <타인의 얼굴>(1964)까지 모두 구매. 모두 영화로도 나왔다고 하는데 <모래의 여자>만 보았다. 오에 겐자부로는 아베 코보를 두고 더 오래 살았더라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거라고도 말했다. 1973년 극단을 만들어 배우를 양성하고 자신의 희곡을 올려 성공을 거두기도 한 코보는 의대를 졸업했지만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문학으로 접어들어 전방위로 재능을 발휘했다. 발명가, 사진작가, 일본작가 최초로 워드프로세서로 소설을 집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불타버린 지도>는 실종자를 찾는 탐정이 실종자로 전도되는 과정을 긴박하게 그린다. 우리에게 주어진 낡은 지도를 끊임없이 불태우고 지도에 없는 미지의 길로 내디딜 수 있을 때, 즉 소멸을 반복하며 재생과 존재의 자각을 이루어내는 인간 실존에 대해 말한다. 인간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럼에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 진정 위대한 인간이라 하겠다. 그것이 의무이기도 하지만 주어진 권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 글을 읽고 글을 쓰고 또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재미를 찾는 게 아닐지.
마지막 단락에서 죽은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려는 것도 그래서 웃음이 번지는 것도.
과거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는 일은 이제 집어치우자. 손으로 끼적인 메모에 매달려 전화를 거는 일도 이젠 진력이 났다. 차의 흐름에 묘한 정체가 생겨서 쳐다보니 차에 깔려 종이처럼 납작해진 고양이의 시체를 대형트럭까지도 피해 지나려고 애쓰고 있다. 나는 무의식중에 납작해진 그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려 했는데, 그러자 오랜만에 분에 넘치는 환한 미소가 뺨을 녹이며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다. (317쪽)
7. 연인들 / 최승자
수술 일주일 후, 병실의 이런저런 환경이 답답하고 두통이 밀려왔다. 심리적인 원인이겠지만 한기도 조금 들어 카디건을 덮어 입고 저녁에 복도 끝에 나가 창문을 열어놓고 단숨에 읽었다. 눈으로 읽다가 나중엔 입으로 작게 소리내어 읽었다. 아니무스와 아니마,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섞이고 뒹굴며 뭉클거려, 살아서 파닥대는 시어들이 무한 힘이 되었다. 결국 그 힘은 시인이 1991년 서문에서 말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것 없이 이 지상 사람들 모두가 천상적 존재를 껴입은 땅님, 즉 따님인 것"이라는 말이 구현한 지점에서 나온 듯하다. 이는 시인이 제안하는 새로운 개념의 페미니즘이다. 그런 생각으로 시인은 연작시 '연인들' 1,2,3을 썼지만 이 시집의 다른 시들도 그런 생각에 기반한다.
구토
오늘 내가 들은 빅 뉴스, 굿 뉴스는,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이렇게 창조해 놓은 신은
죽여버려야 한다는 시를 썼었던
나는 이제 해방이다. 오늘에서라도
그 뉴스를 듣지 못했더라면, 나는 필경
그를 죽여버렸을 테니까, 그래서
신의 살해자가 되었을 테니까.
창세기라는 이름의 소설, 아니면 영화 속에서
그 구조와 진행에 묶여 신음하던 여자가
그 스토리 밖으로 가볍게 빠져나온다.
도대체 이런 스토리를 쓴 작자는 누굴까.
죽여버려야지, 나는 그 안의 한 고통스러운
배역으로 존재하긴 싫으니까, 그리고
내 모든 형제들도 탈출시켜야 하니까,
이 작자를 죽여버려야지, 두리번거리면서,
찔끔찔끔 구토하면서.
하지만 그때 어떤 손이 내 등을 두드리며
내게 말한다. "이봐, 그것도 꿈이야. 꿈에서
아무리 죽인들 무슨 소용이야, 그저 그 꿈을
용서하는 게 최상이지. 용서가 가장
완벽하게 빠져나오는 길이야."
나는 그제야, 내가 그를 태곳적부터
알아왔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나는 그를 안다.
그리고 이제 깨닫는다. 모든 여행은 쓸모없는 여행이고,
모든 여행은 돌아가는 여행이고,
모든 여행은 떠난 적도 없는,
잠 속의 , 꿈속의 여행이라는 것을.
