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녹음시작, 오늘까지 총 9시간 걸려 완성한 황경신의 생각노트 <생각이 나서>의 마지막 글귀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릴케의 말을 믿는다.

'끝이 나면 쓸 수 있다'보다 '씀으로써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로 나는 그 말을 이해한다.

슬픔 자체는 끝이 없지만 '어떤' 슬픔에는 끝이 있다.

사랑은 영원하지만 '어떤' 사랑은 끝이 난다.

그리하여 나는 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말을 나는 잘 모르겠다.

릴케는 어떤 의미로 저런 멋진 말을 한 걸까. 백혈병으로 51세의 나이에 사망한 릴케는

14세 연상이 루 살로메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루는 그 전에 이미 니체에게도 청혼 받은

적이 있는 여인. 따뜻한 모성을 느끼지 못하고 유년을 보낸 섬약한 릴케에게 살로메는 여인

이상의 동반자가 아니었다싶다.

 

그의 묘비에 적힐 시를 스스로 남기는데, 제목은 '비명'.

        

         장미꽃이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누군가가 내 인생의 키워드가 뭘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나는 '글쓰기'라고 내심 대답했다. 또 누군가는 자신도 3살 때부터 글을 썼다며 우스개를 했다.

그렇구나. 난 만 24개월부터 글(글자^^)을 쓰고 읽고 했다고 엄마는 자랑이다. ㅎㅎ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오래도록 일기를 써왔고 크고 작은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도 했다.

재능이 열망을 좇아가지 못하면 번뇌가 오는 법. 다행인지 나는 욕심이 없나 보다.

어느 순간 열망을 조율하는 시점이 오고 (조금은 비겁하게) 내려놓고 물러서 있다. 

글은 마음 깊은 곳에서 분수처럼 치솟아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어야 울림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읽는 이가 알기 전에 양심이 먼저 안다. 진정성,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나는

그럴수록 글을 쓰는 일이 두려워 조심스러워진다. 스스로 당위성을 부여할 수 없으면 한 발도 뗄 수 없는 거다.

진정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다 생각하며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 그 너머의 너머일 거라고 조용히 말해 본다.

 

 

 

 

2012. 5. 21 녹음시작, 43쪽까지.  드디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세번째 장편 <올리브 키터리지>는 2009년 퓰리쳐상 수상작이다. 

오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작가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글을 써온 스트라우트는

이런 유의미한 조언을 한다.

 

"작가가 되겠다면 포기하지 말며, 포기할 수 있다면 포기하되, 그럴 수 없다면 계속 글을

쓰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며 습작을 게을리하지 말라"

 

그녀는 존 치버와 존 업다이크를 좋아하며 육필원고를 고집한다고.

작가 신경숙도 필사하며 공부한다고 하던데, 나는 필사 대신 녹음하면서

한 번 더 읽는 것으로 쉽게 대신하려고.^^ 편집하면서도 한 번 더 읽을 거니까 세 번이 되네.

 

 

 

 

스트라우트의 문장은 섬세하면서도 강하고 생의 위트와 연민이 공존한다.

농후한 생의 이력과 소화력이 엿보이는 문장들, 군더더기 없는 전개, 강인하면서도  시적 서정성이 엿보이는

아름다운 문장들로 가득한 이 소설은 13가지 단편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데, 서사가 독특한 구성 안에서 흐른다.

많은 등장인물이 있지만 그 중심에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인, 올리브 키터리지가 있다.

강인하고 괴팍하고 불같은 성미를 지녔지만 따뜻함을 숨길 수 없는 이 여인과 남편 헨리, 외아들 크리스토퍼.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오랜 세월을 거친 이야기가 거대한 직조물처럼 서로 엮여 수채화를 그려낸다.

드러내어야만 치유 받을 수도 있는 생의 미려한 상처들에 온기어린 시선과 응원을 보내는 이 소설을 작가는

'삶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이야기꾼인 어머니에게' 헌사한다.

 

오늘은 첫번째 이야기 '약국'의 43쪽까지 녹음했다.

첫 문장은 이렇다. -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봄이 왔다. 낮이 길어지고 남은 눈이 녹아 도로가 질척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 쌀쌀한 공기에 노란 구름을 보태고, 진달래가 세상에 진홍빛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데니즈의 눈을 통해 그려보았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이 폭력이리라 생각했다.(43쪽)

 

 

이 글귀를 보며, 나는 입하가 벌써 2주 전이었었던 걸 떠올렸다.