(54-55쪽)
8. 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이전에 영화를 먼저 보았는데, 책을 읽고 나니 원작을 아주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표지의 실루엣을 살린 여자의 몸도 내용을 잘 반영한다. 만주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아베 코보는 공간적 배경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모래'의' 여자는 모래 속의 여자, 모래라는 여자, 모래를 모시는 여자, 모래를 위한 여자, 모래 같은 여자, 모래의 일부인 여자, 모래에 의한 여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재미있게 보았고 읽었다.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허물며 인간 실존을 모색하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은 시시포스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시시포스가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 올려도 떨어질 것을 알면서 노동을 멈출 수 없었던 건 아마도 그 위에 자신을 반기는 꽃 한 송이, 바람 한 자락,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인공 남자도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한 제2의 삶이기에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시간이라는 모래가 끊임없이 쌓여 존재와도 같은 집을 덮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즐거운 마음으로 그 시간의 압박을 가벼이 날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그냥 노동하는 것이다.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분지에 갇혀 살아도 물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면 탈주는 조금 미루어도 될 일이다. 입은 다물되 언제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일. 그렇다면 조금더 그 반복되는 시간을 견뎌볼 만할지 모른다. 기분 나쁘지 않게 음탕하고, 과학지식까지 겸비한, 재미있는 양반이다, 아베 코보.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언제였던가, 뫼비우스의 띠가 같이 가자고 하여 무슨 강연을 들어러 간 적이 있다. (중략)
<노동을 극복하는 길은 노동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노동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노동을 극복하는...... 그 자기 부정의 에너지야말로 진정한 노동의 가치입니다.> (153쪽)
남자는 밀려오는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다. 가능성은 한 가지밖에 없다. 모래의 모관 현상이다. 모래의 표면은 비열이 작기 때문에 항상 말라 있지만, 조금만 파 내려가면 아래로 내려갈수록 젖어 있는 법이다. 표면의 증발 현상이 지하의 수분을 발아올리는 펌프 작용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침 저녁 사구가 뿜어내는 저 방대한 양의 안개와, 벽과 기둥의 재목을 썩히는 저 비정상적일 정도인 습도의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다. (중략) 바꿔 말하면 물은 끊임없이 보급되고 있다는 소리다. (221-222쪽)
9. 파워 오브 도그 / 토머스 새비지
장성주 번역이라 그런지 문장이 더 매력있다. 이 책은 수술 전까지 이틀 동안 부상 부위에 얼음 주머니를 계속 얹고 읽었다. 앉지 말고 다리를 심장보다 높게 두라고 야단치시는 바람에 누워서 읽으며 통증을 잊으려 했다. 진통제 효과가 떨어지면 견디다 너무 아프면 간호사를 호출하고 그러며 읽었다.
개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려한 사람이 도리어 개가 되고 말았으니 그 오만함과 어리석음이 마땅한 벌을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 인간에 대한 연민하고는 또 다른 이야기다. 피터는 자신과 사랑하는 엄마의 운명을 스스로 구한 새로운 유형의 징벌자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살게 할 안전한 세계를 스스로 구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새비지의 실제 가족사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니 피터에 이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긴장감을 유지하며 역동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빠졌다. 먼저 보았던 영화의 장면이 겹쳐지며 생동감 있었다. 영화에서 들을 수 없었던 참된 대사들도 다시 펼쳐보고 싶다.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 주시고
저의 하나뿐인 소중한 것, 개의 아가리에서 빼내 주소서.
피터는 그 기도서가 자주 쓰이는지, 혹시 그 구절만 잘라 내어 자기 스크랩북에 붙이면 안 될지 궁금했다. 아직 붉은색은 띠고 있으나 향기를 잃은 장미 꽃잎보다는 그 시편 구절이 스크랩북의 마지막 항목으로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이제 로즈는 구원받았으므로. 이는 피터 아버지의 희생 덕분이었고, 피터 스스로가 아버지의 묵직한 검은 책에서 얻은 지식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저지른 어떤 희생 덕분이었다. 이제 그 개는 죽었다. (3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