요새는 봄, 가을이 없이 여름이 오고 겨울로 넘어가는 것 같다고 엄살인데, 전적으로 동감되지는 않는다.

봄과 가을은 나름의 빛과 향으로 우리에게 머물다 갔고 우리는 호들갑스레 봄을 노래하고 가을을 누렸으면서, 망각한다.

좋았던 것은 잊어버리고 그건 그저 없었던 듯 아무 것도 아니었던 듯, 여름이 너무 빨리 온다고 법석이다.

입하! 그리고 성하!  나는 입춘보다 이 말을 더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봄을 잊고 싶진 않다.

봄은 늘, 여름 속에도 가을 속에도 그리고 겨울 속에는 더 속속들이 녹아있는 것.

생은 내내 봄날을 어깨곁고 가는 걸. 아, 올리브 키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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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22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특이한 인물이나 특별한 사건 없이도 아름다운 책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가끔씩 꺼내어 아무 문장이고 펼쳐 읽곤 한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존 치버와 존 업다이크를 좋아하는군요. 의외에요. 저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좋아하지만, 존 치버와 존 업다이크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거든요. '약국'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제게는 이미 조용함과 고요함을 줘요. 데니즈가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구요.

프레이야 2012-05-22 09:4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그죠그죠^^ 너무 좋아요 이런 책. 아무 문장이나 펼쳐 읽어도 정말 좋아요.
존 치버와 존 업다이크 필사는 책날개에 적혀있던걸요. 다른 이의 작품을 보지 않는 게 낫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꼭 맞는 말은 아닌 것 같구요.
약국.. 어제 전 헨리가 예고대로 불행을 안은 데니즈에게 본격적으로 흔들리는 내면묘사 부분과
그녀를 위해 드디어 고양이 한 마리를 얻어다 건네는 데에서 멈췄어요.
"발이 얼마나 하얀지 휘핑크림 그릇 속을 지나온 것 같은 작고 검은 아기 고양이"라니요.
군더더기 없는 전개, 묘사력도 심리묘사도 훌륭. 번역의 힘도 기여한 걸까요.

하늘바람 2012-05-2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음하시는 프레이야 언니 모습
참 곱고 멋지게 상상이 되어요
녹음하게될 작품을 느끼고 즐겁게 동참하시는 것 같아 부럽습니다
"작가가 되겠다면 포기하지 말며, 포기할 수 있다면 포기하되, 그럴 수 없다면 계속 글을

쓰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며 습작을 게을리하지 말라"


이 말은 제게 참 와닿네요

프레이야 2012-05-22 18:24   좋아요 0 | URL
가장 행복한 순간이랍니다.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서요^^
하늘바람님의 소원대로 이루시길 바래요^^
태은이랑 태어날 태은이 동생 키우며 얻는 소재로도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있겠네요.

댈러웨이 2012-05-22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많네요. 깔끔하게 써 주셔서 감사한 페이퍼입니다.

1.저는 (쓰는 와중에 정리가 되기도 하지만) 스스로 일단은 정리가 되야 뭘 끄적거릴 수 있기에 '끝이 나면 쓸 수 있다'로 받아들이고 이 문구 제가 좀 가져가겠습니다. ^^
2.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뭔가가 저도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제 속의 산투르니는 도통 울어주질 않는다는.
3.<올리브 키터리지>는 하도 데면데면하게 읽은 책이라, 리뷰들을 보면서 더 좋아하게 된 책이라고 해야할까요...( ") 아,,, 저 바보일까요? 저기 다락방님이 째려보시겠다...

녹음 작업을 하시는 프레이야님의 목소리가 궁금하군요. ^^

프레이야 2012-05-22 18:30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끝이 나면 쓸 수 있다, 이 말도 결국 통하는 말이네요.^^
올리브가 헨리에게 마구 신경질 부리는 장면 읽으며 빙의된 듯 그랬어요.ㅎㅎ
소설은 인물의 대사를 조금은 실감나게 읽어야되니 저로선 쉽지 않아요. 그래도 재미납니다.
어떤 대사에는 거침없는 욕설도 나오는데 이건 뭐 대리만족도 되구요.

2012-05-27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8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